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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폭풍을 본 적은 없지만 지난 이틀 동안 내 마음속은 큰 폭풍을 맞은 것과 같다고 자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직 거센 바람이 잠잠해질 기미가 없었음에도 늘 반복되는 월요일, 또 출근이라는 것을 해야 했다.
머리 스타일도 마치 폭풍을 맞은 듯한 모양이었다. 늦게 일어난 덕에 드라이로 말리지도 못한 머리카락들을 어느새 겨울을 한껏 머금은 바람이 흩어놓아 엉망이 되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갈수록 월요병이 심해지는 윤과장님보다 일찍 출근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내 꼴을 보고는 분명 ‘문대리! 문대리 머리를 보니 월요일인 게 실감 난다. 정말 월요일마다 그런 꼴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어?’ 같은, 심한 모욕감을 주는 말을 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머리 손질이나 할 겸 화장실로 들어갔다.
“어, 과장님!”
“음. 문대리! 주말 잘 보냈어?”
마땅히 느껴져야 할 짜증스러움 없이 그녀는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톡 쏘는 맛이 없는 과장님의 인사는 탄산 없는 사이다 같다고 해야 할까 어쩐지 섭섭한 것이었다. 이래서는 반대로 내가 월요일임을 느낄 수가 없었다. 오늘이 금요일인가 하는 착각마저 드는 것이었다.
“오늘따라 화사해 보이세요. 저번에 화장품 바꾸셨다더니 효과를 보신 거예요?”
“화장품 문제가 아니더라구.”
“그럼요.”
“그런 게 있어. 문대리 머리는 월요일이네. 잊고 있었어.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걸. 고마워. 문대리.”
과장님을 내 어깨를 가볍게 치고는 화장실을 나섰다. 아주 바람직한 변화였다. 갑자기 시집간다고 회사를 그만두는 것 아닐까. 내 상상은 그 끝을 모르고 마음껏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혜림씨, 밥 먹으러 가지?”
“예. 대리님.”
근래 들어서는 혜림이와 밥 먹는 일이 잦았다. 웰빙인지 뭔지 점심시간을 이용해 운동을 시작한 사람이 많아진 것도 그랬고, 요즘 들어서는 밖에서 밥 먹는 일도 호들갑스럽게 느껴져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일이 많았는데 혜림이는 아직 막내라 선배들이 밥을 사주지 않는 한 구내식당을 이용했기에 그런 기회가 자주 생겼던 것이다.
제육 볶음과 콩나물국.
단골 메뉴를 앞에 두고 숟가락을 들며 혜림이에게 말을 건넸다.
“주말에 뭐했어?”
“그냥 집에 있었는데요.”
“그래? 나 혜림씨 스키장에서 봤는데.”
“어, 저.”
혜림이의 얼굴에 당혹감이 역력했다. 내숭쟁이 기집애. 남자 친구랑 스키장에서 노는 꼴을 봤는데 순진한 척은 혼자 다하네.
“왜 거짓말 해? 숨기고 싶은 거라도 있어?”
“그게 그렇잖아요. 그런 말하면 자랑한다고 하고. 스키장 뭐 대단하다고 유세냐 그런 시선도 있구요.”
예의 솔직한 대답에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나도 그런 소리 들을까 내 자신이 스키장에 간 사실은 교묘히 숨기고 주말에 뭘 했는지 묻지 않았던가. 실상 그런 소문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내 자신인 적도 있었다.
“대리님도 스키장 가셨어요?”
왠지 약점을 잡힌 기분이었다.
“어, 응.”
“재미있으셨어요?”
“그냥 그랬지, 뭐.”
잠시 숟가락이 쇠 식판에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혜림씨, 우리 스키장 다녀온 건 서로 비밀로 해주자. 혜림씨 말이 맞는 것 같아. 괜히 사람들이 알아야 좋을 건 없지.”
“좋아요. 누구랑 같이 갔는지 물어 오는 것도 싫구요.”
“하하하. 맞아. 스키 장비는 랜트했느니 보드복은 뭘 샀느니 그 콘도는 후졌다 그런 말도 싫고.”
“하하하.”
우리는 같은 생각을 갖고 웃었다. 마음이 통해 함께 웃는 것은 그녀의 입사 이후 처음인 것 같았다. 그리고 회사 사람과 마음 맞는 것은 내게도 오랜만의 일이라 간만에 정겨운 분위기에서 식사를 마칠 수가 있었다.
무사히 업무상 별 실수 없이 며칠이 지난 수요일 점심시간에 용준씨에게 전화가 왔다. 누가 선수 아니랄까봐 며칠 텀을 두고 전화를 하는 꼴이 내 애가 타길 바랐던 사람 같았다.
