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부
진우가 탄 차가 사무실 앞에 도착하고 차에서 내리는 진우의 표정은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휴대폰이 울리자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전화를 받는다.
-지금 바쁘니?
윤미의 목소리는 여전히 하이톤이다. 언제나 당당한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가끔 진우는 주눅이 들곤 한다.
-바뻐.
-바빠두 시간 좀 내줘.
-지금?
-지금.
-무슨 일인데?
-회사 근처에 와 있어, 한시간, 아니 삼십분이면 돼.
장소를 묻고 전화를 끊는 진우는 표정이 없다. 가끔 일방적인 그녀의 행동에
화가 나면서도 거절하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하기만 하다.
-먼저 들어가세요...
진우가 함께 서 있는 동료에게 말하고 돌아서 나온다. 윤미가 기다리고 있는
까페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화사한 차림으로
앉아 있는 윤미를 본다. 다가와 맞은 편에 앉는 진우.
종업원이 와서 물잔을 내려 놓자 윤미가 진우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주문한다.
-쥬스 주세요.
그런 윤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진우. 그러다 담배를 꺼내 피워 문다.
-생일 선물로 뭘 받고 싶니?
윤미의 말에 진우의 손이 멈칫한다. 수정과 같은 날 생일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수정인 기억하고 있을까...건망증이
심해서 생일마다 자신이 꼬박꼬박 챙겼었는데...
-주는 사람 맘이지만, 너 내 생일 선물 받구 또 화부터 낼까봐 미리 묻는 거야.
잊구 있었구나, 내일이 너 생일이라는 거.
진우는 말없이 담배연기를 뿜어 낸다.
-난 선물 미리 정했는데....차 사줄까?
윤미의 말에 진우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성진우, 너 나 좋아하긴 하지? 그래서 날 완전히 밀어내지 않는 거 아니니?
날 아주 떠날 게 아니라면, 내가 하자는대로 해, 이게 내 방식이야.
윤미의 말에 진우는 아무 말 없이 담배를 비벼 끈다. 윤미를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그녀를 만나는 것이 불편하진 않는 건 사실이다. 수정에게 없는
것이 윤미에겐 있으므로.
-우리 아버지가 나더러 선 보랜다. 봐두 되니?
윤미의 말에 진우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종업원이 쥬스를 내려 놓고 간다.
-니가 보지 말라구 하면 안 볼게.
-알아서 해...
진우의 말에 윤미가 피식 웃는다.
-보라구 말하지 않는 걸 보니까, 너두 싫은가 보네...마시구 일어나자,
니 선물 보러 가야지.
윤미의 말에 진우는 말없이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정말...내가 이래도
되는 거냐, 수정아....널 가슴에 품고 내가 저 애 곁에 있어도 되는 거야?
***************
하루종일 빈 테이블 앞에서 셋팅을 했다가 치웠다가, 메뉴판에 적힌
영어로 된 메뉴를 헷갈려 하며 외우느라 진이 다 빠진 수정은 탈의실로
들어온다. 이미 먼저 들어와서 옷을 갈아 입는 여직원들이 수정을 힐끔
힐끔 쳐다본다. 수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옷을 갈아 입다가 문득 생각난
듯 휴대폰을 꺼내 뭔가 들춘다. 자신의 생일과 진우의 생일이 같은 날
로 스케줄 관리에 입력 되어 있다. 수정의 표정은 어두워지고, 아는 척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한다.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럭셔리....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나와.
일방적으로 제 할 말만 하고 끊어 버리는 태희. 수정은 휴대폰을
닫고 입을 삐죽이며 옷을 갈아 입는다. 호텔 입구로 나온 수정은
태희가 차를 세워 두고 있는 걸 본다. 수정이 차에 오르자 차는
출발하고 도로에 진입한다.
-할만해?
-네...
느닷없이 존댓말을 쓰는 수정을 놀란 눈으로 태희가 힐끔 본다.
-야, 너 디게 힘들었나보다...갑자기 왜 그러냐?
-뭐...뭘요?
-왜 갑자기 존댓말이냐구, 하던대로 해.
