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스민차에요. 그냥 내가 마시고 싶어서 2잔 끓였어요."
해빈의 의사를 묻지도 않은 채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차를 끓여주고서 해빈의 옆 쇼파에 앉았다.
쟈스민차를 싫어하진 않는 건지 해빈은 홀짝거리며 마시기 시작했고, 유미는 그런 그를 쳐다봤다. 자신의 집에 멋대로 들어온 이 남자는 마음대로 리모컨을 누르며 텔레비전에 열중하고 있는 듯 했다. 그렇지만 한 가지를 꾸준히 보지는 않고 계속 돌리기만 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텔레비전을 보긴 하는 거에요?”
해빈이 하는 게 답답했던 유미는 보다 못해 그의 손에 들린 리모콘을 뺏어 들고 그에게 짜증을 냈다. 그렇지만 해빈은 리모콘을 가져가든지 말든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한참을 생각에 빠져있더니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결정했어요! 나가요, 유미씨!”
“..네?”
해빈은 벌떡 일어나더니 그대로 유미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유미가 미처 머라고 할 새도 없이 텔레비전만 끄고 유미가 신발장위에 놓아둔 열쇠를 마음대로 들고는 현관문을 잠궈 버렸다.
“뭐에요? 지금 어디 가는 거에요?”
“놀러요.”
“네?”
해빈은 혼자 신이 나서 얼굴에 웃음이 가득이었지만, 끌려나온 유미의 얼굴에는 황당함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갑자기 끌려나오는 바람에 유미는 지갑이나 핸드폰 모두 다 없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집 열쇠가 해빈한테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뭐라고 화를 내려는 생각에 그를 쳐다보았지만 너무나 해맑게 웃고 있는 해빈의 모습에 화를 낼 수조차 없어서 신세진 걸 갚는 다는 생각으로 한숨을 내쉬며 가만 있을 뿐이었다.
어딜 가는지도 모르는 채 해빈에게 끌려 그의 차에 타고 가길 20분쯤. 도착한 곳은 유미의 집에서는 좀 멀리 떨어진 곳의 대형 할인 마트였다.
“도대체 여긴...”
‘왜 온거에요?’ 하는 말도 채 다 하지 못한 채, 잔뜩 신이 난 해빈이 이끄는 대로 마트에 들어갔다. 해빈은 들어가자마자 쇼핑카트를 끌고 왔고, 유미는 그를 따라서 뒤를 쫒아다녔다. 10시가 넘은 늦은 시간인데도 사람이 많아서 이리 저리 부딪히는 유미를 보자 해빈은 유미를 자기 옆으로 끌어당겼다.
“왜 이렇게 사람을 못 피하고 부딪히고 다녀요. 넘어질까 걱정되네 진짜. 내 옆에 붙어서 다녀요. 그래야 넘어지나 안 넘어지나 볼꺼 아냐.”
분명히 대사만 보면 걱정하는 내용인데 그 말투 어딘가가 자신을 어린애취급 하는 것 같은 느낌에 유미는 이마를 구기고 그를 쳐다봤다. 게다가 생각해보니 은근슬쩍 해빈은 자신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물론.. 그가 나보다 나이가 많은 건 알겠지만..
“도대체 여긴 왜 온거에요?”
왜 은근슬쩍 말 놔요? 라고 할려다가 그냥 나이가 많으니까... 하고 넘기기로 하고서 아까 미처 묻지 못한 것을 물었다. 다짜고짜 마트로 끌고 온 이유..
"유미씨는 마트에 뭐 하러 오는데? 당연히 놀러 왔지.“
“....네?”
“그럼 온 김에 뭐 먹을거나 사가져 갈까?”
“......”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놀러왔다며 대답하는 해빈을 빤히 쳐다보는 유미에게 해빈은 쓱 고기 한점을 건넸다. 먹으란 듯 입가에 갖다 주는 걸 자신도 모르게 받아먹고 보니, 왠지 모르게 창피하기 그지없어 얼굴이 붉어져 버렸다. 해빈은 신경도 안 쓰는지 시식코너를 기웃거리며 계속 이것 저것 집어먹는 데 열중했고, 유미가 안먹는다는 데도 입가에 가져다 대서 억지로 하나씩 집어 먹였다.
“자고로 이런 큰 마트는 시식하는 재미로 오는 거지. 안 그래 유미씨?”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해빈이었고 시식코너에서 집어 먹는 사람이 한둘도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유미는 텅텅 빈 쇼핑카트를 끌고 계속 시식만 하는 게 자의든 아니든 민망하기만 했다. 그래서 해빈이 먹여준 것 중 맛있었던 것 몇 개를 골라서 카트에 집어 넣었다.
“어? 유미씨. 집에서 해 먹으려구? 그럼 저것도 하자.”
