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싸울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는 넥타이를 다시 조이며 말했다.
-흠, 그럴 수도 있지만, 아이들도 있고..
난 냉장고 문을 열고 주스 병을 꺼내 종이컵에 따라 그에게 건넸다. 그는 웃지도 않고 컵을 받아들었다. 많이 화가 난 것 같았다.
-원래 성격이 그래요?
-내 성격이 어때서? 박마리 그 여자 성격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해?
석주는 다 마신 종이컵을 손으로 우그러뜨리며 말했다.
-안 맞는 것은 안 맞는 거에요. 그저 그러려니 하고 생각해요.
나는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흠.
석주는 종이컵을 쓰레기 통에 버리고는 일어섰다.
-나이에 맞게 굴어요. 아직은 철 모를 나이 아닌가?
-나이에 맞게?
난 뒤를 돌아서서 그를 바라봤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내가 대학 들어갔을 때 한 선생은 초등학생이었어. 충고는 고맙지만. 나도 알고 있는 내용이야.
-뭐라구요?
나는 갑자기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 나보고 시건방지다고 하는 건가? 내 맘을 알았는 지 그가 말했다.
-건방지다는 말 뜻은 아니야. 다만, 너무 우울해보여서.
말을 마친 그는 뒤로 돌아서서 나갔다. 혼자 남겨진 나는 소파에 무너지듯 앉았다. 그랬다. 우울했다. 나만 혼자 남겨진 것 같은 느낌.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나만 혼자라는 생각에 우울했다. 하루 이틀 일은 아닌데. 다른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나는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에 두어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
-제길.
나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수업 시작 2분 전이었다.
다행스러운 일은, 아이들과의 수업은 재밌었다. 그동안 시들시들해졌던 내 마음과 몸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다른 강사들과도 큰 문제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하긴, 많은 수도 아닌데 싸운다고 해봤자, 화해하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부터 지내기가 고역이긴 했다.
-한 선생님.
-네?
이유미 선생이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 오늘은 다과회 날인거 아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과 시작하기 전, 교무회의 시간에 오늘은 다과회 날이라는 것을 들었다.
-선생님이랑, 저랑, 박 선생님이랑 최 선생님이 고등학교 2, 3학년 담당이거든요?
-네..
나는 학년별 담당을 나눈 종이를 보며 대답했다.
-뭐하는 거에요?
-아, 어려운 건 아니고요. 애들 노래방 갈거거든요? 노래방에서 애들 지키면 되는거에요. 돌아다니면 안되니까..
-네. 그럼 오늘 수업은 안해요?
-그럼요.
나는 다행이라는 듯 웃어보였다. 하나도 웃기지 않는데. 어쨌든 오늘은 좀 더 편하겠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괜히 책을 꺼냈다. 버릇이었다. 열심히 교재연구를 하는 척! 하는.
-가요, 선생님.
나는 일어섰다. 8시. 8시부터 10시까지 아이들과 놀아줘야 한다. 아니, 아이들 노는 것을 감시해야 된
다. 나와 다른 선생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옆 건물의 노래방으로 갔다. 아이들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
아서 각자 삼삼오오 방을 찾아 들어갔다. 아이들은 모두 여섯 개의 방으로 나눠 들어갔다. 한 방에 만 오 천원 씩. 박 선생이 구 만원을 노래방 주인에게 내 밀었다.
박 선생과 이 선생은 아이들과 친한 지, 곧 아이들이 나와서 각자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버렸다. 노래방 로비의 길다란 소파에 나와 최석주만 남았다.
-피곤하죠?
-아, 아뇨.
-피곤하다고 써 있는데?
최석주는 눈웃음을 보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 뭐야?
석주가 누군가를 보고 소리쳤다. 나도 뒤를 돌아봤다. 누구더라.. 그래, 강이현.
-...
이현은 말이 없었다.
-집에 갈려구?
내가 일어서며 말했다. 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떡하죠?
-가라.
석주가 턱으로 노래방 출입문을 가리켰다. 나는 석주가 이현을 싫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경멸
한다는 느낌. 이현은 고개만 까딱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나는 석주에게 물었다.
-왜 쟬 싫어해요?
-그렇게 보여요?
-네.
석주는 잠깐 동안 망설이더니 말했다.
-저 자식, 쌩 양아치야. 미국에서 살다왔다는 핑계로.. 술먹고 담배피고.. 가끔 지 엄마 차도 몰고 와요.
-그럼 안돼요?
난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안돼죠. 학생은 학생다워야지.. 원장도 저 녀석한테는 꼼짝 못해요.. 우리 학원 건물이 걔네 엄마꺼잖
아. 걔네 엄마가 우리 학원 일층 미용실 원장이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큰 미용실 원장이라..
-그게 걔 잘못은 아니잖아요..
난 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석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 이야긴 그만 합시다. 아, 그런데 내가 언제 술 한잔 산다고 했었죠?
-아, 네.
나는 조금 주눅이 들었다.
-언제 할까요? 담주에 할까요? 나 월급날인데.,
-우와. 좋죠.
