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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잇 스탠드[14]

크레이지쑥e |2005.05.18 12:50
조회 2,272 |추천 0

원나잇 스탠드.[제14화]

 

승하는 오래전 접어 두었던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입안가득 연기 한 모금 집어 삼킨 그는 차마 폐속 깊이 들이 마시지 못하고,
헛기침과 함께 입 밖으로 토해낸다.

 

“쿨럭, 빌어먹을.”

 

화풀이라도 하듯 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힘껏 내동댕이친다.
난제다.
준희와의 얽힌 인연을 어찌 풀어야 할지 절대적인 난제다. 그의 머리 속은 온통 얽히고 설켜서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행동에 질책을 가하고 침을 뱉어도 지금의 현실은 변함없는 사실 이었다.

 

“권선생, 이사장님  오셨어. 가봐.”

 

그의 부친의 호출을 알리는 김 선생의 말에 승하는 사념을 접고 이사장실로
들어갔다. 안에는 그의 부친과 혜원의 아버지가 함께였다.

 

“아니, 자네 꼭 이 늙은이가 발걸음 하게 만들 텐가?”

 

“오셨습니까.”

 

“앉거라.”

 

짐짓 장난석인 말투로 살짝 눈을 흘기시는 혜원의 부친께 정중한 인사를 한 승하는 자신의 부친에게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의 부친이 가르키는 손끝을 따라 쇼파에 앉았다.

 

“허허 장관님 이렇게 가끔 방문 하셔서 저희 학교 위신도 좀
높여주시고 그러세요. 승하놈이야 혜원이랑 데이트 하느라 바빠서
그런 게죠.”

 

“권이사, 내 앞으로 좀 더 자주 오도록 하리다.”

 

흐믓한 미소와 함께 큰 인심이라도 쓰듯 혜원의 부친은 말했고, 승하의 부친역시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모종의 관계. 승하는 인상을 절로 구기게 만드는 형식상의 대화가
신물이 났고,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차올랐다.
그런데, 앞에 놓인 찻잔을 입에 가져가다 뗀 혜원의 부친 입에서 나온 말이 승하의 발목을 잡고 더욱 깊은 구렁텅이로 빠트려 놓았다.

 

“결혼 날짜 잡았다. 아무래도 10월이 좋을 듯 싶구나.”

 

*                    *                    *                    *           

     
오늘따라 승하의 종례가 늦어진다.
난 그 이유를 짐작 하지만, 반 아이들은 잔뜩 인상을 쓰고 투덜거린다.
승하의 수업이 시작되기 전부터  경미한 어지러움 증이 몰려 왔었다.
온몸에 힘이 쫙 빠지고, 자칫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를 것 도 같았다.
눈을 감고 자고 싶었고, 잠시 엎드려 있는 다는 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너무나도 달콤한 잠 이었는데,어느 순간 귓전을 울리는 두 남자의
높은 언성에 꿈같던 잠이 산산 조각이나 버렸다. 아무래도 그가 알아차린 거 같았다.
강렬하게 나를 쏘아보는 눈빛,
당황함을 감추는 억지스런 행동,
하지만 그의 동문서답에 확연히 알아채버렸다. 끝까지 숨기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가소로워 보였다.

 

“무시하기로 한거냐?”

 

느닷없는 누군가의 침범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땐, 언제 왔는지  태후가 경호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 준희. 앞으로 너 짝은 나야.”

 

공고라도 하듯, 크게 내 뱉은 태후의 말에 또 다시 웅성웅성 거린다.

 

"구경 낫냐 새키들아! 입 다물고 공부나 해.
중간고사 일등 못하면 내가 참지 안을거니까.”


내 옆자리로 옮겨 앉은 태후의 행동에 또 다시 술렁거리자 태후가 선생인양
명령을 했고, 반 아이들의 시선과 함께 웅성거림도 쥐죽은 듯 조용해 졌다.
그러고 보니 그 날 이후 태후와 첫 대면이었다.

 

“짝이 누가 되든 관심 밖이야.
될 수 있다면 너랑 말 섞고 싶지 않아.
서로 무관심 하게 지내는 게 좋겠어.”

 

“어쩌나, 난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
네가 도망 갈수록, 날 멀리 할수록,
난 더 가까이 가고 싶어져.”

 

피식. 태후의 말에 나 역시 웃음이 나오려는걸 간신히 참았다.
어린아이의 심술 같았다. 갖지 못하면 더욱 안달 나는 소유욕이 강한 집념 이었다.
태후의 말이나 행동을 보면 필히 유복한 집안의 자식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랑 말장난 할 기력 없어. 그만 접자.”

