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밤이 깊은데 문 저편에서 하녀가 초란을 불렀다.
“저… 초란 언니?”
“무슨 일이니…?”
“손님이…”
“난 이미 손님을 받고 있지 않니…”
“꼭 언니를 불러달라고…”
“안 된다고 하면 되지 않아?”
“그… 그게…”
하녀는 상당히 곤란한 눈치였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파악한 초란이 적령에게 말했다.
“금방 나갔다 오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거라…”
초란이 방을 나서서 자신을 찾은 손님을 확인한 연후에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적령에게 곤란한 청을 하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모셔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구더냐?”
초란은 잠시 망설이는 듯 했다.
“어서 말하거라.”
“철기주라는 장수 입니다.”
“그래…”
“적령님과 같은 눈을 하고 있어서… 제가 위로를 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너는 지나치게 총명하구나…”
“네?”
“영웅을 알아보다니… 이런 곳에 있기는 아깝구나… 그만 나가 보거라.”
“그럼…”
적령의 방을 나온 초란은 곧바로 철기주가 있는 방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철기주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은 더 말이 없으시군요.”
“…”
“술만 드실 건가요?”
“널 탐해서 온 게 아니다…”
“그분과 같군요…”
“누구 말인가?”
“적령이라는 목진국의 장수 입니다.”
“훗… 소문대로군…”
“네?”
“영웅호걸이 아니면 손님으로 받지 않는다는 것 말이다.”
“칭찬으로 알겠습니다.”
철기주가 술을 받으며 말했다.
“그냥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다. 그뿐이다.”
“이렇게 마주하니 처음 뵐 때가 생각나는군요.”
“처음… 볼 때라…”
“네… 다 허물어져 가는 담벼락에 기대어 주무시고 계셨지요.”
“특별한 곳이란다.”
“그래요…? 그런데 며칠씩 꼼짝 않고 계셔서 저는 굶어 죽으려는 자로 착각했답니다.”
“그래서 음식을 준 것이냐?”
“그냥… 어린 시절 먹을 것이 없이 굶주려 살던 때가 생각났을 뿐입니다.”
“그래… 난 네가 음식을 전해주는 손을 보고 그만 환상을 보는 줄로 생각했다.”
“어째서…”
“말했지 않느냐… 그 담벼락은 특별한 곳이라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아직은 때가 아니니… 다음에 들려주마…”
“…알겠습니다.”
“그보다 네 이야기를 해 보거라…”
“…”
초란은 술을 한잔 마시고는 말했다.
“제 푸념을 해도 되겠습니까?”
“네 이야기라면 지난번에 다 듣지 못한 이야기를 마저 듣고 싶구나…”
“글쎄요. 별로 재미 난 이야기가 아니라서… 그저 그뿐입니다. 관청에서 이곳에 팔려 온 것.그것이 제 행복이 끝난 시점입니다.
초란은 잠시 눈물을 보였다.
“남방인을 원망하느냐…?”
“…”
“이곳은 상인들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곳이다.”
“그게 무슨 뜻인지요?”
“너는 네 아버지가 다른 상인들의 시기를 사서 음해를 받아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이곳 중림부는 네 아버지가 북방인 이든… 외국인이든… 그가 상업으로 돈을 버는 것을 문제 삼은 곳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다른 연유가…”
“더군다나 이런 중립지역에서 그런 일로 참수라니… 그리고 그 소생은 영문도 모른 채… 기생집에 파는 것도 법도에 없는 일이다.”
철기주의 이 말에 초란은 갑자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장군님이야 말로 세상물정을 잘 모르시는 군요.”
“…무슨 뜻이냐?”
“전란 중에 법도가 서 있을 것이라 생각하시니 말입니다.”
