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장
방황의 끝
우리 마족에게 있어 첫 인간계 방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개 그때 처음으로 타종족을 접하기 때문이다.
처음 인가을 접하는 시기의 나이는 대략 천살에서 이천살 정도이다.사실 인간계에는 이론만으로만 알고 있떤 인간의 실생활을 몸으로 접하고 마계와의 차이점을 알게 된다.
인간들은 우리와는 달리 무리짓기를 좋아하고 참견하기를 좋아한다.
물론 마족 중에도 성격의 차가 있긴 하지만 서로 어느정도의 거리는 유지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자신이 참견할 것과 그렇지 않을 일의 선을 확실히 긋는 우리와는 달리 인간은 참견해서는 안 될 일에도 끊임없이 참견한다.
* * *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 내가 했던 선택의 결과를 확인하기 이해서는 약간의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주변은 조용했기에 기억을 더듬어 보기에는 좋은 상황이었다. 에릭이 의식을 잃고 나서 나는.....아아, 그랬었지. 그 후 어떻게 됐을 지는 뻔한거겠지. 속으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금세 힘을 냈다. 지금에 와서 이런 생각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이제 슬슬 눈을떠야겠따고 생각한 순간, 삐걱 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든 척 숨을 고르게 하고 그 자의 손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그 자를 내 쪽으로 끌어당겨다가 몸을 옆으로 굴려 오른쪽 다리로 걷어찼다.
"꺄아"
"여기서 뭘 하는거지?"
나는 카엔시스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마, 마리엔님, 깨어 나셨군요"
그 와중에도 카엔시스는 입술을 열어 내게 말을 건넸다.
"네가 여기서 뭐 하는 거냐고 물었어"
"전 마리엔 님의 원기를 회복시키려고 온 겁니다"
"그럼 왜 몰래 기웃거린 거냐?"
"마리엔 님이 주무시고 계실까봐 그런 거였는데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뭔가 소란스럽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나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몸은 여전히 카엔시스에게 향한 채 눈동자만 홀깃 움직였다
"아! 공주님! 깨어나셨군요!"
그는 나를 보고 반가움에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 후 몇 초 지나지 않아 다수의 사람들이 뛰어오는 듯한 소리가 건물 안을 진동했다.
"공주님, 괜찮으셨군요!"
"다행입니다"
"얼마나 걱정했다구요!"
그리고 이곳에서 보리라고 예쌍치 못한 인물들이 있었다
"너희들?"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그들 속에 속해 있는 한 인물을 보고 일순 굳어버렸따.
그는 에릭이었다. 그렇다.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에니그마를 사용하고 말았다.
솔직히 기대는 하지 않았다. 조금 전 내가 마음의 준비 어쩌고 한것도 부질없는 일에 힘을 써버리고 로튼 무리에게 사로잡힌 것으로 지레짐작했던 탓이다. 그런데 이건 도대체?
"괜찮아?"
어리둥절해하던 나는 에릭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목소리가 들린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있는 라디폰 공작이 서있엇따
"공주님께서 에니그마를 사용해주신 덕분에 에릭이 살아난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탈출한거지?"
사실 이게 가장 궁금하다. 에니그마를 사용하면 하루정도는 나가 떨어지게 된다.
"제가 마리엔과 에릭씨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목소리는 문가에서 들렸다
"루시퍼 씨!"
사람들은 반가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탑의 2층에서 나를 불렀던 자, 그리고 에릭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을 알려준 자는 루시였다. 루시가 나에게 에릭의 상태를 알려주었을 때도 나는 오른쪽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루시를 에릭에게 보내면 되겠다고 여겼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 왼쪽 길로 접어든 것은 그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그 여자르 ㄹ쫓아갔다가 돌아와 보니 마리엔과 에릭씨가 쓰러져 있지뭡니까. 다행이 두 사람 다 숨을 쉬고 있어 밖으로 나왔습니다"
"루시퍼 씨가 도와주셔서 천만 다행이었습니다"
잘되긴 뭐가 잘돼. 중요한 석판을 빼앗겼는데. 게다가 내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대처한 루시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탑에 있던 환영 마법, 루시 짓이지?"
"알고 있었군요. 역시 마리엔의 눈썰미는 대단합니다"
"흥, 시치미 떼지마. 일부로 허술하게 만들어놓은거 알고 잇으니까"
"하하하하"
내가 추궁하자 루시는 창밖을 내다보며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지금에서 야 하는 질문이지만 어째서 그런 곳에 계셨던 겁니까?"
