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칙사랑 - 26. 나와 사귀고 싶은 남자
“오우! 베이비!”
멀리서부터 달려오던 동욱이의 첫마디였다.
“뭐야, 징그럽게시리.”
“연인인 척 해야 한다고. 아니면 외박 못나가. 가자, 베이비!”
동욱이의 손이 어깨에 둘러져 왔지만 나가서 복수해주리라 생각하며 꾹 참았다. 여름답지 않게 서늘한 손이여서 사실 기분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부대에서 조금 떨어져 손을 확 치워내자 동욱이는 두 손을 들고 더는 손대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에게는 없는 귀여운 모습에 웃음이 지어졌다.
“남친은 잘 있지? 그 날은 정말 미안했다. 술이 좀 과했지.”
“나 남친이랑 헤어질까해.”
“왜? 그날 일 때문에?”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순간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며 술을 먹자던 동욱이의 어깨가 무척 작게 보였던 일이 생각났다. 내 어깨도 초라하고 작게 보일 테지. 동욱이를 앞서가며 애써 어깨를 펴보았다.
“어이, 친구!”
동욱이의 손이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보니 친구의 눈빛에 염려가 담겨 있었다.
‘그래, 친구니까 이런 모습 보여도 되겠지. 동욱이도 먼저 약한 모습을 보여줬으니까 애써 강한 척 할 필요 없는 거야. 우린 친구니까.’
“그래서 얼굴이 반쪽이 되셨군! 맛있는 거 사줘야겠는데. 군바리 월급으로 먹는 거니까 감사히 먹어야해.”
“뭐 사줄 건데?”
“이 동네에서 최고로 맛있는 제육볶음!”
그가 안내한 곳은 넓지도 않은 평범한 식당이었지만 제육볶음 맛만은 훌륭했다.
“그 사람 사랑한 거 맞냐? 식욕이 너무 왕성한데.”
“너무 맛이 있다! 이렇게 사람이랑 밥 먹는 것도 오랜만이구. 늘 혼자 끼니를 해결했거든. 이거 정말 감탄인데. 이 제육볶음 때문에 또 오고 싶을 것 같아.”
“제육볶음 때문에 오는 건 섭하지. 나 때문이면 몰라도.”
“그런 멘트는 작업할 때나 뿌리시구요, 빨리 식사해요, 네?”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치는 소리, 음식물이 씹히는 소리, 식사시간 다운 소음과 즐거운 대화가 이어졌다. 동욱이는 외박을 나오게 되어 신난다며 연신 싱글벙글이었고, 나도 모처럼 흥겨운 기분이 들었다.
“많이 먹어, 홍주야.”
“그런 말투는 여자 친구 생기면 쓰라니까. 너 은근히 느끼하다.”
“이런 말 그렇지만 난 네가 싱글됐으면 좋겠는데.”
“너도 싱글이니 나도 싱글이어야 한다? 남 잘 되는 건 못 본다는 뜻이구나? 아무튼 예전부터 남 잘 되는 꼴을 못 봤지, 니가!”
“아니, 나한테도 기회가 있다는 뜻이니까. 수능 끝나고 너 만났을 때는 내가 여자친구가 있었잖아. 내겐 기회가 없었던 거니까. 이제라도 당당히 대쉬할 기회를 가졌으면 해.”
“동욱! 난 너한테 관심없음이야. 친구라면 몰라두. 우린 친구가 딱 좋아.”
“왜 내가 군인이라서?”
“야, 밥이나 먹어.”
“하긴. 숟가락 들고 할 얘기는 아니지. 밥 먹고 본격 작업 들어갈 테니까 그리 알고 있어. 알았지?”
동욱이는 씩씩하게 밥을 먹어댔다. 군인이 되면 밥도 씩씩하게 먹게 되는 건가? 확실히 군대 가기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을 저렇게 편한 표정으로 털어놓는 것도 군대에서 배운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 마음을 저렇게 솔직히 표현한 적이 있었던가? 그렇다면 그가 솔직하지 못하다고 해서 내가 화낼 자격은 있는 건가? 멍하게 숟가락을 쥔 채 먼 산보기를 하고 있자 동욱이가 말을 건넸다.
“다 먹은 거야?”
또 그를 잊지 못하는 약한 모습을 들키고 만 것이었다.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오자 동욱이가 어디로 갈 것인지 물었다.
