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칙 사랑 - 09. 그녀는 누구인가요?
심한 어지러움증을 느끼며 의자에 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내 등을 받쳐준 건 그의 팔이었다.
“화곡동 물건 금방 도착할 겁니다. 제가 조치를 했습니다. 대리님 잊으셨어요? 몸이 좋지 않다고 퀵으로 보내면서 영수는 대리님이 하시기로 하셨잖아요. 여기 영수증이요.”
모든 상황을 정리하는 영수증 한 장에 부장님은 멋쩍은 듯 자리로 돌아갔고 귀민은 분하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고마워요. 내가 잊고 있었네요.”
“몸이 좋지 않으니까 이런 실수를 하잖아. 데려다 줄게 나가자.”
그가 작게 속삭였다. 난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은 채 그의 어깨에 기대어 회사를 나섰다. 언제나 편안 느낌을 갖게 하는 내 차의 조수석에 앉아 머리를 두들기며 물었다.
“어떻게 퀵으로 보낼 생각을 했어?”
“너랑 같이 퇴근하려고 했지.”
“고마워, 아깐 정말 살 떨리더라. 요즘 정말 실수가 잦아.”
그건 당신 때문이라는 말을 삼키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 찬영씨 집으로 갈래.”
“오늘은 못 보낼지도 모르는데.”
“있을 거라고 해도 보낼 것 같아, 오빠는.”
그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저녁을 집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중국집에서 시킨 탕수육이 배달되고 그가 비닐을 벗겼다. 나는 여전히 그의 어깨에 기댄 채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스 붓지 말고 그냥 찍어서 줘.”
“먹여달라는 거야?”
“응. 귀찮아. 씹는 것도 귀찮을 정도야.”
그의 어깨에서 받아먹는 탕수육에선 사과맛과 시큼한 맛이 났다. 늘 이러면 좋을 텐데. 이제 그는 내게 크나큰 안정이 되고 있었다. 불안스러운 안정. 그가 날 내보려고 하면 언제든 뒤돌아 가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오늘은 아니라는 것. 묘한 안정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의 침대에 함께 누웠다. 편한 바지였지만 누워있기에 편한 차림은 아니었다. 등 뒤에서 그가 날 안은 채로 우스운 코메디 프로그램을 함께 보았다. 발을 움직일 때마다 스타킹이 이불과 부딪쳐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건조하고 불편한 느낌이었다.
“옷을 벗고 있을래?”
“응.”
내가 가디건과 스타킹을 벗고 바지까지 훌렁 벗어버리자 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내가 무서워? 그런 눈초리가 뭐야?”
“무서운 게 아니라 곤란한 거지.”
“곤란하긴. 편하게 있고 싶을 뿐이라고.”
다시 그의 팔베개를 하고 텔레비전을 응시했다. 허리께를 매만지는 그의 손길에서 고민이 느껴졌다. 그리곤 굳어있듯 얹어있는 그의 손. 내 몸이 그를 기억하게 되면 그는 애인을 잊고 완전히 내 것이 될 수 있을까?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3년을 만났고 이런 경우도 많았으리라. 익숙해져 버린 그녀보다 내가 더 탐나지 않을까? 그도 남자니까. 어리석은 생각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지금 주저하고 있는 거야?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고민 안 해. 지금 날 유혹하려는 거지?”
“잘 알고 있네. 오빤 내 몸에 흥미가 없어? 오빠 타입이 아니라서? 내가 좀 더 작고 통통했다면 달라질 수도 있는 거겠지?”
“바보 같은 소리다. 정말. 더 자극하면 곤란해. 나 참을성이 많진 않거든.”
난 누운 채로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렸다. 그 손을 그의 손이 힘 있게 잡았다. 멈추어 달라는 것 같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자야 한다면 오늘이어야 할 것 같았다.
“답답해. 옷도 마음도 다 벗어버리고 싶어. 오빠가 내 마음에 들어와서 마음까지 무거워져 버렸다고. 이렇게 하면 마음이 가벼워 질 것 같아.”
작은 팬티마저 침대 밑으로 떨어트렸다. 알몸이 된 채로 그에게 꼭 안겨 있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거친 숨을 쉬고 있었다. 곧 참을성을 잊은 그의 손이 분주해졌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나의 몸 구석구석을 매만졌다. 그를 마음에서 덜어내게 될지 아니면 더 깊은 곳에 묻게 될지 잠시 궁금해졌지만 그런 생각도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오로지 거친 그의 숨소리에서 나를 느끼고 있었다. 그가 내 위로 올라와 천장이 그의 얼굴로 가려져 버렸다. 이미 세상을 가리고 있는 그였다. 그를 통하지 않고는 세상을 바라볼 수 없을 것만 같다. 우린 더운 땀을 흘리며 춤을 췄고 한 순간 코끝이 찡해졌고 그 다음엔 밝은 빛을 본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도 사실이었고, 한편 무거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업무 시간에 그의 은밀한 눈빛을 받는 것만은 좋았다.
그날은 다른 날과 혼동이 될 정도로 비슷한 날이었다. 날이 흐리지도 그리 맑지도 않았으며 기억에 남는 친구의 전화가 온 것도 아니었다. 점심이 지나 그의 문자에 즐거워했고 그가 전화 받는 모습을 보며 애인이 아닐까 상상했으며 그에게 길들여지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저녁에 그를 만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오후 모두들 퇴근을 하고 외근 나간 그를 기다리고 있을 때 갑작스레 귀민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나 같은 거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듯 자리에 앉은 그녀는 컴퓨터를 켜고 뽕뽕 소리를 내며 오락을 하고 있었다. 무척 신경에 거슬리는 소리였다. 병이 깨지는 소리와 총 쏘는 소리는 내 마음을 부셔놓겠다는 협박처럼 들렸다.
