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추억만으론 슬퍼서 싫어
“오빠...”
망설이며 꺼질 듯한 목소리를 내는 윤은 겁먹은 얼굴이었다.
“윤이구나. 무슨 일 있어?”
마치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여전히 온화하게 웃는 세진 때문에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왜 아무 말 안 해? 나, 오빠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렇게 고백하고 1년이나 쫓아다녔잖아. 근데도 아무렇지도 않아?
그런 거 보고도 웃어 줄만큼 내가 오빠한테는 아무 의미도 아니야?’
“대답, 들으러 왔어.”
윤은 입술을 깨물어 가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그런 걸 보여 놓고 찾아와 대답을 듣겠다는 자신이 스스로도 용납이 안 되지만
이렇게 흐지부지 끝낼 감정은 아니었다.
세진을 좋아했던 건 사실이고 고백했던 것도 진심이었다.
그러니까 대답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윤아...”
약간 당황한 얼굴로 세진이 윤을 빤히 쳐다보았다.
“알아. 오빠가 날 뻔뻔하다고 생각해도 할 수 없어.
그치만... 그래야 할 것 같아.
오빠한테 확실하게 대답을 듣고 나야 내 마음이 편할 거 같아.
대답해 줘. 거절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그렇게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윤이 안스럽다. 어렸을 때부터 들인 정도 정이지만
유진의 명령으로 기억을 지운 이후로는 더욱 애틋했다.
윤에게는 늘 마음의 빚을 지고 살았다.
그래서 더욱 윤이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다.
거짓이라 해도 그러면 안 되는 거니까.
윤의 기억을 지워놓고 위로하다니, 그럴 자격조차 없다.
“윤이의 마음속에 정말로 내가 있는 거니?”
“오빠야. 오빠라고 벌써 1년 전에 말했잖아.”
“조금은 그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오랜 시간 같이 있었고 가족같은 사이니까.”
“그런 말로 얼버무리지 말아. 확실하게 대답해 줘.”
“하지만 윤아, 정말로 네 마음에 가장 선명하게 찍힌 사람이 나야?”
“세진 오빠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난 한이나 온이, 그리고 윤이를 다 똑같이 좋아해.”
기어이 윤이 듣고 싶지 않던 대답을 한다.
윤은 후둑 떨어지는 눈물을 고개 숙여 감췄다.
“......거절... 이야?”
“솔직하게 생각해봐.
만일 너한테 하루밖에 시간이 없다면 넌 그 시간을 누구와 보내고 싶어?
단 한 사람과 있을 수 있다면 누구를 고를래?”
세진은 말이 없는 윤을 품에 안았다.
천천히 등을 쓰다듬어주면서 세진은 한숨과도 같은 탄식을 했다.
“넌 정말 좋은 아이야. 올곧고 바르지. 그러니까 알 수 있을 거야.
네 가장 밑바닥, 너의 가장 깊은 곳에 누가 자리하고 있는지.
어떤 방해가 있어도 결국에는 찾아내고 말 거야.
그러니까 생각해줘. 답을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계속 그게 누구였던가를 떠올려 줘. 그러면 윤이는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세진의 말을 들으며 윤은 유진을 생각했다.
‘너도 이런 기분이었어? 거절당한다는 거, 정말 싫은 기분이다.
미안해. 나는 세진 오빠처럼 다정하게 거절도 못 했지.
이렇게 단호하게 끊어내지도 못 했어.
왜 난 나를 좋아한다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 걸까. 더 부드럽게 말해줄 수도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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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피하는 거야?”
라니는 온의 앞을 가로막았다. 난처한 얼굴의 온이 슬쩍 라니를 외면했다.
“왜 자꾸 날 피하는데? 오빠, 이젠 라니가 싫어? 작지 않아서 귀엽지 않은 거야?”
“그런 게 아니야.”
“그럼 왜 그래? 오빠가 신경쓰여. 다정하게 대해줘 놓고, 매달리게 해 놓고...
왜 이제 와서 날 모른 척 하는 거야?”
“그렇지 않아.”
“그럼 날 똑바로 보란 말야! 나한테서 작은 라니를 찾지 말고 지금의 나를 봐 줘.”
