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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알갱이 - 45

이끼 |2004.11.27 14:53
조회 1,415 |추천 0

"안녕하십니까? 연예특종 스타쉽 오디세이의 방해선입니다. 저는 지금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고있는 21세기 신데렐라 진유채양을 만나보러 왔는데요. 여기는 좀 의외의 장소네요. 이곳은 집없는 천사들이 살고 있는 천사의 집입니다. 아무래도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같이 들어가보실까요?"

 

"컷! 자, 빨리 장비 갖춰서 내부로 이동해."

 

상큼 발랄한 리포터가 멘트를 마치자마자 방송 스텝들이 내부 씬을 찍기 위해 우르르 이동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샐리는 어쩐지 한편으로 마음이 갑갑해져왔다. 그런 샐리의 표정을 보고있던 태민이 샐리의 곁으로 다가왔다.

 

"표정이 왜 그래?"

 

"그냥, 솔직히 이러다가 태준씨가 아니라고 해버리면 유채 어찌 될까 걱정되네."

 

"흠..."

 

샐리의 말에 태민도 심각한 표정에 젖어들었다. 우선 태준의 게이 기사가 자취도 없이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유채는 정말 영특한 여자였다. 아무것도 없는 강원도 시골처녀의 서울 상경, 그리고 손에 꼽히는 명문가의 여자로 발탁되기까지의 과정은 삼류드라마가 따로 없었다. 게다가 타고난 유채의 연기력은 전국민을 깜빡 속이고도 남았다.

 

"자, 우리도 안으로 들어가자."

 

"응."

 

태민이 샐리의 손을 잡고 천사의 집 내부로 스텝들을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유채씨는 대체 언제부터 여기서 봉사활동을 했던거야?"

 

"몰라, 난 생각도 못했어. 몇년 되었나봐. 여기 원장님이며 애들까지 훤히 알더라구."

 

"참, 정말 알다가도 모를 여자야."

 

태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유채의 선행에 대한 보도는 세간에 있는 신분상승을 꿈꾸는 여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한번에 죽여줄 강력한 내용이었다. 이런 것을 평소에 모두 계산을 하고 산다는 말인가?

 

천사의 집 한쪽에서는 유채가 방송용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다. 노메이크업처럼 보이기 위해 지금 메이크업만 1시간 30분이 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꽤 긴 시간 지루한 작업이었지만 유채는 이 쯤은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었다.

 

"이렇게 이용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유채는 속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예전에 선한 부자가 칭송받는 다는 기사를 한 줄 접하고서 시작한 봉사활동을 이렇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도 못했었다. 방송에서 어떻게 포장을 해 줄지는 미지수였지만 하루이틀 해온 일이 아니었다. 그런 만큼 유채는 자신이 있었다.

 

"진유채씨 준비되었나요?"

 

"네. 여기 준비 끝났습니다."

 

누군가의 질문에 유채의 메이크업을 하던 여자가 큰소리로 소리를 쳤다. 그제서야 유채는 감고 있던 눈을 반짝 떴다.

 

"피부가 너무 좋으세요. 어디서 관리하세요?"

 

"네? 관리는 뭘요..."

 

메이크업 담당의 질문에 유채는 겸손한 척 고개를 숙였다.

 

'어디서 관리했냐고? 집에서 했다. 너도 밤마다 졸려 죽겠는데 오이 갈아서 붙이고, 먹던 우유로 세수하고 해봐라. 다, 노력하는 만큼 얻는거야. 세상에 공짜는 없어.'

 

"진유채씨 이 쪽으로 와주세요."

 

"네."

 

유채가 공손하게 메이크업 담당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던지고는 카메라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런 유채의 모습을 촬영장의 여러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언니,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지 않아요? 저렇게 예쁜데다 착하기까지 하다니. 괜히 신데렐라가 되는게 아닌가봐."

 

메이크업 소도구를 챙겨주던 보조가 투덜거리면서 이런 저런 도구들을 하나씩 가방에 꾸려넣었다.

 

"부럽냐?"

 

메이크업 담당이 보조가 챙기기 쉽게 도구들을 정리해주면서 반문했다.

 

"그럼, 언니는 안 부럽수?"

 

"나도 부럽다."

 

"에휴... 우리는 언제 저렇게 한번 되어보나..."

 

 

 

 

*                     *                     *                     *                     *                     *

 

 

 

 

초 인기 제품 진유채 목도리!

 

"헐..."

 

태준은 길을 걷다가 한 노점상 앞에 적힌 문구를 보고 할 말을 잃고 멍하게 멈춰섰다. 이젠 진유채 목도리라는 상품까지 등장하는건가?

 

"어서오세요. 애인 사주시게요? 요즘 여자들이 너무 좋아하는 진유채 신데렐라 목도리 입니다."

