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용준씨! 우리 잠깐만 쉬어요.”
“힘들어요? 다쳤던 팔 때문에 그래요?”
“아니. 팔은 괜찮은데요. 무릎 밑이 많이 당기네요.”
“문희씨 운동 부족이에요. 앞으로는 운동도 같이 해요. 일단 저쪽에서 쉴까요?”
용준씨의 한 손이 허리에 감겨왔다. 앞으로 나아가기 힘든 나를 뒤에서 밀어주기 위해서였지만 나는 혼자 응큼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뒤로 좀 더 기대볼까?’
서로의 몸은 가까워져 머리가 용준씨의 어깨에 부딪치고 있었고, 자연스런 접촉은 친밀감을 높여 주었다.
‘아이, 좋다. 행복한 주말이야. 그런데 용준씨 원래 키가 컸었나?’
나도 작지 않은 키라 용준씨의 키에 부담을 느낀 적은 없었는데 오늘 따라 훨씬 커 보이는 것이었다.
‘아, 신발!’
그제서야 하이힐을 벗고 같은 높이의 스케이트를 신은 것을 깨달았다. 평지에 맨발로 선 것과 같으니 평소보다 크게 느껴질 수밖에. 하이힐. 여자는 남자와는 다르게 자신의 키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특권을 지닌다. 물론 선택적이지만 말이다. 순간 여자는 하이힐이 되어줄 남자를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현재 위치에서 높게 끌어줄 남자를 말이다. 발판이 되어줄 남자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토요일 오후 매너 있는 남자의 친절만으로도 기분뿐 아니라 자신의 가치마저 상승되는 듯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용준씨는 힘들지 않아요?”
“이 정도로 힘들면 안 되죠. 그렇다면 문희씨가 싫어할 거잖아요?”
“하하. 아니에요. 설마 그런 것으로 사람이 싫겠어요?”
“문희씨는 강한 남자를 좋아해요.”
“제가요?”
“절 좋아하시잖아요.”
저런 자신감도 강함의 일종이 될 수 있겠지. 그런 강함이라면 싫을 이유가 없었다.
잠시 앉아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뒤뚱거리며 타는 사람, 쌩쌩 잘 달리는 사람. 보기에는 쉬워 보이는데 왜 이리 어려운 걸까? 나도 익숙해진다면 쉽게 느껴지겠지. 연애라는 것, 어떤 사람과 교제를 하는 것도 익숙함일 것이다. 용준씨와 나도 시간을 일부러 내서 익숙해지는 것이고. 우리의 익숙해지기는 잘 진행되고 있는 듯 보였다.
“이제 괜찮아요? 30분만 더 타고 나갈까요?”
“좋아요.”
사람들이 많아 빙판에 물이 흥건히 고인 곳이 많았다. 넘어지면 끝장이겠군. 위태로운 빙판길을 용준씨의 손을 잡고 거닐며 바람을 느꼈다. 왠지 건강해지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그런 바람이었다.
스케이트를 벗은 2시간 후에는 워커힐에 있는 레스토랑에 마주 앉았다.
“식사 괜찮았어요? 가끔 오는 집인데 저는 좋더라고요.”
“좋네요. 서울인데 경치도 좋고요.”
“맘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저, 이거.”
용준씨는 주머니에서 예쁘게 포장된 작은 상자를 꺼내 건넸다.
“이게 뭐예요? 선물?”
“점수 좀 따려고 하는 거니 눈 감고 받아주세요.”
‘저건 반지 케이스 같은데. 너무 부담스럽잖아.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도 아닌데. 용준씨가 왜 이리 성급하게 구는 거지?’
반지는 부담되는 선물이라 받기를 주저 하고 있었다.
“안 받으세요?”
“저······.”
“반지 아니에요.”
“예?”
“반지일 것 같아서 부담스러워 하셨던 거 아니에요?”
“예. 맞아요.”
“문희씨가 남자에게 반지 선물을 넙죽 받을 여자 아니라는 것쯤 알고 있어요.”
‘어쩜 이리 여자 마음을 잘 알까?’
“좋은 뜻으로 듣겠어요.”
“빨리 풀어보세요.”
“귀걸이네요. 너무 예뻐요.”
“목걸이를 살까 하다 그것도 부담스러워 하실 것 같아 산 겁니다. 비싼 것 아니니 괜찮죠? 다음엔 비싼 것으로 해드릴게요. 제 선물 부담 없이 받으실 때에요.”
“감사해요. 굉장히 고급스러워 보이는데요.”
“제가 안목은 상당하거든요. 저 귀 이리 대세요. 제가 해드릴게요.”
‘목걸이나 반지는 남자가 끼워줘도 귀걸이를 끼어준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
“당황하시는 것 좀 봐. 농담입니다. 문희씬 당황할 때가 너무 귀여워요. 그래서 장난 친 거예요.”
“아이, 몰라요. 깜짝 놀랐잖아요.”
‘아이, 몰라요, 라니? 지금 내 입에서 나온 말 맞아?’
이 남자 앞에서는 여성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사실 애교를 부리는 것에는 능숙하지 못한 나도 저절로 그런 말투가 나오니 말이다. 그에 반해 윤섭씨 앞에선 자꾸 손톱을 세우는 고양이처럼 굴게 되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하신 모습은 다음 데이트 때 보여주세요. 다음은 세 번째 데이트니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건가요?”
“아니요. 용준씨를 먼저 만났으니까 윤섭씨를 만난 후에 답이 나오겠죠.”
“그렇군요. 힘든 기다림이 될 거예요. 신중한 것은 좋지만 너무 애타게 하지는 말아주세요.”