라니는 애원했다. 그냥 무시해도 되는 사람을
자신은 왜 이렇게도 붙잡으려 하는 걸까.
라탄에 돌아가서 유진과 결혼을 하고
왕위를 물려받아 라탄을 통치하는 것이 라니의 인생이다.
쭉 그렇게 정해져 있었으니까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유진이 아니더라도 결혼은 라탄에 도움이 되는 누군가와 하겠지.
‘결혼은 좋아하는 사람과 하는 거야!’
왜 윤의 말이 이렇게 가슴을 때릴까.
아무 것도 모른다고, 결혼 따위 그저 거래에 지나지 않는다고
속으로 비웃었으면서 왜 갑자기 그 말이 생각날까.
‘오빠 때문이야. 오빠가 갑자기 날 피하니까... 그래서 안정이 안 되서 그래.’
“라니, 미안하다. 나가봐야 해.”
온은 황급히 대문을 나섰다. 홀로 남은 라니는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작은 라니가 되고 싶어... 다시 돌아가고 싶어...’
“라니!”
저멀리서 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라니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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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는 무사하신 겁니까?”
라탄의 위병대장이 부하들을 이끌고 달려온 것은
라니가 쓰러지고 채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쓰러진 라니는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에이피에 의해 그것이 성인식의 후유증임을 알게 된 직후 유진이 MIB에 연락을 한 것이다.
“이런... 상태가 안 좋아요. 당장 라탄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많이 안 좋은 겁니까?”
걱정스럽게 묻는 관장에게 대장은 한숨을 내쉬며 설명해 주었다.
“라탄의 성인식은 육체가 단기간에 성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직 제 기능을 다한다고 보기 어렵지요.
몸에 맞는 힘을 갖추기 위해 신역에 들어가서 가사 상태로 일정기간을 보냅니다.
그 후에야 육체와 정신이 일치되고 자신의 육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신께서 하시는 일이니 한낱 미물인 제가 답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인식 이후 요양 기간에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이렇게 정신을 잃을 정도라면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군요.”
대장은 죽은 것처럼 잠든 라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손으로 지켜왔던 공주님이다.
늘 자신만만하고 칼날같이 단정하던 왕녀의 얼굴에는 못 보던 수심이 깃들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비행을 견뎌낼 수 있겠소?”
대장은 차가운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태도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캡슐에 넣어 모실 생각입니다.
그때까지는 가사상태로 계시는 것이 가장 안전하겠지요.”
“내 잘못이 크오.”
“아닙니다. 왕녀께서 이런 불안정한 시기에
라탄을 떠나시는 것을 말리지 못한 제 책임입니다.”
“아무튼 무사하게 돌아가길 바라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니! 정신이 들어?”
윤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라니에게로 모였다.
눈을 뜬 라니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다로... 그대가 왔군.”
“전하... 불충한 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다로에게 라니가 손을 들어보였다.
“일어나라. 그대의 잘못이 아니야.
내 멋대로 행동하여 그대들에게 폐를 끼쳤다.”
“황공하옵니다! 감히 어찌 신들이...”
“그보다 내가 어떻게 된 것인가?”
“전하께옵서는 성인식의 후유증으로 정신을 잃으신 것입니다.”
“그런가... 역시 성인식을 이곳에서 치른 것이 무리였던가.”
“한시라도 빨리 라탄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신역에 들지 않으시면 위험하십니다.”
“그래... 이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지.”
라니는 침대 곁을 둘러싼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무섭지만 늘 공정했던 한, 좋아하지 않으리라 결심하고도 좋아하게 되어버린 윤,
꼭 데리고 돌아가고자 했던 유진, 어느 샌가 가족이 되어버린 세진... 그리고... 온...
‘이제야 겨우 나를 봐주네. 그렇게 걱정스런 눈 하지 마. 오빠는 웃는 게 더 잘 어울려.’
마음껏 울고 웃고 화냈던 며칠간이 벌써 먼 추억처럼 생각된다.
‘난 또 언제 그럴 수 있을까.
