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wi - 22
"오빠, 시합 잘 봤어. 이긴 것도 축하하고.“
“······.”
분위기를 바꾸려고 한 병진이의 말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민성 오빠는 그리움을 듬뿍 담은 눈으로 나를 계속 응시하고 있었고, 서루 오빠는 그런 우리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나는 그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아, 배고프다. 거기 너무 춥더라. 그래서 더 배고픈 것 같아. 밥 먹으러 안가?”
“나도 운동했더니 배고프네. 밥 먹으러 가자.”
그 때서야 민성 오빠가 병진이의 말에 동조를 해주었다.
“일단 타. 혜림아.”
서루 오빠는 민성 오빠를 의식하는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나를 차 쪽으로 데리고 갔다. 민성 오빠와는 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오빠도 타.”
병진이의 말에 민성 오빠도 차에 오르려 했을 때 서루 오빠가 말했다.
“차도 없으신가 봐요?”
“예. 없습니다.”
“오빠, 왜 그래? 나이가 어리니 당연히 없지.”
내가 민성 오빠를 편들자 서루 오빠의 눈이 더욱 매섭게 변했다.
“나는 스무 살 때부터 있었는데.”
“엄마 차라면서.”
“그건 그냥 한 얘기지. 이런 차 가지고 잘난 척하는 거 우습잖아.”
이런 차? 고가의 외제차임을 모두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적당한 말은 아니었다. 분명 서루오빠는 민성 오빠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질투를 느끼는 건가?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일이었지만 이렇게도 예민하게 나올 줄은 몰랐네.
내가 놀란 것은 두 남자가 벌이는 신경전이 아니라 신경전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결국 이 싸움의 심판은 나였다. 내가 손을 들어 주는 사람이 이기는 싸움. 두 남자를 두고 선택권을 가진다는 것에서 짜릿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기분만 짜릿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짜릿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새 건전지를 혀에 얹고 있는 것처럼 약하지만 몸으로 짜릿함을 느끼고 있었다.
밥을 먹으러 간 곳은 종로에 조금 못미처에 있는 파스타 전문점이었다. 내 옆에는 서루 오빠가 병진이의 옆에는 민성 오빠가 앉았다. 다행히 민성 오빠는 대각선이 아니라 바로 내 앞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곧 차라리 대각선에 앉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의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가는 내 그리움을 몽땅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분명 민성 오빠를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결혼할 서루 오빠를 버리고 단 한번 만난 남자를 따라갈 자신은 없었다. 그냥 좋은 동생으로 남아야지 머리에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 결혼하니?”
“몰라. 아직 부모님 인사도 안 드렸는 걸.”
민성오빠의 질문에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머리 속에서는 동생으로 남아야한다고 했지만 마음은 그를 남자로 보고 있었다. 이 남자 앞에서 결혼이라는 말은 꺼내고 싶지 않다.
“민성오빠, 둘이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 뭐 나랑 영규 오빠보다는 못하지만.”
“두 분 안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민성 오빠가 서루 오빠에게 도전적으로 물었다.
“혜림이 고등학교 때부터요. 제가 과외를 가르쳤거든요. 그 때부터 정말 예쁜 동생이다 생각했어요. 당시부터 혜림이가 절 좋아하는 걸 느꼈죠. 맞지, 혜림아?”
“사귄 건 이주도 안됐잖아.”
계속 민성 오빠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 민성 오빠는 나의 말에 표정이 가끔 밝아지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내 옆에 다른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참지 못하겠는지 가끔 입술이 일그러지기도 했다.
“그게 인연인 거지.”
서루 오빠도 질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오빠, 둘은 결혼하면 어디에 살 거예요?”
“글쎄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아서. 집이 서로 가까우니 그 동네에 살지 않을 까요? 혜림이가 아직 어리니 친정에 가깝게 사는 것이 좋을 것도 같구요.”