- 문희씨, 미안해요. 그간 정신없이 바빠서 연락을 못했어요. 제 연락 기다렸어요?
“그럼요. 당연하죠. 틈을 달라고 하셔서 틈을 주고 있는데 이러시기에요?”
이런 선수들에겐 이런 방법이 좋다는 것을 친구에게 훈수 받은 터였다.
- 이번 주에 뵙고 싶은데 시간 좀 내주세요.
언제나 거침이 없는 사내다. 절대 눈치 보거나 주저하는 일이 없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시간이 될지 모르겠어요. 다음주에 백화점 세일이라 생각보다 바쁘네요. 그래도 시간 꼭 내볼게요.”
- 저, 윤섭이 형이 미안하다면서 문희씨에게 꼭 식사대접을 하고 싶대요. 물론 채련씨도 함께요. 아마도 채련씨를 따로 만나기는 아직 쑥스러운가봐요. 우리가 도와주자구요.
“그래요?”
다시는 넷이서 함께 만나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윤섭씨의 속뜻은 채련이 아니라 나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3년 전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핵심 인물이라 꺼려지기도 했다. 좋은 사람이긴 했지만 그와 나와의 만남엔 걸림돌이 너무나 많은 것이었다.
- 어때요?
“글쎄요. 나이도 적은 분이 아닌데 우리가 꼭 도와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썩 내키지가 않네요.”
- 문희씨도 그래요? 사실은 저두요. 그럼 이번주는 우리 단둘이 만나는 것으로 하죠? 주중이 바쁘면 주말은 어때요?
“주말에 결혼식 있는데.”
- 토요일이요?
“예.”
- 그럼 일요일에 봐요.
“일단은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또 통화 하죠.”
그 통화 이후 한동안 윤섭씨의 다정했던 행동들이 바로 전의 일처럼 머리에 맴돌았다. 좋은 사람이긴 한데. 아쉬움은 많았지만 잊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목요일 오후.
“문대리님, 전화요.”
혜림이가 연결해 준 내 책상의 전화가 울려댔다.
“누구? 본점?”
“아니요. 남자던데. 개인적으로 아는 분이라고 하던데요.”
누굴까? 요즘 같은 시대에 핸드폰을 두고 회사로 전화를 하다니.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MD팀 문희입니다.”
“문희씨?”
“예. 누구신지요?”
“저 윤섭입니다. 이윤섭.”
“윤섭씨?”
‘이 남자가 내 회사 번호를 어떻게 알았지? 맞다. 명함을 교환했었구나. 그래서 핸드폰 번호를 모르고 회사 번호를······.’
내 명함에는 핸드폰 번호가 적혀있지 않았다. 토요일, 일요일 구분이 없는 매장과의 연락을 공식적으로 쉬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예. 식사는 하셨어요?”
다섯시에 전화를 해서 밥 먹었냐고 묻다니 어지간히 할 말이 없었나 보다.
“예. 윤섭씨는요?”
나도 할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식사 했죠. 저 언제 식사 대접을 하고 싶어 전화 드렸어요. 죄송한 일도 있고 해서. 용준이에게 말했는데도 연락이 없더라구요. 일을 방해한 건 아닌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그리고 그 일이라면 신경 쓰실 것 없어요. 벌써 다 잊었는 걸요.”
“그러신가요?”
“예. 이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우리는 수화기를 든 채 아무 말도 없이 있었다. 그 동안 내 머리가 아주 복잡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윤섭씨는 정말 놓치기 아까울 정도의 남자니까.
“네. 그럼 이만 끊을게요. 바쁘신데 제가 실례한 것 같네요.”
용준씨와는 다르게 포기가 빠른 남자.
“저, 저기요. 윤섭씨 핸드폰 번호는 어떻게 되나요?”
“저 번호요? 지금 불러드려요?”
이게 아닌데. 윤섭씨의 번호를 왜 저장시키고 있냐구. 일단 알아서 손해 볼 것은 없겠다는 생각이었다. 그저 그 뿐이었다.
“저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예.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후에 진땀을 흘리고 있는 나를 보고 난 웃고 말았다. 어느새 훌륭하게 감정을 숨기면서 사는 경지에 이른 것일까? 그와의 통화만으로도 이렇게 땀 흘리며 떨고 있는데. 어떻게 며칠동안 무시를 하고 있었던 거냐구. 하지만 내 감정이 확인되었어도 달라진 것은 없을 것이다. 그와 만남은 장애 요소가 너무 많고, 그걸 넘기엔 세상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여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