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칙사랑 - 27. 그칠 것 같지 않은 어둠
“잠이 안 왔어? 술을 또 마시자구 하고. 내가 먼저 전화할까 하다가 너 피곤할까봐 참고 있었는데.”
동욱이는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다가앉았다. 내 방은 침대 방이었지만 동욱의 방은 온돌방이었다. 단 둘이 있는 방에 침대가 있었다면 얼마나 어색했을까, 하며 다행스럽게 생각했지만 동욱이 뒤편에 있는 이불을 보니 괜히 겸연쩍어 지기도 했다.
‘동기 자취방에 놀러왔다고 생각하자. 내가 먼저 어색해하면 동욱이가 오히려 틈을 노릴 거야.’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어색함을 메우려는 나. 다행히 동욱이는 아까처럼 분위기를 잡는 말을 하지 않았고 평범한 농담들로 날 편하게 해주었다.
어느새 맥주 2병이 비워졌다. 이상하게 갈증이 사그라질 줄 몰랐기 때문이다.
“나 화장실 좀.”
화장실에서 나오자 동욱이는 런닝차림으로 앉아있었다. 생각보다 근육이 많은 어깨가 살짝 움직였다.
“답답해서. 이 정도는 괜찮지?”
괜찮을 리 없었지만 태연한 척 자리에 앉은 나는 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순간 동욱이가 남자로 돌변할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들었지만 핸드폰이 울리는 방으로는 돌아가기 싫었다.
‘남은 맥주 1병만 마시고 돌아가자. 무슨 일이 있겠어?’
“너는 내가 싫으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진 동욱이가 물었다.
“싫기는.”
“싫지는 않은데 남자로는 안 보이니? 난 네가 여자로 보여. 이렇게 단 둘이 앉아있는 것도 힘들다는 거 너 모를 거야.”
“너 취했나봐. 이제 그만 쉴래? 남은 술은 내가 가져갈게.”
“홍주야! 계속 대답 피하는데 왜 대답을 안해 주니? 너 그거 알아? 너도 딱 달라 싫다고는 안한다. 그걸 대답으로 알면 되는 거니?”
“······.”
“그럼 대답했다가는 우리 관계가 어색해질까봐서 그런 거니? 어차피 우린 친구 못 해. 네가 거절하면 친구로 남을 생각은 없거든.”
“동욱아, 그럼 하나 물어보자. 언제부터 내가 좋았었니?”
“어?”
“언제부터 날 좋아했냐구.”
“너도 알잖아. 우리 수능 끝나고 만났을 때부터.”
“그럼 그 여자 사귀면서 그 여자 안 좋아하고 계속 날 좋아했다는 거야?”
“응. 솔직히 그래. 만나면서도 늘 너 생각나고 그랬어. 그래서 놓치기가 싫어.”
“진짜 나쁘구나, 나빠! 어떻게 만나는 사람을 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가 있니? 미안하지도 않든?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 있어? 그게 얼마나 상처가 클지 알고는 있는 거야?”
“홍주야·····.”
“너랑 마주앉아 있는 것도 싫다, 이젠. 내 생각 많이 해줘서 고맙긴 한데 너처럼 두마음 품는 남자는 깨끗이 거절이야!”
“정홍주! 두 마음 아니야. 널 향한 한 마음이란 말이야!”
동욱이는 일어서려는 내 팔을 잡았다. 팔을 뿌리치고 문으로 다가가자 동욱이는 다가와서는 날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예기치 못함에도 그랬고 순간 동욱이 남자로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 마음을 봐. 난 한 마음이야. 너한테 상처 주었던 사람처럼 두 마음을 갖지 않아. 너한테 뭐든지 솔직할 거고. 너만 사랑할 거야. 홍주야, 기회를 줘라.”
“이거 놔.”
“가지 마. 너 이대로 가면 우리 다시 못 볼지도 모르잖아. 놔주면 도망갈 게 뻔한데 어떻게 놓겠니?”
“이거 놓으래두!”
호프집에서 힘없이 밀려버린 동욱이가 아니었다. 두 팔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팔의 힘은 점점 더 세어져 갔다.
“이러고만 있자.”
잠시 움직임을 멈춘 사이 동욱이의 입술이 뺨에 닿았다. 왠지 싫지만은 않은 느낌. 동욱이의 고개가 움직이더니 그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이러면 안 되는 거야! 오빠랑 헤어지든 아니든 이건 아니라고!’
강한 부정이 들며 힘껏 그를 밀어냈다. 동욱이가 방심하고 있었던 탓인지 가까스로 두 팔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급히 내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가버렸다. 입술엔 그의 기억이 남은 상태였고 심장은 여전히 강하게 뛰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정홍주! 정신 차려! 남자들에게 끌려 다니며 뒤통수 맞기 일쑤라니! 이제 정신 좀 차리라고!’
순간 휘청거린 느낌. 아무래도 술기운이지 싶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동욱이랑 뽀뽀라니, 거기까지 가도록 분위기를 허락한 내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술이 무서워졌다. 술에 지고 만 내가 원망스러워하며 입술이 아플 때까지 씻고 또 씻었다.
텔레비전을 켜고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핸드폰 진동이 계속 됐지만 이젠 신경도 써지지 않았다. 지금은 주변이 아니라 내 자신의 바람에 귀를 기울일 때라 생각하고 내 자신에게 온 신경을 집중해볼 생각이었다.
