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유리알갱이 - 43

이끼 |2004.11.27 13:06
조회 2,161 |추천 0

부르르...

 

그렇게 망연자실하게 앉아있던 태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떨림을 보내왔다. 태민이 액정에 뜬 유채의 이름을 발견하고 재빨리 폴더를 열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태민씨. 믿을만한 사람 몇명만 내 뒤에 좀 붙여줄 수 있어요?"

 

"네? 어려운건 아니지만 왜요?"

 

"지금 백사형한테 갈꺼거든요. 백사형의 병원 알죠? 태민씨 말이 사실이라면 나중에 필요할 지도 모를 증거자료를 확보해야 하지 않겠어요? 눈에 안 띄이게 붙여주세요.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께요."

 

유채가 똑 떨어지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마치자마자 야무지게 전화가 끊겼다.

 

"왜 형이 이 여자랑 결혼하겠다고 난리를 쳤는지 알겠군..."

 

끊어진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태민이 혼자 중얼거렸다. 유채와 같은 타입의 여자는 태민이나 태준과 같은 삶을 사는 남자들이 만나기 쉽지 않은 스타일이었다. 대부분의 같은 계층의 여자들은 유채와 같은 능동적인 사고방식을 갖는 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늘 주어진 것들로 인해 충만한 삶을 살아온 이들이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만약 태준 형이 집안에서 권했던 유경과 결혼을 해서 이런 어려움을 겪었다면 유경은 필시 태준을 버렸을 것이었다. 하지만 유채라면...? 태민은 유채라면 절대 태준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어떤 확신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다. 진유채양 뒤로 애들 셋만 붙여. 눈에 절대 띄이지 않게."

 

유채의 말대로 태민이 핸드폰으로 지시를 내렸다. 이제 다시 유채의 연락을 기다릴 차례였다.

 

 

 


*                     *                     *                     *                     *                     *

 

 

 


딸랑딸랑...


사형의 동물병원의 문에 매달려있던 종이 미친듯이 요동을 쳐댔다. 순간 놀라서 문을 바라본 사형의 얼굴에는 금새 반가움의 미소가 가득 떠올랐다. 생각지도 않았던 유채가 문 앞에 가쁜 숨을 내쉬며 서 있었다.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나던 사형은 유채의 차가운 시선이 내리 꽂히자 사형은 그대로 다시 의자에 앉아버렸다. 방금 전까지 반가운 미소로 가득하던 사형의 얼굴 표정이 순식간에 뻣뻣해져버렸다.

 

"당신인거야?"

 

유채가 질문을 던지며 성큼성큼 사형에게로 다가왔다. 분명 사형의 얼굴 표정이 변하는 것을 읽은 유채였다. 유채는 사형의 사인이 분명 긍정의 의미라고 강하게 확신을 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갑자기 쳐들어와서 그게 무슨 소리지?"

 

사형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날카롭고 차가운 인상으로 초지일관을 하는 태준도 이런 가식은 절대 보여준 일이 없었다. 지금 사형은 웃고 있었다. 태연자약하게...

 

"태준의 게이 기사... 당신이 한 거라면서요."

 

"설마...유채씨는 내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못 할 것도 없지 않나요?"

 

예전의 유채라면 분명 사형이 그런 일을 절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유채가 일하는 바를 단숨에 말도 없이 인수해버린 사람이었다. 소리소문없이...

 

"유채씨가 너무 과대평가하는것 같은데... 난 그저 동물병원의 의사일 뿐이라는 걸 잘 알지 않나?"

 

묘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늘 유채에게 존대를 했던 사형의 말투에서 '요'자가 빠져있었다.

 

"그저 동물병원 의사는 바 같은거 인수 못하죠."

 

"......"