나는 살짝 웃어보였다. 석주는 좀 고리타분한데가 있었지만, 그것만 빼면 퍽 매력적인 남자인 것 만은 분명했다. 사람 기분도 잘 맞추고 눈치도 빠른 것 같았다. 한마디로, 딱 바람둥이 타입. 하지만, 괘의치 않기로 했다. 어차피, 남자한테 관심도 없는 나였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아주 조금 흘러 나는 광주에 혼자 남았다. 부모님들은 모두 수원으로 떠나셨고 하루하루 내 멋대로 게으르고 퇴폐적인 생활이 계속되었다. 냉장고 안에는 종류별로 맥주를 사다놓고, 빌려놓고 반납하지 않은 비디오 테잎이 쌓여갔다.
집과 학원을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 속에 길들여져 학원에서 아이들과 어울리며 부대끼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곧잘 상담전화도 하고, 매도 들었다. 물론, 매는 장식용이었다. 어렸을 때 하도 많이 맞았던 나는 체벌에 의한 교육은 반대 입장이었으니까. 놀라운 것은 나의 적응 속도만은 아니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내 자리에 와서 재잘거렸으며, 걔중에는 나를 안아주기도 하고 내 자리에다 ‘선생님 좋아요’ 등의 메모를 남겨놓기도 했다.
감동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과연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데 너무나 스스럼없이 나를 선생으로 대해주는,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아이들은 나에게 기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학원 가는 것이 즐거웠고,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행복했다.
-선생님, 오늘 시간있어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책 정리를 하는데, 석주가 다가와 물었다. 나는 무슨 소린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시간이요?
-오늘 끝나고요.. 내가 술 사기로 했었잖아요.
-아,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석주는 기분이 좋은 듯 나를 향해 윙크를 하고는 뒤로 돌아섰다.
나는 오늘 수업 시간을 확인하고 교재를 잠깐 펼쳐봤다. 그때,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학원에서 공부잘한다고 소문난 인후와 세정이였다. 둘은 날 처음보고는 뭐 저런 선생이 다있나, 그렇게 생각했단다. 오자마자 책상 줄 맞추라고 소리 지르고 반말로 수업하고 떠들고 지랄한다고 욕하는 선생은 드물 것이다. 인후의 말에 나는 쿡, 웃었다.
-선생님, 근데요, 저 과학 선생님하고 친해요?
-누구? 최 선생님?
나는 오늘 나눠 줄 프린트를 스테플러로 박으면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네.
세정이가 인후를 밀쳐내고 내 앞에 얼굴을 들이댔다.
-글쎄요. 왜? 세정이가 좋아하는구나. 최 선생님.
-아니에요, 세정이는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어요. 선생님 오시기 전에 계셨던 국어 선생님..
-아, 그 분.
나는 다 정리된 프린트를 책장 위에 올려놓았다.
-이젠 아니에요.. 다 정리했어요. 인후도 좋아하는 사람있어요. 이 학원에. 아직 현재 진행형이에요.
세정이의 말에 인후가 펼쩍 뛰었다.
-아니에요!
-아니긴.. 누구냐면요.. 아, 선생님은 모르시겠다.
세정이가 고개를 저었다.
-누군데.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궁금한거다.. 말해봐.
-3학년에요, 강이현오빠요. 선생님 알아요?
-글세..
오랜만에 듣는 이현의 이름은 너무 낯선 것이어서 난 무심코 지나쳤다.
-그 오빠요, 이 학원에 여자 친구있어요..
인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야,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어. 잘 해봐.
나는 웃으며 인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뭐하냐, 교무실에 들어오면 안되는 거 몰라?
박마리 선생이 내 자리를 지나가며 말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움찔하더니 나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잘 가, 있다 보자!
나는 일부러 밝고 명랑하게 인사를 던졌다. 세정이와 인후가 돌아서서 손을 흔들었다. 귀여운 녀석들.
-한 선생님, 아이들하고 친하게 지내시는 건 좋지만, 너무 격이 없이 지내시면 나중에 걔네들이 다른
선생님들까지 쉽게 본다구요.
박마리 선생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녀를 한번 흘끗, 올려다보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인후와 세정이는 2학년 영재반이다. 영재반은 학원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모아놓은 반이다. 그래선지 진도도 빠르고 수업시간에도 조용한 편이었다. 단 한명만 빼놓고. 하늘이라는 남자애인데, 다른 사람에게 피해 안 가게 혼자 노는 타입이라 별로 신경은 쓰이지 않았다.
-뭐하냐, 인후!
인후가 잠깐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
인후는 딴 짓하다 걸리면 꼭 입을 가리고 웃는다.
-그렇게 공부해서 어디 남자 뺐어오것어? 빨리 책봐.
내 말에 세정이를 비롯한 영재 반 여자애들이 비밀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물론, 남자애들은 어리둥절
한 표정이다.
-선생님, 절대 비밀이에요!
수업이 끝나자 인후가 나를 따라오며 애원을 했다. 나는 씩 웃으며 물었다.
-왜?
-저 인제 포기할거에요.
-왜?
나는 복도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았다. 인후도 내 옆에 앉았다.
-그 오빠요, 나이가 원래는 21살이래요.
-엥? 고 3이라며?
행복한 일주일 만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