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wi - 36
믿는 것이 아니었는데.
너무 쉽게 돌아서준 서루오빠에게서 느꼈던 개운치 않은 기분을 믿었어야 했다. 내 마음을 빼앗아 버린 남자가 있음을 알고 돌아선 그가 어머니를 대동해서 상견례를 마무리하고, 지하 주차장에서 내 마음을 다시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가 선물로 가족을 매수하려했던 비겁함을 가진 사내라는 것을 잊지 말았어야 했다.
민성 오빠가 바빴던 토요일 오후. 서루 오빠의 어머니가 찜질방을 다녀가셨다고 했다. 우리 엄마가 입을 딱 벌릴 만큼의 선물을 들고. 갑작스런 어머니의 방문은 단지 서루 오빠가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아서 벌어진 어머니의 개인플레이라고 보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병환 중인 아버님께는 죄송했지만 더는 끌어서는 서루오빠의 먹이 거리밖에 안 될 것이 뻔했다.
“오빠! 어머니가 오늘 찜질방에 다녀가셨대. 어떻게 된 일이야?”
- 나도 모르는 일인데. 부모님께는 아직 말씀드리지 못했다고 말했잖아. 어머니가 혼자 움직이신 거야.
그 사실을 듣자마자 핸드폰부터 찾았다. 이젠 단축 번호마저 갖고 있지 않은 서루 오빠였기에 번호를 일일이 눌려야 했다. 전화를 빨리 받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전화 속의 오빠의 음성은 모르는 일을 통보받는 사람이라고 보기엔 너무 침착했다.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변명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정말 이러기야?”
- 뭘 어쨌다고?
“우리 부모님께도 말씀 드렸지만 이래서는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 아직 말씀 못 들렸다는 것은 너도 알고 있는 일이잖아. 지금 엄마가 하시는 일까지 막을 여력은 없어.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에 있어? 그럼 내가 당장 말씀드릴까?”
- 흥분하지 말고 만나서 얘기하자. 언성 높여서 해결될 일이 아니야. 좋은 방법을 같이 생각해 보자. 니가 이쪽으로 와. 일하는 중이라 내가 가긴 힘들어.
“그럼 다음에 봐. 이따 밤에 전화를 하던가.”
- 정말 바빠. 며칠 집에도 못 갈지도 모르는 형편이라니까. 미안한데 네가 잠깐만 와. 한 시간 정도라면 시간을 낼 수 있을 거야. 너도 빨리 해결하고 싶잖아.
“어디로 가면 되는데?”
오늘 확실히 마무리를 짓고 말겠어.
뮤직비디오 촬영 세트를 만들고 있다는 성내동으로 향하면서 마음을 굳건히 하고 있었다. 아버지 핑계를 대든 어떤 핑계든 매몰차게 ‘노’라고 말하리라.
“바로 앞이야. 나와”
도착해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서루 오빠는 전혀 심각하지 않은 표정으로, 아니 웃으며 다가왔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여러 명과 함께였다.
“서루 약혼자 구경 왔어요.”
“안녕하세요? 사진보다 훨씬 어려보이신다. 이 녀석 약혼자 온다고 얼마나 자랑을 하던지. 진짜 예쁘시네. 사진빨이 아니었군요.”
“반가워요. 저는 서루 형 후배랍니다.”
약혼자? 이런 흉계를 꾸며놓고 불러낸 거야?
“뭐해? 혜림아,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목소리도 이쁘시다. 남자들 다 녹겠네.”
주춤거리며 인사를 하고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해?
“오빠, 잠깐 얘기 좀 하자.”
“밥부터 먹고. 너 올 때 기다려 먹어야 한다고 내가 다 잡아놓고 있었단 말이야.”
저 뻔뻔함.
“우리 배고파요. 얘기는 나중에 하시고 밥부터 먹어요.”
힘도 세게 생긴 선배라는 남자가 내 팔을 잡아 끌었다. 팔을 빼려 했지만 놔주려 하지 않았다.
