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무랑은 사람들이 숨죽여 속삭이는 소리에 그 곳에 나타난 불청객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 불청객은 연회장과의 전체 조화에 실패한 엉뚱한 장식물처럼 구석진 의자에 석고상처럼 붙박혀있었다.
세상을 조롱하는 가면 뒤의 얼굴은 여전히 표정을 알 수 없었기에 설무랑은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 장소에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정황으로 미루어볼때 분명 자발적으로 참석한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어쨌든 다들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쳐다보고 있는 이 불청객을 유일하게 반가워하는 사람은 그곳에서 설무랑 뿐이었다.
" 네가 이런 곳을 선호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군,그래."
설무랑은 시비조의 말투였지만 반감이 실리지 않은 다정한 말을 건네며 초율에게 다가갔다.
그가 제 4황자에게 다가서는 모습은 호사가들의 궁금증을 한층 더 돋구었다. 많은 귀족들은 관심 없는 척 둘을 곁눈으로 살피면서 그들의 행동에 집중하고 있었다. 수근대는 소리가 조금 더 높아졌다. 서서히 입소문이 돌기 시작한 두 존재의 대면은 상당히 기대되는 장면이었다. 제황성을 유령처럼 누비고 다니는 기이한 차림의 남자와 300년만에 갑자기 살아 돌아온 지국천왕의 죽었던 아들-둘이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것은 대단한 화제거리로 떠오르기 충분했다.
" 네 얼굴을 보니 내가 이곳을 떠나야 할 이유가 확실해졌군."
초율은 거대한 몸집을 일으켰다. 그는 설무랑이 나타남으로써 불편한 장소에서 겨우 버티고 있던 인내심이 바닥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걸음을 옮기지는 않았다.그를 은근히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가 순간 일어서자 움찔했다.
설무랑은 제 4황자의 근처 테이블에 놓인 술잔을 들어 죽 들이키면서 자신들을 주시하는 귀족들에게 냉소를 보냈다.
" 가끔은 이런 역겨운 곳에서 굉장한 수확을 얻게 되지. 특히 누군가의 목을 옥죄고 싶다면 더더욱 좋은 장소야."
설무랑은 술이 가득 찬 술잔을 초율에게 건네었지만 초율은 무시하고 있었다. 설무랑은 초율이 받지 않은 술잔을 자기 입에 털어넣었다.
막 소예가 연회장의 보조 입구에서 들어서고 있었다. 설무랑은 삼삼오오 모여 자기들을 도마에 올려놓고 온갖 추측으로 즐거워하는 귀족들의 등 뒤로 들어서는 그녀를 보았다.
" 나는 이런 시끄러운 곳을 원래 싫어하지만, 오늘은 꽤나 재미가 날 것같아. 너도 즐거우면 좋겠군."
설무랑은 초율에게 그렇게 전하고 볼 일이 있는 듯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초율은 더이상 누구도 접근하지 않길 바랬다. 아직 천제가 머물러있길 명령한 시간을 채우려면 인내심이 더 필요했다. 밝은 조명과 거슬리는 음악소리와 색색으로 치장한 광대같은 사람들. 잘 짜맞추어진 가구들과 장식물들은 그에게 불편한 환경이었다. 때론 여자들의 향수가 스칠 때면 메스껍기도 했다. 그 곳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심히 거북스러운 마당에 누군가를 상대하는 것은 참기 힘들 지경이었다.
" 오랫만에 뵈옵니다, 황자 전하."
하지만,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귓전을 스치면서 조용히 있고 싶은 초율을 방해했다.
아름다운 연녹빛의 머리카락을 날개처럼 풀어헤치고, 매혹적인 미소를 띄우는 절세미인 제공이 예전보다 더 건강미 넘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 초율도 순간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어쨌든 제공의 접근으로 이제 초율에 대한 관중들의 관심은 극에 이를 정도였다.
" 이곳에 전하께서 납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공은 진심으로 말했다. 약혼식이 황가의 대 경사였지만 초율까지 움직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가 아는 초율은 이성을 벗어난 사람이었다. 아무리 봐도 초율은 격식을 따져 참석할 사람은 아니었다.
" 좋아보이는군."
초율은 지난 번 마찰에서 제공이 입은 내상을 염두해두고 말했다. 확실히 제공의 혈색은 건강해보였다.
" 전하의 은혜입니다."
제공이 상체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는 초율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억지로 질문을 삼키고 있었다.
" 훌륭한 의관이었습니다."
"......"
역시나 초율은 제공의 관심사에 대해선 일말의 실마리도 주지 않은 채 오직 침묵했다.