“어린 신부라. 어리다고 생각하시면 키워서 결혼을 하시죠. 저는 혜림이를 보고 어리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그 때 식사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심한 말들이 오갔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포크가 접시에 부딪쳐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침묵을 깨기 위한 대화를 대신해주고 있었다.
식사 이후 두사람의 신경전에 노심초사하는 나를 걱정했던지 민성 오빠가 어느 정도 물러나 주어서 병진이와 나의 대화가 주를 이루었다.
“혜림아! 핸드폰 좀 볼게.”
민성 오빠가 탁자위에 놓여 있던 내 핸드폰을 가져갔다.
“예쁘다. 나도 이걸 살 걸 그랬나봐.”
그리고 버튼을 누르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울리는 민성 오빠의 핸드폰.
서루 오빠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민성 오빠의 핸드폰을 뺏어 번호를 지워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기엔 서루 오빠의 자존심은 너무나 셌던 걸까? 결국 서루 오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혜림아, 나 또 병원 들어가 봐야 되거든. 집에 데려다 줄게. 오늘은 집에 일찍 가라.”
“싫어. 오빠, 먼저 가. 나는 사람들이랑 놀다 갈래.”
“날씨가 추워.”
“나 어린 애 아니야. 택시타고 가면 되니까 먼저 가.”
이미 자존심이 상한 서루 오빠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오빠가 가고 난 후 남은 세 사람. 거리에는 찬 바람이 불었다. 빨리 커피숍에 들어가 따뜻한 커피로 언 입을 녹이고, 언 발도 녹이고 싶었다.
“우리 커피 마시러 갈까?”
“혜림이 너 너무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뭘?”
“해도 너무 한다. 내가 서루 오빠였음 못 참았어.”
내가 심하기도 했다. 병진이의 말을 듣고도 스스로의 잘못을 알기에 변명도 할 수 없었다.
“결혼할 남자 앞에서 그렇게 대놓고 바람을 필 수가 있니? 염치없는 계집애.”
“니가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
“아니, 상관할 거야. 내가 말했지. 둘은 안 어울린다고. 넌 서루 오빠에게 감사해야돼. 너같은 거 데리고 살려고 하니까 말이야.”
“병진아, 말이 너무 심하잖아. 미안한데 너 집에 가라. 나 혜림이랑 할 얘기 있어.”
“오빠!”
“진짜 미안해. 오늘은 그냥 가.”
“오빠도 그러는 것 아니야. 곧 결혼할 여자를 뺏고 싶어?”
“미안하다고. 우리 먼저 갈게.”
민성 오빠는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차가운 바람을 억행하며 우리는 걸었다. 앞으로의 바람은 이보다도 매서울테지. 하지만 이 남자 곁이라면. 곁에 있어준다면 마음만은 뜨거울 것 같아.
병진이를 버려두고 한참을 걸어왔을 때었다. 나는 울고 싶었다. 단지 민성 오빠를 다시 보고 싶은 것 뿐이었다. 서루 오빠를 아프게 하고, 이렇게 나쁜 여자가 될 마음은 없었다. 오빠는 내 마음을 아는지 내 잘못이 아니라는 듯 꼭 안아주었다.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보고 싶었지, 너두?”
“······.”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정말 미칠 것 같았어.”
오빠는 내 턱을 들어 내 입술을 마셔버렸다. 그간의 갈증을 한꺼번에 풀려는 듯 거칠게 그리고 오랫동안 내 안의 공기를 다 들여 마시고 있었다.
“이게 내 진심이야.”
그제야 수군대는 사람들을 의식하게 되었다. 낮에 뜨겁게 키스를 하는 연인은 고대 앞 안암동 거리에 어울리는 풍경은 아니었다.
“오빠, 일단 가자.”
“네 진심도 그런 거지?”
오빠는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응. 나도 보고 싶었어.”
오빠는 소리 내어 웃더니 내 손을 잡고 경쾌하고 빠른 걸음으로 나를 또 다른 세상으로 인도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