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위험신호
민혁은 오후 일정들이 빼곡히 채워진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라금융 자금 지원에 관한 오찬약속,
흥진화학 연구소 사내 정기 세미나 참석,
세계 경영인들의 모임 축사 연설,
본사 임원들과의 회의.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일정 진행시간까지
수학공식처럼 정확히 분 단위로 적혀 있었다.
일정 중에 단 한 가지도 소홀히 할 수 있는 게 없군.
오찬? 자금 지원과 관련된 협상을 하는 자리니 분명 화기애애한 자리가 될 리 없음.
정기 세미나?
흥진화학 설립 이후 한 번도 빠짐없이 개최된 세미나는
일종의 전통처럼 진행되어 왔으니 불참은 허용될 수 없음.
축사 연설?
단순한 참석자의 입장이 아니므로 참석 필요.
임원들과의 회의?
한 달 결산보고를 하는 자리이므로 넘겨버릴 수 없는 회의.
민혁은 책상 위에 종이를 뿌리치듯 내려놓았다.
잠깐 생각을 하던 민혁은 수화기를 들고 단축 번호를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도 받지 않는 전화.
정확히 다섯 번 전화를 걸었지만 일정한 신호음 뒤로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
알 수 없는 섬뜩함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거칠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민혁은 거침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회장님, 한라금융 이사님과 오찬약속이…!”
“모두 취소!”
등 뒤로 들려오는 비서실 여직원의 말을 간단히 튕겨내 버리고는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의 구분!
그것만큼은 하늘이 두 쪽 나도 확실하게 구분해야 하며,
사적인 일이 공적인 일을 앞지를 수 없다는 것쯤은 민혁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공(公)사(私) 구분이 흐릿한 사람은 지독하게도 혐오했다.
하지만 자기 앞가림조차 제대로 못한다면 기업 경영도 불 보듯 뻔한 일이지!
그렇게 민혁은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며 주차장에 들어섰다.
차의 앞좌석 문을 열려다가 잠깐 흥분을 가다듬었다.
8년 전 교통사고 이후 다시는 운전대를 잡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그런 것쯤이야!
맹세 따위는 얼마든지 뒷전으로 밀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부르르릉, 하며 생각보다 부드럽게 걸리는 시동에
민혁은 안도의 한숨을 남몰래 삼켰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바로 눈앞에 데려다 놓았어야 했는데.
자꾸만 머릿속에서는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통제력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치며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민혁은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바랬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민혁이 운전하고 있는 차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차들 사이의 빈틈으로 파고들었다.
드디어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민혁은 크게 숨을 쉴 수 있었다.
과거의 기억들이 자꾸만 반복되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런 바보 같은 경우가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데!
과정은 똑같았지만 강도는 훨씬 강했다.
대문 앞에 도착한 민혁은 조심스레 벨을 눌렀다.
역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문 손잡이를 돌리자 간단히 문이 열렸다.
아무도 없다!
거실로 주방으로 욕실로 닫힌 방문까지 열어봤지만 아무데도 그녀는 없었다.
미미한 향기가 민혁의 예민한 후각으로 스며들었다.
눈동자에서 번쩍 하며 섬광이 일 듯 불안이 극에 달했다.
허겁지겁 밖으로 뛰어나간 민혁은 무작정 길을 향해 달려 나갔다.
파랗게 펼쳐진 풀밭에도,
한가로운 놀이터에도, 나무그늘 아래 쉼터에도 하연의 모습은 없었다.
햇살이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었지만 그런 것쯤이야!
문득 고개를 돌리던 민혁의 눈길에
길 끄트머리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던 하연의 모습이 잡혔다.
팽팽하게 당겨지던 실이 한꺼번에 후두둑 끊어지듯
온 몸에 빳빳하게 흐르던 긴장이 풀렸다.
민혁은 깊숙이 스며드는 안도감을 느끼며
가만히 서서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
바람이 살랑거리며 하연의 어깨 위에 가지런히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하얀 그녀의 모습이 시리게 박혔다.
그러다가 문득 예민한 청각으로 요란한 엔진 소리가 파고들었다.
위험해!
민혁은 온 몸의 빳빳한 긴장이 엄습하는 것을 느끼며 두 눈을 부릅떴다.
쌩, 하며 지나가던 오토바이의 손잡이에 하연이 들고 있던 봉지가 걸려 찢겨졌다.
휘청하며 기울어지려던 하연의 몸을 간발의 차이로 민혁이 받아냈다.
봉지 속에 들어있던 내용물들이 우르륵 쏟아져 사정없이 굴러다녔다.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하연은
아무말도 못한 채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니는 거야!”
그만 버럭 소리부터 지르고 말았다.
