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왠일인지 하루종일 환자가 끊임없이 병원을 채웠다. 조금 숨을 돌릴것 같다 하면 이간호사와 함께 새로운 환자가 속속히 들어왔다. 왠지 준하의 머리에는 두개의 뇌가 있는것 같았다. 환자를 진료할때 쓰는 뇌와 그리고 지우에 관해 생각하는 뇌. 전혀 오진을 일으키지도 않았고 평소처럼 완벽한 진료를 소화해내었지만 청진기를 들고 있는 내내 그의 생각은 지우에게로 뻗어져있었다.
그녀가 듣고 싶은 말이란 무엇일까. 내가 하고싶은 말이란 무엇일까. 내가 하고싶은 말이라면 분명…. 우선 뒤죽박죽 섞여있는 정신없는 마음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우선 지우는 좋은 여자이다. 어딘지 모르게 약간 여우같은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그저 눈치가 빠르던지 머리가 좋다고 넘기면 될 일 이었다. 또 지우는 서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여자이다. 서현으로부터 느껴왔던 떨림과 안타까움보다 지우와 있으면 편안함과 안정감이 그를 덮어온다. 분명 그녀를 내것으로 하고싶다. 다른 남자의 품안에 안겨있는 모습을 보았을때는 정말인지 피가 거꾸로 솟는것같았다. 이제껏 서현에게는 쉽게 사랑한다고 해왔으면서 왜 이번에는 할수 없는건지.
“젠장.”
지우는 따뜻한 음성으로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아마 그녀는 그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하고싶은 말도 ?결국 내 스스로는 깨닫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사랑한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시계를 쳐다봤을때는 어느덧 4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공항은 복잡했다. 사람들을 보아하니 유학생들도 더러 보였다. 홀로 여행을 떠나는 아들이 못내 안쓰러워 어머니는 자식을 계속해서 부둥켜 안았다. 다른 한쪽에서는 어린 남매와 그들의 어머니가 많은 짐을 들고서 티케팅을 하기위해 줄로 들어서고 있었다. 비가 올것 처럼 구름이 끼고 흐린 날씨였다. 비행기가 뜰수 없을만큼 태풍이 부는 건 아니겠지. 지우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다급하게 손목을 두른 시계를 찾았다. 6시 비행기이기 때문에 이제는 들어가야 할 시간이었지만 그 어느곳에서도 준하는 보이지 않았다. 알고보니 그녀가 자랑하는 대단한 그 “눈치”는 아무것도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 그가 올것이라 믿었는데 정작 보이지 않는것 보면 계산을 잘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여권과 티켓을 쥐고있는 손바닥에서는 평소에는 잘 보이지도 않던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입국심사를 하기위해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서있는 줄에 설까 말까 고민을 하고있는데 멀리서 자동문이 열리고 뛰어 들어오는 준하가 보였다. 그는 주위를 급하게 둘러보고있었다. 지우는 곧바로 고개를 돌리고 줄을 섰다. 입가에는 미소가 저절로 번졌지만 표정관리를 하기위해 이로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지우야! 강지우!”
공항사 직원에게 여권을 내밀었을때 준하의 다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숨이 헐떡거리고 이마에는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예요? 오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반갑지 않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지만 준하의 표정은 전혀 어두워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굉장히 밝았다.
“할말이 있어. 이 말하지않으면 당신이 말한거처럼 나 끙끙 앓을지도 몰라.”
결국 지우는 서있던 줄에서 나와 준하의 앞에 섰다.
“뭔데요?”
“아버님께 신랑감 구했으니까 안가겠다고 당장 연락드려.”
속으로는 쾌재를 부를지언정 지우는 코웃음을 쳤다.
“신랑감이라뇨?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저랑 결혼할 사람이 있었나요? 나 사랑한다는 사람도 없던데.”
“다 알고 있었지?”
“뭘요.”
새침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지우의 뺨으로 손을 가져가 쓰다듬었다.
