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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화성에서 온 왕자님

wagi |2004.06.17 03:12
조회 1,346 |추천 0

20. 너의 세상을 지켜주고 싶어


행복이라는 게 이런 걸까?

 

윤은 유진의 얼굴을 보다가 생긋 웃었다.

돌아보았을 때 얼굴을 마주치고 같이 웃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토록 기쁜 일인 줄 몰랐다.

 

그리고 오늘의 유진은 뭔가 답지 않게 다정하고 세심해서

윤은 정말로 입이 귀밑까지 찢어질 지경이었다.

 

“왜 그러느냐?”

 

“아냐, 아무 것도. 근데 너 오늘 엄청 신경쓰고 나왔다.”

 

“세진이녀석이 굳이 골라놓았다고 입고 나가라고 하도 성화를 부려서.”

 

말을 흐리며 조금 부끄러운 얼굴을 한 유진이 귀여워서

윤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창았다.

 

‘아유,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행동 하나하나가 다 예술이네. 난 왜 이걸 몰랐을까?’

 

막연히 꿈꾸던 백마탄 왕자님과의 로맨틱한 데이트는 아니었지만 즐거웠다.

 

‘뭐, 백마는 없지만 왕자잖아.’

 

태연히 이런 생각까지 해버린 윤은 세상 사람 모두에게

이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너무 괜찮지 않냐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기 자리 비었다.”

 

그동안 연구하느라 집안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던 유진이었다.

뒷모습만 보는 일에 진력이 났다고 언제까지나 투덜거리는 윤에게

질린 세진이 유진의 등을 떠밀어 보낸 것이다.

 

‘세진오빠, 고마워. 맛있는 거 사다줄게.’

 

“우리 맥주도 마시자.”

 

“맥주? 맛도 없던데 그런 걸 왜 먹는 거냐?”

 

“네가 아직 어려서 뭘 모르지. 후후후...”

 

‘유진이 너도 한번 취해봐라. 너 취하면 진짜 귀엽겠다.’

 

음흉하게 웃는 윤을 이기지 못하고 맥주를 맛본 유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맛없다.”

 

즐거운 시간은 꿈처럼 흐르는 법이다.

하루종일 붙어 있었어도 윤과 유진에게는 아쉽기만 했다.

 

“어라, 벌써 11시네.”

 

“그렇구나. 그만 돌아가야겠다.”

 

말과는 달리 한참 동안 일어서지 못하고 미적거리는 윤과 유진이었다.

 

“집앞인데 그냥 좀 더 있다 갈까?”

 

“걸으면 10분이니 늦어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며 버티던 둘은 결국 한이 전화로 야단을 쳐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너무 즐거웠어.”

 

“나도 즐거웠다.”

 

“그래, 그럼. 나 들어갈께.”

 

“들어가라.”

 

“너 가는 거 보고.”

 

“너 들어가면 갈 거다.”

 

티비에서 이런 장면이 나오면 유치하다며 코웃음을 쳤겠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닭살돋는 짓을 잘도 한다.

윤과 유진도 에외는 아니라서 몇걸음 떨어진 각자의 집에 들어가기가 아쉬워 또 한참 실랑이를 했다.

 

“알았어. 들어갈께.”

 

결국 포기한 윤이 막 몸을 돌리려는 순간 유진이 윤의 팔을 붙잡았다.

 

“왜?”

 

“아, 아니다...”

 

“뭔데? 말해봐.”

 

“아무 것도 아니다.”

 

“말해보라니까. 궁금하잖아.”

 

윤의 채근에 유진은 한참 망설이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너 말이다... 만일, 내가 사라진다면... 아니다.”

 

“무슨 말이야?”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 들어가라.”

 

“김유진, 말 꺼냈으면 제대로 해.”

 

“나 먼저 간다. 신경쓰지 마라.”

 

유진은 윤을 남겨두고 냅다 뛰어 도망쳤다.

남겨진 윤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려던 거였어? 유진아, 나 갑자기 불안해져.’

 

 


*********************

 

 


오랜만에 개운하게 집안 청소를 한 세진은

윤이 없는 생활의 적막을 즐기며 축구 관람중이었다.