어느새 라디폰 공작이 루시를 향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음....예전에 숲에서 길을 잃고 헤멜 때 갑자기 에릭씨가 쓰러지고 모습을 감춰버렸지요. 그후 누군가가 저도 노리고 있따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에릭씨처럼 잡으려는 생각이었겠지요.하지만 이래봬도 잔재주가 많거든요.. 덕분에 무사히 도망을 친거구요"
"그러면 왜 그 세사람이 도플 갱어였따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지 않으셨습니까?"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언젠가는 알게 되것 아닙니까. 그리고 제 예상대로 결국은 알게 댔잖아요"
그 말에 일행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입니다. 루시퍼 씨도 무사하셨고 , 세린경도 티스몬 백작이 약을 가지고 먼저 가셨으니 완쾌할겁니다"
"흐음"
내가 다른사람들과는 달리 기쁜 표정을 보이지 않자 말을 꺼냈던 죠안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공주님, 왜 그러십니까? 별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으신걸요?"
"그런건 아니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잇찌? 에니그마가 완벽하게 먹혀 들어갈 때는 백번에 한번 있을까 말깐데. 게다가 잡히지도 않았어. 난 에릭도 죽고 로튼에게 잡혔을 경우를 예상하고 있었는데"
"훗 운이라는건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따르는 것이죠"
"내 말에 카엔시스가 주변이 환해질 정도로 밝게 웃으며 말했다.
"석판은 역시 빼앗겼지?"
뻔히 빼앗겼다는 걸 알지만 확인하는 차원이었다. 그리고 캐스나를 쫓아갔떤 루시에게 다시 빼앗았냐고 질문으로서 던진 것이기도 했다.
"쫓아가긴 했지만 그곳에 로튼씨는 없더군요. 석판을 빼앗기에는 수식간에 마법진을 이용해버려서 ."
"이로써 석판을 모두 빼앗기고 말았군요"
"카엔시스 님"
"괜찬습니다. 제르마 님께서도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람의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석판은 잃었찌만 모두 무사하니 그걸로 된겁니다"
"모두 빼앗긴 건 아닙니다"
사람들은 난데없는 루시의 말에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루시는 품속에 손을 집어너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순간 눈이 휘둥그래졌다
"당신이 아르테미스의 산에서 만났던 마법사였나, 루시?"
내가 날카롭게 캐묻자 다른 사람들은 설마 하는 얼굴로 루시를 보았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 있죠? 요이체로스 문제로는 약간의 충돌이 있엇지만 지금은 로튼씨라는 공동의 적을 둔 사이가 아닙니까?"
하지만 쉽게 넘어갈 문제는 아니었다
"도대체 그때 왜 그런짓을 했떤 겁니까?"
"당시에 우리를 속였떤 겁니까?"
"아르테미스의 산에 마물을 풀어놓았떤 것이 정말 루시퍼씨였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적지안게 놀란표정이었다
"뭐 일단 마물을 푼건 제가 맞습니다. 하지만 속인 건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합류하게 된것뿐이지요"
"그런건 상관없어. 당신은 왜 석판을 손에 넣으려 했던거지?"
"석판을 파괴하기 위해서입니다"
"어째서?"
"그건 지금은 말씀드릴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여러분과 목적이 같다는 거죠"
루시의 말에 사람들이 술렁이며 그를 쳐다보았다.역시나 심각하게 고민 하던 사람들은 루시를 믿어보기로 마음을 먹은 눈치였다. 그걸 눈치챈 루시는 언제나처럼 실실거리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행동하나하나에 이유를 부여한다는 것은 꽤나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냥' 으로 치부ㅏ고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도 있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왕궁으로 돌아가는 일행 중에서 유독 나만 심각했다. 도대체 어째서 왜 에릭을 구했던 걸까? 후회한다거나 물리고 싶다거나 하는 차원이 아니다. 말 그대로 이유를 모르겠다.
게다가 에릭이 했떤 행동의 의미는 또뭐냐? 왜 키스 같은걸 하고 난리냔 말이다.
그리고 또하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내 첫키스였다는 사실이다. 워낙 정신이 없어 별 느낌도 없었지만. 그래도 첫키스다. 첫키스는 멋진 마족과 근사한 분위기에서 하고 싶었는데 . 아무리 이 몸이 내몸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날 밤 우리 일행은 이름 모를 작은 숲에서 야영하게 되었다.잠시 누어 있던 나는 몸을 일으켰다. 나는 덮고 있떤 이불을 걷어내고 밖으로 나왔다
"마리엔, 아직까지 안자고 뭐 하는 겁니까?"
"그냥"
루시는 내가 아무말도 하지않자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다물었다
"루시."
"왜 그러십니까?"
"만약 아는 사람이 인질로 잡혔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어?"
"구해야죠" 망설임 없이 돌아오는 대답에 나는 다시 입을열었다
"만약 구하면 자신이 위험에 처하거나 많은 피해를 본다면?"
