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때까지 물 한모금도 넘기지 않던 진서가 불현듯 욕실로 가 샤워를 하고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묵묵히 그 숨 막히는 침묵을 받아내고 있던 정재가 갑작스러운 그 태도에 불안함을 숨기고 곁눈질로 살피고 있었다. 주방으로 가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꺼내 음식을 준비하고는 정재를 불렀다.
“식사해요.”
주방으로 들어온 정재가 소복이 담긴 볶음밥을 보고는 작게 웃어보였다.
“이걸 다 먹어라구요?”
“나 때문에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요.”
“그래요. 같이 먹어요.”
마주앉아 식사를 시작한 두 사람에게 또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느낌을 읽을 수 없는 그것이 이상하게도 정재의 가슴을 더 불안하게 하고 있었다.
“아까는 미안해요. 형 때문에 나도 내정신이 아니었어요.”
“정재씨 탓 아니에요.”
표정 없이 많아 보이던 볶음밥을 다 먹어치운 진서가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가지고 나왔다.
“어디 가게요?”
“클럽에 가려구요.”
“휴업이라고 써 붙여 놨어요. 회원들에겐 나중에 다시....”
여전히 그 눈 속에 아무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밤사이 그렇게 흘려보낸 눈물 속에 심장을 녹여버렸는지 생각을 잊은 사람처럼 멍해 보였다.
“몸이 무거워요. 가서 땀이라도 좀 흘려야 갰어요.”
“그럼 같이 가요.”
함께 가겠다는 정재의 말에 진서가 단호한 한마디를 던졌다
“아뇨. 혼자 갈게요. 그러고 싶어요.”
더 이상 아무 말을 할 수 없게 하는 그 차가운 말에 정재가 그대로 물러났다. 애써 버티고 있는 냉정을 알아 다른 말로 감정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 클럽에 도착한 진서가 후덥한 공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창문들을 모두 열어졌었다.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고 생각이 정지된 듯 한곳을 돌고 있는 감정들이 스르르 몸 밖으로 빠져나와 또 다시 뜨거운 열기가 심장으로 고이로 있었다.
- 내 앞에 있지 않은 너를 용서할 수 없다.
이렇게 무력한 나 또한 용서할 수 없다.
너를 보아 느껴지는 그 뜨거운 것들이...
내게는 차라리 낯설지 않은 익숙함이었다.
누구도 용서하고 싶지 않다.
내 앞에 너를 잊게 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이렇게 또 다시 삶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는 나를...
방으로 들어가 목검을 가지고 나온 진서의 눈빛이 뜨겁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견뎌내지 못할 두려움을 차라리 심장에 각인시켜 그 몸이 온전히 하나의 불덩어리가 되고 있었다. 목검을 움켜쥔 손에 온몸의 뜨거운 열기가 모이고 있었다.
한 획은 거어 가르는 그 속에 밤을 녹인 공포가 흩뿌려지고 있었고 마음이 몸을 움직여 알지 못할 분노마저 일고 있었다. 허공을 잘라 가를 듯 목검을 휘둘러 대던 진서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과 마주섰다.
- 뜨거운 바람
시간의 양으로 사람을 가슴에 담는다면 이제 내게는 더 담을 가슴이 없다.
원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담지 않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너에게 향하는 모든 바람을 정지시켜 흔적도 없이 상쇄시키고 싶다.
하지만 내게는 이미 내 뜻이 없다.
너를 보아 가져지는 모든 것이 이미 내 의지를 넘어선 영혼의 갈망이 다.
눈을 감아도 내 눈 안에 들어와 앉은 너를....
마음을 열지 않아도 이미 내 몸을 도는 피 속에 너의 흔적이 기억돼 있는 것을....
도대체 내가 나에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런 나를 더 이상 버려두지 마라.
마음이 몸을 죽일 수도 있다.
