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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잇 스탠드[36], [37], [38]

크레이지쑥e |2005.05.26 07:57
조회 3,017 |추천 0

원나잇 스탠드.[제36화]

 


요란하게 울려대는 핸드폰 소리는 날 단잠에서 깨웠다. 주섬주섬 핸드폰을 찾아 가던 손안에 그것이 집혔고, 잠에서 덜 깬 모습으로 전화를 열었다.

 

[이 준희씨?]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나를 알고 있는 듯한 상대방의 긴박한 음성이 먼저 귓전에 울려왔다.

 

“네. 누구세요?”

 

[이렇게 불쑥 전화해서 죄송해요.

전 윤 혜원 이라고… 합니다.]

 

승하의 약혼녀 윤혜원.

 

[만나 뵙고 싶어요. 나와 주실래요?]

 

“그러죠”

 

한번쯤 그녀에게서 전화가 올 거란 예상은 잠재의식 속에 담아 두고 있었다.

그래서 놀라움이나 걱정을 느끼지 못했고 어쩌면 이렇게 먼저 연락이 오는 것이 당연지사 라 생각했다.

나는 심플한 원피스를 차려 입은 모습으로 정해진 약속장소로 들어섰다.

그곳엔 이미 혜원이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인사를 건네는 내 말에 그녀가 맞은편 자리를 가르치며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전보다 얼굴색은 많이 안 좋았고, 몸 또한 수척해져 그 동안 마음이 고생이 심했음을

간접적으로 들어냈다.

 

“지금 제 모습 참 우습죠? 저도 알고 있지만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제 상황을 이해해 주세요.”

 

“하고 싶은 말이 뭐죠?”

 

단도직입 적으로 묻는 내 말에 혜원은 숨을 한번 크게 내 쉬었다.

물론, 윤혜원 저 여자의 입을 통해 나올 말은 뻔히 알고 있었다.

 

“승하 오빠 돌려주세요.”

 

“제가 가져갔나요?”

 

눈시울을 붉히며 말하는 혜원에게 내 반문은 그녀의 입을 일순 봉쇄 해 버렸다.

잠시 멍한 상태로 커피 잔만 만지 작 거리던 혜원은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다시 시선을

나에게 고정 시켰다.

 

“준희씨만 아니면 우린 결혼 했어요. 승하오빠만

보고 자란 한 여자 삶을 짓밟고 준희씨는 행복할거라

생각해요? 부탁이에요. 제발 승하오빠 저에게 보내 줘요.

흑흑……준희씨는 젊고 예쁘잖아요. 얼마든지 다른 남자

만날 기회도 많고요…… 전 승하 오빠 하나만 바라보며

살아 왔어요. 그러니까 제발 준희씨가 포기해 줘요. 네?”

 

눈물 흘리는 혜원은 쓰다듬어 주고 안아주고 싶은 충동이 들게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승하오빠랑 결혼할 수 없다면 저 죽어 버릴 거에요.

이런 제 마음 조금 이라도 헤아려 준다면 그만 오빠

놓아줘요. 제가 이렇게 싹싹 빌게요. 준희씨 한번만……

네? 한번만 저 좀 도와줘요 제발 이요 흑흑……”

 

무릎까지 굽힐 자세로 필사적인 애원을 해오는 헤원의 눈에선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그녀의 뽀얀 볼을 타고 마구 흘러 내렸다.

 

“내 자신까지 던져가며 승하오빠 위해 희생 했어요.

사람들에게 몹쓸 여자라는 손가락질을 당해도 오빠만

있으면 전 감당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돌려줘요.”

 

혜원의 눈동자에 투영된 내 모습은 사악한 사탄과도 같았다. 정말 끔찍했다.

왜, 이런 모습으로 이런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지 지금의 현실이 싫었다.

어차피 간악한 여자로 낙인찍힌 내 입에선 감언이설로 혜원을 속이지는 못했다.

 

“윤혜원씨! 뭔가 잘못 알고 오셨네요.

저에게 이렇게 사정할게 아니라 권승하씨를

직접 찾아가야 했어요. 전 그저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뿐이죠. 그러니까 저에게 이렇게

애원 하셔도 소용없다는 얘기에요.”