“잠시 만요.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죄송해요. 식사는 다음에 하도록 하죠.”
“에이, 이러지 말아요. 배고파 죽는 거 볼래요? 우린 정말 배고프면 죽기도 해요. 어, 막내도 왔냐?”
그 사내가 막내라고 부른 남자는...
이 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민성 오빠였다.
‘왜 저 사람이 여기에 있는 거야? 아르바이트 한다는 곳이 여기였어?’
숨이 턱하고 막혀버렸다. 내 귀도, 입도 막힌 듯 열리지 않았다.
“막내야! 형수님이야. 인사해라.”
내 팔을 잡고 있던 남자가 민성 오빠를 향해 말했다.
“이거 놓으라구요. 누가 누구 형수에요? 민성 오빠! 오해야. 그건.”
나의 말을 듣지도 않고 나름대로 상황 판단을 해버린 민성 오빠는 뒤돌아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깐만. 얘기 좀 해.”
서둘러 쫓아갔으나 잡힐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성큼 성큼 가버린 그를 쫓기엔 내 보폭이 너무 짧았다. 건물 안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민성 오빠를 겨우 잡았다.
“얘기 좀 해. 정말 끝내려고 찾아 온 거야.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이 둘러싸더니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한 거라고.”
“됐어. 듣고 싶지 않다.”
“날 못 믿는 거야? 그런데 오빠는 왜 여기 있어?”
“난 일하러 온 거야. 너처럼 연애하러 온 게 아니라구.”
“누가 연예를 하러 왔다는 거야? 서루 오빠가 여기 있는 걸 못 봤어?”
“······.”
“봤지? 봤는데도 여기서 일을 하고 있었단 말이야?”
“엄마 아는 분이 소개 해줘서 왔어. 나도 그 사람 보고선 당황했고. 당장 나가고 싶었지만 엄마 입장을 난처하게 할 수는 없더라. 그래서 내일까지만 일한다고 했지.”
“엄마 아는 분?”
서루 오빠 어머니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갔다. 이것도 서루 오빠의 계략이었을 것이다. 서루 오빠가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어머니가 민성 오빠 어머니에게 말을 전한 것일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서루 오빠가 일하는데 줄 알면서 어떻게 일을 할 수가 있어?”
“너랑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나봐.”
“나랑 상관없어. 오히려 오빠랑 상관있지. 서루 오빠가 그 분식집 옛날 건물 주인집 아들이라는 것 알고 있었지?”
“알고 있었으면?”
“오빠는 자존심도 없어? 그런 사람이랑 같이 일하고 싶었냐고?”
민성 오빠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순간 내가 엄청난 말실수를 하고 말았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이미 뱉어진 말은 형체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이번 아르바이트 자리가 서루 오빠의 계략이었음을 느끼게 하고 싶어 돌려 말한 것이 오히려 그의 자존심을 할퀴고 만 것이었다.
“왜? 건물 주인이랑 만나다가 세 들어 있는 사람 만나니까 창피하든? 그 사실을 내가 숨기고 조용히 살아줬으면 하는 거야? 영규 말이 틀리지 않았구나. 네가 돈만 밝히는 속물 같다고 했을 때 절대 그런 아이 아니라고 널 두둔했었어. 너는 순수하게 날 좋아해주는 거라고 믿었다고. 순간 눈이 멀어 친구 말도 못들은 내가 병신이지. 너 같은 속물은 상대하고 싶지 않다.”
“그런 얘기 아니잖아. 오빠가 좀 더 날 생각했다면 피할 수 있는 자리 아니었어? 먼저 배려 못한 건 오빠잖아.”
“너 세상 그렇게 사니? 네 중심적으로만 살아? 너만 있고 세상은 안 보이지? 아니면 세상이 네 발밑에 있냐? 우리 엄마 입장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했잖아. 너 때문에 우리 엄마가 아는 분한테 욕먹으면 속이 편해?”
“뭐가 내 중심적이야? 비약해서 말 좀 하지마.”
