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질투의 화신>>
"화해 안 하실 거에요?"
숙제를 끝내고 방에서 나온 레이는 2층에서 내려오던 유키와 마주쳤다.
아이는 한달 정도 지나와 냉전중인 상태를 모르진 않았다. 아버지의 차가운 태도에 레이는 내내 속상했다.
툭 던진 아들의 말에 유키의 숱 많은 눈썹이 올라갔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제가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하셨어요? 선생님 말이에요. 언제까지 선생님 괴롭히실 건데요?"
"뭐? 누가 괴롭힌다는 거야?"
그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선생님이 너무 불쌍해요. 아버지한테 미움만 받고. 선생님이 뭐라고 물어봐도 아버진... 대꾸도 안 하시잖아요. 선생님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아들녀석까지 지나의 편이었다. 하긴 차갑고 무뚝뚝한 아버지보단 천사같은 선생님이 더 좋은 건 당연했다.
그녀에게 빠질대로 푹 빠져있는 레이는 계속 유키의 잘못만을 말했다. 반찬투정까지 왜 하느냐며...
녀석에게는 눈 흘기는 버릇까지 생긴 것 같아 화가 났지만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건 애들이나 하는 거라고 하셨어요."
"뭐? 누가 그런 말을 하던?"
"선생님요. 아버진 애들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반찬투정을 하세요?"
유키는 이를 악물고 주방으로 갔다. 더이상 지나의 역성이나 드는 아들녀석과의 말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저녁 6시가 넘었는데도 김 지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보다 아들녀석의 저녁식사가 걱정되었다.
오래 전에 가정부가 없을 때 아이의 밥을 몇 번 챙겨준 적은 있었지만 학교에 다닐 정도로 커버린 녀석의 입맛을 어떻게 챙겨줘야할 지 난감했다.
'도대체 가정부란 여자가... 자기 말로 가정부라면 제대로 해야지! 이게 뭐야? 외출도 잦고 한번 나갔다하면 항상 늦어! 날 완전히 우습게 여기는 거야!'
그는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이곳으로 오라고 했다.
얼마후 기사가 왔고 유키는 그에게 레이를 데리고 나가 같이 맛있는 저녁을 사먹으라고 했다. 하지만 레이는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대신에 저 녀석 데리고 나가게 해주지. 그럼 됐냐?"
아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있는 보리를 쳐다봤다. 녀석은 같이 나가고 싶어하는 표정이었다.
"아버지는요? 같이 안 가실 거에요?"
"난 생각없다. 갔다 와."
아들이 보리를 데리고 나가는 것을 보고 유키는 주방으로 갔다. 그다지 입맛이 없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거실로 나갔다.
'비가 오는군.'
검은 구름으로 사방이 어두워진 바깥은 이내 비를 뿌려댔다. 많은 양의 비는 아니었지만 장시간 동안 내릴 비였다.
유키는 집안을 돌아다니며 문단속을 했다.
레이 방에서 나온 그는 다른 빈 방으로 가려다 예전에 가정부가 사용했던 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을 현재 김 지나가 쓰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한달 사이 방 분위기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고 자신의 방과는 다르게 향긋한 젊은 여자의 체취가 느껴졌다. 김 지나의 체온이 피부에 닿는 착각이 들정도였다.
창문을 걸어잠그고 나가려던 그는 잠시 그녀의 방안에서 서성거렸다. 뭔가를 찾는 사람처럼.
그러나 그가 찾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겁없이 고백했던 여자였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전화는 받을 것이다. 신호음조차 울리지 않았다. 바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원이 꺼져있다고.
'배터리가 다 됐나? 아니면 누군가를 만나느라 꺼놓은 건가?'
막 몸을 돌려 돌아서던 그의 시선이 문득 침대 옆 조그마한 수납장 위로 향했다.
그곳에는 어떤 회사에서 받은 탁상달력이 놓여져 있었고 숫자 두 개에 동그라미가 각각 그려져 있었다.
9일. 그리고 이달 마지막 날 30일. 그는 달력을 들어 음력날짜를 확인했다.
9월 9일은 음력으로 7월 25일이었고 마지막 날은 음력 8월 17일이었다. 뭘 표시해놓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그는 자신의 서재로 가서 서랍을 뒤졌다. 서랍에 넣어둔 봉투 속에서 김 지나가 이곳에 올 때 낸 개인서류를 꺼냈다.
"음력 8월 17일..."
그는 김 지나의 생일이라는 것을 알고 달력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묘한 기분이 밀려올라왔다.
가정교사이자 가정부인 그녀의 생일. 무슨 작은 선물이라도 해줘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일선물? 내가 왜? 그녀 애인도 아닌데.'