“예.”
나에게는 즐거운 일이었지만 실은 두 남자에게는 잔인한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 뜸을 들이지 말자. 윤섭씨를 한 번 더 만나고는 대략적으로라도 마음을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겠어, 라고 생각했다.
“이런 얘기 아세요?”
“예?”
“아주 못된 부부가 있었대요. 그 둘은 이혼해서 각기 다른 사람을 만났대요. 둘 다 다행히 착한 사람을 만났죠. 나중에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글쎄요.”
“착한 남자를 만난 못된 여자 부부는 못된 부부가 되었어요. 반대로 착한 여자를 만난 못된 남자 부부는 착한 부부가 되었대요.”
“어. 그러니까 여자를 따라가게 되었다 그 말인가요?”
“예. 맞아요. 그렇게 여자가 중요하대요. 우리 어머니가 말씀해주신 거예요. 우리 부모님은 제가 말씀드리기는 그렇지만 착한 부부에요. 어머니가 좋으신 분이거든요. 그래서 늘 착한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착한 여자라. 날 보고 착하다고 하는 거지?’
“전 문희씨를 만나 착한 부부로 살고 싶어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많이 어려운 일 같아요.”
“싫다고는 안 하시네요.”
“그렇게 되나요?”
용준씨의 은근한 프로포즈에 넘어간 것이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용준씨와 착한 부부로 사는 것. 돈을 열심히 벌자, 해외 나가서 살자, 그런 목표보다는 훨씬 예쁘게 들리는 것이었다. 이런 건실한 목표를 가진 남자라면 평생을 함께해도 좋지 않을까? 마음은 조금씩 용준씨에게로 흘러가는 듯 했다.
***
윤섭씨와의 데이트는 또 한 밤이었다. 일요일 밤. 다음 날의 출근을 위해 쉬고 싶은 시간이었지만 늘 바쁜 그를 생각하면 막무가내로 거절하기도 힘든 것이었다.
‘이런 생활도 조만간 끝나겠지. 어머,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벌써 용준씨로 마음이 정해진 것도 아닌데.’
하지만 내 마음이 한 편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은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뿐 어느 정도 굳어지고 있었다.
추운 겨울밤에 나가자니 멋진 남자와의 데이트라 해도 은근히 귀찮은 일이어서 윤섭씨를 만났을 땐 또 입이 쭉 나와 있었다.
“늦은 시간에 불러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어쩔 수 없죠. 뭐.”
“오늘은 어떤 영화를 보실래요? 이번에는 제가 보여드릴게요.”
“저, 윤섭씨! 오늘은 영화를 보지 않고 한두 시간만 있다 들어가고 싶어요. 내일 출근도 해야 해서요.”
남자가 정한 데이트 코스를 바꿀 수 없다는 룰이 있었지만 영화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잘됐네요. 저도 가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어디요?”
“가보시면 압니다.”
윤섭씨 차가 멈춰 선 것은 동네 커피숖 앞이었다.
‘가고 싶은 곳이 여기?’
“아니에요. 문희씨. 저 혼자 내릴 거예요.”
윤섭씨가 안전벨트를 풀려는 내 손을 저지했다.
“잠시만 여기 계세요. 저 혼자 다녀 올게요.”
“어딜요?”
그는 차 트렁크를 열어 무언가를 꺼내는가 싶더니 커피숖으로 혼자 올라가 버렸다. 뭐야? 외상값이라도 있는 거야? 아님 다른 여자? 그러다 내 자신의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여자는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으면 끊임없이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더니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조금 기다려 보면 알 것을 나 혼자 추측을 해본다고 머리를 굴린 결과가 기껏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상상이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우스웠다.
“여기요.”
“이건 보온병이네요.”
“예. 핫초코를 샀어요. 이제 핫초코와 어울리는 곳으로 가는 겁니다.”
“이 보온병은 집에서 가져오신 거예요? 아니면 늘 가지고 다니시는 건가요?”
“집에서 가져온 거예요. 꽤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 않아요?”
“응. 그러네요.”
초등학교 때 엄마가 사오셨던 그런 보온병 같았다. 요즘 늘 흔히 보는 그런 스텐레스 질의 것이 아니었다.
“옛날 우리 집에서는 마호병이라고 불렀었죠. 요즘은 깨지지 않지만 그건 옛날 거라 깨지는 거예요. 안이 유리로 되어 있는 것.”
“아, 유리로 된 것. 그 안이 참 예뻤었는데. 우리 집에도 있었지만 깨져버렸죠.”
다르게 살았어도 같은 추억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렇다. 우린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찾아보면 같은 추억도 많겠지. 마호병. 우리 집에서도 마호병이라고 불렀었는데.
“깨졌다는 보온병 문희씨가 깨뜨린 거죠?”
“······.”
‘또 시작하겠다는 거야?’
나는 말도 없이 윤섭씨를 째려보았다.
“문희씨가 깨뜨린 것 아니냐구요?”
“맞아요. 제가 깨뜨렸어요.”
“그럴 것 같더라구요. 어릴 적에 덤벙대는 성격이었죠? 그래 보여요.”
“우리 어디로 가는 건가요?”
“성질도 급하셔라. 말 안하면 또 화내실 거죠? 남산에 갑니다. 거기서 우리 핫초코 마셔요.”
‘또 시비를 거네? 그래 좋아. 극장에서는 소리를 못 치니까 내가 참았어. 거기서는 마음껏 소리칠 수 있겠지.’
윤섭씨는 분위기 잡으며 핫초코를 마실 작정으로, 나는 마음껏 소리쳐 덤벼볼 작정으로, 우리는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 채 남산으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