 

“준희씨가 오빠 마음 좀 돌려줘요. 아니 멀리 떠나줘요.

오빠 눈에 보이지 말아줘요. 그에 대한 사례는 충분히 해

드릴게요. 보아하니 홀어머니 모시고 살던데 평생 먹고

살 만큼 보장해 드릴게요. 그러니까…… 준희씨가…”

 

‘쾅’

 

나는 들고 있던 물 컵을 힘껏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혜원을 향해 노려보았다.

잠시나마 마음이 아프고, 그녀에게 미안해하고, 연민을 느꼈었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후회했다.

 

‘결국, 당신도 권력에 썩어빠진 여자였군.’

 

그녀의 한 마디에 나는 좌절을 겪고 혜원을 괴롭히던 눈물은 어느새 나에게 전염돼 내

눈망울에 눈물이 고이게 만들었다.

 

“제 말 기분 나쁘게 듣거나, 협박이라 생각 말아요.

어차피 준희씨는 오빠랑은 이어질 수 없는 사이에요.

오빠네 집에서 준희씨 환대 하지 않는 건 뻔한 일이고요,

제발 멀리 도망가 줘요. 가서 다시는 오빠 앞에 나타나지

말아줘요. 평생을 벌어도 못 만질 만큼의 거액을 드릴께요.

현명 하다면 제 판단이 옳다고 생각 하실 거에요.”

 

간곡하게 부탁을 해오는 혜원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슬픔에 잠긴 듯한 눈빛을 보내왔고,

자기 부모님의 권력의 남용과 부정을 함부로 행사했다.

내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고, 난 침착하기 위해 오들오들 떨려오는 온몸에 힘을 주었다.

 

“왜 승하샘이 당신을 거부 하는지 이제 서야

알겠네요. 권세나 세력의 힘을 빌려 사람 벼랑

끝에 내모는 재주 있네요. 당신이란 여자는……

내가 권승하 라면 당신 존재조차 무시했을 거야…

오늘 당신의 인격모독은 아주 탁월했어요.

다신 마주치는 일 없길 바라며 먼저 일어날게요.”

 

“이 준희씨!”

 

나를 붙잡는 그녀를 뒤로하고 난 카운터에서 차 값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울고 싶은 내 마음을 대변 하듯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지 시작했다.

그 빗속에 난 몸을 맡기고 목적지 없이 걸었다.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빗물과 어우러져 분간 할 수 없게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 내렸다.

 

*              *              *               *                *

 

가을의 문턱에서 내리치는 비는 여름철 장마보다 더 많은 양을 내 뿌렸다.

마치 하늘이 뻥 하고 뚫린 것 같은 착각마저 감돌게 했다.

헤드셋을 귀에 대고 퍼붓는 비와 리듬을 맞춰 들려오는 색소폰 음률은 맑고 아름다웠다.

그 소리에 한껏 취해있던 태후는 서서히 느껴지는 진동에 헤드셋을 벗고, 핸드폰을 꺼내

액정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심란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권 혜미!”

 

[지금 만나줘야겠어]

 

“왜?”

 

[잊었어? 그게 아니라면 클럽으로 와]

 

미련이 없음을 과시하며 혜미는 전화를 일방적으로 먼저 끊어 버렸다.

태후는 깊은 한숨을 들이 마시며 빗속을 뚫고 혜미가 말한 클럽으로 조속히 뛰어갔다.

그리고 그 앞에서 이미 젖은 몸으로 비를 피하고 있는 준희와 마주쳤다.

 

“준희야!”

 

태후가 애처롭게 그녀를 불렀지만,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묻혀 준희에게 전달되지

않았는지 그녀는 아무 표정 없이 앞만 응시 하고 있었다.

비를 맞은 탓인지 준희의 입술이 파랗게 질리고 바르르 떨고 있었다.

 

“이 준희.”

 

바로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조용히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준희가 태후를 돌아다 봤다.

 

“왜 이러고 있어? 이러다 감기 들어.”

 

“추워.”

 

태후는 온몸이 진동하듯 떨고 있는 준희를 데리고 클럽으로 들어갔다.

비가 내려서 인지 다행이 클럽 안은 따스한 온기가 감돌아 훈훈했다.

 

“서 태후, 여…….”