유미가 뭔가 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해빈은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며 이것 저것 잔뜩 카트안에 집어넣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카트는 꽉 차버리고 말았다.
“이걸 다 사려구요?”
이대로라면 마트에 있는 물건 종류별로 하나씩 다 사댈 것만 같은 해빈의 행동에 유미는 그가 담을 때마다 하나씩 빼서 제자리에 돌려 놓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해빈은 유미가 뭐라 하든지 말든지 한참을 카트에 집어넣으면서 30분을 넘게 휘젓고 다니더니 드디어 계산대앞에 서서 말했다.
“자, 이제 계산해요.”
“...네?”
온갖 것들로 가득 찬 카트를 유미 앞으로 밀면서 말하는 해빈의 행동에 유미는 당황해서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이걸 계산하라니.. 이 남자가 지금 제정신일까?
“...저 지갑 없는데요.”
자기 행동을 돌아보라는 의미로 어이없어함이 확연히 드러나는 표정과 함께 목소리를 깔고 말을 했지만 오히려 해빈은 한심하다는 듯 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것도 안 갖고 다녀요? 준비성도 없어..”
“...해빈씨가 무턱대고 절 끌고 왔잖아요.”
“그래도 지갑 정도는 챙겨야 하는 거 아닌가? 어쩔 수 없네. 내가 사줄게.”
유미는 해빈의 뻔뻔함에 입을 벌리고 그의 행동을 쳐다보았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사준다는 식의 거만한 태도로 계산을 하고, 자율 포장대에서 박스 포장까지 알아서 하는 그를 보니 정말로 ‘사주는’식의 태도인지에는 의문이 갔지만, 너무나 신나하며 벌써 2박스째 포장하려고 하는 그를 보니 그냥 웃음밖에 안나왔다.
상자를 테잎으로 붙이는 단순 작업을 낑낑대며 하고 있는 그의 가위질에 유미는 자신도 모르게 웃으면서 다가갔다.
“내가 할게요. 이런 것도 못해요?”
“......”
피식 웃으며 그의 손에 들린 가위를 가지고 상자를 붙인 다음 포장하고 있는 자신을 해빈이 넋을 잃고 바라보는지는 알지도 못한 채 유미는 그렇게 웃으면서 아직도 가득 남아있는 물건들을 포장했다.
* * *
정규 퇴근 시간은 6시이지만, 상운의 퇴근이 정시에 이루어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겨도 자신이 그 과정을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마음을 놓지 못하는 성격때문에 상운은 언제나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스스로 하곤 했었다.
오늘은 점심을 먹고 들어오다가 운송팀이 실수해서 고객의 물건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한 걸 보게 되어서 자신이 직접 관여하지 않아도 될 일인데도 그 일을 처리하느라 시간을 잡아먹었다. 사장의 위치에서 일일이 관여하면 아래 사람들이 불편해 한다며 김비서가 불평을 했지만, 때로는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윤비서의 말에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늦어진 일을 마무리하려 했지만, 갑작스런 유재욱 사장의 전화에 상운은 하던 일을 미루고 그와의 약속장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 저녁 9시.
갑자기 약속을 잡기에 적합한 시간은 아니지만, 이런식으로 만나자고 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상운은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은 마음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유재욱사장이 약속을 잡은 곳은 청담동에 위치한 일식집.
평소에도 유사장이 애용하는 곳으로서, 상운도 여러번 왔었던 곳이었다.
먼저 와있었던 건지, 유사장은 혼자서 술을 몇 잔 마신 듯 얼굴이 벌개져 있었다. 그런 모습에 상운은 그를 상대하는 것이 영 내키지 않게 여겨졌지만, 그의 주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먼저 오셨습니까."
"오.. 한사장 왔군 그래. 어서 앉으라구."
"벌써 한잔 드신 겁니까."
"하하하. 오늘 기분이 좋아서 한잔 하고 싶은데.. 갑자기 한사장 생각이 나더라구. 불편한가?"
"아닙니다. 오히려 절 생각해주셨다니 감사하죠."
무슨 속셈으로 자신을 부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사장의 앞에 앉아 그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같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얘기, 저 얘기.. 그다지 일과 관계없는 얘기만을 하는 것을 보면 그냥 단순한 사석인걸까 싶다가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해보면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어서 웃고는 있지만 속으로는 바늘방석 같을 뿐이었다.
"한사장은 나랑 이런 식의 술자리가 불편하지?"
그런 상운의 마음이 은연중에 얼굴로 들어나기라도 한 건지 유사장의 말에 내심 당황했지만 언제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상운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닙니다. 불편하지는 않습니다만, 익숙하지 않을 뿐입니다."
상운이 따른 술을 입에 대며 유사장은 알게 모르게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능구렁이 같은 놈..' 속으로 상운이 한창 머리를 굴리며 능숙하게 상황을 모면해나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무언가 꼬투리를 잡고 싶지만, 한편으로 그의 행동이 자신과 너무 닮았기 때문에 더욱 더 상운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었다.