심장을 도려내는 하룻밤의 공포가 진서의 몸에 예전의 병을 옮겨다 놓고 있었다. 순간순간 찾아드는 환영과 현재의 고통들이 뒤섞여 자신과 동준이 하나인 듯 또 다르게 느끼고 있었다. 거울 속의 눈과 기를 세운 시선을 마주대하고 있던 진서가 붉은 현기증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목검을 세워 몸을 지탱한 채 감은 눈 속으로 이성을 찾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움직이지 않은 채 온몸을 휘감은 혼란을 받아내던 그 눈이 스르르 열려 또 다시 거울 앞의 자신을 보았다.
- 너였구나.
내 심장에 박혀 나를 삼킬 듯 울부짖든 사람이 너였구나.
어둠을 밀어낼 듯 눈부신 흰 빛깔의 도포가 그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 얼굴에 드리워졌던 무거운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지고 있었고 그 입가에 부드럽고 깊은 미소가 고즈넉이 내려앉았다. 목검을 휘두르는 몸짓이 허공을 내려 밟는 듯 가볍고 힘차 그 몸에서 느껴지는 푸른 기운이 주위의 다른 것들을 잠식시키고 있었다. 뜨겁게 휘몰아치든 열기가 그 몸에서 사라지고 맑고 푸른 기운이 몸을 삼키든 붉은 공포를 녹여내고 있었다.
진서를 그렇게 혼자 보내고 마음을 놓지 못하던 정재가 결국 클럽으로 향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서 혼을 잃은 사람처럼 목검을 휘두르고 있는 진서를 보았다. 문득 두려움이 밀려왔다. 낯선 느낌이었다.
검을 내려치는 굵고 강인한 몸짓이 섬뜩하리만치 날이 서 있어 절제되고 싸늘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30분이 넘도록 혼을 잃은 듯 목검을 휘두르던 진서가 정적을 깨는 휴대전화 소리에 그것을 거두고 뒤를 돌아보았다. 문을 들어선 정재가 휴대전화를 귀에 된 채 진서를 향해 작게 웃어보였다. 종두의 전화였다.
부산에서 올라와 한필중의 사무실에 들러 동준의 소재를 파악한 그가 떠나기 전에 정재에게 짧은 상황을 전했다. 완전한 암흑의 숲에서 그나마 한줄 생명줄을 잡은 듯 그 마음이 한시름을 내려놓고 있었다. 전화를 끊은 정재가 진서에게로 다가가 동준의 일을 전했다. 자신의 말에 차가운 시선으로 대답을 내놓는 진서의 느낌이 왠지 모르게 낯설고 경직돼 있었다.
“일이 급해 연락 못하고 인천으로 가 있는 모양이에요. 진서씨가 걱정하고 있는 일 같은거 없으니까 너무 염려하지 말아요.”
“누구든....이번에 참아 주지 않아.....다 쓸어버릴 거야.”
“.....진...서씨...괜찮아요?”
“........”
정재를 보는 그 시선 속에 싸늘하게 식어있는 알 수 없는 낯선 느낌이 깃들어 있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 서 있는 듯한 차갑고 시린 한줄기 한기가 정재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무실로 들어온 정재가 메모지에 종두가 말해준 그것을 적어 한 장을 때내 주머니에 넣었다. 뒤를 따라 들어온 진서가 냉장고를 열어 생수 병을 꺼냈다. 거의 바닥이 들어나 한모금도 채 되지 않을 만큼 남아 있었다.
“내려갔다 올게요.”
정재가 나가고 잠시 책상 앞에 서 있던 진서가 좀 전의 석연치 않은 느낌을 붙잡고 있었다. 자신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듯 메모지를 주머니에 넣는 정재의 행동이 마음에 걸렸다. 책상에 앉아 이리저리 연필을 돌려대던 진서가 놓여 진 메모지 위로 조심스럽게 자국을 긁어 보았다. 눌러 쓴 희미한 선들이 조금씩 선명해져 글자가 조합되고 있었다.