 

태후를 보고 손을 흔들던 혜미는 준희의 등장에 인상을 구기고는 팔짱을 끼고 태후를

노려봤다.

 

“짝눈 된다. 눈 똑 바로 떠라.”

 

“쟤는 왜 데리고 왔어?”

 

“준희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이 준희니까….”

 

혜미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싫은 내색을 해 보이며 험상궂은 얼굴로 준희를 째려보았다.

하지만, 준희는 신경 쓰지 않았고 어느 샌가 태후가 내미는 따뜻한 녹차와 수건을 받아 들고 젖은 머리와 몸을 대충 닦아 내려갔다.

 

“너 무슨 일 있는 거야?”

 

걱정스레 물어오는 태후의 물음에 준희는 잠시 할말을 잃었다.

좀 전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고, 설명한다 해도 웃음 거리였다.

 

“아무 일도……”

 

“너 안 되겠다. 일어나 내가 집에 데려다 줄게.”

 

온몸의 떨림 증상은 훈훈한 온기 속에서도 그치지 않고 계속 되었고, 보다 못한 태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준희에게 손을 내 밀었다.

 

“서 태후, 내 할말 시작도 안 했는데 가겠다고?”

 

혜미의 낯빛이 바뀌며 태후에게 물었으나 태후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준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 클럽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데 혜미가 준희를 상대로 트집을 잡았다.

 

“이 준희, 너 요즘 잘 나가더라”

 

비열한 웃음을 흘리는 혜미는 뜻 한 바를 이른 듯 만족스런 얼굴로 뜻 모를 말을 던졌다.

 

“서 태후, 여기서 준희와 함께 나가는 순간

모든 게 다 아웃이야 알아서 잘 선택해.”

 

다소 위협적인 혜미의 말에 태후는 망설임 없이 나를 데리고 클럽 밖으로 나왔다.

그들의 뒤에서 혜미의 확인되지 않은 수군거림이 들려 왔지만 태후는 무시하고 제 갈길 만

바삐 걸었다.

 

“그만 들어가 봐.”

 

“그럴 거였으면 나오지도 않았어.”

 

준희 말에 태후는 가당치 않다는 말을 내 뱉고,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나도 하나 줘”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준희에게 담배를 건네는 태후는 주고 나서 준희 입에 물린

담배만 응시했다.

준희의 입을 통해 깊숙이 그녀의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담배 연기가 태후는 순간 부러웠다.

정말 하찮은 물건 이라도 준희것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 곁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

준희가 내 뿜은 매캐한 담배 연기가 비와 어우러져 그들 앞에서 아지랑이 마냥 물결을 이루며 아른아른 움직였다.

그렇게 아른대며 물결을 이루던 연기가 어느 틈에 사라져 버렸다.

태후는 유유히 사라지는 연기가 꼭 준희 같아 마음이 불안해져 왔다.

 

“이 준희”

 

“?”

 

“너 때문에 심장이 멍들었어.

여기가 새 파랗게 멍들어서 너무도 아파”

 

태후는 자기 가슴팍을 주먹으로 쳐대며 아픔을 호소했다.

그 모습에 준희도 마음이 아파왔다. 헛된 이상을 꿈꾸는 태후를 더 이상 방치해 둘 수만은

없었다.

 

“한 낯 스치는 열병이야, 그 마음,…

순식간에 물거품 되 버려 그러니까 접어”

 

“아니, 물거품이 되어도 접기는 싫어. “

 

“잊으란 말, 아파하지 말라는 말, 울지 말라는 말, 하지

않을게. 너의 기분, 너의 감정만큼 울고, 때리고, 부수고,

아파해…그래서 너의 멍든 심장을 도려내버려……”

 

작은 관심 이라도 받기 위해 내 던진 태후의 말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시작도 안했는데, 이별 인거야?”

 

“시작은 너 혼자 했고, 끝은 나 혼자 해”

 

“내 심장을 갉아먹는 너의 기생충 따위는……”

 

“새로운 사랑을 만나면 지나간 사랑은 그저 연습이야”

 

얼음장처럼 싸늘한 준희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에 꽂히고,

그의 모든 오장육부가 난도질당하여 찢기는 감각은 생소 하지만 숨 막히도록 아팠고,

눈앞에 있어도 손을 뻗어 쉽게 잡을 수 없는 준희는 택시를 타고 홀연히 사라져 갔다.