아슴한 어느 옛날
겁(劫)을 달리 하는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알뜰한
내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아비의 피 묻은 늑골에서
백년 해로의 지어미를 빚으셨다는
성서의 이야기는
너와 나의
옛 사연이나 아니었을까
풋풋하고 건강한 원시의 숲
찬연한 원색의 칠범벅이 속에서
아침 햇살 마냥 피어나던
우리들 사랑이나 아니었을까
불러 불러도 아쉬움은 남느니
나날이 새로 샘솟는 그리움이랴 이는
그날의 마음 그대로인지 모른다
빈방 차가운 창가에
지금이사 너 없이 살아가는 나이건만
아슴한 어느 훗날에
가물거리는 보랏빛 기류같이
곱고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다시금 남김없는
내 사람일지도 모른다
김남조, <너에게> 전문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칠 것 같지 않은 어둠이 가득한 작은 도시였다. 한적한 풍경을 보며 나 자신의 바람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난 그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새우잠을 자고 일어나서 찬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정신이 차려지는 데로 차에 올랐다. 아직 완전한 아침이 아닌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경주 집에 도착해보니 집 앞에 그의 차가 서 있었다. 주차를 하고 그의 차를 지나다보니 의자에서 잠든 그가 보였다. 그가 측은했지만 그냥 지나쳐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방에 들어서자 마자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몇 시일까? 문 두들기는 소리에 잠이 깼다. 아마도 찬기씨겠지, 싶었다. 문을 열자 수척한 모습의 그가 서 있었다.
“잠깐만, 나 세수 좀 하고.”
“들어갈 게.”
“아니, 들어오지 마. 내가 나갈 거야. 10분만 기다려줘.”
밖으로 나가니 햇볕이 뜨거워질 시간이 됐는지 땅에서부터 열이 확 올라왔다. 그가 서 있는 곳으로 가 평평하게 생긴 돌 위에 쪼그려 앉았다. 그도 옆에 자리를 잡았다. 떨어져 있는 거리는 2m쯤. 우리 사이의 거리 같았다.
“헤어지려고 하는 거니? 헤어지고 싶은 거야?”
듣기 싫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헤어짐이란 단어가 싫어 고개를 돌렸다. 그런 이야기 듣지 못했다는 듯 눈에 보이는 나뭇가지를 들고 바닥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헤어질 거 아니면 들어. 이번 일은 100% 내 실수였어. 정말 미안해. 네 상처가 얼마나 컸을지는 짐작도 안가. 다시는······.”
“내 말부터 들어. 나 오빠랑 안 헤어져. 생각 많이 했어. 분하고 억울하지만 헤어질 수는 없겠더라.”
“······.”
“그런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아. 그리고 다시 오빠를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믿기는 힘들 것 같아.”
“고마워, 홍주야. 살면서 미안한 거 갚을게. 앞으로는 속이는 일 없도록 할게.”
“얼마나 기다릴 수 있어? 내 마음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까지 얼마나 기다릴 수 있는지 궁금해.”
“기다릴 거야. 네가 돌아만 온다면 언제든 기다릴 거야.”
“세달이 걸리든, 일년이 걸리든?”
“응. 기다릴게. 재촉도 안할게.”
“오늘은 이만 돌아갈래? 어제 잠을 못 잤어. 할 일도 있고.”
아쉬워하는 그를 돌려보내고 보니 따뜻한 밥 한 끼 주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에게 하루 빨리 돌아가기 위해 내 마음의 상처를 씻어내는 것이 더 급했기에 지금은 내 마음 추스르는 것만 신경 쓰자고 다짐했다.
경주에 온지 2주가 되었을까, 예기치 못한 손님의 방문을 받았다.
“언니!”
“넌 언니가 귀국해도 얼굴도 안 비추지? 여긴 너무 덥지 않니?”
방이 허름해서인지 간만에 본 언니는 더욱 세련되어 보였다. 절제된 표정은 여전했지만 머리 스타일하며 옷매무새는 여느 고급 레스토랑에 가도 빛을 발할 만했다.
“많이 예뻐졌다.”
“넌 더 말랐네. 이런 생활이 좋니?”
“응?”
“나랑 서울 가자. 너 데리러 온 거야. 생각할 것도 없어. 오늘 당장 가.”
“언니!”
언제나 본론부터 말하는 버릇은 여전했다.
“아버지 회사 출근한지 5일됐어. 정말 엉망이더라. 넌 알고도 여기 와있는 거니? 아버지도 예전 같지 않으셔. 너무 약해지셨고 사업 확장에 힘 부쳐 하시는 것 같아. 나 혼자 하기엔 일이 벅차. 너랑 같이 일했으면 해.”
“오자마자 회사 출근을 하라니. 아버지가 원하시는 일이 아니야. 나한테 다시 회사에 나오지 말라고 하셨는 걸.”
“그거라면 해결됐어. 내가 너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더니 내 뜻대로 하라고 하셨어. 하루가 아깝다. 당장 가자. 오늘 쉬고 내일부터 출근하자고.”
그렇게 강경했던 아버지가 언니의 말 한마디에 뜻을 바꾸셨다니. 그 말에 몹시 서운했다. 하긴 일도 내팽겨치고 남자 따라 출장 간 딸과 언니를 비교할 순 없겠지. 또 다시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 몰려왔다.
“홍주! 언니 혼자 못하니까 도와달라는 거야. 거절할 거 아니지?”
이미 언니가 마음을 먹은 이상 선택권은 없어 보였다. 한 시간 만에 정리를 마치고 짐을 챙겨 서울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눈이 부셔 선글라스를 끼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7월이었다.
이제 홍주 이야기도 끝나갑니다.
아마도 3편내로 끝나지 않을까 싶어요.
손을 많이 봐서 출판사에 넘기기로 했답니다.
그동안의 관심 감사드려요. 쓰는 동안 홍주만큼 괴로운 시간이었어요.
다음글은 좀 더 밝은 글로 인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