분명 괜찮냐고 물어봤어야 했는데.
꼴사납게 신경질을 내는 모습이라니!
자신을 향한 욕설을 나지막이 삼키며
민혁이 하연을 똑바로 일으켜 세웠을 때가 되어서야 하연은 정신을 차렸다.
“민혁씨…? 이 시간에 여긴 어떻게…?”
“줍지마!”
떨어진 물건들을 줍기 위해 길 밖으로 나가려던 하연의 팔을 붙잡고
민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왠지 그 말을 그대로 따라야 할 것만 같아서
하연은 민혁이 조용히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길 한 가운데 떨어진 물건들에 눈길이 갔지만
절대로 그 사람 얼굴에 가득 담긴 염려의 빛을 발견한 이상 주울 수가 없었다.
오는 길에 봐 둔 나무 벤치에 하연을 앉힌 뒤
민혁은 천천히 하연의 앞을 서성거렸다.
“괜찮아요, 난. 다치지도 않았는걸요. 그냥 조금 놀랐을 뿐…!”
“왜 전화를 받지 않았지?
집을 비워두면 문이라도 잠그어 놨어야 할 거 아냐!
길가에 왜 그렇게 바짝 붙어서 걸어 다니는 거야!
위험하다는 것도 모르나?”
소리 지르며 화내는 모습에도 하연의 표정은 잔잔하기만 했다.
이미 왜 이토록 화를 내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냥 잠깐 나간 것 뿐 이에요.
집에 없으니까…전화 받을 수 없는 건 당연하잖아요.
그리고 다음부터는 안쪽으로 걸어 다닐게요. 약속해요.”
약속한다는 하연의 말에 민혁은 사정없이 무너져 내렸다.
무릎을 꿇고 자기 앞에 털썩 주저앉은 그의 모습에 하연은 당황했다.
가지런히 모은 두 무릎에 이마를 대고 있는 민혁의 모습은
애틋함을 넘어서 숭고하기까지 했다.
조그만 그녀의 무릎을 느끼며 민혁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당신이라는 여자 때문에 당연한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 하게 되 버렸어.
하루에도 수십 번씩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해.
쓸데없는 걱정이겠지.
괜히 과민하게 반응하는 거겠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어!
오직 당신을 지켜줘야겠다는 생각 밖에 하지 않아.
헬멧 너머로 곱지 않은 시선을 번득이던 남자의 시선을
당신은 전혀 느끼지 못했겠지.
하지만 난 느껴!
순간순간 온 몸을 옥죄는 두려움을 느껴.
그저 조금 위험한 정도로 넘겨버릴 수 없는 일들을
당신이란 여자는 너무나 간단히 넘겨버려.
그래서 늘 걱정이 돼.
“민혁씨…사람들이 봐요…. 어서 일어나요. 여기, 내 옆에 앉으면 되니까.”
늘 재보고 따져보고 탐색하고
무슨 일이든 이유부터 찾아내려 하고
조건을 달고 있는 자신과
전혀 다른 여자.
어쩌다 우연히 일어난 위험일 뿐이고
모든 것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조차 인연이라는 단어로 쉽게 믿어버리는 여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다는 위험한 경고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만 할까.
심장이 멎어버릴 듯한 상황이 무사히 지나갔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데.
민혁은 무거운 한숨을 허공으로 흩어버리며 하연 곁에 앉았다.
“회사에…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내 걱정 말고 당신이나 걱정해. 도대체 뭐가 그렇게 급히 필요했던 거야?”
“야채죽을 끓이려구요.”
앉아있던 민혁이 휙, 하고 바람을 일으키며 일어섰다.
민혁의 손에 가느다란 하연의 손목이 잡혀 있었다.
밝은 햇살을 등지고 선 민혁을 잠깐 올려다보던 하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를 세워둔 곳까지 걸어오는 동안 두 사람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민혁의 한쪽 팔에 기댄 채 발을 맞춰 걸어가던 하연은
눈길을 돌려 강인한 그의 턱선을 바라보았다.
어렴풋이 그가 느꼈던 긴장감이 묻어났다.
언제 내가 이토록 그에게 간절한 존재가 되어 있는 걸까.
하연은 걸음을 멈추고 아무렇게나 풀어 헤쳐진 그의 넥타이를 고쳐 매 주었다.
“그렇게…불안했던 거예요?”
“…그냥 모른 척 해. 마음으로만 알고 있어.”
하연의 마음속으로부터 찰랑거리는 소리가 우러나왔다.
굳이 말로 이르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는 것만큼 소중한 사실이 또 있을까.
운전석에 아무도 앉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하연의 눈이
놀란 고양이처럼 커졌다.
그런 하연의 물음 가득한 눈빛을 읽기라도 한 듯 민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 오르기를 재촉했다.