“…”
초란의 이 대답에 철기주는 그만 할 말을 잃어 버렸다. 그리고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전란 때문에 노동력이 부족한 곳이니, 팔려오는 부모 잃은 전쟁고아가 부지기수 입니다. 겉으로는 평화롭지만, 노예선이 항상 드나드는 곳입니다. 그것은 여자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저 같은 젊은 여자는 작은 죄만으로도 이런 곳에 팔려올 수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거 정말 부끄럽구나… 내 생각이 짧았다.”
“아니옵니다.”
“허나… 네 부모님의 일은… 틀림없이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건…”
“네 집에 찾아왔다는 그 고향의 북방인 말이다.”
“그가 왜…”
“아직도 널 찾느냐?”
“제가 비록 이런 곳에 와 있지만, 1년에 2번 정도 절 찾아와서 돌보아 줍니다.”
“돌보아 준다…”
철기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찌 말을 아끼시는 것이옵니까?”
“네 부모는 아마 그 남자의 명으로 이곳에서 첩자 노릇을 하였을 것이다.”
“네?”
“그것은 네 아비가 외상이 아닌 내상이었다는 것으로도 확실한 일이다. 아홉 개 제국의 국내 정보를 염탐하기에는 그것이 가장 용이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 일을…”
“아마… 네 부모님이 밀정활동은 처음 이곳 남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 중림부의 내상이 되어 네 염려대로 음해를 받을 위험을 감수하며 그 능력을 인정 받으려 한 것도, 물론, 너와 가족을 위한 것도 크겠지만… 좀 더 내상의 신뢰를 받으며 좀 더 넓게 그 정보망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
초란은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자 철기주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오래 살면서 아는 지인도 많은데다가 널 찾아준다는 고향의 어른도 있지 않느냐?”
“이번에는 무엇을 물으시는 겁니까?”
“어찌하여 도주할 수도 있는데, 이곳 초류향(草流香)에 조용히 들어 앉은 것이냐?”
“…”
철기주의 물음에 초란은 눈물을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혼자가 널 버린 것이냐?”
“…”
#05
초란은 부모님이 참수되고, 자신이 앞으로 어찌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심한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잡혀온 후 단 한번도 자신을 찾지 않는 정혼자인 최연의(崔戀意)를 생각하면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연의 씨…”
한 달여를 눈물로 하루하루를 지세던 그녀의 마음 속에는 어느새 남방인에 대한 원망이 사무치게 쌓여가고 있었다. 자신의 부모님을 죽인 남방인과 자신을 배신한 정혼자에 대해서도…
“더러운 남방인들…”
그렇게 남방인과 정혼자를 원망하며 잠이 든 그녀를 간수가 흔들어 깨웠다.
“초란아… 초란아… 일어나! 어서!”
“…누구…?”
초란은 잠결에 자신을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것은 놀랍게도 자신의 정혼자 최연의였다.
“연의 씨?”
“어서 나와?”
“네?”
최연의는 관병의 복장이었고, 자신이 갇힌 옥사는 이미 열려 있었다.
“어떻게…”
“관병을 매수할 돈을 구하느라 조금 늦었어…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당신…”
“감동하기는 아직 일러… 어서 나가자.”
사실 초란은 너무나 긴장되어 있었으나, 최연의는 조금 흥분되어 있었다.
“널 다시 보게 되다니, 이제 죽어도 소원이 없어.”
“뭐야? 그게 무슨 소리야? 불안하게…”
“하하… 미안해… 자 어서 나가자. 시간이 얼마 없어.”
그렇게 돈으로 관병을 매수해 옥사를 빠져 나온 초란과 최연의는 곧바로 항구로 향했다.
“어디로 가는 거야?”
“항구로”
“항구?”
“그래… 중림부를 떠나는 거야.”
“그럼 어딜 가려고?”
“아직은 몰라. 하지만, 우리 둘이 있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상관없어. 뭐 네 고향도 좋고…”
“연의 씨…”
두 사람이 야음을 틈타 도주해서 항구에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날이 밝고 있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대로 두 사람은 배에 올라타 지하 선실에 숨었다. 그리고 이제는 출항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운 배 및 선실에 두 사람만 남게 되었을 때 초란이 말했다.