 

유채의 퉁명스러운 발언에 사형의 표정은 진하게 구겨졌다. 순식간에 웃던 사형의 얼굴이 구겨지자 유채는 다소 놀란 눈치를 감추고 여전히 차갑게 사형을 쏘아보려 노력했다. 일부러 비틀어서 사형에게 기분나쁘라고 이야기를 한 터라 살짝 떨리기도 했다. 태준이라면 이런 식으로 말을 해도 능히 반응이 짐작이 되는터라 크게 상관이 없었지만 지금 사형의 경우는 많이 달랐다. 생각해보면 이런 식으로 사형과 마주쳤던 적이 유채에겐 단 한번도 없었다.

 

"무슨 상관이지? 넌 태준을 사랑하지 않아."

 

사형의 입술이 이내 유채를 빈정거리듯 한쪽이 치켜 올라갔다. 유채는 속으로 깊이 숨을 들이 마셨다가 내쉬었다. 이제 게임이 시작될 차례였다. 태민의 말에 대한 단서를 유채는 꼭 찾아야만했다.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죠?"

 

"난 널 아니까."

 

"나에 대해서 뭘 아는데요?"

 

"태준을 사랑했다면 그의 집에서 그렇게 무작정 뛰쳐나왔을까?"

 

"그건 별개의 문제예요!"

 

"그래서? 그를 사랑이라도 한다는 거야?"

 

사형이 말도 안된다는 식의 대답에 유채는 바짝 약이 올랐다. 사랑? 그래 까짓거 사랑하지 뭐. '그래, 사랑해. 사랑한다고!' 라고 큰 소리로 외치려면 유채는 문득 자신의 주머니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종이의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아, 아까 신문... 사형에게로 오면서 택시 안에 버려져있던 신문에서 우연히 읽었던 기사를 찢어두었던 쪼가리였다. 유채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사형에게 신문 쪼가리를 내밀었다. 신문 쪼가리를 받아든 사형의 얼굴에 '이게 뭐야?' 라는 메세지가 언뜻 흘렀다.

 

"당신이 메이플의 최대 주주일꺼라고는 생각 못 해봤어요."

 

유채가 뿌듯한 표정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사형이 당황한 표정으로 급히 기사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물론 유채는 추측으로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형의 당황한 모습은 유채가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었다.

 

"뭘 근거로 그딴 소리를 하는거지?"

 

사형의 말투가 조금 격해졌다. 아마 기사를 훑어봐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한줄도 없다는 자신감 때문이겠지.

 

"사브리나가 안 보이나요?"

 

유채의 여유로운 말투에 사형은 또다리 쭈글쭈글한 신문 쪼가리에 시선을 꽂았다. 새로 메이플의 대표이사로 선임되었다는 기사의 사진, 그 사무실 전경의 뒤로 파충류의 케이스가 놓여있는 모습이 그제서야 사형의 눈에 들어왔다. 사형이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아냐, 이것이 단서는 될 수 없어.

 

"사브리나는 알비노 콘스네이크야. 우리나라에 알비노 콘스네이크가 한두마리인 줄 알아?"

 

"아... 그래요? 하지만 사브리나가 그냥 평범한 알비노 콘스네이크는 아니잖아요."

 

유채가 만연의 웃음을 지으며 여유롭게 사형의 곁으로 다가왔다.

 

"전체적으로 붉은 뱀의 마지막 거의 흰색으로 보이는 꼬리 부분. 대개의 알비노 콘스네이크 전체가 붉고 색소가 침착되어 백화되죠. 그런데 사브리나는 신기하게도 꼬리 부분에서 거의 붉은 색이 없고 완전 백화가 이루어져 있잖아요."

 

"아니, 그건..."

 

"제가 기억하는 모습이 틀린가요? 사브리나처럼 완전히 꼬리가 하얀 알비노는 많이 못 봤는데요."

 

유채의 입에서 알비노 콘 스네이크의 특징이 줄줄이 엵어나오자 사형이 얼빠진 표정으로 유채를 바라보았다. 물론 공부를 한다면 알 수 있는 부분이기는 했다. 하지만 유채는 파충류 전문가가 아니지 않은가?