수정이 무안한 듯 표정을 수습하며 웃음으로 때운다.
-어디루 가?
-집으루요.
-아이씨...너 정말 밥맛 없게 굴래?
-그렇잖아요, 호텔에서 내가 태희씨한테 반말하구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구 하겠어요, 그래두 호텔 회장 아들인데...안 그래요?
가증스러운 수정의 표정에 태희가 확 질린 표정으로 힐끔 거린다.
-너 원래 싸가지 없는 거 알거든, 그냥 생긴대로 살아라...사람 헷갈리게
만들지 말구.
-뭐...정 소원이라면...그러지....날씨 좋다.
창밖을 보며 수정이 말하자 태희가 앞 유리창으로 고개를 기웃거리다
수정을 힐끔 본다.
-먹구름만 잔뜩 끼었구만, 뭐가 좋다는 거야? 저녁에...약속 있어?
-없으면 뭐, 밥이라두 사주게?
수정의 말에 태희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돌린다.
-나야 뭐 사주면 좋지....
-너는 증말 싸가지 없는 것도 그렇고 거기에다 뻔뻔하기까지 하다.
어떻게 하믄 너처럼 얼굴이 그렇게 두꺼워질 수 있냐?
-하필 왜...니가 백마탄 왕자니?
수정이 혼잣말로 궁시렁대자 태희가 귀를 쫑긋 세운다.
-뭐?
-암 말두 안했어....밥은 내일 사주구, 지하도 앞에서 내려줘.
-왜?
-잊고 있던 약속이 이제야 생각 났거든.
차가 지하도 앞에 멈춰 서자 수정이 차에서 내린다. 차창으로
고개를 내미는 수정.
-하나만 묻자...너 여자친구 있어?
수정의 물음에 태희가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수정을 본다.
-그건 왜?
-없으면 한 사람 구제해주라, 신데렐라가 무지 되고 싶어하는
애가 하나 있거든, 니가 백마탄 왕자가 되달라구.
-내가 왜?
-왕자가 없으면 신데렐라두 없거든...그래서 니가 필요해.
수정의 말에 태희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그럼, 넌 나한테 뭘 줄건데?
-왕자한테 필요한 게 뭐겠니? 모든 걸 다 가졌는데....니가 가지고
있지 않은 거 하나, 황보수정...날 가지면 되잖어.
수정의 말에 태희는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생각해봐, 조금...손해는 보겠지만, 장사라는 게 늘 이익만 남길 순
없잖어, 잘 가.
수정이 돌아서 지하도로 걸어 내려가자 태희는 운전대에 팔을 올리고
그런 수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본다.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그러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거 내가 완전히 밑지는 장사 아냐?...황보수정, 너 내가 정말
백마탄 왕자라구 생각하냐? 천만에...아버지한테 구박 받고, 사람 취급도
못 받는 왕자 봤냐?
태희가 웃으며 차를 몰고 사라진다.
**************
불편했던 몸이 어느정도 나아지자 수정의 부친은 움직이는데에 한결
수월해진다. 저녁을 먹던 밥상 앞에서 부친이 조용히 입을 뗀다.
-내일이 수정이 생일인데, 아침 먹으로 오라 그래.
부친의 말에 새어머니의 눈꼬리가 올라간다.
-전화 한 통 없는 년, 뭐가 이뻐서 생일상까지 갖다 바쳐요?
새어머니의 말에 부친은 아무말도 못한다.
-요즘 도통 코빼기도 안보이구, 뭘하고 싸돌아 다니는지....걔, 남자
생긴 거 아냐? 얌전한 고양이가 부뚝막에 먼저 올라간다구, 딱
걔가 우리 뒷통수 칠 애라니까.
새어머니의 투덜거리는 소리에 혜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맞어.
혜지가 슬쩍 새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맞짱구 친다.
-나라두 돈 벌이를 이제 해야지...그 년 믿고 있다간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다니까.
-식당이라두 다니게?
-지금 내가 가릴 때냐? 아는 사람이 파출부 자리가 하나 있다고 소개
시켜준다는데, 거기라두 나가봐야지.
-엄마, 창피하게...파출부가 뭐냐? 곧 있음 의사 사위 보게 생겼는데.
