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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마음과는 달리 몸은 떨리고 있었고, 숨조차 쉬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순간 도둑질을 한 기분이 들었다. 내 것이 아닌, 탐나는 물건을 가져온 듯한 기분. 그에게 당장 달려가 ‘윤섭씨!’ 라고 크게 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에게 난 모르는 사람일 뿐일 테니까. 그 암담한 현실에 현기증이 일었다.
“문희씨! 괜찮아요? 안색이 좋지 않아요? 밖으로 나갈까요? 원래 답답한 곳 싫다고 했었죠?”
“아니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제 아무도 우리 만남을 막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어떤 누구라도 맞서 싸울 거라고.
“술 마시죠. 우리.”
나는 고마운 바람둥이 황보용준에게 술잔을 권했다.
“사랑을 위해!”
용준씨는 내 속내도 모르는 채 사랑이란 말을 듣자 눈을 번쩍였다. 사냥감 포획 직전의 늑대의 눈빛. 마음껏 침 흘려라. 나도 바라는 바니까. 독한 술은 내 몸 깊은 속으로 들어가 심장을 더욱 뜨겁게 달구어 주었다. 하지만 절대 취해서는 안 된다.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침착이야.
“제가 친구가 있어요.”
뜬금없는 말에 용준씨는 조금 의아해 하는 듯 했다. 침착해야겠다는 건 생각이었을 뿐 마음이 급한 나머지 다음에 할 말이 먼저 나와 버린 것이었다.
“스키장에 같이 갈 예쁜 친구요. 그 친구랑 용준씨 아는 쪽 분 한분만 우리 오붓하게 가요.”
몸을 용준씨쪽으로 가깝게 기울었다.
“그럼 4명이 되는 건가요? 좋아요.”
“근데 멋진 분이 오셨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제 친구가 용준씨를 탐낼지도 모르니까요.”
나는 매혹적인 웃음을 흘렀고 용준씨는 아주 흡족해했다.
“저 분들 중에 제가 골라도 되나요? 어머, 죄송해요. 고른다는 말이 이상했네요.”
“마음대로 고르십시오. 예쁜 여자랑 스키장을 가는 것엔 늘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이니까.”
“음. 저 분이 좋겠어요. 친구가 좋아할 만한 스타일인데요.”
망설이는 척하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손동작으로 윤섭씨를 가리켰다
“누구요?”
“저 검은 줄무늬 양복 입으신 분이요.”
“아, 윤섭이 형이요?”
“이름이 윤섭씨인가요?”
이윤섭. 그가 맞았다. 비슷한 사람이 아니라 그였다. 그의 이름을 직접 듣게 되자 어느새 또 숨이 막혀오는 듯 했다. 안돼!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들키면 다 물거품이 될지도 몰라.
“용준씨 매력에 쫓아가진 못하지만 제 친구가 좋아할 스타일인 듯해요. 저 가, 가능할까요?”
“저 형이라면 좋다고 할 거에요. 워낙 바쁘긴 하지만 그런 기회를 놓칠 형은 아니죠.”
하마터면 침착을 잃고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침착해야해. 앞에 용준씨가 없다면 내 뺨을 때려서라도 정신을 차리라고 내 자신을 혼내고 싶을 정도였다. 마음을 가라앉히자. 이제 한고비를 넘고 있는 것뿐이야.
“휴우.”
“왜 한숨을 쉬세요? 속이 불편해요? 우리 나갈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걱정이 되요. 아까부터 몸이 안 좋아 보여서.”
“정말 괜찮아요. 멋진 분들과 멋진 시간이 될 것 같아 좋기만 한 걸요.”
“그렇다면 다른 형들이 더 나을 것 같은데. 더 재미있고 멋진 형들이 있거든요.”
“제 친구 스타일이라니까요. 말 나온 김에 약속을 잡죠. 이런 일은 나중으로 미루다보면 금세 봄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좋습니다. 이번 주도 괜찮으시겠어요? 저 이번 주 괜찮은데.”
“저는 좋아요. 친구도 괜찮다고 할 거에요.”
“형을 불러 올게요. 우리끼리 정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잠깐만요!”
일어나려는 용준씨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저 분 혹시 여자 친구 있는 건 아니죠? 만약 있다면 친구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요.”
“없습니다. 워낙 바빠서 여자 만날 시간이 없대요.”
용준씨는 일어나 성큼성큼 무리로 향했다. 나는 잠시라도 내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에게 보여줄 내 얼굴. 그가 날 기억하지 못한다면 첫 대면이 될 것이었다. 좋은 첫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선량한 표정을 지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용준씨의 여자 친구로 소개받는 이상 당신에게도 기회는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난 이 남자의 여자가 아니에요. 당신의 여자가 될 수도 있어요’ 하는 것을 표정으로 말하고 싶었다. 최대한 그와 나의 경계를 없애줄 표정 말이다. 단 그만 알아볼 수 있어야 했다. 용준씨가 알아차려서는 곤란했다. 하지만 거울 속의 나는 그저 웃고 있었다. 누군가를 유혹하는 표정은 지어 본 일이 없었기에 쉽지 않았다. 이윤섭. 그 때문에 누구에게도 그런 표정을 짓지 못했으니까.