- 인천 안진동 서합리 165-4번지
메모지를 때내 한손에 구겨 책상 한편에 던져버린 진서가 방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들고 있던 목검을 다시 천으로 말아 쌌다. 편의점에 다녀온 정재가 음료수와 생수를 냉장고에 넣고 진서의 방 앞에 섰다. 불러도 대답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사무실로 왔다. 샤워를 하고 나올 시간이 한참이 지나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자꾸 불안해지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책상 귀퉁이에 겨진 메모지를 펴본 그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다급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로가로 뛰어나왔다. 몇 번을 둘러보다 주차장으로 달려가 급하게 핸들을 돌렸다.
정재와 통화를 끊고 바로 서울로 출발한 종두가 오후가 되기 전에 한필중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밤 생활에 익숙한 자들의 본능으로 미묘하게 흐르고 있는 그곳의 분위기를 단번에 느끼고 있었다.
“사장님 지금 어디 계시냐?”
“저희도 모릅니다.” “
같은 말 여러 번 묻게 하지 마라.”
“정말...저희도...”
어깨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종두의 주먹이 그 복부를 강타했다. 허리를 꼬꾸리고 쓰리지는 어깨에게 종두의 서늘하게 내리 깔린 음성이 전해졌다.
“말해. 새끼들아...동준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너희들 내 손에 죽는다.”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던 그들 중 유난히 동준을 따르던 아이가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인천으로 가신 것 같습니다. 이번에 새로 마련한 별장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급하게 핸들을 잡던 종두가 정재에게 전화를 했다. 그 부제가 자신만큼이나 염려되고 있을 사람들임을 알아 떠나기 전에 다급한 마음을 숨기고 가벼운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밤새 한필중과 맨발로 불길을 걷듯 뜨겁게 술잔을 기울인 동준이 새벽녘에 어깨들에게 부축돼 침대에 썰어졌다. 알콜이 온몸을 점령해 모든 것이 뿌옇게 흐려지고 감각을 잃어버린 순간에도 그 하나가 통증처럼 아프게 울려대고 있었다.
밤새 휘몰아친 폭풍우에 온전히 견디지 못했을 그것이 동준에게 그대로 전해져 취한 정신 속으로도 날카로운 아픔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렇게 잠이 들어 불편한 꿈길에 또 다시 그들을 만난 동준이 그림을 그리고 있던 그에게서 자신의 영혼을 느꼈다. 한없는 따스함으로 자신을 향해 웃고 있던 그 한사람이 이유 없이 아팠던 이유도 조금씩 알아지고 있었다.
- 너를 품어 다른 세상을 꿈꾸었던 나를 아느냐.
내게는 한세상 가지는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했다.
한 사람 담은 이것으로 이미 내 속에는 다른 것을 담을 가슴이 없다.
마주 앉아 보아도 아까워 심장이 떨리는 너를...
품어 아픈 그것조차도 한 점 흘리기 싫은 나를...
이 세상이 품어주지는 않을 모양이다.
허나 원통하지 않다.
이미 내가 너를 가져 죽어있는 나무에 푸른 기운을 가져오지 않았느냐.
이토록 뜨겁게 살아있는 심장을 느껴보지 않았느냐.
너는 내 사람이다.
나는 너의 사람이다.
하나였던 가슴을 기억해 가져가니 너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염원이 깊으면 하늘이 길을 열어 나를 너에게 보내주실 것이다.
12시가 다 되어 깨어난 동준이 방을 나와 거실의 수화기를 들었다. 신호음이 끊어져 있었다. 현관문을 나서려다 문밖을 지키고 선 어깨들과 마주친 그가 낮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잠시 머뭇거리든 그들이 주섬주섬 말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사장님께서 형님......여기 계시게 하라고....”
“그래서 너희들이 이렇게 지키고 서서 나 감금하고 있는 거냐?”