“미안해… 연의 씨…”
“뭐가?”
“나… 사실… 연의 씨를 원망했어… 날 버린 줄 알고…”
“바보같이 그럴 리 없잖아… 난 절대로 널 버리지 않아. 절대로…”
“사랑해…! 연의 씨…”
“나도 널 사랑해. 죽도록…”
그렇게 두 사람이 꼭 안고 서로를 위로할 즈음 갑작스럽게 밖이 소란스러워 졌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
그때, 갑작스럽게 지하 선실에 관병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저항할 사이도 없이 포박되고 말았다.
“연의 씨!”
“초란 아!”
그렇게 두 사람은 또 다시 헤어지고 말았다.
“안돼! 연의 씨!”
어두운 지하 옥사에서 초란이 다시 밖으로 나온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뒤였다. 그녀는 포박된 채 관청의 광장으로 끌려 나왔다. 그리고 중림부의 관장인 허백(許柏)이 그녀에게 말 했다.
“이자들을 아느냐?”
“네?”
그녀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러나 정신이 몽롱해진 그녀 앞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때, 끔직한 광경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의 앞에 있는 것은 장대에 높이 매달린 정혼자 최연의(崔戀意)와 그 부모였다.
“캬아 악~”
그녀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혼절했고, 그 후 그녀가 깨어난 곳은 바로 초류향(草流香) 이었다. 그렇게 참담했던 그날의 기억을 회상하며 그녀는 몸을 떨고 있었다.
“여기를 떠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냐? 복수…”
“…”
“…”
“글쎄요… 처음에는 그 허백 이라는 자를 죽이기 전에는 이곳 중림부를 떠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수년이 지나면서 이젠… 그 기억마저 희미해져 갑니다.”
잠시 긴 침묵이 흘렀다.
“훌륭한 남자구나…”
“네?”
“최연의라는 네 정혼자 말이다…”
“…”
그 후로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술만 계속 들이키고 있었다.
“그의 직업은 무엇이었느냐?”
“선비였습니다.”
“선비라… 전란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구나…”
“그렇습니다. 법도보다는 칼이 먼저인 세상이니까요…”
“글도 그 선비에게 배운 것이냐?”
“그건…”
“어디에서 배우는 것이냐?”
“가끔… 연의 씨가 글을 깨우치러 나가는 글방에 따라간 적이 있어서, 연의 씨의 스승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줄곧 그분에게 글을 배웠습니다.”
“남방인을 모두 원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더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자는 만나는 것이냐?”
“제가 그런 험한 일을 당하고, 또 기방에 있게 되자. 그 동안 알고 있던 자들은 한 순간에 모두 모르는 타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분만은 절 따뜻하게 맞아주셨습니다.”
“알 수 없는 일이군”
“네?”
“네가 알던 자들이 모두 널 외면한 것은 어느 정도 관청이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글방의 선생이라는 자는 그런 네 사정을 모른다 말이냐?”
“모를 리가 있었겠습니까?”
“그의 마음이야 고맙게 받을 수 있겠지만, 그 후 그에게 아무 일도 없었느냐?”
“네…”
“어째서…”
“저도 나중에 그분께 학문을 깨우치며 알게 된 것인데 그분은 현애규(賢愛揆)라는 분으로… 세상에 학문을 하는 자라면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감히 관청에서도 그분께 어찌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에게는 항상 그분을 모시려는 각 국의 제상들이 드나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간신적자들이 모시려고 하는 자가 그리 훌륭하단 말이냐?”
“그건 직접 만나보시고 판단하심이 옳을 것 같습니다.”
“네가 보기에는 어떠하냐”
“딱히 전쟁을 피해온 분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보기에는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습니다.”
“주인 이라…”
철기주는 깊은 생각에 빠져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