“외박만 나오게 해달라면서? 갈 데 있는 거 아니었어?”
“네가 외박 나오게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니야! 나 돈도 없단 말야.”
“진동욱! 너 진짜 너무한다. 난 몰라. 너 혼자 놀아.”
“그러기가 어디에 있어? 돈도 없고 놀아줄 사람도 없는데 다시 부대로 들어가?”
“그거야 네 맘이지. 난 모른대두.”
“홍주! 같이 놀아줄게. 놀구 가라. 아주 쇼킹, 재미나게 해줄 테니까, 응?”
동욱이는 내 팔짱을 끼며 코맹맹이 소리로 놀다가라며 졸라댔다. 몇 번이고 뿌리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떨쳐낼수록 더욱 더 몸을 밀착시켜 오는 것이었다. 그의 팔이 가슴을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난 멈칫 했지만 동욱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지 표정 변화도 없었다. 순간 야릇한 기분이 느껴진 나는 소리를 치며 그를 떨궈냈다.
“그만 놔!”
“화 난 거야? 정말 바쁜 일이 있었던 거야?”
“왜 이렇게 찰싹 붙어?”
“어, 너 내 팔이 가슴 스친 것 때문에 예민해 하는 거야? 아하하하. 너 진짜 귀엽다.”
“야!”
“아, 느낌 좋던데!”
내가 윽박을 지르면 꼼짝을 하지 못하던 동욱이었다. 쉽게 얼굴을 붉히거나 바닥만 쳐다보며 난처해 하던 그는 군대에서 뻔뻔함도 배웠나 보다.
“군대에서 아주 못된 것만 배웠어! 귀엽던 동욱이는 어디로 가고 이렇게 징그러운 군바리만 남은 거니?”
“군대에서 배운 게 아니야. 나 원래 이랬어. 네가 몰랐던 거지? 앞으로 나 만나면 새로운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줄게. 어때, 구미가 땡겨?”
“사절이야, 절대! 저리가!”
“그럼 순진한 동욱이는 어때? 그걸 원한다면 해줄 수도 있는데?”
“저리가라니까!”
난 동욱을 앞서 걸었고 동욱이는 놀리는 게 신난 듯 큰 소리로 웃으며 뒤따라 왔다. 결국 청을 이기지 못하고 일찍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인테리어는 어렸을 때 부모님을 따라가 본 경양식집 분위기였고 아직 해가 한참 남았음에도 안은 어두컴컴했다.
“여기가 동네에서 제일 좋은 곳이야. 그러니 얼굴 풀어. 일부러 이런 곳에 왔을까봐?”
“아니. 감탄하는 표정이었어. 너무 멋진 걸.”
“멋진 곳만 오니까 좋아?”
우린 초등학교 시절 추억을 이야기하며 2000cc를 비웠고, 군대 얘기, 대학 시절 이야기를 하며 또 2000cc를 비웠다. 아직 머리가 무거울 정도로 취하지는 않았지만 동욱이의 느끼 멘트가 거세지는 것도 싫었고 점점 끈적해지는 눈빛도 부담스러워서 이만 일어서자고 했다. 동욱이는 별 말없이 내 뜻에 따라주었다.
“일어설까?”
“그러자.”
“야!”
“아얏!”
“쿠당탕!”
순순한 동의에 안도하며 방심한 틈을 타 동욱이가 기습 뽀뽀를 해온 것이었다. 놀란 나는 그를 밀쳐냈고, 동욱이는 의자와 함께 넘어져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미안! 괜찮니?”
스스로의 괴력에 놀라며 동욱에게 다가갔다.
“그러게. 왜 쓸데없는 장난을 쳐! 나 놀랐잖아.”
“입도 아니도 뺨이었는데. 그렇게 불쾌했어? 힘은 여전히 세구나.”
소리에 놀라 다가온 주인의 시선을 피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구는 동욱이. 하긴 여자한테 뽀뽀하다 밀침 당하며 무안하기도 하겠지. 우린 서둘러 계산을 하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동욱이는 절뚝절뚝 다리를 절며 앞서 걸었다.
“뭘 그리 궁시렁 거려?”
“내가 그렇게 싫어? 어떻게 그런 힘으로 밀어치니? 나 참!”
“야! 기분이 나쁜 건 오히려 나지! 너 장난이 지나쳤잖아.”
