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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영, 만개하지 못한 악녀 스타의 비극

tomasson |2004.11.26 19:25
조회 8,762 |추천 0




윤석호 감독의 데뷔작인 <내일은 사랑>의 스타는 단연 이병헌과 박소현이었다. 이병헌은 한국 최대 흥행작 <공동경비구역 JSA>를 거쳐 이제는 배용준과 함께 한국의 양대 스타로 자리잡았다. 반면 박소현은 대표적인 히트작을 내놓지 못해 팬들의 기대에는 부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일은 사랑>에서는 이들 이외에 또 다른 대형스타를 배출했다. 바로 한국 최초의 매력적인 악녀스타인 고소영이다
물론 고소영은 <내일은 사랑>에서 12회까지만 출연했다. 그가 맡은 역 또한 '현경'이라는 차분하고 여성적인 여대생이었다. 이는 한국 남성들이 전통적으로 가슴속에 품고 사는 이상형이라 할 수 있다. 슬플 때 함께 울어주고 힘들 때 옆에서 위로해주는 순정파 여인에 대한 환상을 갖지 않은 한국 남성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러한 역할의 최고봉은 심은하가 1993년 <마지막 승부>에서 맡은 '다슬이'역이었다. 심은하는 좌절감에 빠진 농구선수 남자친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여인 역을 훌륭히 소화해내었다. 물론 1998년에 윤석호 감독 역시 <순수>에서 명세빈을 발굴하며 '다슬이'를 이어가는 가장 여성적인 캐릭터를 선보인 바도 있었다.

그러나 고소영은 태생적으로 이러한 역할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윤석호 감독의 말에 따르면 "1회부터 12회까지 차분한 '현경'역에 갇혀 있기에는 너무 끼와 재능이 아까왔다. 여러 가지 이유도 있었지만 본인 성격에 걸맞는 더 큰 역을 맡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라고 회고했다.

12회 이후 도중하차했던 고소영은 이듬해인 1993년 MBC의 <엄마의 바다>의 '경서' 역으로 다시 돌아온다. 똑같은 여대생이지만 '경서' 역은 <내일은 사랑>의 '현경' 역과 180도 달랐다. 경서는 당시 한국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열풍처럼 번지고 있었던 '신세대'를 대변하는 역이었다. <엄마의 바다>에서의 고소영은 자신의 의사를 직설적으로 밝히는 똑똑하고 당돌한 여대생 역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연기 상이 아니라 고소영의 실제 성격이나 다름없었다.

한국에서 고소영이라는 배우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로 상반된다. 솔직하고 진솔하다는 좋은 평가가 있는 반면 싸가지없다라는 나쁜 평가도 있다. 고소영은 데뷔할 당시부터 지금까지 다른 여배우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부분의 여자 배우들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떻게 하면 착한 모습을 보여줄까 고민한다. 그러나 고소영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그녀의 인터뷰를 보면 "이거 이런 말 해도 되나"하고 염려가 될 정도로 말을 막 해댄다. 섹시함은 솔직함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그런 점에서 본다면 한국에서 가장 섹시한 배우는 고소영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미 나이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섹시어필'에 관한 여론조사를 하면 고소영은 늘 베스트5안에 들 정도이다. 이에 대한 반대의 평가가 바로 '싸가지 없다'라는 말이다. 고소영 역시 이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적이 있다.

"데뷔작 <엄마의 바다>에서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어요. 매일 촬영 현장에서 사진과 인터뷰 요청을 받았는데 그게 여간 눈치가 보이는 게 아니에요. 촬영하다 말고 선배들 멀쩡하니 기다리는데 따로 인터뷰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더라구요. 해서 인터뷰를 거부한 적이 많아요.

뭐 같은 소리를 여러번 하는 것도 별 재미없구요. 그랬더니 건방지다, 싸가지 없다 소리를 하더라구요. 더구나 내가 맡은 경서라는 역할 자체가 할 소리 다하고 속을 남겨두는 스타일이 아니라 더욱 그런 이미지가 증폭됐어요."