그들이 내게 다가왔다. 콤팩트를 얼른 덮어 가방 속에 다시 집어넣었다.
“안녕하세요? 이윤섭입니다.”
잠시 그를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 당신 정도면 악수를 해도 되겠어, 라는 도도한 표정으로. 악수를 청하는 내 손은 마치 키스라도 해달라는 듯 묘하게 손등을 많이 보이고 있었다.
“반가워요. 문희에요. 이름이 외자죠.”
“반갑습니다.”
그가 내 손을 잡았다. 우리 둘의 게임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질 수 없는 게임이었다. 만약 패배자가 된다면 또 어떤 모양으로 망가진 채 살아야 할지 벌써 두려워지니까.
윤섭씨는 그 때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은테 안경이 잘 어울릴 것 같은 샤프함도 그대로였고, 말을 걸기도 힘들 정도로 도도한 표정도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조금 말랐다 싶은 정도였다.
사실 기억 속 그의 얼굴은 한 장의 그림과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얼굴은 하나씩 지워지고 내가 그려넣은 눈과 코, 입의 형체만 남은 것이었다. 하얗게 날려버린 과장된 이미지 사진과 흡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 앞에 서 있는 그는 입가에 작은 점과 떴다 감을 수 있는 눈동자를 가진, 머리카락도 한 올 한 올 살아있는 실존인물이었다. 손을 뻗어 그를 잡고 싶었지만 내겐 아직 이른 행동이었다. 내 것으로 만든 이후에 가능한 일인 것이었다.
“용준씨 아는 분 뵙기는 처음인데 용준씨 만큼이나 멋지세요.”
동의를 구하 듯 용준씨를 쳐다보았다.
“형은 광고 PD일을 하고 있어요. 그 일이 늘 부러워요.”
늘씬한 모델을 만날 수 있는 점이 부러운 것이겠지.
“많이 바쁜 직업이라 들었는데 시간 괜찮으세요?”
나란히 앉아있는 그들이었기에 고개만 살짝 돌리면 되는 일이건만 몸을 윤섭씨 쪽으로 살짝 틀었다.
“네?”
“스키장이요. 이번 주에 꼭 가고 싶은데 시간이 괜찮으신지 물은 거예요. 저와 용준씨 단둘이 갈 수는 없거든요.”
“예. 괜찮아요. 이번 주는 안 그래도 스키장에 가볼까 했습니다.”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아요. 술 한 잔 같이 하실래요?”
“예.”
잠시 후 세 개의 잔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내겐 그 소리가 즐거운 여행이 곧 시작될 거라는 전주곡처럼 들렸다.
그 날 이후 회사 업무는 엉망이었지만 기분은 날아갈 것 같았다. 퇴근 후에 날마다 강행되는 쇼핑에 발은 붓고, 몸은 녹초가 되었다.
드디어 금요일. 여행은 하루 앞두고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했지만 단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설채련. 여행을 함께 갈 친구였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일정이 맞지 않거나 남자랑 외박이라니 말도 안 된다며 거절을 했고 설혹 설득을 한다고 해도 ‘제가 이런 여행은 처음이라서’ 라며 내숭을 떨며 분위기를 깰 것 이 뻔했다. 그 때 마지막 카드가 채련이었다. 대기업 비서실에 근무하는 채련은 세련된 외모로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녀가 윤섭씨에게 달려들지 않을까하는 것이었다. 사실을 말하며 일방적으로 밀어달라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촌스런 방법은 용준씨를 불쾌하게 할 뿐 윤섭씨에게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채련이랑 나랑은 정확히 이름만큼이나 비교되는 상대였다. 솔직히 나는 그녀보다 세련되지 않았다. 옷장 속에는 노멀한 정장이 가득한 나에 비해 그녀는 365일 파티에 가는 분위기였다. 늘 화려하고 경쾌했다.
내 걱정이 괜한 것이 아니었음을 그녀는 곧 보여 주었다.
토요일 편한 보드복 차림으로 나타난 그녀는 멋져 보였고, 남자를 홀릴만한 고양이 눈은 그날따라 더 깊어 보였다. 진짜 괜찮은 사람들이야, 라며 투덜거리던 그녀의 눈빛이 윤섭씨를 보자마자 반짝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문희 말대로 제 타입이네요. 반갑습니다. 설채련이에요.”
“채련씨. 반갑습니다.”
그가 채련이 이름을 부를 때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는 차에 올랐다. 나와 채련이 뒤쪽에 앉았다.
“문희야! 저 남자 정말 마음에 든다. 봐라. 오늘내로 넘어오는 것 보여줄게.”
그녀가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도와줄게. 열심히 해봐!”
그녀에게는 그렇게 말했지만 속은 타고 있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윤섭씨의 뒷통수를 바라보는 일뿐이었다. 어쩌지, 어쩌면 좋아.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때늦은 후회가 들었지만 이젠 부딪쳐보는 수밖에 없었다.
‘해보는 거야. 아자,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