 

“대화하면 안 접을 거냐?”

 

“푸 훗.”

 

나즈막히 내 뱉은 내 말에 엉뚱한 소리로 날 웃기는 태후였다.
생각지 못했는지 내 웃음에 태후의 동공이 커져왔고, 그때 승하가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와 교단에 섰다. 한참 아무 말 없는 승하의 시선이 나를 향했고, 난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주시했다.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seems like you still want something.”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갈증이 가시질 않은 모양이군.)

 

“You the one who seduced me first. don't try to put this on me.”
(그날 밤 먼저 유혹을 한건 너야. 그 일에 대해선 책임을 묻지마.)

 

잔뜩, 비꼬아 대는 내 말에 승하는 그날 밤 일을 상기 시켰다.

 

‘내 짐작이 맞았군. 후후.’

 

마음에 걸리는 것일까? 아니, 인정하기 싫은 모양 이었다.

 

“What if i'm serious about you?”
(책임은 묻지 않으나, 그 마음이 진심이라면?)

 

“What do you want me to do about it?”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래?)

 

“Do whatever you want , i won't force you.”
(당신 마음 가는 데로. 강요는 하지 않아.)

 

“I'll mee you at that sky rounge at eight i'll give you answer then.”
(8시 그날 밤 만났던 그곳 스카이라운지 에서 보자. 그때 대답하지.)

 

만나자는 승하의 말에 난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고, 우리 둘의 대화에 실증 난 반 아이들은 불만을 여과 없이 내 뱉었다.

 

“선생님, 그런식의 대화 듣기 거북해요.
해석이라도 해주시던가요.”

 

“맞아요. 오늘이 처음도 아니고.”

 

“이 준희, 너도 앞으로 자제해. 영어 잘 하는 건
알겠는데 아무 때나 써먹지 말라고 재수 없으니까.”

 

저마다 한마디씩 툭툭 던지던 말이 결국은 나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승하는 어떠한 대답도, 변명도 하지 않는다.

 

“둘만의 언어니까, 비밀이거든.”

 

승하의 묵묵부답에 그를 대신해 내가 대답했다.
특별을 느끼도록 과포장해 미화시킨 말이었다.
그러자,반 아이들은 더욱 발끈했고 날 쏘아보는 눈초리 또한 한층 더 냉랭해 졌다.

 

“조용히 해. 원하면 너희 모두하고 영어로 대화 해줄게.
실전만큼 좋은 학습도 없는 법이니까. 오늘 특별 사항은 없다 .모두 조심히 돌아가도록. 이상!”

 

권승하의 종례가 끝이 나자 그와 태후를 비롯해 남자 아이들이 우르르 교실을
빠져 나갔고,여자애들 모두는 준희의 자리를 순식간에 빙 감싸기 시작했다.

 

“왕따 주제에, 사람을 패고, 그것도 모자라 잘난 척 이라.”

 

“이년 영어로 승하샘 한테 꼬리 친 것 맞지?
아우, 정말 밥 맛 이라니까.”

 

그녀들의 행동에 가만히 앉아만 있는 내게 다가와, 혜미가 내 이마를
한손으로 툭툭 쳐내며 말했다.
그녀들은 건드리면 폭발할 듯한 일촉즉발의 발광적인 상태를 갖추고 있었다.

 

“짐작만 하지 말고, 알아들어 이 깡통들아!”

 

“혜미야, 이년은 말로해서 안되겠다.”

 

빈정대고 무시하는 내 말에 그녀들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열댓명이 내 주위를
좀 더 가까이 감싸왔다.

 

“문 잠궈!”

 

혜미의 한 마디에 재빠르게 움직이며 다른 아이들의 호흡이 척척 들어맞았다.
난 재미있는 표정을 지으며, 다리를 꼬고 앉아 그녀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내 몸에 손대는 거 얼마든지 좋은데,
대신 그 뒷감당은 나도 수습 못해.”


나에게 달여들 기세를 갖춘 그녀들을 쏘아보며 차갑게 내 던진 내 말에
순간 그 아이들의 표정이며, 행동이 멈칫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나는 창가 쪽의 창문을 열고 밖으로 빠르게 뛰어 내렸다.

 

“미안해, 너희들 응징은 다음에 받도록 할께.
혜미 말대로 승하샘 에게 꼬리 좀 쳐보려고. 훗.”

 

“야, 너 거기 안서? 비겁하게 도망이나 가고.”

 

난 그녀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며 마음껏 비웃어 주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들을 상대 할 힘은 더더욱 없었고, 자꾸만 속에서 뭔가 치미는 것이
내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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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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