“장난 아니야. 진짜 하고 싶었단 말이야. 여자애가 무드를 몰라요.”
“너랑 내가 왜 뽀뽀를 하니? 갑자기 그러니까 놀란 게 당연하지!”
“안한 것도 아니면서.”
“뭐?”
“너랑 나랑 뽀뽀한 거 처음도 아니잖아. 기억 안나?”
“너 진짜 이럴 거야!”
“정홍주씨!”
동욱이가 몸을 돌려 내 두 어깨를 잡았다. 검게 그을린 피부에서 나는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그의 숨소리가 가깝게 느껴지자 갑작스레 동욱이가 남자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너랑 사귀고 싶다고. 지금 내가 군인이라 마음 표현 다 못하고 있는 거야. 원래 저번 휴가 나갔을 때 너 남자친구 있다고 해도 말할 생각이었어. 그러다 재대하고 말하자 마음을 바꿔 먹은 거라고. 지금이 더 좋네. 남자친구도 없겠다. 걸릴 게 없잖아. 단 몇 개월은 기다릴 수 있지요, 정홍주씨?”
“이거 놔. 나 아직 남자친구랑 헤어진 거 아니야.”
“헤어져!”
그의 손을 뿌리쳤지만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
“너한테 아무 것도 솔직하게 말해주지 않는 남자라면서! 늘 너 아파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면서! 자기 이름도 속이는 남자를 뭐가 좋다고 다시 만나? 너 제 정신이야?”
“네가 내 친구는 맞지만 그렇게 말하는 건 기분 나쁘다.”
“홍주야! 나는 최소한 널 속이는 일은 없어. 아니, 정식으로 약속할게. 난 너 속이지 않을게. 너 나 싫어하는 것도 아니잖아. 우리 다시 시작하자. 이제 어린 나이도 아니니까 결혼할 수도 있고 예전보다는 더 좋잖아. 다시 만나. 너랑 사귀고 싶다.”
“내가 오늘 실수한 것 같네. 난 네가 친구로 날 부른 줄 알았어.”
동욱의 손은 풀렸지만 포기하는 듯한 눈빛은 아니었다. 정말 진심으로 날 만나고 싶다는 그의 말은 예기치 못한 것이라 많이 놀랐다. 어색하게 몸을 돌렸을 때 동욱의 손이 내 손을 잡았다. 손을 빼려했지만 그는 더 힘을 주고 그렇게 앞으로 걸었다.
“평생 안 놓고 싶다. 너 내 마음 모르지?”
그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것이 몇 달 전에는 예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머릿속은 이제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저 다리가 걸어지는 방향에 몸을 맡기고 싶어졌다.
술도 마셨고, 경주의 거처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라 할 수 없이 주변의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왜 방을 두개나 잡아? 하나로도 괜찮은데.”
“너는 괜찮겠지. 난 안 괜찮거든!”
“내가 설마 널 덮치기라도 할까봐?”
“누구랑 한 방에서 자는 거 불편해서 그래. 오늘 피곤했어. 일찍 자고 싶다.”
아쉬움을 표하는 그에게 잘 자란 인사를 건네고 초라한 여관방에 들어서자 긴장이 확 풀리며 술이 확 오르는 것 같았다.
‘먼저 씻을까?’
욕실에 들어서려 할 때 메시지가 왔음을 알리는 핸드폰. 집어서 보니 찬기씨의 문자였다.
[나 경주왔어. 어렵게 알아내서 왔는데 너 없네. 어디니?]
‘오빠가 내 숙소에 왔다는 거야?’
가만히 방에 앉아 핸드폰만을 주시하고 있다보니 그에게 전화가 왔다. 머릿속이 막막해져왔다. 오늘의 일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이야?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잡은 채 생각을 하는 동안 다시 문자가 왔다.
[어디야? 헤어지든 아니든 이야기 좀 하자.]
[여기 네 숙소야. 차도 없는 것 같고 도데체 어디니?]
‘헤어지든?’
헤어질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는 건 내 몫의 일이었다.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군. 온 신경을 거슬리게 한 그 말에 화가 난 나는 동욱의 방에 전화를 걸어 술을 마시자고 청했고 동욱이는 흔쾌히 응했다.
‘웃겨, 진짜? 지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나와? 마음대로 하라지.’
침대에 던져진 핸드폰은 여전히 울어댔고, 나는 동욱이의 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