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적절한 남자(27)
나는 아침까지 선택을 해야했다. 오히려 이럴 땐 현수가 먼저 결정하고 나에게 통보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사람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선택해야만 하는가...
직장을 다니면서 늘 점심 메뉴를 선택하는 것이 괴로웠다. 결국 먹고 나면 그게 그거지만 먹기 전까지는 도대체 뭘 먹어야 할지 선택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건 먹고나면 그게 그거라는 메뉴가 아니다.
이 선택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것이다.
만약 내가 여기 혼자 남게 된다면 소원인 독립을 선택하는 것이겠지만 그에 대한 비용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다시 돈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건?
그건 또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어떻게 치른 독립인데 여기서 포기하는 것인가?
나의 마음은 전자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어떻게든 해보고 싶었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현수도 그렇게 말했다. 인생 포기하기엔 별 거 없다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현수에게 나의 결정에 대해서 말하려고 했는데 현수는 아직 잠든 상태였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전에 현수가 사용했던 포스트 잇을 사용하기로 했다.
'현수씨, 어젠 고마웠어요. 저에게 결정하라고 했죠? 제가 여기 있을게요. 월세는 지금부터 꼬박꼬박 낼게요. 저 열심히 살아볼게요. 이왕 시작한 독립을 포기할 순 없네요. 현수씨에겐 미안하지만...'
그렇게 포스트잇에 써서 냉장고에 붙여 놓았다.
회사에 출근해서 마음 한구석에서 정훈의 연락을 기다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제 정훈의 부인의 전화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포기하겠다는 결심도 섰고 그럴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정훈에게서 어떤 연락도 없는 것을 느끼자 웬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정훈은 무슨 생각에서 나에게 다시 시작하자고 한 것일까?
정말 이혼할 생각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이 없는 일이다.
그러다 현아와 민석이 떠올랐다. 지금 나로서는 세상의 가장 부러운 커플이었다.
나는 민석에게 전화를 했다.
"현아 어떻게 됐어?"
"응. 괜찮아졌어. 조금 더 집에서 쉬라고 해서 며칠 휴가 내고 쉬는 중이야."
"다행이다."
"그래도 언니가 이럴 땐 최고인가보다. 너 와주어서 현아가 너무 좋아하더라..."
바보...현아에겐 네가 최고란 걸 모르니?
"그래..나도 고맙다. 현아 잘 챙겨줘."
"그나저 정훈과 재횐 어떻게 된 거야?"
민석이 마음의 여유를 찾은 게 확실한 것 같았다. 그 동안 통 물어보지 않던 정훈과의 관계에 대해 묻고 있었다. 그 말을 들으니 섭섭하기도 했다. 예전 같으면 정훈과 재회를 했을 때부터 민석과 상의를 했을지도 모른다. 중간중간에 여자한테 전화가 걸려왔다고 말하고 그리고 어제도 민석에게 전화를 걸어 상의를 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젠 민석과 그런 우정도 여유롭게 나눌 형편이 못되는 것 같았다. 현아와 결혼으로 자연스럽게 마음의 배려도 전부 현아에게 쏠렸다는 것을 나도 인정하는 것일 것이다.
"끝났어."
"끝?"
"응."
"다시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그게...결혼했더라고?"
"뭐라고?"
민석도 놀란 모양이었다. 다시 찾아온 애인이 결혼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할 것이다.
"그렇더라구..."
"넌 참 첫사랑 지독하게 한다."
지독하게?
나 스스로 생각못한 단어였다. 이런 게 지독한 걸까?
그럴 수 있겠지. 내가 보기엔 현아와 민석도 지독한 사랑을 하는 것 같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거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 그 둘은 함께 있어서 지독하다는 말이 안 어울리는 것일까? 사랑에 대한 부정적인 단어는 모두 이별 후에 쓰이는 걸까?
"뭐..그런 거지...인생 뭐 별 거 있니?"
"어째 자포자기하는 말투다..."
"뭐 어쩌겠지? 이대로 있는 수 밖에.."
"너 그 남자한테 제대로 따지지도 않았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구 있는 거지?"
역시 민석은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찾아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이쯤에서 포기하자 생각하고 있던 터라...
"그럼 뭘 어쩌겠어?"
"그럼 진짜 사랑이 아닐 수도 있어. 사람들은 말야. 뭔가 쿨하게 해결하는 게 멋있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쿨하게 해결할 수 있음 그건 사랑이 아닐 수도 있어. 사랑은 앞뒤도 못가리고 유치한 거야. 나랑 현아를 봐..."
그래...난 사랑에 패배자다. 정훈이 아니라 사랑에 패배자다. 3년 전에도 지금도 그 사랑을 그냥 떠나 보낸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하기엔 나에겐 너무 큰 이별이다. 정훈에게 진짜 사랑으로 보이지 않을지만 누구나 사랑의 방식이 있는 거다. 난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라 잡지 못했을 뿐이다.
정훈에게서 저녁까지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쓸쓸한 퇴근 시간이었다. 별 다른 약속도 없었고 할 일도 없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만약 현수가 집을 비웠다면 진정한 독립이 되는 것이다. 현수가 집을 나갔다면 나에게 연락을 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루먼 연락도 없었다.
집에 돌아갔을 때 현수의 흔적은 없었다. 역시 현수는 약속한 대로 내 결정에 따라 집을 나간 것 같았다. 혼자 있으니 원룸도 넓어 보였다.
처음엔 진우가 있었고 다음엔 현수가 있었다.
나는 내가 메모를 붙여 놓았던 냉장고를 봤다. 얼핏 봐도 내 필체가 아닌 다른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민아씨. 결정에 따라 집을 비웁니다. 오늘 당장 들어가지 않으면 민아씨 부모님에게도 알리겠다는 아버지의 협박 때문에요. 아버지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부족한 저 때문에 민아씨에게 피해가 갈 것 같아서요. 이런 말하면 진짜 동거한 것 같은데...그 동안 함께 있어서 즐거웠어요.'
혼자 미소를 지었다. 현수와 아무 관계도 아니었는데 같이 있는 동안 즐거웠다니...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정훈과는 함께 있었던 것이 지금 괴로운 추억이 되었는데...
정말로 정답 없는 세상이다.
사랑이라고 생각한 사람을 날 울리고,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을 날 웃게 했다.
현수에게 연락이라도 해볼까 생각했는데 전화번호를 모른다는 생각이 났다. 전화를 주고 받은 적은 있지만 따로 저장해두지는 않았다. 전화기를 뒤져 현수의 전화번호를 생각하는 것을 찾았지만 막상 전화를 하려니 어색해서 관두었다.
이제 진짜로 혼자 맞이하는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분명히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