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준하가 서현을 오래간만에 본것은 지은의 49제 추모때였다. 지은의 운구가 한국으로 돌아왔을때 떠들썩했던 매스컴에 비해 이번에는 가족단위로 치루어진 조용한 추모식이었다.
지은이 한국에 돌아왔을때 그녀는 편안히 누워있는채로 많은 사람들의 도움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었다. 수많은 취재진들이 현진그룹의 외동딸의 죽음을 다루러 공항까지 나왔다는게 믿겨지지 않았었다. 온 세상이 그렇게 검게 보인적이 없었다. 심지어 취재진들이 짊어지고온 카메라까지도 검은색이었다. 지은의 소식을 듣자마자 눈물을 터뜨렸던 서현의 두눈은 모두 말라버려있었다. 부운 그녀의 슬픈 눈은 아무런 감정이 없는듯 멍한 눈빛으로 지은이 편안히 누워있을 관을 바라보고있었다. 고개를 떨구었던 태빈은 그날 말을 단 한번도 하지않았다. 그가 무슨생각을 하고있었을까. 죄책감일까. 아니면 어쩔수없다는 것일까. 우리들 앞에는 지은의 부모님이 서 계셨다. 아직도 고우신 그녀의 어머니의 얼굴은 검은 망사로 가려 그림자가 기울어져있었다. 하지만 어깨는 심하게 흔들렸고 얼굴을 하얀 손수건에 묻고서 옆에 서 계신 이회장님의 품에 안겨있었다. 이회장님은 전혀 슬프지 않은 사람처럼 덤덤한 표정이었다. 꼭 딸을 마중나오지 않고 다른 모르는 사람의 운구를 보러 억지로 나온 사람의 표정. 설마했지만 정말 그렇게 보였었다.
49제 추모식의 모든 절차가 끝나고서 준하는 두르고있던 검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지은의 넓고 화려한 집에서 나와 정원으로 향했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정원의 하얗고 넓은 그네의자에 걸터앉은 그는 구름한점 없는 맑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올렸다. 따가운 햇볕에 두 눈을 감고 지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에게 했던 말도.
“오래간만이야.”
낯익은 따뜻한 음성에 천천히 감겨있던 눈을 떴다. 서현이 조심스럽게 옆자리에 앉았을때 그네가 흔들리며 철근소리가 들려왔다.
“응. 좋아보이네?”
힘들게 서현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며 준하가 말했다.
“행복해?”
“어. 행복해.”
준하의 물음에 서현은 서스름없이 쉽게 대답했다. 다행이었다. 그녀가 행복하다면 된것이었다.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된 그녀로부터 원하는것은 더이상 없었고 또 원한다고 해서 받을수있는것도 없었다. 그저 그녀가 행복을 갖고있으면 된거였다. 그 남자의 사랑을 받으면 된거였다.
“미국 간다며?”
“들었니?”
“어. 임태빈씨 한 이주정도 출장가는데 너도 같이 간다고..”
맞다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까지 태빈이 없던 시절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억할수 없을정도로 그녀는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날수가 없었다.
준하의 덤덤한 표정에 다행이라는듯 서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진실된 그의 속마음은 알수없겠지만 그래도 겉으로나마 괜찮아하는 모습에 다행인듯 싶었다.
“너희 병원에 예쁜 간호사 없어?”
“어?”
“아니, 있으면 데쉬해보라구.”
“뭐?”
장난기 가득한 말투와 표정으로 말하는 서현의 모습에 준하는 어이가 없다는듯 고등학교시절 항상 보여왔던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예쁜 여자라. 갑자기 강지우라는 여자가 떠올랐다. 그 당돌한 여자를 생각하는 자신을 향해 준하는 비웃었다.
“지은이는 잘 있겠지?”
서현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꼭 거기에 지은이 앉아서 아직까지도 예쁜 눈을 흘기며 그녀를 노려보고있을것 같았다. 식지않은 태빈을 향한 사랑으로 그녀를 미워하고있을것 같았다.
“잘 있겠지. 별로 걱정안해.”
“왜?”
“숨쉴때도 워낙 무서울정도로 강했던 애라.”
“강하지않았어. 너도 알잖아.”
