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MC, 조명, 카메라 등 모든 스탭들이
큐 싸인 만을 기다리며 긴장이 감도는 스튜디오,
문득 출연자들이 읽어야 할 대본을 집에 놓고 왔음을 깨닫는 순간
내 얼굴은 백짓장이 되어있다.
이내 선 채로 쓰러져 연출자의 책임 추궁 대신
의사의 진료를 받는 행복한 상상으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찰나,
불현듯 가스 불 위에 올려 두었던 라면이 교차되는 어지럼증이란,
그야말로 ‘건망증’이라는 불치병 -아니 그저 난치병 정도라고 해두자. -
이 난치병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출근길 지하철 탄 뒤에 두고 온 핸드폰 생각해내기,
‘정말 특이하다’ 고 배꼽잡고 웃으며 외워둔 친구 이메일주소 잊어먹기,
중요한 물건을 사러 간 가게 앞에서 그 물건이 무엇이었는지
20분간 곰곰이 생각해보기 등
나의 이 난치병이 시시각각 벌려놓는 여타 사건들을 늘어놓자면
이 지면도 모자랄 것 같다.
최근에는 이 오랜 투병생활을 끝내기 위해 한 가지 묘약을 처방해 보았다.
수필가 이하윤씨가 극찬한 ‘메모광’ 흉내 내기!
우선 일에 관련해서 처방하고 있는 ‘메모’의 효과는 기대이상으로
나의 신뢰도를 회복시켜 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장미에는 가시가 있고, 베토벤은 귀머거리였다.
물론 이러한 사실들로
내 지병이 벌려놓는 일련의 사건들을 합리화할 수는 없겠지만
건망증이라는 지병을 않고 있는 나는 ‘메모’라는 명약으로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편이다.
내가 무엇이 부족한 줄을 알고,
그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지를 생각하고,
그 처방전을 겸허하게 실천하는 것으로 매 하루를 채우는 사람,
‘지혜로운 사람’을 만드는 경쟁력은
바로 그 사람의 ‘콤플렉스’가 아닐까.
얼마전 어떤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을 보았다.
여자와 남자가 한 카페의 창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남자, "무슨 음악 좋아해요?"
여자, "뽕짝이요. 삶의 애환이 묻어있는 그런 정서가 와 닿는 것 같아요..^^"
남자, "분위기는 클래식인데 알고보면 아줌마 근성이 다분하군요."
여자, "지금 나오는 야상곡같이 잔잔한 쇼팽의 곡을 들으면
전 도무지 이해가 안가요. 잠만 오지.."
남자, "안 좋아한다는 것 치고는 클래식에 대해 많이 아는 것 같은데요."
여자, "안 좋아하기 때문에 더 잘 아는 거에요.
사람은 자기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에 대해 더 노력하게 마련이라구요.
그러니 느끼지는 못해도 지식적으로는 뽕짝보다 잘 알 수도 있죠."
부족하기 때문에 더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정말 우리네의 본성이라면
오늘도 핸드폰을 두고 나온 스스로를 너무 나무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챙겨도 챙겨도 또 잊혀지는 이눔의 컴플렉스 덕에
내 가방 앞주머니에는
꼭 기억해야 할 내용들이 다닥다닥 입주한 메모장이 한 살림 크게 차려놓고,
앗차하는 순간마다 고슬고슬 전셋돈을 주고있지 않더냐는 말이다.
난치병이 있다는 것은 차라리 다행이다.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당신이 얼마나 살고 싶어질 지,
당신의 주위 사람들은 그런 당신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을지,
당신은 똑똑히 마주 보아야 한다.
그 가운데에 피어나는 삶에의, 강인한 연꽃망울의 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