고소영은 애초부터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여타의 배우들과 달랐다. 그래서 그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면서도 기자와 PD들 혹은 시청자들 사이에서 손꼽히는 말썽꾸러기이다. 고소영과 일하는 PD들은 늘 "소영이와 일한다지 좋겠다! 잘해봐" 이런 비아냥을 듣는다고 한다. 더구나 언젠가는 동료 연예인에게 얻어맞은 일까지 보도된 적이 있었다. 당시 한국언론의 보도내용이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옆방으로 이병헌이 왔고 고소영이 최진실에게 가보자고 권하는 과정에서 최진실의 친동생 최진영이 고소영을 구타했던 것은 사실. 그러나 화장실 앞에서 언쟁이 있은 후 최진영은 2대 정도 고소영의 뺨을 때렸는데 그 과정에서 고소영의 왼쪽 아래 입술이 터져 피가 났다"

모든 현상엔 양면성이 있다. 고소영이 건방지고 싸가지 없다는 뜻은 반대로 그녀가 얼마나 당당하고 솔직한지를 반증해주는 셈이다. 그런 측면에서 고소영은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이미지를 대변해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이미지화해서 시청자들에게 전달한다. 어떻게 하면 더 귀엽게 보일까라든지 어떻게 하면 더 청순하게 보일까라는 고민은 애초에 고소영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막가파식으로 자신을 내비치며 귀엽고 싶을 때 귀엽다가 섹시하고 싶을 때 섹시한 게 고소영이다.

90년대 한국에서 심은하와 명세빈 류의 청순가련형의 스타가 대세를 이룬 점을 감안한다면 고소영은 제 역할에 관해서라면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고소영이 나타나기 전까지 말광량이 악녀 캐릭터를 맡을 만한 배우는 한국에 없었다. 그리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고소영이 아무리 싸가지없이 나와도 한국의 남성들은 고소영에게 열광한다. 현재 작품활동을 활발히 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수억대의 광고 CF를 쉽게 따낸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백설공주>라는 동화를 생각해보자. 아름답고 착한 백설공주와 아름답고 악한 계모의 대립이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절세미녀라는 것은 아름다운 여신이 될 수도 있지만 그 반대쪽을 보면 질투에 불타고 남의 남자를 가로채는 위험천만한 탕녀가 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양면성 중에서 한국은 한쪽만을 취하고 다른 쪽을 철저히 탄압했다. 고소영은 이렇게 탄압받은 악의 캐릭터를 부활시켰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빠져있는 수많은 한국 남성들의 틈새를 치고 들어가 이들을 마음껏 조롱한다. 실제로 고소영의 삶 자체가 그랬다. 고소영의 말을 들어보자.

"당시 나는 서초동 우성아파트에 살았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전화통에 불이 났다. 학교 남자선배들로부터 온 것으로 적으면 3통, 많은 5통이었다. '소영아, 차 끌고 왔는데 데려다 줄게' 그런데 이게 한 차여야 말이지. 전화통수와 똑같이 거의 매일같이 차를 끌고와 아파트 주차장에 대기중이었던 것이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하나. '야타족'도 아니고 '나타족'도 아니고. 기다리고 있던 선배들은 자존심이고 뭐고, 머쓱해하며 자기 차를 점지해주길 기다렸다. 이러니 내가 '공주'일 수밖에. 내가 할 일은 거만스럽게 '초이스' 하는 것뿐."