유키는 들어왔던 것처럼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유스케는 아직도 멍한 얼굴로 있는 여자의 얼굴 앞으로 자신의 손을 휘휘 저어보였다.
그러자 그녀가 속눈썹을 귀엽게 깜빡거리며 그를 쳐다봤다.
"왜 그렇게 사람을 뚫어지게 보는 겁니까?"
"아... 죄송해요. 아직도 유스케가 대답해주지 않아서."
"여기에 어쩐 일인지?"
"네. 어쩐 일이세요?"
유스케는 호텔 레스토랑에 그녀와 이렇게 앉아있는 것이 너무 기뻤다.
마침 그 쪽으로 지나가던 길이었던 그는 지나의 뒷모습을 한눈에 알아봤고 곧, 금상첨화를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일 때문에 서울에 잠깐 오게 되었어요. 일주일 정도 호텔에 머무를 겁니다. 아까 그 근처는 볼일이 있었구요.
가던 곳에 공사를 하는 바람에 그 길로 차를 돌린 겁니다. 그런데 지나씨를 만나게 되었군요. 너무 좋은데요?"
"저도 반가워요. 놀랍기도 하고."
김 지나는 유스케와 대화를 하면서도 몇 번이나 창밖을 쳐다봤다. 이미 밖은 어두컴컴했고 언제부턴가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유키와 레이가 저녁을 잘 챙겨먹었는지 걱정되었다. 택시만 빨리 탔어도 이미 집에 도착하고 남은 시간이었다.
유스케를 갑자기 만나는 바람에 경황이 없어 집에 전화도 하지 못 했다.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보이자, 유스케는 무슨 급한 일 있는지 물었다. 지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아니지만... 집에 전화를 못 했거든요."
"레이가 저녁을 먹었는지 모르겠네요. 유키씨가 제대로 챙겨줄 지 모르겠네요."
갑자기 그의 입안에 씹히던 살코기가 아주 질기고 아무런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아주 쉽고 자연스럽게 '유키씨'란 단어가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는 물잔을 들어 물을 마시며 살코기를 삼켰다. 그리고 포크와 나이프를 조용히 내려놨다.
'언제부터 그들 사이가 그렇게 가까워졌지?'
그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만 해도 유키는 그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고 그녀 또한 꼬박꼬박 거리를 두며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유키를 좋아하는 감정을 숨긴 채 말이다. 그러던 그녀의 입에서 사랑하는 남자의 이름을 달콤하게 속삭였다.
위가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유키 잘 지내죠?"
"네? 네."
"두 사람 좀 친해졌어요?"
그의 질문에 지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유스케는 서둘러 보충질문을 던졌다.
"사이가 가까워졌냐구요? 두 사람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 같아서요. 그가 너무 당신을 몰아부치는 것 같았거든요."
"아, 네... 음... 친해졌어요."
유스케는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의 눈에서 시선을 고정시킨 채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다행이군요."
"저기, 유스케. 죄송해요. 더이상 못 먹을 것 같네요. 배가 불러서..."
"그래요? 얼마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점심을 너무 무리하게 먹었나봐요."
지나는 물을 마시고는 입가를 닦았다. 커피가 잠시 후에 나왔지만 그녀는 커피 대신 우유를 달라고 했다.
"우유?"
"아, 오늘만해도 커피를 석 잔이나 마셨어요. 아무래도 이제 커피 같은 거 안 마셔야 될 것 같아요. 유스케도 커피보단 다른 차를 마셔요."
그의 호기심어린 눈빛에 놀랍도록 재빠르게 거짓말로 둘러댔지만 얼른 물잔을 입술에 가져갔다.
평소에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한 그녀는 마음이 불안하면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즉흥적인 거짓말에 스스로도 매우 놀라 속으로 충격을 받았다. 이러다간 갈수록 태산을 만들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유스케에게 자신의 불안한 심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호텔에서 나온 두 사람은 호텔 앞에 세워져있는 그의 검정 차로 다가갔다. 그는 이미 조수석 문을 열고 그녀가 타기를 기다렸다.
"지금 이 호텔에서 묵을 겁니다."
유스케는 신호가 다시 파란 불로 바뀌자 기어를 바꾸며 조용히 말했다. 지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가 굳이 자신이 묵을 호텔이 어딘지를 밝힌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약간 부담이 되었다.
"저번에 내가 줬던 거 어떻던가요?"
"아, 사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음색이 참 좋던걸요. 발라드를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고."
"그냥요. 지나씨하고 비슷한 색깔이라고 해야하나?"