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네를 흔들어보았다. 속초로 이사가기 전에도 살았다던 이 집에서 어린 지은은 나처럼 이렇게 하늘을 쳐다보며 이 그네를 탔겠지. 어릴적 누구나 한번쯤은 지니는 꿈과 희망을 가지고서 환한 웃음을 띄우며 이 넓은 잔디밭을 뛰어놀았겠지. 따뜻한 곳에 가고싶다며 이탈리아로 훌쩍 떠나버린 지은에게서 받았던 엽서가 떠올랐다. 자신이 죽는 다는 말을 전혀 감정없이 아무렇지도 않은듯 써놓았던 그녀. 삶을 전혀 포기하지 않은것처럼 살아있는 필체였지만 ‘나 죽어’ 라는 말은 왠지 자포자기한듯한 분위기를 내고있었다. 한동안 지은의 엽서를 바라보며 그는 오랜시간동안 생각에 잠겨있었다. 동정심과 연민이 한꺼번에 그녀에게로 쏠렸다. 너무나도 그와 비슷했으면서도 달랐던 그녀였기에.
“그렇지만 나보다는 강했어. 죽는 순간까지도..사랑하는 사람 포기하지 못했을테니까. 말은 포기했다고 했지만.”
서현은 아무말없이 나른하게 불어오는 여름 바람을 맞으며 준하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말은 포기했다고 했지만 그 애..끝까지 임태빈씨 사랑했을 애야. 그 정도면 강하지. 나는 이렇게 살아있는데도 포기를 해버렸으니까말야. 뭐, 포기안한다 해도 할수있는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상대가 서현이라는듯 당당히 고개를 돌려 준하는 그녀를 마주봤다. 그들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조금 수그러든 미안한 감정이 서현의 가슴속에서 다시 솟아나려하고있었다. 이제는 조금 고개를 숙인 욕심과 미련이 다시 준하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곧 그는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이제는 정말 끝이야. 오랫동안 해온 질긴 사랑같은거 오늘부로..정말 끝이야.”
“…….”
“끝내고싶어. 정말. 끝내고싶어.”
“…….”
“다른 사랑..할수있을거야, 이제는. 하고말거야.”
준하는 다시한번 서현을 마주했다. 이제는 자신감과 무거운 다짐으로 가득 체워진 얼굴이었다.
병원 앞에 있는 페스트푸드 점에서 간단히 요기를 한 준하는 시원했던 에어콘 바람을 뒤로한채 더운 길거리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얼굴이 저절로 찡그려질 만큼 7월의 날씨는 신경질이 날 정도로 덥고 눅눅했다.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앞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던 그를 누군가가 부르고있다는것을 깨닫는데는 조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선생님!”
그가 고개를 돌렸을때 예전과 변함없이 도도함을 물씬 풍기는 모습을 한 지우가 서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누구인지 생각해내는데 오랜시간을 소비해야했다. 분명 얼굴은 잊혀지지않을만큼 가슴속에 새겨져있었지만 누구였더라?
“기억못하시는건 아니시죠?”
그의 마음을 모두 읽은듯 지우는 얼굴을 찡그리며 그에게 물었다.
“감기!”
감기? 아..
“강지우씨.”
그제서야 이름을 떠올린 준하는 조금 난감한듯 씁쓸한 미소를 띄웠다. 하지만 그에 반해 재미있다는듯 장난스런 미소를 띄고있는 지우는 준하를 똑바로 쳐다봤다. 이 여자가 수줍음이라는것도 없나?
“병원 가시는 겁니까? 그러고보니 그날 이후에는 안오시더군요.”
“다 나았거든요.”
정말 멀쩡해보이기는 했다. 준하는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반대편의 신호등을 쳐다봤다. 오늘따라 신호가 늦게 바뀌는것 같은 기분에 더워서 짜증이 나려했다. 어서 신호가 바뀌어서 진료실안에 들어가 에어콘 바람을 쐬고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귀에 거슬렸다. 지우의 발음이었다. 첫날 그녀를 봤을때는 들리지 않던 것이 왜 오늘 갑자기 집히는건지. 그는 고개를 돌려 지우를 의심스런 눈빛으로 쳐다봤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역시나였다. 발음이 한국사람치고는 부정확했다.
“발음때문에요?”
눈치가 빠른건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신기한 능력이 있는건지. 그녀는 준하가 먼저 말하지않아도 다 안다는듯 한발 앞서나갔다.
“꼭 사람들이 그런식으로 쳐다보더라구요. 제 발음때문에.”
또다시 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신호가 파란불로 바뀐듯 사람들이 하나둘씩 횡단보도위를 지나갔다.