“저희는.....그냥....사장님께서 시키신 일이라..”
“난 지금 꼭 가봐야 할 때가 있는데...그럼 내가 어떡하면 되겠냐?”
“죄송합니다. 사장님 저수지에 낚시하시러 가셨습니다. 오시면 말씀하십시오.”
“그때까지 기다릴 시간 없다.”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 저희가 사장님께 죽습니다.”
“지금 안 비키면 내 손에 죽는다.”
동준의 말에 정원을 지키고 있던 아이들까지 현관 앞으로 와 두 줄로 포진을 서 동준을 막아섰다. 동준이 한발을 내려서자 앞을 가로막고 섰던 그들이 뒤로 물러섰다.
“너희들한테 손대고 싶지 않다. 비켜라.”
“형님도 사장님 잘 아시지 않습니까.”
결국 동준이 자신의 앞을 풀지 않는 그들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 시간까지 초조한 기다림으로 지쳐가고 있을 진서의 얼굴이 떠올라 더 지체하고 있을 마음의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동준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가지 않는 그들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맥 놓고 버릴 수 없이 불편한 마음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그렇게 밀고 당기는 동준과 그들의 주먹질이 정원을 들어서는 한필중의 등장으로 멈추었다.
“무슨 일이냐?”
모두들 자기 자리를 지키고 선 그들이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동준이 한필중에게로 다가서 메마른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가봐야 갰습니다.”
“나는 아직 니 대답을 듣지 못했다. 두 가지 모두를 어정쩡하게 남겨두고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저는 분명 제 뜻을 전했습니다.”
“나는....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니가 보인 뜻이 내가 듣고 싶은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올라 가갰습니다.”
한필중이 현관위로 올라서며 정원에 풀어진 어깨들에게 말을 던졌다.
“오늘 이곳에서 누구도 나가는 사람은 없다. 주어진 임무 재대로 못하는 새끼들은 각오해라.”
한필중이 안으로 들어가고 굳은 채 서 있던 그들이 동준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형님! 들어가십시오. 저희들 한번만 봐주십시오.”
“미안하다. 지금 가야 할 일이다. 너희들한테는 미안한 일인데....더 기다릴 수 없는 일이다.”
“죄송합니다. 형님. 용서하십시오.”
창밖으로 동준과 어깨들의 팽팽한 힘겨루기를 지켜보고 있던 한필중이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간밤 동준과의 기 싸움에서 결국 자신이 패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씁쓸했다. 굳이 자신을 들어내 보이지 않고 있어도 온 몸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그 꿈틀되는 붉은 기운이 늘 한필중을 이유 없이 무력하게 했다.
굳이 지윤으로 인한 얽힌 고리가 아니라 해도 중압감을 느끼게 하는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수적으로 힘리는 그 힘겨루가 시간이 흐를수록 동준에게 불리해지고 있었다. 조급함이 들켜 동준이 몇 번을 그대로 가격당해 몸이 흔들렸다. 이미 반시간이 지나 여러명에게 나누어 소진해버린 힘이 바닥을 들어내고 있었다. 때를 놓치지 않은 무리들이 동준에게 일격을 가해 결국 동준이 다시 집안으로 끌려들어왔다.
술잔을 비우고 있던 한필중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조차 못하는 동준을 바라보며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약삭빠른 놈들보다 미련하고 무모한 놈들이 더 무섭다는 걸 너를 보면서 가끔 느낀다.”
“제가 더 이상 사장님을 증오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니 증오가 내게까지 닿기에는 그 힘이 너무 미력하다 생각지 않니?”
“.............”
“그렇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혹시 니가 이러는 게 그 계집아이 하나 때문이라면..... 마음 접어라. 가져보고 품어보면 다 별 다를 것도 없는 게 여자 아니냐. 모르지 않을 텐데 미련 떨지 마라.“
“.....그 아이 저한테는 여자...아닙니다. 가져보고 싶고, 품어보고 싶은 여자.....아닙니다.”
