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난 레오는 왠지 기분이 좋아 늘 일어나자마자 입에 물던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레오는 기지개를 켜고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런던의 하늘은 뿌옇게 흐려 있었지만, 레오는 그 하늘마저도 퍽 멋있다고 느꼈다. 아침은 거의 안 먹는 레오지만, 효은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아침을 꼭 먹는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사실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 사이에서 떠돌던 ‘정력비법’ 종에 한 구절이 생각나서 이다. 아침을 안 먹는 남자들은 40대가 되면 정력이 급속도로 감퇴한다나? 레오는 말도 안되는 소리야. 하고 중얼거렸지만, 어쨌든 그는 아침에 토스트 한 조각이라도 꼭 먹고 나온다. 그 다음에는 런닝머신을 간단히 뛰고 샤워를 한 다음에 출근 준비를 한다.
레오가 즐겨 입는 수트는 좀 어두워 보이는 색이다. 워낙 젊은 나이에 회사 총수가 되다보니 좀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선택한 색상들이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런 어두운 옷은 쳐다도 안 본다. 회색, 연한 네이비, 혹은 붉은 색상의 무늬가 들어간 체크 등의 수트도 몇 벌 샀다. 더군다나 캐주얼 정장으로도 한 벌 샀다. 오늘은 아예 청바지를 입고 출근해 볼까? 레오는 고개를 흔든다. 오늘은 잡지사 창간일이다. 색동 리본도 잘라야 하고 간단한 연설도 해야 하고 저녁에는 만찬회에 가야 한다. 바쁘겠군. 고민하다가 레오는 네이비 바탕에 회색 스트라이프 수트를 고른다. 그리고 연 보랏빛 넥타이를 맨다. 완벽하다.
레오는 자신의 독신자 아파트를 나와 회사를 차를 몰았다. 아침 8시 30분이다. 출근하는 시간은 8시 45분. 출근해서 신문을 보고 요한센이 건네는 커피를 마시며 간단한 브리핑을 듣는다. 그리고 9시면 일과가 시작된다. 그런데 거기에 또 한가지 추가가 된다. 바로 효은에게 전화하는 것이다.
-오늘 10시에 잡지사 출간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2시에는 중역회의, 또 7시부터 잡지사 출간을 기념하는 만찬회가 있습니다.
레오는 커피 향을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찬회, 어떻게 할까요?
-뭘?
레오가 신문을 펴들며 되물었다.
-아가씨 초대 할까요?
잠시 생각하던 레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너무 주목받는 것도 부담스러울거야. 오늘은 혼자 가지. 뭐.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레오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레오의 마음을 알아차린 요한센은 그저 고
개만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준비할까요?
여 비서가 물었다.
-그, 강효은씨 초대하는 거 빼고 다시 연락해.
-알겠습니다.
요한센은 자리에 앉아 오늘 중역회의에서 발표할 프레젠테이션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잠깐 숨을 돌린 레오는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옆에는 요한센이 있었다.
-오늘은 뭘 먹지?
-글쎄요. 저는 집에 가서 먹어도 되는데요. 사장님 때문에 매일 밖에서 먹다보니 이젠 사먹는 것도 질립니다.
요한센의 투정에 눈을 부라린 레오는 화를 버럭 내며 말했다.
-그럼 자네는 집에 가서 밥 먹고 오게!
-혼자서 드실려구요? 그럼 쌩뚱할텐데?
요한센은 씩 웃으며 받아쳤다.
-빨리 결혼하십시오. 그럼 좋잖아요?
-결혼해도 점심 차려줄 아내는 없어. 집에서 밥만 하는 여자로 만들긴 싫어.
-효은 아가씨를요?
요한센의 말에 레오는 움찔 했다.
-아니, 꼭 그녀가 그렇다기보다는 어떤 여자든지..
레오가 중얼거리듯 변명을 늘어놓자 요한센이 고개를 흔들었다.
-전제 윈즈버그 아가씨보고는 제발 집에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미란다 얘기 좀 하지마. 머리가 다 아프니.
레오가 단호하게 말하자 요한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식당 안에는 손님이 좀 많았다. 아무래도 점심 시간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레오와 요한센은 구석진 자리에 가서 앉았다.
-주문하시죠.
요한센이 메뉴를 레오에게 건넸다. 레오는 웻지 감자를 곁들인 커틀렛과 감자 수프를, 요한센은 새우 튀김을 곁들인 센드위치를 주문했다.
-여긴 아무래도 감자 요리가 맛있어.
레오는 물을 한잔 마셨다.
-그래요?
-그럼.
레오는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대답했다. 어쩐지 연애를 하니 식욕이 왕성해지는 것 같았다. 음식이 나오자마자 몇일 굶은 사람처럼 먹어치운 레오는 효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밥 먹었어?
-음, 지금 먹고 있어요. 당신은?
-나는 먹었는데. 뭐 먹어? 그, 싸구려 음식 먹지 말고 비싸고 맛있는 거 먹어. 내 카드라도 보내줘?
-또 그런다. 그러지 말랬죠? 난 괜찮아요.
-그래도 난 자기 걱정에..
레오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됐어요. 나 잘 있으니 걱정 말아요. 있다 전화할게. 안녕.
매정하게 효은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새우 꼬리를 접시 구석에 내려 놓으며 요한센이 말했다.
-너무 꽉 잡히신 거 아니에요?
-아니야!
레오가 적극적으로 부정했다.
-왜 그렇게 화들짝 놀라십니까.. 어디 찔린 사람처럼.
-자네, 빨리 먹지 못해? 시간은 금이라구!