"특히 비오는 날 듣기에 아주 좋더군요."
유스케가 고개를 잠깐 돌려 지나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아주 짧게 마주쳤다.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김 지나였다.
"아, 잠깐만요!"
"아니, 왜요?"
"빠트린 게 있어요. 꼭 사가지고 가야하는데..."
"그게 뭔데요?"
유스케는 달리는 차의 속도를 줄이고는 도로변에 세웠다. 지나는 이미 안전벨트를 풀고 있었다.
"뭘 사려고요?"
"식빵요. 레이가 샌드위치가 먹고싶다고 했거든요. 유키씨까지 먹다보니까 식빵이 금방 떨어지는 거에요."
"..."
그녀를 쳐다보던 유스케의 안색이 매우 차갑고 딱딱해졌다. 하지만 지나는 다른 생각을 하느라 보지 못 했다.
그는 먼저 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저 혼자 내리면 되는데."
"같이 가요."
"하지만 차는 어쩌고..."
"신경 꺼요. 갑시다."
그의 따뜻한 손이 지나의 등에 와닿으며 살짝 품으로 끌어당기자, 지나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지나가 맞지?"
재영이 정면으로 시선을 둔 채 중얼거리듯이 동인에게 물었다. 동인의 표정이 굳어있을 거라는데 돈을 얼마를 걸어도 좋았다.
"안 들어갈 거야?"
그녀는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는 아직도 김 지나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를 불렀다.
"머, 먼저 가!"
동인은 우산을 든 채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조금 전 지나가 간 곳을 분명히 보았다.
그녀는 아까 집으로 돌아갔어야 했다. 분명히 집에 간다고 버스정류소로 향하는 것을 봤었다.
그는 그녀의 등에 손을 올리고 가까이 끌고안고 간 남자가 누구인지 꼭 보고싶었다.
그의 우수한 시력으로 봐선 그녀가 있는 곳의 주인은 분명히 아니었다.
막 커다란 유리문을 지나치려던 그의 걸음은 진열되어 있는 빵을 고르는 두 사람 앞에 멈추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뭐라고 얘기하자 그녀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부를까하다가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 검은 양복의 남자가 다시 그녀의 등에 손을 올렸고 동인의 시야를 가려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내 그들이 계산을 했는지 입구로 나오고 있었다. 동인은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며 차도를 향해 돌아섰다.
"이런 것까지 사줄 필요 없어요, 유스케. 저녁도 샀잖아요."
"그럼 뒤에 지나씨가 식사대접해줘요."
"네?"
두 사람은 길에 세워둔 차를 향해 걸었다. 커다란 우산 아래로 두 사람의 모습이 아주 다정스럽게 보였다.
"내일 바빠요?"
"내일요?"
"아니면 모레. 어차피 내가 일본으로 갈 시간이 정해져 있잖아요."
일본. 그럼 저 남자는 일본 사람인 것이다. 그녀가 일하는 곳에 집주인도 일본이름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남자의 얼굴에는 흉터가 전혀 없었다.
"좋아요. 그럼...이번 주 토요일 저녁은 어때요? 괜찮아요?"
"왜 하필 토요일입니까? 난 내일 당장 또 만나고 싶은데."
일본 남자의 말투로 봐선 전혀 일본인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지나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뇨. 그냥요."
"좋습니다. 며칠만 참죠."
지나는 남자의 도움으로 조수석에 올라탔고 그 남자는 차 앞을 돌아 운전석으로 갔다.
그는 차에 올라타기 전에 누군가의 시선을 강하게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바로 서 동인이 있는 곳으로.
"이상하군?"
"네?"
"아, 아니에요."
유스케는 차를 출발시키며 거울을 통해 아직도 인도에 서있는 남자를 힐끗 쳐다봤다.
그는 남자가 빵가게 앞에 서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이 차로 가자 뒤따라 온 것이다.
얼마 후, 서재에서 글을 치기 시작한 던 그는 자신의 머릿속이 이미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일을 그만두었다.
정신이 산만해서 아무 것도 일할 수가 없었다. 이런 복잡한 심정이 어제 오늘이 아니었다.
한달 전... 아니 누군가가 이 집에 온 뒤로부터 예전처럼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는 아까 달력에 표시한 동그라미 중 다른 하나에 신경을 쏟았다. 음력 7월 25일은 도대체 무슨 날인 건가.
누구 가족 중에 생일이거나 헤어졌다던 애인의 생일일 수도 있었다.
'헤어졌던 애인 생일? 그건 안 돼!'
이미 그 날은 지나갔지만 유키는 괜한 신경이 쓰여 가슴이 답답했다.