빗속에서 그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본 태후의 눈에선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줄기가 한 없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이 준희, 이미 내 가슴엔 얼룩이 져 버렸어’

 

원나잇 스탠드.[제37화]


비를 맞고 난 이후 감기 몸살로 며칠을 앓아누워 학교도 제대로 나가지 못했다.

열이 몹시 올라 엄마는 내가 죽는 줄만 알았다고 한다.

그렇게 며칠을 이불 속에 박혀 있으면서도 태후의 걱정은 쉽사리 놓지 못하고 있었고,

장장 삼일 넘게 연락이 없는 나로 인해 승하가 불쑥 집으로 찾아왔다.


“안녕 하세요? 준희 담임 권 승하 입니다.

준희 어머님 되시죠?”


“네, 그런데 여기까진 어떻게…….”


“준희 많이 아픈가요? 걱정이 돼서요.”


“지금은 좋아 졌어요. 좀 전에 약 먹고 잠들었는데

한번 들어가 보시겠어요?”


“네.”


승하는 대뜸 ‘네’라고 대답을 하고 엄마가 내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뒤를 따라 그의 머리가 먼저 내 두 눈에 들어왔다.

난 누워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고, 승하는 매우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 봤다.


“준희야, 선생님 오셨다. 좀 괜찮니?”


엄마가 내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승하를 가리키자 그는 작은 미소를 보이며 안도의 한숨도 함께 내 뱉었다.


“선생님 이쪽으로 앉으세요. 전 차 좀 내올게요.”


“네. 감사 합니다.”


엄마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승하는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그의 이마를 내 이마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아기를 다루듯 내 입술에 입맞춤을 해 왔다.


“준희 감기 내가 다 가져갈게. 너 아프면 속상해”


내가 연락도 없이 나가지 않은 삼일 동안 그는 꾀 애가 탄 듯 했다.

“지금 기분 어때?”


“상쾌해.”


거짓말처럼 승하가 오고 나서는 더 이상의 열은 오르지 않았고, 언제 앓았냐는 듯 몸이 한결 가벼워 졌다.

승하가 웃었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승하의 얼굴이 참 해맑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큰 남자에게도 저런 표정이 남아 있다 는 것이 나는 그저 신기했다.


“같이 갈 곳이 있는데…….”


“좀 더 자고 싶은데…”


“며칠 동안 연락도 안하고 사람 가슴 졸여놓고,

이렇게 불쑥 찾아와도 반기는 내색도 없네…아무래도

난 불청객 인가보다. 잠 보다 도 못한 존재 였어 권승하.”


자고 싶다는 내 말에 심사가 뒤 틀렸는지 승하의 입에선 볼멘소리가 흘러 나왔다.

왠지 거부 할 수없는 승하의 애교 섞인 말은 저절로 내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나가있어 옷 갈아입고 나갈게”


그제 서야 화색이 도는 승하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으로 나갔고, 난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섰다.

며칠 사이에 머리도 얼굴도 엉망 이었다. 이런 모습을 승하에게 보였다는 것이 창피해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거울 앞에서 대충 머리를 매만지고 거실로 나갔을 땐 승하는 엄마와 함께 다과를 들고 있었다.


“바람 씌어도 괜찮겠니?”


“걱정 마세요. 어머니 일찍 들여보낼게요.”


승하가 대신 엄마의 물음에 대답을 하고는 나에게 어서 나가자는 무언의 눈짓을 보내왔다. 난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승하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처음 승하를 만났던 두 번 다시 보기 싫었던 그 호텔 이었다.

내 표정이 어두워 진 것을 간파한 승하는 내 손을 꼭 부여잡았다.


“두려움으로 기억 되었던 곳이 이제는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장소가 되면 좋겠어. 같이 들어 가 줄 거지?”


승하의 말에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 그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내 손을 잡고 레스토랑으로 향했고, 그곳의 종업원들은 승하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 우리의 자리를 안내 했다. 그곳에서 가장 전망 좋은 자리였다.