‘나도 너 같은 거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근래 들어 회사 사람들과 부쩍 친하게 지내고 있었지만 그녀에게만은 다정히 말을 건넨 적도 없었다. 오락 소리만큼 시끄러운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고 고음의 목소리가 사무실에 퍼졌다.
“어, 소영아! 웬일?”
친구는 있는 모양이지, 그 성격에. 아마도 나는 입을 삐죽거렸을지도 모르겠다.
“남자 친구 있지. 지금 사이는 좋지 않지만 금방 화해할 거야. ······. 응. 어머, 너 몰랐어? 회사 사람이잖아. 아주 평범한 사람이야. ······. 당연히 날 떠받드는 남자지. 내가 안 그런 남자 만나는 거 봤냐? ······. 나이는 많아. 세살 차이.”
그녀가 회사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었나 생각이 들 때쯤 그녀 입에서 찬영씨의 이름이 거론됐고 난 순간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좀 생겼지. 그래서 우리 회사 한 기집애도 재수 없게 꼬리치고 그래. 어차피 내가 그 꼴은 안 볼 거지만.”
그녀의 시선이 나한테 박혀 있었다. 날 바라보며 친구와 통화하는 그녀는 공포영화 한 장면처럼 섬뜩했다. 몸에 가시가 돋는 기분. 난 서둘러 회사를 빠져 나왔다.
‘이찬영, 이 바보 자식아! 니 애인이 저 기집애였던 거야! 니가 지키고 싶던 애인이 쟤였냐고! 당신 우리 두 사람 가지고 논 거였어?’
그에게 당장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음은 더디게 느껴질 뿐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순 없었다.
‘좀 받으란 말이야!’
실제 그가 전화를 받은 것은 전화가 걸린 지 채 30초가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는 아직 매장에 있다고 했고 기다릴 순 없는 난 당장 그리로 간다고 했다. 화가 난 상태에선 운전을 못하게 하는 그였지만 그것이 이젠 상관이 없었다. 만약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를 다신 보지 않을 거니까. 길게 줄서 있는 차량행렬을 비집고 그가 있는 곳에 도착을 하고보니 순간 망설여졌다.
‘무슨 말을 하러 온 거야? 애인이 있다고 처음부터 말한 사람한테. 귀민이 애인이라고 헤어질 수 없다고 하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헤어진 후 그가 보고 싶으면 달려가지 않을 자신 있어, 정홍주?’
아주 초라한 여자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가 오기 전에 조금만 울겠다고 마음먹었다. 세상사람 아무도 모르는 눈물을 아주 조금만 흘릴 거라고 말이다.
“당신이 지키고 싶은 여자가 귀민이었어?”
그의 면전에서 말을 던지면서 너무나 비참했다. 사실이 그렇든 아니든 떠날 자신이 없는 내가 가슴에 구멍이 뚫린 인형처럼 느껴졌다.
“아니야. 무슨 소리를 듣고 온 거야? 귀민이가 그래?”
“귀민이? 친숙하게 부른다. 들은 말이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나봐.”
“귀민씨랑은 아무 관계가 아니야.”
“그런데 왜 그런 말 내 귀에 들리게 하는 건데? 당신 여기저기 여자 널려놓는 버릇 있는 거 아냐? 내가 우연히 걸린 거고!”
“정홍주! 널 깍아 먹는 말 좀 하지 마! 그럴 리가 없잖아. 어쩜 넌 나를 한순간도 못 믿어주는 거니?”
“그럼 누군데! 당신 애인이 대체 누구야!”
묻고 싶지 않은 말이었는데. 끝까지 묻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입에서 나온 말은 사라졌지만 뱉은 말은 뱉은 말이다.
“말하고 싶지 않아.”
“말하고 싶지 않다고? 말도 안 해주면서 매일 그 여자와 날 견주는 거지? 내가 그런 꼴 언제까지 참아줄 거라 믿었어? 나도 이젠 좀 알아야겠어. 알고 생각 좀 해야겠고. 누군데? 그 사람 어떤 사람이야? 나도 물을 권리쯤은 있다고 생각해!”
“우리 안 본지 1년 됐어. 너랑 비교하지도 않고.”
“나만 바라볼 수는 없어?”
“미안해. 이러지 마.”
“안본지 1년이나 됐으면서 무슨 애인이야? 헤어져, 그럼 되잖아.”
“헤어질 수 없는 사람이야. 네가 자꾸 이러면 널 볼 수가 없어.”
“그건 내가 헤어지자고 해도 나 잡지 않는단 뜻이지?”
“응. 널 잡을 수는 없어, 난.”
그의 말에 따르면 귀민이와는 밥을 몇 번 먹었을 뿐이라고 했다. 더는 아무 관계가 아니라고. 그리고 날 만난 후로는 연락을 피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날 달랬고 난 바보같이 마음이 조금은 수그러졌다.
“집으로 갈래? 기분 좋지 않으면 저번에 그 바에서 술이나 마시자.”
꽉 막힌 도로에서 느릿하게 움직이는 차에서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있자니 세상이 느릿하게 보였다. 멀리 한강이 보이고 성수대교가 천천히 옆을 스쳐가고 있었다. 난 결심했다. 애인을 버릴 수 없다는 남자와 한달 안에 헤어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