“내가 올거라는거.”
매력적인 미소를 짓기만 할뿐 지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않았다. 조금씩 숨이 안정되고 있었고 준하는 그녀를 더욱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를 꼭 감싸 안았다.
“안갈거지, 이젠?”
“안가긴 왜 안가요. 어머, 시간 좀 봐. 나 가야되요. 이러다간 비행기 놓치고 할아버지한테 죽어요. 나 머리깎여도 좋아요?”
시계를 확인한 지우는 그의 품안에서 빠져나오려 몸부림을 쳤지만 그럴수록 준하는 팔에 더 힘을 줬다.
“가지마.”
그녀를 품안에 안았다. 향기로운 샴푸냄새가 흘러나오는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드디어 사람이 된거같아. 드디어 사람이 하는 사랑하는 거 같단 말야. 이제서야 날 사랑한다는 사람 찾았는데…. 못가. 가지마. 사랑해. 사랑해, 강지우.”
준하의 목에 두팔을 두르고 발꿈치를 조금 들어올렸다. 그녀는 입술로 그의 두 뺨을 문질렀다. 그의 머리카락 깊숙히 손을 넣어 그를 더 끌어당겼다.
잠시 고개를 옆으로 돌려 유리로 이루어진 공항 벽을 쳐다봤을때 밖에는 어느덧 비가 내리고 있었다. 보슬비 답게 땅에 부딪히는 소리마저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에필로그]
어디선가 알람시계소리가 귀청떨어지게 들려왔다. 벌써 아침인건가. 아직 떠지지 않은 눈커풀 뒤로 조금씩 정신이 돌아온 준하는 잠에서 깼다. 시계를 끄고서 몸을 조금 뒤척여봤다.
“음.”
그의 훤히 들어난 가슴에 팔을 두르고 얼굴을 기댄채 잠이 들어있는 지우가 보였다.
“지우야.”
그녀의 이마에 살짝 키스를 하고서 이름을 나지막히 불렀다.
“지우야, 일어나야돼.”
“싫어. 일요일이잖아요.”
“맞다.”
갑자기 자신의 잠을 확 깨버린 시계한테 욕을 퍼부워볼까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전날밤에 시계를 on으로 해놓았는지 모르겠다. 역시 습관이란 무서운 건가보다. 그는 반쯤 일어났던 몸을 다시 침대로 눕혔다. 손가락으로 지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잠시 천정을 쳐다봤다.
“오늘 다들 모이겠죠?”
지우도 잠이 다 깨버렸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응. 서현이랑 태빈씨. 진아씨랑 재석씨. 다 모일거야.”
그녀는 손으로 눈주위를 비볐다.
“선후오빠가 이렇게 인기많아질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니까 오늘 콘서트 가서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두 눈으로 확인하자고. 전혀 못믿겠으니까.”
별로 반가운 일이 아니라는 듯 준하는 혀를 찼다.
“우리 결혼식때 선후오빠보고 연주 해달라고 해요.”
“싫어. 그 사람한테는 청첩장도 안보낼거야.”
“준하씨!”
“나 여기있어. 그렇게 소리 안질러도 돼.”
지우는 엉크러져있는 이불을 넘어 준하의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나 사랑한다면..정말로 그렇다면..나 평생 놓치지 않을거죠?”
“눈치 빠른줄 알았더니 전혀 아니었잖아! 당연하지. 당신 아무데도 못가."
그녀는 그의 강한 허리에 두팔을 감고 가슴에 뺨을 댔다. 일정한 속도로 뛰고있는 심장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와 똑같은 박자로 그녀의 몸속에 있는 따뜻함도 함께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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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
쓰면서, 지우는 제 헤로인이 되버렸어요.
제가 좋아하는 여성상으로 그리려고 (강하고, 밝고, 능력있고) 많이 노력했는데, 과연 잘 되었는지..
다음에 새로운 소설로 찾아 뵐때까지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