“주말에는 예약제로 돌아가는 자리야”


승하는 그만큼 좋은 자리를 앉게 되었다는 암시를 주었지만, 사실 난 아무 자리나 다 똑같아 보였다. 좋은 자리에 앉아도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그 자리가 더욱 빛이 나고 안 나는 그런 이유였다.

승하와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종업원이 전복죽을 내 왔다.


“어머니가 너 병치레 한 후엔 그것만 먹는다고 하셨어”


“훗. 엄마랑 그새 그런 얘기까지 한 거야?”


“오늘은 처음이라 놀라신 것 같아서 말씀 안 드렸는데,

다음엔 준희 어머니께 솔직히 털어 놓을 거야”


승하는 자신에 찬 모습으로 말했고, 내가 죽을 다 먹을 때까지 그저 나를 바라만 보았다. 부드러운 전복죽이 고소한 맛과 함께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예전의 엄마 솜씨와도 같은 맛이 배어났고, 삼일 만에 처음 넘기는 음식 이었지만 속에선 별 다른 거부  반응이 없었다.

내가 죽을 다 먹고 나자 승하는 종업원을 불러 자신이 지시한 것을 내오라고 말 하고는 홀 쪽으로 시선을 돌려 음악을 바꾸라고도 말했다.

그리고 종업원이 테이블 위에 와인과 칵테일을 내려놓았다.

와인은 승하앞에 놓여지고, 칵테일은 단연 내 차지가 되었다.


“무 알코올이야 생과즙 쥬스나 다름없어”


“나도 와인 마시고 싶어”


“후훗… 오늘은 안돼”


“피…….”


승하는 내 말에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마주보다가 나란히 앉은 승하를 접하자 숨이 탁 막혀왔다.

이러다 그가 스킨쉽 이라도 해오면 심장이 멎거나, 뻥 터져 버릴 것 같은 마음이 죄어왔고 승하는 답답한지 타이를 반쯤 풀어 헤쳐 자유로운 모습으로 내게 건배를 청해 왔다.


“승하 샘… 아니…하하”


“키스 해줘?”


승하가 내 어깨를 살며시 잡아끌며 장난스럽게 물어왔고 난 주위의 눈을 의식해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무슨 생각으로 날 만나 는 거야?”


내 질문에 승하는 눈살을 찌푸리고, 와인을 한잔 더 입으로 가져갔다.


“당신 눈에 내가 쉬워 보이 는 거야?”


쉬워 보이냐는 질문에 그는 자극을 받았는지 들고 있던 와인 잔을 테이블에 ‘쿵’하고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 소리를 쳤다.


“여러분, 주목해 주세요!”


각자의 영역 안에서 단란하고 오붓한 시간을 갔던 그 안의 사람들은 느닷없는 승하의 행동에 의아한 눈으로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는 승하가 갑자기 내 팔을 잡아당겨 일으켜 세우더니 건장한 두 팔로 나를 들어올려 자신의 품속에 안아 들었다.


“이 아가씨가 오늘 제 청혼을 받아 준다면 지금 여러분들이

드신 음식값은 전부 제가 다 지불 하겠습니다.”


승하의 뜻 박의 제안의 그 곳의 사람들은 휘둥그런 눈빛으로 환호성을 질러댔고, 나에게 시선을 돌려 어서 받아 주라는 무언의 강요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승하가 이번엔 시선을 나에게 맞추었다.

강렬한 그의 시선이 이글거리며 타 올랐고, 그런 그의 눈빛에 난 온 몸이 뜨거워져 왔다.


“이 준희! 나 권 승하는 거렁뱅이가 되어도 좋아.

네가 다리를 못 쓰는 불구자가 되어도 좋다.

널 갖기 위해 서라면 돈? 권력? 명예? 그 따위

것도 다 필요 없다. 평생을 준희 너를 위해 살고

싶어. 너의 동반자가 될 자격을 허락해 주겠어?”


나를 향한 승하의 고백에 난 어쩔 줄 몰랐고, 이럴 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받아 주세요. 두 분 정말 잘 어울립니다.”


“하하하 그러게요. 멋지시네요.”


“행복하세요. 꼭 결혼에 골인하시길 바랍니다.”


여기저기서 여러 사람들의 말들이 동시에 터져 나오고, 승하는 흡족한 듯 하면서도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시무룩해 졌다.