혜지가 투덜대며 새어머니를 본다.
-결혼 얘기 나올 때까지만 할거야 안그래두...너 시집 보내려면 그래도
돈이 좀 있어야 할 거 아냐, 빈 몸으로 보낼 수 없잖어...에휴, 내 팔자야.
무슨 놈의 팔자가 이 모양인지...쯧.
새어머니의 말에 부친은 아무말 없이 수저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왜요, 또 소화가 안되요?
대답하지 않고 방문을 열고 나가는 부친을 보고 새어머니는 혀를 찬다.
-박복한 년은 남편 복도 없고, 자식 복도 없다는데....
-걱정마, 내가 꼭 호강 시켜줄거니까.
-너나 잘해 이년아.
-괜히 나한테 그래...
혜지는 시큰둥해져서는 수저를 탁 놓는다.
************
전철에서 내린 진우는 자판기 앞에 서서 커피를 한 잔 뽑으려고 선다.
그러다 문득 수정일 떠올린다. 그러다 돌아서면 반대편에 수정이 서 있는
걸 본다. 수정은 진우를 막상 만나려고 왔지만 다시 발길을 돌리던 참이었다.
진우와 수정의 시선이 마주치고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서로 마주보며 서 있다.
진우가 수정일 보다 계단을 향해 뛴다. 수정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고,
전철이 막 도착한다. 전철에 가려 수정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전철이 떠난후
다시 수정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곧 이어 숨을 헐떡이며 진우가 수정의
앞에 나타난다. 그 순간 수정은 그토록 덤덤하기만 했던 진우와의 이별이
새삼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수정의 눈에 눈물이 그렁해지고, 애써 울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린다.
-저녁...먹었어?
-아니.
-같이 먹을래?
-아니....
진우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수정에게 가졌지만 그건 그저 자신의 욕심일 뿐이란
생각을 한다. 수정이 먼저 벤치에 가서 앉자 진우가 서 있다가 옆에 가서 앉는다.
-내일....생일이더라구, 기억하구 있었니?
수정이 어렵게 말을 꺼내자 진우가 고개를 가만히 끄덕인다.
-처음인 거 알어? 니가 생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거 말야.
진우의 말에 수정이 아무 말 없이 앞을 본다. 그리곤 정말 힘들게 말을
꺼낸다.
-진우야....나, 왕자님 만났다.
수정의 말에 진우가 돌아본다.
-날 신데렐라로 만들어줄 왕자가 나타났다구....그래서 나, 그 사람
꼭 가지고 싶어....속물이래두 할 수 없어, 누구든...내 상황이라면
그런 욕심 부릴 거라 생각해.
수정의 말에 진우는 어두운 표정으로 앞을 본다.
-사랑....하니?
진우의 말에 수정은 잠깐 생각한다. 그리곤 태희를 떠올린다.
-그렇게 만들거야....동화 속의 신데렐라처럼, 내 인생을 해피엔딩으로
끝낼 거야. 대신...난, 반칙 같은 거 안해.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내 감정 솔직하게 말할 거야,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될 때까진.
수정의 말에 진우는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다. 그러다 진우는 피식
웃는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아냐? 그 공주의 잠을 깨우는 자는
그 공주를 얻는 것과 동시에, 부와 명예까지 덤으로 얻는다...그게
신데렐라와 다를 게 뭐가 있냐? 내가 지금...그래. 너하구 나...우린
지금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꿈을 쫓고 있는 거지?
-나....다신 널 만나러 이렇게 오지 않을 거야....앞으로 우연히 마주
치더라두 나, 너 아는 척두 안할지도 몰라. 그래서...인사하러 왔어.
수정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진우가 그대로 가만히 앞만 보고 앉아 있다.
그때 전철이 바람을 몰고 들어온다. 수정의 머리칼이 휘날린다.
-생일...축하해, 내 마지막 인사야...잘 있어.
전철이 서고 수정인 돌아보지 않고 올라탄다. 진우는 그런 수정을
앉아서 본다. 수정은 등을 보이고 서서 전철 문이 닫히고 역을 떠날 때까지
그렇게 서 있다. 진우는 사라진 전철을 바라보다 손으로 뜨거워진
얼굴을 문지른다.