 

"의외라는 얼굴 표정이군요. 난 습관적으로 내가 어울리는 사람들의 취미나 직업에 관해서 늘 정보를 습득하고는 해요. 원래 태생이 그 들과 같이 않기 때문에 같은 대화 수준을 만들기 위한 나름대로의 노력이죠. 날 어설픈 여자로 알았다면 큰 오산이예요."

 

싱긋 기분좋게 웃은 유채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 메이플의 대표이사로 추대된 사람... 최대 주주께서 추천을 하셨더군요. 그리고 그 대표이사란 사람의 취미가 파출유 수집이더군요. 그래서 당신과 연결고리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을 갖고 전화로 대충 알아봤죠. 그리고 그 최대주주란 사람이 장백그룹의 이사의 동생이라는 것까지 알고나니 더이상 말이 필요없더군요."

 

"하..."

 

유채의 말에 사형이 감탄어린 표정으로 숨을 내뱉었다. 그것을 알아낸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긴 했지만 유채가 그정도까지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정말이지 이 여자는 늘 자신을 놀랍게 하는 여자군. 하지만 진유채. 까부는 것은 거기까지야. 사형이 신문 쪼가리를 책상위에 둔채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멋진 추리실력이고 정보 수집력이라는 건 내가 인정하지. 하지만 지금 당신이 말한 것과 내가 태준의 게이기사를 날조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물론 없겠죠. 그 정도로 어설프게 일을 처리할 만큼 바보는 아니니까."

 

"그럼 뭘 어쩌겠다는거지?"

 

"난 왜 그랬는지가 궁금할 뿐이예요."

 

"내가 그것을 이야기 해줄 것 같은가?"

 

유채의 독설어린 표정에 사형이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예전 참 순수하고 맑은 미소라고 생각했던 사형의 미소가 유채의 눈에 사뭇 다르게 보였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착한 미소로 위장했지만 속으로 계산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는 사형의 존재에 대해서 깨달은 이 순간, 결코 그 미소는 순수하지 않았다.

 

"왜 태준의 일에 이렇게 열을 올리는 건지 난 도통 모르겠군. 어차피 상관없는 사람이잖아. 안 그래?"

아까보다 한층 부드러워진 사형의 한쪽 손이 유채의 어깨를 지그시 감싸왔다. 순간 유채는 어깨를 돌려 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좋은 그림을 위해서 지금의 이순간은 참아야만했다.

 

"틀린 말은 아니죠. 그럼 당신이 내게 넘어와 줄껀가요?"

 

유채가 표정을 바꿔 사형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포갰다. 아닌 척 하는 연기라면 질릴 만큼 많은 경험과 노하우로 무장된 유채였다. 사형이 뱀처럼 교활하게 두 얼굴의 가면을 쓴다면 유채는 천개라도 쓸 수 있었다.

 

"무엇을 원하지?"

 

"글쎄요..."

 

무엇보다 남자를 리드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는 유채였다. 사형과 유채가 있는 동물병원의 분위기는 한층 더 노곤노곤해지고 있었다. 물론 유채의 온몸에선 닭살들이 오븐속의 통닭처럼 오돌토돌하게 튀어나오고 있었지만 유채는 꿋꿋하게 참아내고 사형의 그윽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무엇을 원하던 다 주겠어."

 

"다요?"

 

"물론. 태준따위 이제 나와는 상대조차 되지 못해. 그는 망했고, 나는 오히려 훨씬 더 많은 부를 가지고 있어."

 

"아, 그렇군요..."

 

사형은 전형적인 계급사회에 정말이지 너무도 잘 길들여진 존재라고 유채는 생각했다. 남들이 보는 곳에서는 선량한 척 고아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사진을 찍고 카메라가 돌아서면 매몰차게 어린아이의 손을 쳐내는 그런 부인네들하고 사형의 모습은 정말이지 다를 바가 없었다.

 

'반드시 너에게도 똑같은 상황을 돌려주지.' 유채는 소리없이 사형에게 이를 갈았다. 그 사이 태민이 유채의 뒤에 붙여둔 사람들의 사진기를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추천수0
반대수1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