- 죽어있던 제 심장을 뛰게 만든 사람입니다.
사람으로 살게 싶다는 뜨거운 눈물을 흐르게 한 사람입니다.
내 모든 악행과 허물을 중화시켜 그 눈속에 담아 줄 세상의 유일한 내 편입니다.
그 곁에서 숨쉬는 하루가.....
이렇게 살아내는 전부의 생보다 귀하고 아깝습니다.
그래서 제 심장처럼 느껴지는 사람입니다.
“나도 지친다. 너를 두고는 지윤이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걸 안다. 니가 돌아서지 않겠다면 ....차라리 죽어 살아져줘야 그 아이도 어쩔 수 없이 놓지 않겠니.”
마당으로 거칠게 차 한대가 들어섰다. 종두였다. 문을 열고 내려서는 발걸음 속에 숨기지 못하는 불안함과 조급함이 그대로 들어나 있었다. 느닷없는 종두의 등장으로 기진맥진해서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어깨들이 놀라 몸을 일으켰다.
“....형님께서 여기는 어떻게......?”
“동준이 어디 있냐?”
“안에 사장님과 함께 계십니다?”
집안으로 들어선 종두가 온통 터지고 찢긴 동준의 얼굴에 심장이 내려앉고 있었다. 한필중에 대한 끓어오르는 적계심이 그 눈에 이글거렸다. 그 시간에 그곳으로 들어선 종두를 본 한필중이 못마땅한 목소리를 내놓았다.
“부산에서 일을 보고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기는 왠 일이야?”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어떤 아인지 처음부터 아시고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다른 아이들처럼 잔 꽤나 술수를 부리지 않는 거 누구보다 사장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버리실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해서 사장님께 얻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돌아가라. 이놈과 정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카메라는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서 가져오겠습니다. 데려가게 해 주십시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소파 앞으로 몸을 수겨 앉아있던 동준이 힘겹게 종두를 올려다봤다.
"뭐하러 왔어."
인천의 상황이 궁금해 속이 타던 태수가 다른 결제를 핑계로 별장으로 차를 몰았다. 한적한 외각을 돌아들어 차가 없는 외길로 들어서다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택시 뒤를 따르게 되 슬슬 열이 오르고 있었다.
"씨팔 새끼...안가고 뭘 하는 거야."
거칠게 경적을 울려 되자 좁은 외길의 한쪽으로 차를 빼던 기사가 창문을 열고 태수에게 길을 물었다. 창문을 내리고 열이 받친 폭언을 내뱉으려던 태수의 눈이 뒤 자석에 꽂혀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한순간 내려서 그 저녁의 치욕에 대한 대가를 맛보게 해주고 싶었지만 더 재미있는 일이 기다릴 것을 알아 그대로 차를 몰았다.
몇 개의 파일들을 가지고 집안으로 들어선 그 눈이 동준과 종두 그리고 한필중의 분위기를 읽어내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급한 결제도 있고 사장님께 따로 드릴 말이 있어 내려왔습니다.”
굳어 있는 동상처럼 앉은 동준을 흘낏 쳐다본 태수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사라졌다. 한필중이 이층 서재로 올라가고 잠시 뜸을 들이고 있던 태수가 동준에게로 다가가 승자의 기분을 한껏 들어내고 있었다.
“어떠냐? 이제 내가 널 밟고 일어설 차랜데......절대로 널 이길 수 없을 거라 했던 말 아직도 유효하냐? 지금 니 몰골이 패잔병의 마지막이라면.....좀 있으면 그 최후의 발악을 보게 될 텐데....심장 떨리네.”
동준이 고개를 들어 그 야비한 눈빛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 말속에 깔린 위험한 복선이 섬뜩하게 가슴에 걸리고 있었다.
“......무슨......말이야.”
“기다려 봐라. 재미있는 일 생길거야.”