“넌 세상이 널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지? 그건 꿈이야. 나처럼 돈 없는 사람들한테는 세상 속의 내가 보여. 다들 잘났는데 살려고 바둥거리는 내가 보인다고. 옛날 건물 주인에게도 잘 보여야하는 우리 엄마도 보이고.”
“왜 이래 진짜!”
“공주병 아가씨. 이제 그만 비켜주시죠. 아니다. 어차피 네 눈엔 내가 보이지도 않을 텐데 미안하다. 내가 갈게.”
‘꿈속에 사는 공주병 아가씨? 자존심도 없이 사는 사람이 내게 할 말이야?’
멀어져 가는 민성 오빠를 나도 잡을 생각이 없었다. 사랑한다면서 절대 손해 보려 하지 않는 건 오히려 민성 오빠였다.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부둥켜안고는 상처입기를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 보다는 차라리 오빠의 말대로 공주병이 나을 것 같았다. 공주병은 자신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자기 비하적 발상. 민성 오빠가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밖에 생각이 되지 않았다.
“얘기 끝났으면 밥 먹으러 가자. 다른 애들은 먼저 갔어.”
서루 오빠가 어느새 내 옆에 서 있었다. 그런 뻔뻔함이 오히려 자신감으로 보이기도 했다.
“미안해. 밥 먹을 기분이 아니야. 얘기도 다음에 하자.”
“집에 가려고? 내가 데려다 줄게. 차 갖고 나올 테니까 기다려.”
“아니야. 혼자 갈래.”
“혜림아, 우리 결혼 못한다고 안 볼 거니? 애인 사이가 아니더라도 난 네게 편한 오빠로 남고 싶어. 예전처럼 과거의 과외 선생님으로 생각해줘라. 그럼 좋겠는데. 동생이 힘들어 하는 걸 보고 그냥 둘 수가 없어서 그래. 잠깐만 기다려.”
“마음만 받을께. 오늘은 혼자 가고 싶어. 오빠가 이해해줘.”
서둘러 건물을 빠져 나왔다. 서루 오빠가 애인으로는 싫지만 오빠로는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정말 기분이 엉망이었다. 내가 무슨 잘못으로 돈만 밝히는 공주병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건지. 민성오빠를 만나기 위해 쇼핑하고 싶은 것도 참고, 부지런해지려고 얼마나 노력하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는 더러운 기분과 날마다 힘겹게 싸우고 있단 말이야. 알아주기는커녕 면전에서 욕을 하다니 제정신이 아닌 쪽은 당신이야!
달리는 택시 안에서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죄 없는, 분홍으로 물든 손톱만 뜯어냈다.
그 날 내내 민성 오빠에게는 전화가 없었다. 물론 나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 서루 오빠를 떼어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맞이하게 될 줄 알았던 일요일은 자장면 한 그릇 시켜먹을 돈도 없이 집을 혼자 지키는 것보다도 훨씬 답답한 것이었다.
늦은 점심을 혼자 차려먹고는 햇빛이 드는 베란다에 앉아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제라도 전화라면 미안하다 말할 용의가 있는데. 햇빛이 뜨거워질수록 마음은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었지만 먼저 전화를 할 만큼 마음이 풀려주지는 않았다.
전화를 먼저 걸어볼까 망설이고 있을 때 그제서야 벨이 울렸다.
‘그러면 그렇지. 어, 이건 병진이잖아.’
“병진아, 일어났어?”
- 어, 뭐하니?
“일어나 밥 먹었어. 일찍 일어났네. 쉬는 날이라도 늦잠을 잘 것이지.”
- 별일 없으면 우리 집에 좀 올래?
병진이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기운 없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무슨 일로? 오빠 출근해서 심심해?”
- 오빠 집 나갔어. 나한테 말도 안하고. 민성 오빠도 전화 안받고. 아마 둘이 같이 나갔나봐. 나 어떻게 해?
민성 오빠랑 같이 집을 나가? 전화를 끊고는 서둘러 울고 있는 병진이의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