비는 좀처럼 멈추질 않았다.
"우산을 가지고 나갔던가?"
어두운 밤하늘을 쳐다보며 그가 중얼거렸다. 무의식 중에 그녀 생각을 하는 것은 이제 당연한 듯 했다.
처음에는 자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을 때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았던가.
고작 석 달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도 마치 그녀가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던 여자처럼 레이와 그는 그녀에게 익숙해지고 말았다.
그녀가 차려주는 음식이 아니면 안 되었고 그녀가 타놓은 커피가 어느 커피맛보다 뛰어나게 맛있었다.
집안과 바깥에서 울려퍼지는 그녀의 웃음소리는 그에게 때로는 달콤한 속삭임이기도 했고 때로는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들리는 노래이기도 했다.
갑자기 집안이 조용한 것이 참을 수가 없었다.
'비 오는 날 음악을 들으면... 꼭 커피를 마시는 기분이 드는 거 있죠? 그런 적 있으세요?'
레이의 방학이 끝나기 전, 밤바다를 보겠다던 바다로 갔던 그 날.
그 충격적인 일로 기절한 그녀를 호텔로 데려갔었고 두 사람은 또다시 하룻밤을 한 침대에서 보냈었다.
그가 먼저 눈을 뜬 것은 빗소리였다. 지금보다 제법 많은 양이라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당시 멋드러진 음악과도 같았다.
그날 그 빗소리를 두 사람은 같이 들었다. 서로의 얼굴을 구석구석 바라보면서. 그리고 그녀가 그런 말을 했었다.
비 오는 날의 음악은 커피를 마시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유키는 침실에 있는 오디오로 향했다.
몇 년 전에 구입한 것이긴 해도 당시 최고가의 제품인 만큼 아직까지 음질은 최고였다.
CD를 이것저것 고르던 유키는 지금 당장 듣고싶은 노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 지나가 가져간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주인이 없는 방을 함부로 드나드는 것이 약간 찔리긴 했지만 그 음악CD를 들어야 했다.
그녀의 작은 책상 위에 있는 그가 사다 놓은 컴퓨터로 다가가 몇 장 있는 CD를 집어들었다.
그녀는 주로 발라드곡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찾던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책상 위에 놓다가 못 보던 CD를 다시 들었다.
'to 지나?'
케이스 겉에 받는 사람의 이름이 쓰여져 있는 것을 보면 누군가가 선물한 모양이었다.
호기심이 그의 몸속에서 꿈틀거리자, 유키는 그것도 같이 들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원하던 음악을 틀기 전 그는 그녀가 선물로 받은 CD를 먼저 틀었다.
곧 일본 남자 가수의 멋진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건... 일본 노래잖아?'
한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그녀를 몹시 그리워한다는 애절함이 담긴 노래가사였다. 케이스를 보니 복사된 것이었다.
한참을 노래를 들으며 유키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던 중, 그는 남자의 노래가 멈추고 이이서 남자의 부드러운 음성이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일본말이었지만 그는 그 목소리가 아주 익숙하다는 것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를 알게 되었다.
바로 유스케였다!
'태어나서 여자한테 이런 특별한 선물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그 어느 여자도 아닌 바로 당신이라는 것이 나에겐 행운이네요.
공항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당신 얼굴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제 심장을 두드린 소리가 어떤 소리보다 컸거든요.
내 앞에 나타나 준 거 고마워요, 지나씨.
이 노래는 언젠가 나의 사랑하는 여자에게 꼭 불러주고 싶었던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당신에게 바친다고 생각하니 많이 떨려서 몇 번이나 녹음을 해야했죠.
만약 이 노래와 얘기를 언젠가 지나씨가 알게된다면 좋겠습니다.
그저 어느 남자의 노래가 아닌, 당신을 위한 노래라는 것을 알았으면 합니다.
지나씨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유스케가...
유키는 음악을 껐다. 그는 자신의 귀를 원망했고 그놈의 호기심을 원망했다.
어쩌자고 이 노래를 끝까지 들을 생각을 했는지, 어쩌자고 한 여자에게 사랑고백하는 소리를 들을 생각을 했는지!
당장에 CD를 부셔버리고 자신의 윙윙거리는 귀를 막아버리고 싶었다.
이것을 선물한 사람이 바로 유스케였던 것이다. 그녀는 매일 이것을 들었을 것이다. 유스케의 달콤한 노래와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며.
물론 그녀는 일본어를 모르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 하지만 유키는 분노가 치밀어 그냥 서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상과없었다. 그녀가 이것을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위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내장이 뒤틀릴 정도로 복부가 아팠다.