아무리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자신을 뒤로 감춰도
하연만큼은 숨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분명 망설였을 테지.
악몽 같은 기억들을 억누른 채 다시 운전대를 잡은 거구나.
날 위해서. 혹시라도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봐.
그런데도 이 남자는 도무지 힘든 내색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미 다 알고 있는데.
하연은 조심스레 터져 나오는 감격을 눌렀다.
“힘들면…그냥 잠깐 쉬어도 돼요. 내 곁에서…!”
민혁은 운전석에 오르자마자 하연의 입술을 탐했다.
따스한 체온과 촉촉한 마음을 온 몸으로 확인하기라도 하듯 민혁의 입술은 간절했다.
두려워했잖아!
또 다시 놓쳐 버릴까봐 겁냈었던 거야!
민혁의 자아가 귓가에 속삭였다.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너무나 똑같이 되풀이되는 느낌 때문에 겁이 났었다.
이제는 이 여자가 아니면 견뎌낼 자신이 없다!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 버린 여자의 입술은
결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늘 촉촉하게 적셔 주었다.
잠깐 동안 민혁에게 입술을 정복당한 채 망설이던 하연은
열정적으로 그의 입맞춤을 되돌리기 시작했다.
결코 노련하거나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진심이 오롯이 담긴 그녀의 선물은 충분했다.
아니, 과분했다!
무사한 것을 축복하는 의식이 끝난 뒤
민혁은 목에 감긴 하연의 팔을 소중히 떼어냈다.
가지런히 두 손을 모아준 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시는 날 시험하지 마. 더구나 이런 장소에서는 곤란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차 내부를 휘, 하고 둘러보는 민혁의 모습을 본 하연은
재빨리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민혁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마치
나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옵고…라며 읖조리는 것 같아서
하연은 발개진 볼을 하고서 소리 없는 웃음을 삼켰다.
☆★☆
야채죽과 장조림, 장아찌,
동치미 국물이 포장되어 들어있는 작은 쇼핑백을 손에 들고서 걸어가던 민혁의 표정이
잔뜩 심각해졌다.
하연은 갑자기 멈춰선 민혁에게 바짝 붙어서며
걱정이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민혁의 고갯짓을 따라간 시선에서
문 앞에 웅크리고 있던 어떤 사람을 발견했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병원 복도가 안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양반다리를 하고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을 발견한 하연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아예 민혁은 팔짱을 낀 채 연구대상이라도 되는 듯
손가락으로 눈썹을 슬며시 문질렀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하연을 향해 민혁이 연구 결과를 알려 주었다.
“아직도 누군지 모르겠어? 김윤경 실장! 흥미롭군.”
맙소사!
입을 딱 벌린 채 정신없이 달려간 하연은
졸고 있는 윤경의 어깨를 마구 흔들어댔다.
한참 만에 부스스 깨어난 윤경의 눈은 새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세상에나.
“오호, 이제야 나타나셨군. 의문의 여자, 진하연!”
천천히 하연의 곁에 다가선 민혁의 귓가에 그녀의 비아냥대는 말투가 걸렸다.
모자 그늘 아래로 천천히 훑어 올라가던 윤경은
민혁과 눈빛이 마주치자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최대한 비싸 보이는 양복 쪽으로 먼지가 많이 갈 수 있도록!
하연은 어색한 미소를 띤 채 윤경이 마음대로 행동하게 내버려 두고 있었다.
민혁도 이번 한 번만 눈감아 주기로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뿐이야!
“언니…왔구나. 피곤하면 들어가서 눈 좀 붙이지 그랬어.
병실에 간병인 침대 있는데.”
“하연아, 도무지 널 보면 화를 낼 수가 없으니 어쩌면 좋으냐!
오기 전에는 모진 소리 좀 잔뜩 쏟아 부어 줘야지 결심했는데!”
음, 그래도 맞는 말은 하는군.
쓸데없는 말만 지껄이는 부류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윤경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 민혁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조금 더 관찰해 보는 것도 꽤나 흥미로울 것 같군.
갑자기 윤경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민혁을 향해 걸걸한 목소리를 날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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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것 보다 때때로 편집하고 다듬는 시간이 훨씬 오래걸리는 듯 합니다. ^^
한 주 시작은 잘 하셨나요? 혹, 무더위에 지치시지는 않았는지...
전 개강했답니다.
아마 학교생활에 적응하려면 또다시 한 주 정도 고생하겠죠?
저에게 쪽지 보내실때, 쑥쓰러워 하시는 님들 간혹 계신데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쪽지 보면서 힘얻고 그러는걸요.
그럼 미강이는 이만 물러갑니다. 또다시 시작될 하루! 홧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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