 

멀뚱히 서있는 태준을 목도리를 사려는 손님으로 알아본 노점상 주인이 흥겹게 말을 걸어왔다. 이미 노점상 주위에는 이리저리 목도리를 들춰보는 여자손님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이거... 잘 팔려요?"

 

태준의 어이없는 질문.

 

"잘 팔리다마다요. 요즘 진유채만 써 붙이면 다 팔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3000원 되겠습니다."

 

노점상 주인이 태준의 질문에 어이가 없다는 듯 쏘아붙이고는 연신 물건 팔기에 바빴다. 진유채만 쓰면 다 팔린다고?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는 태준은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을 발견했다.

 

진유채 시계, 진유채 머리핀, 진유채 선글라스, 진유채가 마시는 주스, 진유채 립스틱... 이 상태면 당장 CF를 하나만 해도 대박 터뜨리는 것은 무리도 아닌 듯 보였다.

 

"너 어제 진유채 토크쇼 나온거 봤어?"

 

길을 걷는 여자들도 이제는 진유채 이야기를 한다. 태준은 대화를 나누면서 걸어가는 여자들의 뒤를 무심코 따라가기 시작했다. 워낙 큰소리로 주책없이 떠드는 여자들이라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저절로 태준의 귀에 이야기들이 흘러들어왔다.

 

"진짜? 토크쇼 나왔어? 재미있었어?"

 

"장난아니었어! 그 여자 짱 멋지더라. 세상에 영어랑 일어를 줄줄 하는데 해외여행은 커녕 여권도 만들어본 적이 없대."

 

유채가 여권이 없다는 건 나도 처음 아는 사실이군.

 

"어머, 어머. 어떻게? 그 남자가 가르쳐줬대?"

 

"그건 아닌 것 같고. 하여간 그 여자 말도 너무 잘하고 내숭도 안 떨고 너무 좋아."

 

"방송에 진유채 혼자 나왔어?"

 

"어. 왜?"

 

"난 그 여자를 신데렐라로 만든 남자도 너무 궁금한데 도통 나오지를 않아."

 

태준이 여자의 말에 피식 웃었다. 유채때문에 내가 궁금하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곧 결혼발표 할 것 같은데..."

 

"그래? 그럼 일부러 안 나오고 있나보다."

 

그래, 니네 맘대로 생각하고 맘대로 결혼 내라. 어처구니 없는 여자들의 수다라고 생각하면서도 태준의 쫑긋한 귀는 좀처럼 접히질 않았다.

 

"지금쯤 그 남자가 딱 나타나줘야 진유채 인기가 완전 급물살을 탈텐데. 아직 신데렐라 신데렐라만 떠들었지 왕자님이 안 나왔으니까."

 

"세상에 결혼한다고 그렇게 연예인처럼 뜬 여자는 진유채밖에 없을꺼야. 꼭 옛날 영국의 다이애나비 같지 않냐? 그런데 그 진유채의 남자 잘생겼냐? 설마 찰스처럼 생긴건 아니겠지?"

 

뭐? 찰스? 태준은 방금 말을 한 여자의 등을 턱 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내가 어디가 찰스처럼 생겼다고!

 

"너 사진 나온거 못 봤어? 얼음장같이 생겼어. 냉혈인간? 뭐 그렇게 생겼더라. 항간에 소문이 그 남자 여자 연예인들하고 꽤나 놀았던 보던데."

 

태준의 이가 뽀드득 갈렸다. 니가 봤냐? 봤어? 언제적 얘기를 하고 그러냐? 너네는 어릴 때 안 놀았냐?

 

"그래? 혹시 나중에 진유채가 그 남자한테 채이면 어찌 되는거냐?"

 

"낙동강 오리알 되는거지 뭐."

 

낙동강... 오리...알? 태준의 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재잘재잘거리며 앞에 걸어가던 여자들은 몰라라하고 그냥 자기네들의 갈 길을 가버렸다. 생각해보면 지금 유채가 화제시 되는 계략을 쓰는것이 가능한 이유는 유채가 아무것도 없는 서민적인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약 이렇게까지 극도로 매스컴을 부풀려놓은 상태에서 태준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매스컴들은 일제히 진유채의 사기극에 대해 보도하기에 바빠질 것이었다.

 

"흠..."

 

태준은 심각한 표정으로 덥수룩하게 수염이 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태준의 게이기사는 정말 조용해졌고, 세상은 모처럼 언론에 드러난 신데렐라에 열광을 하고 있다. 그동안 신데렐라들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이런 이야기를 드러내기 싫어하는 계층들이라 쉬쉬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수염부터 깎아야겠군."

 

그래도 오랫만에 만나게 될 유채에게 자신의 허름하고 초라한 모습은 죽어도 보여주기 싫다는 태준의 뻣뻣한 자존심은 살아 있었다.

