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아아~!"
터져나오는 기합소리와 함께 살라도르가 힘껏 자신의 검을 내리쳤다.
성벽을 기어오르던 나찰 하나가 진흙덩이처럼 으깨어지며 떨어져나갔다.
"이 끔찍한 괴물 놈들 같으니라구. 끝도 없이 밀려오는구만..."
힘겨운 듯 숨을 몰아쉬며 살라도르가 파크를 돌아보았다. 파크가 씽긋 웃어보이며 대답한다.
"싸부~ 힘내시라구요. 천사님들이 우리를 보살피고 계시잖아요. 화이팅~!"
달라니안의 마물들과의 공방전은 수십일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달라니안 지역의 계간 지점 공략을 맡은 혼돈계 제 5 대장군인 다문천왕은 뜻밖의 인간들의 강력한 저항에 애를 먹고 있었다. 게다가 얼마 전 천사들 몇이 인간들에게 합세한 후로는 성의 함락이 더욱 요원해졌다.
'"쾅~!'
커다란 장창이 바위를 조각조각내었다.
다문천왕이 그 우락부락한 눈망울을 이리 저리 굴려대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지국천왕이 자신의 품에 든 비파줄을 튕기며 말한다.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형님. 천사 몇 놈이 합세했다고는 하나 어차피 인간들의 성인지라 며칠 안에 곧 우리 수중으로 떨어지게 될 거외다."
"증장과 광목은 뭐하고 있는가?"
"크크~!! 둘은 지금 신나게 성벽을 두드려 대고 있습니다."
지국천왕이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는 곳을 보자 과연 증장천왕과 광목천왕이 엄청난 힘으로 달라니안의 성벽 아래서 흙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 우락부락한 거대한 놈들이 대장격인 것 같은데 이 녀석들은 우리 손으로 정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구나... 쳇~!"
살라도르가 파크를 향해 한 마디 던졌지만 파크는 성벽 아래 공방전을 관찰하느라 정신이 없다.
베르베르와 루씨를 제외한 십이천사대는 천공으로 가기 위해 달라니안으로 서둘러 왔지만 안타깝게도 달라니안의 카르마도 이미 마물들에 의해 모두 소멸된 상태였다.
게다가 혼돈계 제 5대장군 다문천왕을 포함한 사대천왕의 공격으로 루씨의 바로 윗서열인 야고보가 심한 부상을 입어 어쩔 수 없이 이곳 달라니안 성으로 피신한 후로 인간들과 힘을 합쳐 이렇게 마물들에게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
"우오옷 정말 대단해요~!"
파크가 소리치는 곳을 바라보자 살라도르의 눈에 한 무리의 천사와 수천의 나찰들과 두 마리의 집채만한 마왕들의 격돌이 들어왔다.
증장천왕의 거대한 칼이 굉음을 내며 허공을 가르자 천사들이 공중에서 흩어졌다가 다시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곧이어 다른 한쪽에서 광목천왕이 그의 오른손을 뻗어내자 쥐고 있던 길다란 이무기가 튀어나와 성벽 중간 쯤에 날카로운 이빨을 박아넣었다.
광목천왕은 이무기의 몸체를 밧줄처럼 잡고는 순식간에 성벽을 기어올라갔다. 감히 거인의 몸놀림이라 상상할 수 없었다.
광목천왕은 성벽 중턱에 대롱대롱 매달린채로 왼손에 들고 있던 옥구슬모양의 커다란 철지주를 힘차게 던져올렸다.
"조심해~! 파크"
철지주는 광목천왕의 머리위를 맴돌던 천사들을 힘차게 지나 성벽을 거슬러 올라가 달라니안의 병사들과 파크를 덮치는데 그 크기가 왠만한 황소만하다.
살라도르가 몸을 던져 가까스로 파크를 구해냈으나 나머지 병사들은 무너진 벽돌들과 함께 성벽 아래로 추락했다.
성벽을 기어오르던 몇몇 나찰의 무리들도 덩달아 추락한다.
눈깜짝할 새도 없이 사대천왕이 이끄는 마물들의 무리가 산더미처럼 달려들어 추락한 병사들의 시체를 먹어치웠다.
광목천왕은 이무기를 이용하여 성벽위를 마치 거미처럼 이동하며 떨어지는 철지주를 정확히 받아내는데 그 움직임이 정말 신출귀몰하다.
베르베르의 바로 다음 서열인 천사대의 안드레아는 경악했다.
이런 종류의 마물들은 그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던 녀석들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대천왕과 그들이 이끄는 무리들은 천공계에는 아직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요괴계의 신흥세력이었지만 그들의 엄청난 전투력을 높이 평가받아 당당히 혼돈계 다섯 개 군단 중 하나로 책봉된 것이기 때문이다.
"저 녀석을 먼저 처리해야겠다."