괜히 화를 내며 남 이사 잡혀 살던지 말던지. 레오가 중얼거리자
-사장님만 행복하시면 되는 겁니다. 안그래요?
요한센이 윙크를 해 보이며 말했다.
-회의 시작합시다.
레오가 말하자 모두들 일제히 파일을 폈다. 요한센이 들어와 잡지사 설립으로 인해 얻는 이익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요한센이 열을 내서 브리핑을 하고 있는 동안, 레오의 머릿속은 딴 생각으로 가득했다. 있다 만찬회 끝나고 만나러 갈까. 아니면 그냥 집으로 갈까. 정말 내가 효은이에게 끌려가는 건가. 흠, 그렇다면 조금 기분이 상하는 걸.
-사장님?
어느새 요한센의 브리핑이 끝났다. 레오는 요한센이 한번 더 부르자 그때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 그래요. 이사님들 서류 한번 검토해 보시죠.
그때, 홍보 이사 로렌이 손을 들었다. 레오는 일그러지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네, 이사님?
-뭐, 이건 잡지사에서 결정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만, 우리 집지사에서 대 스타를 한번 키워보면 어떨까요? 이미 패션 업계에서는 모델 한 명쯤 키우는 게 관례고, 또 신선한 모델을 잘만 키우면 엄청난 파급 효과가 있을텐데요.
-아, 그건 이미 잡시가 쪽에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내년 신년호에 모델 컨테스트 공고가 나갈겁니다.
요한센의 말에 레오는 언제 그런 이야기가 있었나? 하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나 곧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홍보 이사님. 대답이 되셨나요?
-네, 알겠습니다.
-오늘 여기 모이신 모든 분들 만찬회에 나오셔야 합니다.
레오가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레오는 넥타이부터 벗어던졌다.
-하루가 너무 길군.
레오의 투덜거림에 요한센이 말했다.
-글쎄요. 아가씨와 함께 있으면 하루가 한 시간일걸요?
-요한센.
레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네, 사장님?
-자네, 너무 말이 많아.
-그렇습니까? 그래도 전 효은 아가씨가 100점을 준 남자인데요?
-100점은 아니었어. 셋 중 제일 낫다 그랬지.
-그래도 빵점보다야 낫죠.
요한센의 말이 레오의 상처를 건드렸다.
-그래. 난 빵점이었어.
레오는 고개를 숙이고 짐짓 상심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 너무 상심하진 마시죠. 결과가 중요하니.
요한센의 말에 용기 백배한 레오는 일어나 거울로 다가갔다.
-뭐, 나도 이 정도면 빠지는 외모는 아니잖아? 능력도 있고. 그렇지, 요한센?
-그렇죠. 솔직히 사장님하구 아가씨하고 모델을 하셔도 좋을 것 같네요.
-둘 다 나이가 너무 많아. 모델 하기엔. 요즘 모델들은 다들 스무살도 안 넘었잖아?
-니콜 키드만, 줄리아 로버츠, 케서린 제타 존스. 모두 애가 딸린 유부녀 모델 아닙니까?
-하긴. 그녀들은 그녀들 나름대로 아름다움이 있으니.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해봐?
-제가 보기엔 아가씨야 동안이고 또 키도 크고.. 늘씬하시잖아요. 꾸미기만 하면, 왠만한 모델 뺨 칠 것 같은데요.
-내가 봐도 그래.
레오가 맞장구를 쳤다. 요한센은 이 닭살에 얼굴을 찌뿌렸다.
-너무 하시네요, 사장님. 소름이 끼칩니다.
요한센은 정말 소름이 돋는다는 듯 몸서리를 치고는 방을 나갔다. 그러나 레오는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말 모델을 시켜봐?
-공작부인 오셨습니다, 사장님.
요한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 어머니!
의자에 기대 책을 읽고 있던 레오가 깜짝 놀라 일어났다.
-언제 돌아오셨어요?
-방금 도착했다. 아주, 네 기사로 신문이 도배가 되었더구나.
-아, 그거요. 죄송해요, 어머니 먼저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레오는 소파에 앉았다. 요한센이 홍차를 내 왔다.
-그런데 어떻게 된거냐? 정말 그 아가씨와 잘 되가는거야? 저번에 차 사고 나서 집에 왔을 때는 바락바락 소리 지르더니.
-글쎄요. 그냥. 느낌이 좋은 여자에요. 따뜻하고요.
레오는 홍차를 한모금 마셨다.
-그래? 어쨌든 집에 한번 데리고 와라. 난 그 아가씨한테 한국 이야기 듣고 싶다.
공작 부인은 여기까지 이야기 하고 일어섰다.
-벌써 가시게요?
-자선 모금 행사가 있어서 거기 가야해. 집에 들러서 옷 좀 갈아입고 가야겠다.
-그래요, 가세요. 요한센!
레오가 요한센을 부르자 요한센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어머님 가신다는데?
-네, 알겠습니다.
레오는 공작부인이 나가자 고민에 잠겼다. 집에 데리고 가 인사를 한다는 것은 좀 심각한 문제였다. 그렇게 되면 거의 약혼녀가 되는 것이다. 그래? 내가 그녀와 결혼할 수 있을까? 또 다시 생긴 문제. 이것은 연애와는 다른 문제였다.
이번주 연재 끝이네요...ㅋ 두 편을 같이 쓸려니 정말 바쁩니다.
그렇지만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셔서 너무 행복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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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레오. 그러나 효은은 결혼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로스베너 그룹이 주최하는 자선 음악회에 초대된 효은. 그러나 일 때문에 빠지게 되고 망신을 당한 레오는 효은에게 화를 내는데.. 안그래도 미란다 때문에 심란한 효은! 레오의 말에 발끈 하게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