-미안하다....미안하다 수정아....생일 축하한다.
************
태희는 오랜만에 긴 시간동안 여유롭게 샤워를 한다. 그리곤 이층 방
베란다 앞에 나와 벤치에 앉으며 내려다 보이는 어둠 속의 정원을
바라본다. 람보는 시큰둥하게 웅크리고 앉아 대문쪽을 바라보고 있다.
누굴 기다리는 거냐?.....
태희는 수정의 말을 다시금 떠올린다.
-왕자한테 필요한 게 뭐겠니? 모든 걸 다 가졌는데....니가 가지고
있지 않은 거 하나, 황보수정...날 가지면 되잖어.
태희는 씁쓸한 미소를 띠며 휴대폰을 꺼내 든다. 휴대폰을 열고
일번을 꾹 누르자 싸가지란 글자가 뜬다. 태희는 가만히 휴대폰을
닫는다. 처음 수정을 만났던 지하도를 떠올린다. 그러자 태희는
다시 웃음이 나온다.
-이상하게도 넌...날 자꾸 웃게 만드는 거 아냐? 너 때문에 내가
요즘 미친놈처럼 자주 웃는다.
태희가 자리에서 기분 좋게 일어난다.
**********
막 씻고 나온 수정이 휴대폰에서 문자 알림 소리가 나자 들어와
화장대 위에 놓여진 휴대폰을 열어본다.
어이, 싸가지....12시가 지나면 혹시 너, 괴물로 변하는 거 아니냐?
수정이 태희가 보낸 문자를 보고 피식 웃는다. 휴대폰을 닫는데 다시
문자가 날아온다.
유리구두를 그냥 버릴까, 임자를 찾아줄까...생각 중이다, 잘자라.
수정은 휴대폰을 닫고 가만히 거울을 본다.
-황보수정, 너 잘한거야....뻔뻔해지기루 했으면 그냥 뻔뻔해지자.
그때 현숙이 방으로 들어오며 수정을 본다.
-미친년두 아니고 혼자서 뭐라구 궁시렁대냐?
-늦었네?
-그래, 늦었다...재미 좋디, 둘이서?
현숙이 투덜거리며 시비조로 말하자 수정이 피식 웃는다. 그리곤
로션을 바른다.
-그 차, 그 놈 꺼 맞대?
수정이 씨익 웃으며 돌아 앉아 현숙의 팔을 잡고 앉힌다.
-앉어봐.
-뭐어?
-너 신라호텔 알지?
-호텔두 갔었냐 둘이서?
눈이 휘둥그레지며 현숙이 묻자 수정이 흘기며 말한다.
-그런게 아니라, 거기 호텔 아들이래.
-누가?
-강태희...걔 말야.
현숙이 헉 소리를 내더니 입을 쩍 벌리고는 수정을 넋나간 듯 본다.
-나두 첨엔 믿기지 않더라니까....나 거기 취직했다, 오늘부터 근무했어.
이번에도 현숙이 헉 하는 소리를 한 번 더 내지르더니 뒷덜미를 손으로
잡으며 뒤로 쓰러진다.
-어이구....
수정이 그런 현숙을 피식 웃으며 보다 자명종 시계를 맞춰 놓는다.
현숙이 벌떡 일어나 앉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그럼, 너 정말 신데렐라가 되는 거냐?
현숙의 말에 수정이 그저 웃는다. 그리곤 자리에 눕는다.
-아이고 배야....
현숙이 배를 움켜 잡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다 누워 있는 수정을 내려다
보며 말한다.
-설마, 미치지 않고서야 널 신데렐라로 만들어주진 않겠지? 암...그러면
정말 나, 농약 먹구 죽어버릴거야.
현숙이 정말 배가 아픈 듯 움켜 쥐며 설설 기어 방에서 나간다. 수정이
혼자 기분 좋게 웃다가 진우를 떠올리자 기분이 다시 우울해진다.
생각하기 싫은 듯 수정이 고개를 젓고는 이불을 덮어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