안드레아가 쏜살같이 성벽위로 기어올라가는 광목천왕을 가리키자 천사대원들이 공중에서 집결하여 그를 에워쌌다.
"형님 도와드릴까요?"
끝이 두갈래로 갈라진 커다란 칼을 휘두르며 성벽 아래서 증장천왕이 소리치자 까마득히 위에 매달려있던 광목천왕이 대답한다.
"됐네 아우~! 나 혼자서도 충분하네. 크하하하~!!!"
말을 마친 광목천왕이 어느샌가 다시 이무기를 뻗어 성벽을 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공중에는 흐릿한 형체에 발그레한 빛을 내는 잡귀들이 셀수 없이 날아다니고 까마득히 높은 달라니안의 성벽에는 벌레떼처럼 새까맣게 나찰들이 달라붙어있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라면 기껏해야 그의 머리윗쪽이었다.
천사대는 잡귀와 나찰들을 베어내며 광목천왕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그는 한번 자리를 옮길 때마다 철지주를 던져올려 천사들의 접근을 철저히 막고 있었다.
"이거 난공불락인데요. 어떻게 해야할까요? 안드레아님"
마태오가 물었지만 안드레아는 묵묵부답이다. 어찌해야 할 지 그 자신도 알수가 없었던 터이다. 하지만 계속 이런식으로 놔둔다면 광목천왕과 나찰의 무리들이 성안으로 침입할 것이고 만약 그가 성안의 마법사들에게 해를 가해 결계가 무너진다면 순식간에 공중의 잡귀들까지 들어닥친 후 곧이어 성은 함락될 것이다.
그랬다. 마물들은 크게 그 형체를 가진 것과 형체를 가지지 못한 것으로 나눌 수 있었는데 형체를 가지지 못한 귀혼들은 비록 그 존재에 상응하는 물리적인 힘은 가지지 못하나 인간들에게 들러붙어 정신을 흐리게 하고 의지를 꺽는다.
성 안의 마법사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성 주위의 결계는 형체가 뚜렷치 않은 이 귀혼들을 막아주고 있었으며 가장 중요한 수비책 중 하나였던 것이다.
안드레아와 천사대가 다시 한번 광목천왕에게 접근하자 천왕을 따라 성벽위를 기어오르던 나찰들이 이를 보고 달려들었다.
백색의 검광들이 번쩍번쩍하며 나찰들의 목이 떨어지는 가운데 안드레아는 겨우 광목천왕의 머리 위로 수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그의 검이 광목천왕의 정수리를 노리고 꽂히는데 갑자기 그가 고개를 들어 짙은 눈썹의 커다랗고 부리부리한 눈으로 안드레아를 노려본다.
섬찟한 마음에 검세가 저절로 움츠려드는데 철지주가 주위의 귀혼들을 박살내며 안드레아를 향해 치솟아올라왔다.
공중에서 불꽃놀이 하듯 귀혼들의 파편이 흩어지는데 안드레아는 겨우 옆으로 비켜나 이를 피하는 듯 싶었다.
하지만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검은 그림자에 몸을 빙글 돌리자 하늘 높이 올라갔던 철지주가 다시 덮쳐오고 있었다.
기겁을 한 안드레아가 몸을 피하려 하지만 날개를 바로잡아 방향을 바꿀 새도 없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가? 천공계 최고의 십이천사대의 대원이다.
머리위로 황소만한 철지주가 덮쳐오자 안드레아는 반사적으로 날개를 힘차게 한번 도리질 한 후 쏜살같이 하강하기 시작했다.
공중에 흩어졌던 귀혼들의 파편이 뺨을 때리며 으스러져 공기중으로 퍼져나간다.
철지주와 함께 하강하는 안드레아의 밑에는 광목천왕이 손가락마다 힘을 불끈 쥐고 오른손으로 철지주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광목천왕의 손과 철지주의 합공에 안드레아는 가루가 되고 말 것이다.
"으라라랏~!"
이때였다. 마태오가 기합을 넣으며 그의 검으로 철지주의 옆면을 쳐내며 지나갔다. 비록 엄청난 위력으로 하강하는 철지주의 움직임을 봉쇄할 순 없었지만 하강 방향을 약간이나마 바꿀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심정이었다.
철지주는 온통 강철로 만들어진 커다란 쇠구슬이라서 그 기세가 어마어마했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의 의중을 파악했는지 나머지 천사들도 날개를 푸득이며 차례로 철지주를 쳐내며 허공을 날아 지나갔다.
"이런 젠장~!"
'챙챙!!" 거리며 몇 십 번의 검음이 철지주를 훑고 지나가자 광목천왕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성벽위에 이빨을 박고 있던 이무기를 떼어냈다.
철지주는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떨어지고 추락하던 안드레아는 검을 곳추세워 자신의 머리를 무서운 속도로 노리며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광목천왕이 물렀던 이무기로 안드레아의 검을 막아냈다.