만화루에서의 대결에서 제공은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초율이 보낸 황궁의 의관이 며칠 그를 치료하고자 갖은 노력을 했지만 제공의 내상은 심각하여 그는 결국 고개를 내 저었다. 남방성의 내노라하는 의관들을 비밀리에 불러들였지만 제공의 내상을 손 볼 수 있는 의관이 하나도 없었고 제공은 겨우 참아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나타났다. 그는 황궁 전속 의료기관인 천의관(天醫館)의 하급 의관의 복장을 하고 나타나 제 4황자의 명으로 왔노라하였다. 초율이 보낸 의관이라 관심이 갔을 뿐 그의 실력에 대해선 제공도 반신반의했다.
그는 말없이 3일간 제공의 몸을 살폈고 침을 놓고 탕재를 지어올렸다. 그는 치료에 관한 것이 아니면 한 마디도 없이 묵묵히 자기 일을 했다. 제공은 속을 알 수 없는 그가 의심쩍기도 했지만 참을성을 가지고 몸을 내맡겼고 5일째 되던 날부터 제공의 몸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치유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관은 나타났을때처럼 소리없이 사라진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제공은 그가 가진 의술에 호기심이 동했다. 흔치 않은 그의 실력에 감탄한 것은 물론이었다. 제공은 연줄을 통해 제황성의 천의관에서 그를 찾아내고자 했지만 놀랍게도 그에 대한 자료는 어디에도 없었다. 천의관의 고급관료인 제공의 사촌은,
" 어쩌면 황자궁에 개별 소속된 의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불확실하게 짚어 말했다.
" 가끔 황자나 황녀들께서 사사로이 사람을 두는 경우도 있거든요. 천의관에 등록절차를 밟은 뒤 정식으로 의관을 두는 게 보통이지만, 아닌 경우도 있지요.게다가..."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 북궁의 제 4황자궁이라면...더더욱 알 도리가 없지요."
제공은 사촌이 흘리는 그 비밀스런 소식에 더 마음이 끌렸다.
" 그게..무슨 소리인가?"
제공이 되묻자, 사촌은 더욱 경계하며 주변을 살폈다.
" 제 4황자궁은 귀신들이 산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습니다."
제공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초율의 거처에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소문이라고 생각했다.
" 겉으로 보면 그 곳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듯 하죠. 주인인 4황자 마저도 출입이 묘연하답니다. 그런데..그 안에는 사람이 아닌 존재들로 가득하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 그게..귀신이라 이건가?"
사촌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 전하의 부탁을 듣고 그 의관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그는 천의관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혹시나 하고 약재부를 뒤져보았는데...제 4황자궁에서 자주 몇 가지 약재들을 들여가곤 하더군요. 누가..그 약재를 쓸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제 4황자 자신일까요?"
제공은 그 소리가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사해 본 결과, 이상한 소문들이 돌고는 있었다. 때론 제 4황자궁의 뜰에서 흰 옷을 입은 여자를 보았다거나 아무도 없어야할 곳에서 말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는 등 근거는 없지만 수상한 소리들이 떠돌고 있었다. 다만 특이한 재료들이 황자궁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은 장부를 통해 확인한 결과 확실히 수상한 부분이었다.
제공은 초율을 쳐다보았다. 그는 초율의 시선이 자신의 어깨를 지나 하객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두 약혼자들에게 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내심 놀랐다.
" 잘 어울리는 한쌍이 아닙니까?"
제공은 별 반응을 기대하지 않고 말을 건네었는데, 초율은
" 태자와 친분이 있는가?"
제공은 초율이 관지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는 이 사내가 단순한 궁금증을 넘어 진심으로 알고 싶어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 물론입니다. 전하. 어릴 적부터 둘도 없는 친구이지요."
하지만, 초율의 반응은 거기서 끝이 났다.
" 자네에게 안기길 원하는 계집들의 시선이 가히 이곳을 숱제 잿더미로 만들고도 남겠군."
초율은 돌아서 가 버렸다. 제공은 초율의 비의도적인 유머감각에 웃고 말았다.
소예는 깊은 한숨으로 마음을 다 잡은 뒤, 모두의 축복을 한 데 받고 있는 두 약혼자들 앞에 다가가 섰다. 비영은 그렇게나 찾던 소예가 눈앞에 나타나자 남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두 손을 덥썩 잡으면서,
" 소예야, 와 주었구나!"
소녀처럼 기뻐했다. 그제서야 비영은 남아있던 불안과 허전함이 사라져버리고 흐린 시야가 트이면서 연회장 전체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 축하해. 그리고..오늘 참 예쁘다."