고소영이 맡은 캐릭터는 대부분 다 부잣집 귀한 딸로 나온다. 이것 역시 실제의 고소영과 일치한다. 고소영의 아버지는 해운회사 일본 지사장이었고 어머니 역시 절세 미인이며 그 어머니 밑에서 어렸을 때부터 승마와 무용 등을 배우며 자랐다. 연기생활을 시작한 뒤에도 고소영은 이러한 배경 때문에 늘 사치의 여왕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었다. 하도 외제명품에 욕심이 많다는 비난을 받자 한때 사치와의 전쟁을 선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남성들은 그녀에게 관대하다. 고소영의 집앞에서 그녀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남성들 틈에서 자신도 그 경쟁에 참여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강하고 정열적인 남성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꾼다. 고소영은 바로 그 꿈 위에 서 있는 존재이다. 실제로도 고소영은 거대 재벌가의 사업가와 스캔들이 있기도 했었고, 스토커로부터 공개구혼을 받기도 했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고도 성장을 해오며 치열한 경쟁을 치러웠던 한국인들에게 고소영은 승리한 자만이 살아남고 승리한 자만이 화려한 미인을 차지할 수 있는 승리 이데올로기를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고소영만의 매력이다.

냉정하게 고소영을 평가해보자면 고소영은 <엄마의 바다>이후에 뚜렷한 히트작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특히 1998년 영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이후에 <러브>, <연풍연가>, <이중간첩> 등에서 본인의 캐릭터와 사뭇 다른 한국 전통적인 청순가련한 여인역만 줄곧 맡았다. 이러한 변신이 성공적이지도 못해 대부분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고 만다. 고소영의 이런 변신에 대해서 한국의 문화부 기자들이나 문화평론가들은 고소영이 맡을 만한 화끈한 악녀 역을 소화할 수 있는 기획이 없었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예를 들면 고소영은 <원초적 본능>의 샤론스톤과 같은 역을 해야하는데, 아직 한국에서는 그런 기획을 할 만한 영화사가 없다는 것이다. 윤석호 감독이 <내일은 사랑>에서 고소영을 풀어준 이유는 고소영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으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엄마의 바다>를 성공시켰으나 그 이후에 또 다시 <내일은 사랑>의 '현경'역으로 돌아와버렸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그러나 고소영은 2003년 숨겨놓은 자신의 매력을 <산토리니>라는 럭셔리 세미누드 화보집에서 전격 공개했다. 최근 누드붐이 불고 있는 한국이지만 고소영의 화보집은 여타의 누드와 차별화하여 매우 고급스럽고 귀족적인 풍을 유지했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은 고소영이니까 가능했던 것이고 대 성공을 거두었다. 모바일 서비스를 시작한 첫날에 7,000건을 기록한 접속건수가 3일째부터 4만건 이상의 접속건수를 기록하는 등 크게 증가했으며 총수익이 무려 20억원에 달한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 누드집의 성공으로 고소영은 2002년 <이중간첩> 이후 단 한편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았어도, 광고CF에서 최고의 인기모델 지위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

고소영이라는 배우는 철저히 얼굴로 몸으로 삼분의 이는 먹고 들어가는 축복받은 연기자다. 코 위의 작은 점까지 의미심장한 얼굴과 깡 마르지 않은 균형잡힌 몸매는 가히 매혹적이다. 살이 잘 찌는 체질이라 본인 스스로는 피나는 다이어트와 철저한 피부관리를 한다지만 어쨌든 그녀는 우리 사회의 웰빙열풍을 조장할 만한 공식 미인이다. 그러나 12년의 연기생활을 통해 이러한 매력을 100% 발휘한 일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90년대 내내 엄숙주의를 벗어던지지 못한 한국의 대중문화 흐름 탓이다. 32살이 넘어서야 세미누드집을 낼 수 있었고, 이제는 CF로 숨어버린 고소영, <내일은 사랑>에서 긴 치마와 두꺼운 책에 가려진 그녀의 끼와 재능을 완전히 만개하지 못한 책임은 누가 져야할 것인가? 최소한 12회만에 그녀를 풀어준 윤석호 감독만은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것 같다.

* 이 글은 일본 고단샤 출판사에서 준비 중인 <윤석호 감독과 한류스타>의 한국어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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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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