자꾸 정원 쪽으로 고개를 힐끔거리던 태수가 길 한쪽으로 들어서는 택시를 보자 그 웃음이 야릇하게 번지고 있었다. 마당으로 들어서는 작고 야윈 여자아이를 본 어깨들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며 한명이 진서 앞을 막아섰다.
“어떻게 왔습니까. 집을 잘못 찾은 것 같은데...”
가까이 다가서 그 눈을 마주한 어깨의 심장이 한순간 멈칫했다. 작은 몸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그 열기가 단번에 상대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사람 찾으러 왔다.”
낮게 내려깔린 목소리에 묘한 기운이 섞여 있었다. 뒷말을 잘라버리는 어린 여자아이의 태도가 재미있었든지 어깨가 피식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야! 이 아가씨가 말이 상당히 짧네. 초면에 말을 잘라버리네.”
모여 앉아있던 무리들이 그 생뚱맞은 출연에 웃음을 흘리며 한마디씩 했다.
“여기는 찾을 사람 없으니까...돌아가라. 아가씨야.”
“.....이.....동준이”
그 입에서 이동준이라는 말을 들은 무리가 놀라 모두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건 또 뭐야. 오늘 일 정말 가지가지 생기네.”
“어디 있어.”
“어떻게 찾아 온 건데.....동준이 형과는 무슨 관계데?”
자신 앞으로 우루루 몰려오는 무리들에게 진서가 천으로 싸고 있던 목검을 풀어 겨냥했다. 그 모습이 의이 없고 재미있었던지 미소를 걸고 있던 무리들이 더 크게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어이구....그걸로 우리 치시게. 이 아가씨 무지하게 재미있네. 그럼 한번 휘둘러보시던지.”
그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진서 앞에 다가섰던 어깨가 헉하고 바닥으로 내려 꽂혔다. 순간 다들 그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놀란 눈으로 진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야.....이 계집에.”
“이동준이....어디 있어.”
맨손으로 진서의 어깨를 잡으려던 또 한명이 팔을 움켜쥐고 나가 떨어졌다. 순신간에 몸을 스치는 목검의 바람소리에 그제야 무리들이 몸을 긴장하고 진서를 둘러쌌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태수의 조소가 한껏 퍼지고 있는 것을 본 동준이 밖의 소란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한순간 심장이 얼어버려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고 있었다.
동준이 스프링처럼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진서를 둘러싸고 있는 어깨들에게 달라 나가며 거칠고 격앙된 말을 내뱉었다.
“물러서라. 누구라도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내 손에 죽는다.”
자신을 빤히 보고 서 있는 진서의 눈이 동준의 심장을 꿰뚫고 지나갔다. 목까지 차오른 말들이 답답하게 가슴을 누르고 있었지만 정작 내놓는 말은 호흡 속에 섞여 희미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너.....너 어떻게.....”
“늘 나를 기다렸던 사람이니...이번에는 내가 왔다.”
그 눈 속에 동준이 느꼈던 진서가 없었다. 자신을 보고 있으면서도 다른 것을 향해있는 공허한 눈빛이 뭔가에 홀려버린 사람처럼 멍해 보였다. 입으로 말을 내놓으면서도 한발을 움직이는 무리 중에 하나를 단번에 목검으로 날려버리는 그 손끝에 싸늘한 바람이 머물고 있었다.
“진서야!....너 왜이래.”
“이젠 아무도 용서하지 않는다. 내 앞을 막는 것도.....너를 힘들게 하는 것도...”
한필중이 서제에서 내려와 밖의 소란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다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종두가 탁자위에 있던 태수의 차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뒤를 따라 나왔다.
“그 아이냐.”
동준과 한필중의 뜨거운 시선이 마당을 가로질러 서로에게 꽂혔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동준이 진서를 등 뒤로 막아서며 종두가 보내고 있는 눈빛을 읽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