입 안으로 쓴 맛이 느껴졌다. 사토 유키는 독한 양주를 꺼내와 입 안에 부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 아니면 지나?
그는 양주병을 든 채 서재로 가서 대문에 연결된 무인 카메라를 전원을 켰다. 김 지나였다.
그는 문을 열어주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녀가 받았던 유스케의 음성이 담긴 CD를 제자리에 두고 나왔다.
"이제 오는군?"
지나는 현관을 들어서며 거실에 있는 유키를 발견했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얘기하려다 그의 손에 양주병이 들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시간에 술을? 설마 병째로 마시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분노어린 눈빛에 지나는 몸을 움직이다 멈추었다. 무슨 화난 일이라도 있었던 것 같았다.
유키는 그녀 앞에서 술병을 입에 갖다댔다. 그녀의 눈동자가 커지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면서.
입술가로 흐르는 술을 손등으로 대충 닦으며 차갑게 말했다.
"우산도 안 가져갔는데 별로 안 젖었군?"
"네? 아... 그게... 택시를 탔거든요."
"택시? 택시기사가 여기까지 와주던 모양이군?"
유키는 지나가 입술을 깨무는 것을 지켜봤다. 거짓말이었다.
택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차를 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하는 걸 보면 숨기고 싶은 상대였다.
"저녁은 먹었소?"
"네. 식사...하셨어요?"
거의 한달만에 유키의 관심어린 질문을 받는 것 같아 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
단지 한달 내내 차가웠던 그 표정 그대로인 것은 마음 아팠지만 말이다. 그녀는 조용히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발길을 옮겼다.
"나랑 얘기 좀 하지."
"죄송해요. 조금 피곤해서... 내일하면 안 될까요?"
그녀의 거절에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유야 어떻든 그녀가 거절하자 무척이나 화가 치밀었다.
"피곤?"
"네. 아, 레이는요? 보리가 안 보이네요?"
지나는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얼른 피하며 레이 방으로 갔다. 그러나 아이가 없는 것을 알고 방에서 나왔다.
"저녁 먹으러 갔소."
"네? 어디로요?"
"기사랑 같이 나갔소.'
"아니 왜..."
"이유는 당신이 더 잘 알텐데?"
이를 악물고 그가 거칠게 내뱉었다.
차가운 그의 태도에 지나는 그가 화간 원인이 결국은 자신이란 것을 알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지나는 젖은 머리를 등뒤로 넘기며 방으로 들어갔다. 조금밖에 젖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몸이 찝찝했다.
셔츠와 스커트를 벗고 브래지어 끈을 막 내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확 열리는 것이다.
"앗! 이게 무슨..."
사토 유키가 한걸음만에 방을 가로질러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를 침대로 밀쳤다.
"으앗!"
그의 무거운 상체가 그녀의 몸을 눌렀다. 그리고 그녀가 뭐라고 대항할 틈도 없이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가졌다.
깜짝 놀란 그녀는 한순간 몸이 정지되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었다.
간신히 그를 밀쳤을 때 그의 검은 눈과 마주쳤다. 그는 당장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 처럼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지금 당장 당신을 가지겠어!"
"뭐, 뭐라구요?"
숨넘어갈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의 억센 손이 그녀의 얼굴을 거머쥐는 바람에 지나는 얼굴이 아팠다.
지나는 신음을 내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그가 턱을 치켜 들며 소리쳤다.
"내 눈을 똑바로 봐! 만약 당신이 거절해도 소용없어! 강제로 가질 생각이니까!"
참고있었던 욕망인지 그녀의 곁에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것에 대한 분노인지는 그도 알 수 없었지만 온몸이 화산처럼 뜨거운 것만은 확실했다.
"왜? 놀랐나? 분명히 말했지. 당신이 여기 있는 한 언제 어디서든지 당신을 가지게 될 거라고! 당신을 원하게 될 거라고!"
"유, 유키씨..."
유키는 다시 그녀에게 키스했다. 조금 전보다는 아주 짧은 키스였지만 분명히 분노와 욕망이 뒤섞여있는 키스였다.
그가 입술을 떼며 나즈막하게 속삭였다.
"아아... 알았어. 레이가 신경쓰이겠지."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환한 조명을 받으며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의 육감적인 몸을 내려다보았다.
"10분이오. 안 오면... 내가 여기 올 수밖에."
유키는 떠나기 전 거친 키스로 부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그땐 장소가 어디가 될 지 몰라."
그가 나가고나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레이가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김 지나는 조금 전의 충격때문에 쉽게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너무 놀라 눈물도 나지도 않았다.
또 초인종이 울리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총알같이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 현관으로 나갔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