알면서도 쉬쉬하는 상운의 과거는 유사장과는 달랐지만 어떻게 보면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대단한 척 하고 있는 자신 역시 아직까지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서 그 늪에 발을 담그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결국, 일종의 동족혐오라고 할 수 있겠지.'
"....요즘 BOK는 일이 잘 된다고 들었네. 하긴.. 한사장의 성격을 봐도 당연히 일을 잘 하겠지 싶지만.."
"과찬이십니다."
"자네는 그 자리를 지키는 게 좋아. 가장 돈이 되고,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거든. 괜히 나처럼 이것 저것 벌리지 말고 한 가지를 확실히 하라구. 잘못 건드리다가는 지금 그 자리도 뺏기는 수가 있으니까."
"...어차피 먹고 먹히는 자리 아닙니까. 제 자리 뿐만 아니라 모든 자리가 다 그렇지요."
“하하하! 그렇지.. 내 자리나 한사장 자리 모두 다 언젠가는 먹고 먹히겠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정말 순수하게 같은 분야에서 사업을 했었던 인생 선배의 말 정도로 밖에 안 들렸을 말이지만 그 말이 유사장의 입에서, 그것도 상운에게 하는 것이라면 단순한 뜻이 아님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언제든지 지금의 상운 자신의 자리쯤 뺏어 올 수 있으니 지금 이 상태에서 더 이상 설치지 말라는..
상운은 그럼 그렇지 하는 마음으로 웃으면서 대꾸했다. 유사장의 자리 역시 언젠가 누군가에게 채일지 모르니 그쪽이야 말로 조심하라는 말.
유사장 역시 상운의 그런 속 뜻을 모를 리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사장은 호탕하게 웃었지만 속에서는 무언가 끓어오르는 듯 했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놈.
도대체가 속을 알 수 없는 능구렁이 같은 놈.
“그나저나... 저번의 계약은 아주 괜찮았어. 그런 식의 계약이라면.. 다시 한번 더 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더군.”
술을 그대로 한잔 들이켜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으며 유사장이 말했다. 씨익 웃으며 하는 그 말에 상운은 욕지거리가 치밀어 올랐다.
더러운 놈. 추잡한 놈.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저딴 식으로 더럽게 여자를 탐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돈이 많고, 대단한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시작은 자기가 했다 치더라도 그의 계약은 너무 더러웠다. 유사장과 계약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공적인 서류와 함께 사적인 여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유미를 데려온 것이지만....
유사장의 얼굴 뒤로 아마도 집에서 쉬고 있을 유미가 생각나자 상운은 화가 났다. 절대로 더럽게 일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변명 하에 몇 번이나 유미를 이용했었고, 그 대부분이 유사장을 상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작 저런 놈을 상대하기 위해 자신에게 이용당한 유미가 안타까워 가슴 한 구석이 타는 듯 아파왔다. 그게 어떤 의미이든 간에 유미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은 상운에게 있어서 사실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절대로 사적인 거래를 두지 않겠다던 자신의 방식에 위배되는 여자. 자신의 방식이 틀어져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절대 내키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 여자.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세상에 알려진다면 자신을 추락시킬 수도 있는 여자.
어느새 자신의 치부를 안고 있게 만들어 버린 유미의 존재는 상운에게 하나의 ‘화’였다. 게다가 하필이면 존경하던 사람의 딸이었으니...
유미를 그렇게 만든 건 자신이면서도 유사장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상운은 웃음이 나왔다. 자신 역시 유사장 만큼이나 더러운 놈이라는 걸 부정하는 것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계약은 한번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겠지요.”
상운의 얼굴 위로 스쳐지나간 수많은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유사장은 굉장히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상운의 눈에는 유사장이 자신의 본능에 충실했던 그날 밤에 대한 회상을 하리라 여겨질 뿐었다. 그렇지만 그 미소 뒤에 유사장의 계획이 마무리되었음은 아무리 대단한 상운으로서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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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너무 피곤하네요..
주말이 가기전에 올려야겠다는 생각만으로,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이 마무리 되면...
예전부터 썼었던 다른 글들을 다시 관리-_ -; 할 계획이라서...
열심히, 정말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이제, 중반으로 치닫는 군요..이 글도..
슬슬 상운의 과거도 밝혀져야 할텐데요..
자신의 마음을 다쳐가면서도 일에 몸사리지 않는 상운! 이 저의 컨셉이었는데..
그렇게 보이나요? 아직은 그렇게 보이지는 않을 듯 하지만..=ㅅ =;
어쨌든, 주말엔 비가 온다고 하네요.. 혹시 모르니까 우산 꼭 챙기시고요..
그럼 담에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