“그럼.”
그는 인사를 하고 횡단보도로 들어섰지만 따라와서 팔을 붙잡은 지우때문에 횡단보도 중간에서 걸음을 멈춰야했다.
“네?”
“바쁘세요?”
날도 더운데 준하는 좋아하는 원두커피보다는 차가운것이 나을거라는 생각에 아이스커피를 주문했고 지우는 시원한 키위쥬스를 주문했다. 푹신하고 넓은 쇼파에 깊이 주저앉은 지우는 주위를 둘러봤다.
“날이 더우니까 모두들 시원한데 들어오고싶어 안달인가봐요.”
창밖에 보이는 인도를 걷는 사람 수보다 카페안에 앉아있는 사람 수가 더 많아 보였다. 주문한 음료들이 나오자 지우는 무척 기다렸었는지 한숨에 쥬스를 반절이나 마셨다.
“목이 말랐나보죠?”
“아뇨. 그냥 제가 원래 성격이 좀 급해서요.”
준하는 천천히 아이스커피를 마셨다. 차가운 음료가 몸속으로 들어가자 목이 시원해지면서 정신이 맑아지는것 같았다. 그새 더위 먹었었나.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33.”
“와우.”
지우는 말도 안된다는듯 놀란 얼굴로 준하를 쳐다봤다. 생각해보니 이 여자가 놀랠만도 하다. 이 여자 나이는..
“저는 24인데.”
“알아요. 차트 봤으니까.”
지우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듯 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직도 20대처럼 젊고 탄탄한 몸을 가지고있는 그가 30대라니. 그녀는 계속해서 ‘와우’를 반복하며 스트로우를 물었다. 처음 준하를 봤을때 지우는 이 남자가 굉장히 잘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설퍼보이기도 했다. 자신감에 가득찬 의사의 얼굴은 분명했지만 어딘가 아픈 환자의 모습을 하고있었다.
“전 선생님 병원 앞에 있는 영어학원에서 강사해요.”
영어를 잘해서 발음이 좀 이상한가보다. 그제서야 이해가 간듯 준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만 영어강사라고 해서 다 한국말 발음 이런건 아닌데?”
준하는 정말로 이 여자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렸을때부터 미국에서 살았어요. 뭐, 덕분에 그래서 한국에 친구가 없지만. 아직까지는요.”
지우는 말하면서 힐끗 준하를 쳐다봤다. 그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듯 했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녀를 쳐다보고있지는 않았다. 창밖을 쳐다보던지 무릎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 남자가 아직 나한테 반하지 않았군 그래. 왠만해서는 그녀에게 반한 남자들의 행동은 저렇지 못했다. 다들 심하게 긴장하면 했는데 이 사람만은 의외였다. 아예 그녀의 눈을 마주치려고 조차 하지않았다. 전혀 관심이 없다는거야, 지금?
“제 친구해주실래요? 아, 그전에 말 놓으세요. 저보다 한참 어른이신데.”
한참 어른이라. 이 여자가 지금 내가 나이 많다고 놀리는거야 아니면 원래 말투가 저렇게 비꼬는 투인거야.
“좋아, 말은 놓지. 그런데 친구라니? 정말 친구없다는거야?”
“한국에 온지 이제 겨우 한 달됐어요. 친구가 있을 턱이없죠. 저 심심하단 말이예요.”
이제는 아주 불쌍한 표정까지 지어보고있다. 꼭 주인을 잃은 강아지가 슬퍼보이는것처럼 귀엽게 슬퍼보였다. 준하는 어이가 없어서 헛기침을 했다.
“공짜로는 아니예요.”
이제는 더 어이가 없었다.
“친구를 이런식으로 사겨? 공짜가 아니라니. 무슨 거래도 아니고.”
“일부러 싫어도 친구해주시는건데 공평해야죠.”
“그럼 내가 친구해주는 대신 나한테 뭘 해줄수 있지?”
“똑같이 친구해드릴께요.”
이 여자 아주 신기한 사람이었다. 결국 공평하다는 소리가 저 뜻이었나. 준하는 피식 웃었다. 지우는 새침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남아있는 키위쥬스를 모두 마시고 깨끗히 비워진 컵을 남겨두었다. 준하 또한 잠시 지우를 쳐다보다가 남아있는 아이스커피를 마셨다. 앞으로 다가올 재미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