커다란 이무기의 입이 안드레아의 검을 덥썩 물자 엄청난 악취에 안드레아가 이맛살을 찌푸린다.
이무기를 성벽에서 떼어내자 광목천왕도 더 이상 성벽에 매달리지 못한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집채만한 광목천왕이 추락하자 괜히 그 자리에 섰던 애꿏은 나찰(혈육을 먹는 요괴의 일종)들만 광목천왕과 그의 철지주에 깔려 터져나갔다.
"크아아아~!!!!!"
땅에 떨어지자마자 벌떡 일어난 광목천왕이 분을 참지 못하고 하늘을 향해 포효한다.
전투는 잠깐 소요상태에 들어갔으나 요괴들의 포효는 밤까지 계속되었다.
파크는 밤늦도록 숙소에 들지 않고 성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로 파르스름한 빛의 폭발이 간간히 일어나는 가운데 결계 밖 어둠 속으로 날아다니는 수많은 귀혼의 무리들이 반딧불처럼 유영하며 아름다운 밤하늘을 빚어내고 있다.
살라도르가 그런 파크 곁으로 다가왔다.
"안 자니? 파크?"
"오셨어요. 싸부."
"날 싸부라고 부르는 사람은 이 성안에 너 밖에 없을꺼다. 파크"
"히~이~! 성주님이라고 부르는 건 너무 딱딱하잖아요."
파크가 언제나처럼 장난스럽게 씨익 웃으며 대꾸한다.
"그나 저나 미안하구나... 괜히 너를 여기까지 불러서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고 말이다."
"하하~!! 전 되려 멋진 구경을 많이 할 수 있게 되서 정말 좋은 걸요. 저 도깨비불들 좀 보세요. 정말 아름답지 않아요?"
파크의 말에 살라도르도 성 밖의 귀혼들을 바라본다.
"천사님들 전투는 정말 대단해요. 그렇죠 싸부?"
파크의 물음에 살라도르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사실 그도 천사라는 존재가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천사는 커녕 성 밖에 지금 날아다니고 있는 귀신들만 해도 얼마 전까지는 믿을 수 없는 다른 계의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요우단님께서 분명 걱정하고 계실 터인데..."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아부지한테 싸부를 혼내라고 일러바치진 않을 테니까요..."
"요녀석 봐라~!"
살라도르와 파크가 서로 마주보며 크게 웃었다.
왕족인 파크였지만 살라도르와는 어린 시절부터 각별하게 지내던 터라 꺼리낌이 없었다.
살라도르는 그에게 검술 선생이자 친구이자 형이였던 것이다.
물론 살라도르에게 파크 또한 제자이자 친구이자 동생이었다.
살라도르는 자신의 생일을 맞아 카피바 사냥이나 하자며 파크를 자신의 성으로 초대하였다.
성주가 된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니 한 삼년 만인 것이다. 그 삼년 사이 파크는 훌쩍 성장해있었다.
자신이 바이자르를 떠나올 때만 해도 분명 젖살이 포동포동한 꼬마였었는데 이제는 건장한 소년이 되어있었다.
정복왕 폴크스겐의 불미스러운 죽음 이후 왕국의 제사를 주관하던 니시마루 교황이 그의 왕권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일개 보병 소대의 대장이었던 살라도르는 니시마루의 동생 요우단에게 우연히 그 뛰어난 검술솜씨가 눈에 들어 왕족 가문의 검술 선생이 되었다.
살라도르는 왕국에 이 어려운 시기에 요우단님 같은 분이 있어 다행이라고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니시마루 왕은 썩을대로 썩어있었다. 왕권과 신권이 모두 그에게로 집중된 지금 그를 견제할 만한 수단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문제일까? 니시마루는 점점 포악하고 흉포스러워졌다.
듣기로는 니시마루도 대륙통일 전쟁의 전설적인 영웅 중 하나였다는데 이미 그의 그런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왕국이 유지될 수 있는 것도 니시마루의 동생이신 요우단님의 충정 덕분일 것이다.
살라도르에게는 그런 분의 아드님에게 가르침을 드리고 가까이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었다.
과거 자신이 니시마루 왕의 눈밖에 나 곤란스러웠을 때도 요우단님께서는 기꺼이 이곳의 성주 자리를 내주시었다.
그런데 그런 분의 아드님을 이런 곤경에 빠뜨리게 하다니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았다.
"하려던 카피바 사냥은 물건너가고 괴물 사냥만 잔뜩 하게 됐네요. 크크 흥미진진이에요. 싸부~!"
살라도르는 미안한 마음에 쓴 웃음만 지으며 귀혼불들이 유영하는 밤하늘만 올려다 보았다.
파크가 슬며시 머리를 기대왔다.
살라도르가 돌아다보니 어느샌가 파크는 새근새근 잠이 들어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