소파에 기대 한참 티비에 열중하던 세진은 유진이 들어오자 해죽 웃었다.

 

“데이트는 즐거우셨나요?”

 

최근 감정을 알아가는 유진의 변화가 재미있어서

사소한 일로도 유진을 놀리던 세진이었다.

얼굴을 붉히며 발끈 화를 내는 유진을 기대했던 세진은

아무 대꾸도 없이 어두운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유진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얼굴이 왜 그래요?”

 

“가고 싶지 않다.”

 

"그래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내가 살아야 화성이건 지구건 있는 법이지요.”

 

유진의 말에 세진은 뛸 듯이 기뻐했다.

 

“하지만 가지 않을 수도 없다.”

 

“뭐하러 죽으러 갑니까? 화성이 지구를 침공하겠다는 건 위협일 뿐입니다.

군부의 힘만으로 지구와 싸울 수는 없습니다.

단지 귀찮아서 지도부가 전복되는 걸 구경만 하고 있었던 화성인들이

지구와 싸우는데 나설 것 같습니까?

 

더구나 범우주연합이 아무리 종이호랑이라고 해도

나서서 거스를 배짱은 신군부에는 없습니다.

가뜩이나 쿠데타라고 말도 많은데 일부러 그런 여론에 힘을 실어주는 멍청한 짓은 못 할 겁니다.”

 

열변을 토하는 세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들은 후환이 두려울 것이다.

그러니 날 제거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겠지.

게다가 화성 지도부의 뒤에는 라탄 행성이 버티고 있다.

그들을 끌어들이려는 자들도, 배제하려는 자들도

나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그냥 지구에서 조용히 살아가겠다고 말해도

그들의 귀에는 들리지도 믿겨지지도 않는다.

화근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전쟁 따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바로 정치의 무서움이다. 지구를 침공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유진님... 어째서 당신은... 지구 따위, 화성 따위 그냥 눈돌리면 안 됩니까?”

 

“그럴 수는 없다. 화성을 위해서도 또 지구를 위해서도 옳은 방법이 아니다.”

 

“아직도 당신이 화성의 지도자 후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평범한 지구인으로서 살아가는 길이 주어졌는데도 아직도 당신은 화성인입니까?”

 

“아니, 솔직히 말하면 화성보다는 지구가 걱정되기 때문이다.

지구는 아직 화성의 공격을 막을 아무런 준비도 없다.

화성이 쳐들어오면 속수무책 당하게 될 것이다.”

 

“지구가 걱정된다고요?”

 

유진은 문득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지켜주고 싶다. 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유진님...”

 

“언제까지나 그렇게 행복하게 걱정근심없이... 밝게 살 수 있도록 지켜주고 싶다.

그것이 화성으로 가려는 이유다. 지도자로서의 의무감 같은 건 애초에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유진님, 차라리 윤이와 함께 다른 별로 가십시오.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화성에서도 유진님이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면 굳이 지구를 침략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세진은 억지를 썼다. 저토록 슬픈 눈을 한 유진이 애틋해서 차마 볼 수 없었다.

처음 지구로 왔던 8살의 꼬마는 울지도 웃지도 않고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메말라가기만 했다.

그런 유진이 어느 순간엔가 웃고 울고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늘 윤이 있었다.

 

‘왜 이제 와서... 어째서! 버려진 것으로도 모자라서

과거에 발목을 잡혀 죽음을 맞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면... 너무 가엽지 않습니까? 당신은 화도 안 납니까?

유진님... 정말로 이대로 됐다는 겁니까? 윤이는 어떻게 하죠?

그렇게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려는 겁니까? 그게 진정... 윤이가 원하는 것일까요?’

 

생각같아선 유진을 붙들고 흔들어 정신차리라고 마구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그러나 세진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윤이의 모든 것은 이곳에 있고 윤에게 세상은 이곳뿐이다.

어떻게 다 버리고 가자고 할까.”

 

중얼거리는 유진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아픔에 세진은 뒤돌아서 눈가를 훔쳤다.