라탄의 왕녀 라니가 아닌 나를 봐주는 사람들을 또 어디서 만날까.
가고 싶지 않아... 보내지 말아줘... 오빠...’
“전하? 어찌 그러시옵니까?”
아무리 간절한 눈으로 애원해도 온에게는 닿지 않는다.
라니는 한참 그와 눈을 맞췄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온은 방을 나가버렸다.
‘그렇게 가지마. 나한테 등을 보이지마. 나, 오빠가 그럴 때마다 가슴이 무너져... ’
“전하?”
눈에 고인 눈물을 감추기 위해 라니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명령했다.
“라탄으로 귀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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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피웠어?”
유진은 마당 안쪽에서 온을 발견했다.
어색하게 웃으며 담배를 문 온은 손가락을 세워보였다.
“형한테는 비밀이야.”
“라니가 가는 게 그렇게 서운해?”
“서운하지. 정도 많이 들었는데.”
억지로 웃는 온의 입매가 참 슬퍼 보인다는 생각을 하며 유진이 손을 내밀었다.
“나도 줘.”
나란히 담배를 피우면서 둘은 한참 말을 하지 않았다.
“윤이랑 어떻게 된 거야?”
“울려 버렸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 답답해서...
말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어.
난 인내심만은 자신있다고 생각했는데 윤이한테는 그게 안 되더라.”
“언제까지고 기다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야.”
“한이 형하고 똑같은 말을 하네.
난 혼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지금쯤 하지 않으면 방해할 생각이었다면서 웃더라.”
“형은 늘 모든 걸 알고 있지.”
“응, 그래서 무서워.”
둘은 잠시 한의 행적을 떠올리다가 진저리를 쳤다.
“라니한테 안 가봐?”
“준비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괜히 얼쩡거리다가 대장의 눈치를 받는 것도 싫고.”
“그래... 라니를 끔찍하게 위하는 것 같던데.”
“뭐라고 해도 라니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켜왔으니까.
아마도 아버지인 국왕보다도 더 챙길걸.”
“그런 말을 들으니까 라니가 너무 멀게 느껴진다.”
“설상인(雪上人: 높은 직위나 신분에 있는 사람)라는 건가...
아니, 형의 경우는 설상정인(雪上情人: 신분이 높은 연인)이야?”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앗, 뜨거!”
당황한 온은 담배를 떨어드렸다.
“다들 알고 있어.
귀엽던 라니는 무엇이 되었을까? 라라라, 귀엽던 라니는 자라서 마음을 훔쳤지...
누구 마음을?”
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혼자 바보짓했군.”
“응, 일부러 피해 다니는 형 얼굴이 왜 그렇게 새빨갰는지 라니만 몰랐지.”
“어쩔 수 없잖아. 갑자기 그렇게 달라진 모습을 보면 당황하는 게 당연해.”
“그럴까? 한이 형이나 윤이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는걸.”
“그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무시무시하다고.”
“형도 라니가 아니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가기 전에 라니의 오해는 풀어줘. 라니는 형이 자기를 싫어하게 됐다고 생각해.”
온은 귀를 의심했다.
“뭐?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그거야 그럴 만 하잖아. 늘 형이 자기를 피하고 외면하니까. 그렇게 다정하던 사람이 말이지.”
입술을 깨물고 선 온의 등을 툭 친 유진이 시원스럽게 웃었다.
“분발해서 라니를 좀 떼어가라고.”
“넌 어땠어?”
“뭐가?”
“윤이를 놓고 죽으러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어?”
“아무 생각도. 그냥 슬퍼서 울었어.
화성에 도착할 때까지 울다가 잠들고 울면서 깨고... 지옥이었지.”
“넌 용감해.”
“그건 용기같은 거랑 상관없어. 상황이 그랬으니까. 그래서 형한테는 조금 화가 나.”
“왜?”
“형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데 그걸 버리려고 하니까.
나는 그렇게 원해도 가질 수 없었던 거였는데.”
“그런가...”
픽 웃은 온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반짝거리는 저 빛은 얼마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이곳에 도착한 걸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사연이 묻어있을까.
“추억은 아름답지만... 역시 그것만으로는 슬프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