소예는 힘겨운 속마음을 달래며 자연스럽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웃었다. 소예의 눈에 그녀는 정말 최고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행복해보였다.
비영은 착잡한 마음에 웃는 게 힘들어지는 소예를 훑어보면서,
" 나 너 처음 봤을때 네가 아닌 줄 알았어. 네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줄은 몰랐거든."
비영은 관지를 쳐다보며 동의를 구했다.
" 오늘 정말 아름다운 건 너야, 소예야. 너 오늘 진짜 예뻐. 그렇지,관지? 아..아니, 전하?"
소예는 비영의 그런 작은 실수마저 부러웠다. 그리고 그녀를 보며 웃어주는 관지에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 정말이야. 비영도 아름답지만, 소예도 오늘 눈부시게 아름다워. 마치...불꽃같아."
아무도 순간 소예의 입술이 살며시 떨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비영이 천제의 부름에 잠시 둘을 떠났고, 소예는 관지와 둘이 남아 아직 축하를 전하지 못한 끈질긴 하객들의 축하와 인사를 비영 대신 하나하나 들어주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가 정말 자기 자리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었다. 관지는 차차 하객들의 인사를 받아주는 것이 귀찮은 듯 최소한의 예의만 담아 건성으로 응대하며 소예 곁에 있었다.
하객들의 괴롭힘이 조금 덜해지자 그는 소예를 향해 조심스레,
" 부탁 하나..할게."
관지의 속삭임에 소예는 심장이 뛰었다.
" 나는 소예가 적어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예전처럼 날 '관지'로 대해주면 좋겠어. 친구들에게만큼은 난 '전하'가 되기 싫거든."
관지는 그 말이 소예에게 어떻게 전해질지 알지 못했다.
" 특히..소예는 내게 반쪽의 심장이잖아."
관지는 오래 전의 전투에서 소예가 목숨을 바쳐 자신을 구해낸 뒤, 그녀를 반쪽의 심장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소예는 연회장에서 울려퍼지는 어떤 소리도 이제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관지의 인자한 얼굴만이 뚜렷하게 들어왔다. 그녀는 슬픈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제가 아니에요,전하. 전하의 반쪽 심장은 제가 아니라 비영입니다."
관지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둘은 말없이 눈을 바라본 채 서 있었다.
'왜...단념하려고하면 당신은 나를 붙잡는 거죠? 당신을 바라보는 것도, 곁에 남는 것도..그 무엇도 허락치 않으면서 떠나지도 못하게 만드나요?'
그녀는 관지의 눈을 바라보면서 마음으로 되뇌였다.
울컥 눈물이 쏟아지려는 순간이었다. 힘이 느껴지는 손이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소예의 허리를 감았다. 막 눈물샘 밖으로 한 줄기 짠 액체를 흘려버린 소예의 얼굴은 그 손에 의해 관지에게서 등을 돌린 채 젖은 얼굴을 들키지 않고 설무랑의 넓은 가슴에 가려졌다.
설무랑의 난데없는 출현과 과감한 행동에 관지도, 멀리서 아들을 살피던 지국천왕도, 그 외 모든 하객들은 얼어버렸다.
" 제가 공주님을 모시도록 하지요."
설무랑의 미소와 말투는 당당해서 관지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소예의 눈물샘은 말라버렸고 그녀는 마법에 걸린 듯, 설무랑의 손에 이끌려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설무랑은 한참을 걸은 뒤에야 인적없는 정원에서 그녀의 손을 자유롭게 해 주었다.
소예는 연회장을 걷는 동안,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태를 냉정히 지켜볼 시간을 얻었다.그녀는 붉어진 눈을 다른 곳으로 피한채 따져물었다.
" 이게 무슨 무례한 행동입니까?"
설무랑은 냉정하게 말했다.
" 수백의 대 귀족들이 모여있는 연회장에서, 막 약혼식을 끝낸 태자를 향해 펑펑 울어내는 꼴보단 나앗으리라보는데, 이럴땐 감사를 해야지. 안그런가, 소예공주?"
" ..........."
소예는 할 말이 없었다. 사실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엄청난 수치심에 비하면 이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설무랑은 그녀를 구한 셈이었다.
==오늘 경남지방에 눈이 많이 왔습니다. 서울, 강원도 지방에 비하면 그리 많은 양도 아니지만 워낙 눈 소식이 없는 지역이라 이 정도의양에도 한바탕 소란이 났습니다.
일주일 동안 여행을 갑니다. 한 동안 글을 못 올릴 듯하여 좀 길게 남기고 갑니다. 다녀와서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