 

 


*********************************

 

 


윤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상한 말을 하니까 악몽을 꾸잖아.”

 

등허리께에 축축한 기운이 느껴졌다.

윤은 한기를 느끼고 몸을 웅크렸다.

 

“왜 그런 소리를 했을까? 꼭 어디 멀리 갈 사람처럼... ”

 

꿈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유진의 슬픈 얼굴만은 아직도 생생했다.

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확실하게 물어보자. 꿈자리도 뒤숭숭하고...

아무래도 마음이 심란해서 잠도 안 올 것 같아.”

 

떨리는 손으로 가디건을 걸치면서 윤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별일은 아닐 거야. 무슨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나 심장은 여전히 두근두근 고동치며 윤의 불길한 기분을 한층 가중시켰다.

 

*


“세진오빠, 유진이 안 자?”

 

“윤아, 이 시간에 여길 어떻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허둥거리는 세진을 보고 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부터 스멀거리던 불안한 예감이 덮쳐왔기 때문이다.

 

“유진이 뭐 해?”

 

자기도 모르게 뾰족하게 날이 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윤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수그린 세진의 소매를 붙잡았다.

 

“말해줘, 오빠. 유진이 지금 어디 있어?”

 

“뒷마당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나 지금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아. 오빠, 말 좀 해봐.”

 

윤의 호소에 세진은 뭔가를 결심한 듯 눈을 빛냈다.

 

“윤아, 지금부터 어떤 일이 있더라도 놀라면 안 돼.”

 

“무슨 일인데? 내가 놀랄 일이야?”

 

“너라면... 어쩌면...”

 

‘유진님이 마음을 돌릴지도 모르지. 윤아, 너만 믿는다.

부디 유진님을 보내지 말아다오. 유진님을 살릴 사람은 너뿐이다.’

 

“가자.”

 

세진은 윤을 데리고 뒷마당으로 갔다. 유진의 질책같은 건 무섭지 않았다.

그것도 살아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살아만 주신다면 평생이라도 들을 테니까...’



 

**********************************

 

 

오늘 중으로 올린다고 해놓고 헉, 벌써 다음날이 되어버렸네요.

화살보다 빠른게 세월이라더니...

요즘 실감하고 있습니다. ^^;;

 

닐리리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

네, 좀 짧았습니다. 예리하시긴... -_-;;;;

이번편을 붙이자니 너무 길고 또 내용도 완전히 달라지는 거 같아서

그냥 두편으로 잘랐는데 어찌 아시고..^^;;

 

좋은아이님, 시련이 있어야 사랑도 불타오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

이제 최대한의 고비를 어떻게 넘길지 저도 걱정이 되네요. ;;

 

딸이님, 그렇게 티나게 짧았나요? ^^;;

짧다는 말씀이 많으시네요.

이번 편도 좀 짧은데... 찔립니다.

 

봄꽃님, 싸우다가 정든다고 이녀석들은 싸우는 게 연애질이랍니다. ^^;;

멍청한 녀석들이지만 검은옷 사나이들이 좋아요. ^^

누가 나한테 하나 던져주면 좋겠는데...-_-

 

윤호사랑해님, 헉, 기어이 윤이를 화성으로 보내고 싶으신 거예요? -_-;;

하지만... 진짜로 윤이는 먹을 거 땜에라도 화성 못 가요. 그런 애랍니다. ^^

 

밥풀님, ㅎㅎㅎ 귀엽죠, 그 남자들?

님한테도 하나 보내주고 싶어요. 싫으셔도 보낼래요. ㅋㅋㅋㅋㅋㅋㅋ

 

비야님, 헉, 그런 말씀을... -_-;;;;

다음엔 정말로 MIB의 내부사정을 스펙타클하고 스릴있게 다뤄볼까나... -_-

 

희동이마을님, 사람도 그렇지만 인생은 사건의 연속이잖아요.

좋은 일, 나쁜 일이 랜덤분배되듯이 인연과 악연도 그렇겠죠.

때로는 인연이 악연이 되기도 하고 또 가끔은 악연이 인연이 되기도 한다고 믿어요.

다 마음먹기에 달린 것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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