"그럼 단념해야죠"
"역시 그렇지?"
"그렇죠"
나와 루시는 짜여진 각본처럼 돌아오는 대답에 바로바로 입을열었다
"그럼 그때 왜 내가 에릭에게 가야 한다는 것처럼 말했지?"
"마리엔이 그렇게 말해주길 원했으니까요"
이번에도 바로 대답이 돌아왔따
"그게 무슨뜻이지?"
"제가 그입장이었따면 그걸 원했을 겁니다. 그리고 나와 마리엔은 닮은꼴이지요"
루시의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스스로는 그런 선택 못합니다. 그래서 등을 떠밀어줄 누군가를 기다리지요.특히 고민이 있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않았다. 하지만 내 눈빛츤 '헛소리. 그럼 내가 그렇단 말이냐' 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손각으로 가리키며 뜬금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따
"제가 몇 살처럼 보입니까?"
"글세, 스물 네 살 정도?"
그러자 루시가 실소를 머금었다
"몇 년 후면 천 살 입니다"
루시의 말에 내 눈빛이 강렬해졌다.
"인간이 아니죠. 하지만 인간들과 지낸 시간이 많았스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발견했찌요. 진정한 나와는 다른 나를. 인간들에게 미움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속이고 그들에게 맞췄습니다"
"그게 싫었습니다. 어차피 그들과 나는 다른 존재니까요. 그래서 어느 순간에 나는 동료라도 웃으며 죽일 수 잇는 존재가 되었지요" 그말을 하는 루시의 입술에는 잔잔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의말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의 형으로 끝났다.
"그럼 지금은?"
"글세요. 말로 하기 힘들군요. 굳이 풀어서 말하자면 예전에는 인간들과 함께 가려했었습니다. 그뒤에는 완벽하게 선을 그어 혼자 나아갔습니다. 지금은 그 중간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함께 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연결은 되어 있습니다"
"이해 못하겠어. 결국 어느쪽이 옳은거지?"
"모릅니다. 각자에 따라 다릅니다"
"...난 당신과 달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리고 쉽게 루시는 내말을 받아 들였다
"맞습니다. 저와 마리엔은 전혀 다른인물이지요. 이건 그냥 옛날 이야기입니다."루시의 말 솔직히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하게 어느 정도 만족은 했다.
날이 저물어 게이트라는 도시에서 하룻밤을 묵고 가게 되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나오는 도중 여관 뒤뜰에서 뭔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여관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비추는 범위 안으로 들어왔다 다시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검이었다
오밤중에 잠이나 잘것이지 웬칼부림? 나는 에릭을 보며 고개를 절레 절래 흔들고는 하늘로 시선을돌렸다
"마리엔?"
"이 밤중에 안자고 뭐 하는거냐?"
아무리 그래도 다짜고짜 ' 왜 그랬어>?'라고 묻기는 곤란하다.
에릭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은 물어볼게 있어"
"나한테?"
에릭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따. 그리고는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왜그랬어?"
"뭘?"
"그러니까! 왜그랬냐고!"
차마 내입으로는 키스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에릭은 시치미를 떼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건지 갸웃거리기만했다
"왜 그.....키스했냐고?"
작게 소리친다. 불가능한게 아니다. 목소리를 낮춰 단어 하나 하나에 강세를 주어 말하지 작게 소리치는 것이 돼버렸다
"기억하고 있었냐?"
"당연하잖아"
"네가 아무말도 안하기에 기억 못 하는줄 알았어"
한참 동안 잠자코 있던 에릭이 중얼거렸다.
"다시한번 물을께. 왜그랬어?"
에릭은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좋아하니까."
"응?"
나는 침착한 모습 그대로 되물었다
"좋아해"
나는 방금 들었던 말을 되새겨보았다.
"장난치지마!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거냐?"
나는 에릭의 위기 타개를 위해 나온 헛소리에 버럭 화를 냈다.
"장난이 아니야"
하지만 에릭이 정색하며 말하자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지금 느끼는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될까? 당혹? 황당? 그러나 나는 얼마지나지 않아 이혼란스러운 상황을 벗어날수 잇었다.
나는 내볼에 뭔가 살짝 와 닿는 것을 느끼고 흠짓했따. 에릭의 손가락이 살짝 닿았다가 마침내는 손전체가 닿았다. 그는 마치 소중한 걸 만지는 것처럼 내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손이 차가워. 그리고 딱딱해. 아마 굳은살이 박여서 그러겠지. 검을 많이 쥐어서 그런가보다.에릭은 잠시 나를 내려다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넌 날 어떻게 생각하지?"
"내가 굉장히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간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여관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가마히 가슴에 손을 대보니 잔뜩 놀란 가슴이 아직도 요동치고 있었다.
"마족 놀래키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