 

 

 


*                      *                       *                       *                       *

 

 

 

사형은 거칠게 TV 리모콘을 눌러 TV를 꺼버렸다. TV가 꺼지자 불이 꺼진 거실은 온통 어둠으로 휩싸였다. 모든 매스컴이 24시간 모두 신데렐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길거리는 온통 진유채판이고, 인터넷도 온통 패러디와 부러움의 글귀들로 가득 메워지고 있었다. 어디서도 진유채라는 이름 세글자가 안 보이는 곳이 없었다.

 

그렇게 진유채의 인지도가 올라갈수록 더불어 상승되는 것이 김태준의 인지도였다. 그가 스스로 메이플을 버렸다는 괴소문이 사실인 것 처럼 나 돌더니만, 메이플이 부실 경영에 여러가지 문제를 많이 가지고 있는 흉물로 점점 전락해가고 있었다. 더불어 메이플의 주가는 연신 바닥을 내리쳤고, 전국의 메이플 레스토랑 체인은 점점 손님보다 파리에 신경을 써야되는 지경에 이르르고 있었다.

 

사형의 불찰이었다. 처음 유채의 보도가 나왔을 때 재빨리 반박보도를 내거나 무엇인가 조치를 취했었야했다. 처음에 메이플 레스토랑에 대해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없는 탓에 그저 먼나라 불구경하듯 바라만 보고 있던 것이 잘못이었다. 상대가 여자이고, 아무것도 없는 서민이란 사실에 사형은 유채를 얕잡아보았고 일은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지금이라도 무엇인가 해야했다. 무엇인가를... 사형이 손을 뻗어 스탠드의 불을 켜고는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진유채... 핸드폰 주소록에서 진유채 주소록을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지금 전화는 고객의 사정으로 당분간 착신이 정지되었..."

 

젠장. 전화를 끊어버린건가? 성질에 못이겨 핸드폰을 닫은 사형의 머리속에 샐리의 이름이 스쳤다. 샐리... 유채와 친한 샐리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도 유채와의 연결고리는 처음부터 샐리였고 지금 유채가 사형의 연락을 절대 받지 않는 이 순간에도 샐리는 연결고리가 되어 줄 것이란 희망이 있었다.

 

"여보세요?"

 

다행히도 샐리는 핸드폰을 받았다.

 

"샐리야."

 

"......"

 

사형은 아무 응답이 없는 핸드폰이 혹시나 끊겼나 싶어 몇번이고 수신상태를 확인했다. 이상은 없었다. 샐리가 대답을 안하고 있을 뿐이다.

 

"샐리야."

 

"오빠랑 할 말 없어."

 

"샐리야,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너의 오해야."

 

"...오빠... 유채에게 확인시켜준거 나야. 정보 제공해 준거 나라고. 이상하지 않았어? 꽤 많은 내부 정보가 흘러나갔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지 않아?"

 

젠장! 순간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던 사형은 발에 걸린 죄없는 의자를 있는 힙껏 걷어찼다.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샐리의 전화기까지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이쯤에서 사형에게 전화가 올 것이라고 유채는 미리 샐리에게 이야기를 해 둔 터였다. 샐리는 유채가 시키는대로 차분하고 동요하지 않는 목소리로 사형에게 응대를 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너... 우리가 메이플을 삼키기 위해서 돈을 얼마나 들였는지 알면서도 그런 말이 나오니?"

 

"우리? 그 우리가 누군데?"

 

"샐리야, 너랑 내가 남이야? 우린 친척이야!"

 

"친척? 그게 뭐 중요해?"

 

이쯤되자 온순하던 사형의 눈빛은 탐욕을 드러낸 날짐승 마냥 매섭게 변했다. 지금 전화를 받고 있는 샐리는 사형이 알고 있던 마냥 방긋거리던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쩔 계획이야? 지금 어쩔 계획이냐고?"

 

사형의 목소리가 차갑고 딱딱하게 가라앉아버렸다. 샐리는 그 목소리 자체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에 순간 움찔거렸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사형의 이런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정말 사형이 능력이 없어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있는게 아니라 탐욕과 야심이 너무 쎄서 회사의 경영이념과 어긋난다는 이유 때문에 떨어뜨려놨다는 정보가 확실한 설득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샐리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언제 오빠는 통보하고 일 저질렀어?"

 

"뭐?"

 

"요즘 신문하고 TV가 아주 재미있지? 드라마가 따로없지?"

 

"......"

 

"내일 보도를 잘봐. 내일은 반전이 있는 날이거든."

 

"뭐?"

 

뚜뚜... 뚜...

매정할 정도로 전화는 일순간에 뚝 끊겨버렸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사형이 멍하니 끊겨진 핸드폰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일? 내일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거지? 진유채... 대체 넌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거야? 진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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