“침묵은 긍정을 뜻 하는 거지?”


“……”


“꽉 잡아, 손 목에 둘러”


난 로버트 마냥 승하가 시키는 대로 그의 목을 손으로 감고 승하가 전하는 그의 입술을 느끼며 점점 그의 향에 매료당해 빠져 들었다.

좀 전에 의식했던 남의 눈 은 생각조차 안했고, 그저 지금 승하의 입술을 느끼는 데만

열을 올렸다. 그런데,

승하는 짖꿎은 웃음을 보이며 입술을 거두어 갔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오늘 음식값은 전부 제가 지불 하겠습니다.

남은 시간도 알차고 편하게 보내다 가세요.”


사람들을 향해 내 뱉는 그의 말에 그 안의 사람들은 일제히 환한 미소와 함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승하는 나를 안아 든 채로 레스토랑에서 나와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그제 서야 나를 자신의 품에서 내려놓고는 내가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벙긋 하기도 전에 승하의 입술이 다시 한번 깊게 날 눌러 왔다.

‘팅’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밖의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에 넋을 잃고 쳐다보았고, 승하는 입술을 떼지도 않은 채 손을 들어 올려 닫힘 버튼을 꾹 눌러 버렸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작동을 꺼 버렸다.

작은 그 공간에서 뜨거운 열기가 끌어 올랐고, 나는 구석에 몸을 기대어 승하가 주는

기쁨을 맛보았다. 열정적 이고 영혼을 태울 듯 한 감미로운 키스 였다.

승하의 짜릿한 혀가 유영하듯 내 입안을 감돌며 묘한 기운을 전달하고 그의 육체가

뿜어내는 열기에 나는 그만 녹아들었다.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붓던 승하의 입술이 점차 목으로, 가슴으로 내려오더니 다시 입술로 올라와 내 두 눈과 마주했다.

승하가 굉장한 자제를 하고는 나를 품 안에 안고 내 머리를 헝클어 놓으며 깊은 한숨을 내 쉬는 바람에 엉킨 머리카락이 얼굴 주변으로 쏟아져 내렸다.


“준희야, 이대로 너 보내기 싫다.”


여전히 날 꼭 품에 안은 채로 말하는 승하는 매우 아쉬운 눈빛으로 날 바라 봤고,

그의 육체는 심하게 떨려왔고, 내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가 기다려.”


그 한마디에 승하는 주저앉았고, 더 이상 어떤 말이나 행동도 없이 날 고이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굳이 집으로 들어가 인사를 하고 나온다는 그를 간신히 돌려보내고 난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까지 아주 푹 긴 잠에 빠져들었고, 오전엔 병원에 갔다가 오후 수업 시간에 맞춰 등교를 했다.

때마침 승하의 과목 시간 이었고, 교문을 들어섰을 땐 학교는 발콱 뒤집혀 졌다.


*                    *                    *                    *                   

다른 해 보다 유난히 쏜살같이 지나간 여름 이었다.

그 이유가 승하는 준희 때문 이라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중간 중간 그를 애 먹이는 사건도 더러 있었지만, 그래도 준희와 함께여서 그는 행복했다.

혹시라도 자고 일어나면 깨어지는 꿈이 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은 요즘 들어 부쩍 그를 엄습해와 초조의 빛을 띠게 만들었다.

거기다 그의 아버지 문제도 플러스알파의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하지만, 승하는 기우에 불과 하다고 단정을 지었다.

아직까지 그의 아버지는 투항을 거듭 촉구해 왔지만, 승하는 완력을 빌미 삼아 찍어 누르는 그 거대한 힘에 맹렬히 항거 했다.

다행히 그의 어머니가 승하의 큰 버팀목이 되어 주는 바람에 본가로 들어가는 신세는 면했다.

승하는 한도 끝도 없이 그를 치고 들어오는 군걱정을 훌훌 털어 버리고 시계를 들여다봤다.

그리고 ‘언제 이렇게 시간이 갔지?’ 라며 투덜거리고는 옥상으로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이 시간엔 항상 준희가 옥상에 있기 때문이다.

교무실 복도를 지나 여러 애들 사이를 헤치고 옥상으로 막 발을 치닫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준희’ 라는 이름 때문에 승하의 발걸음이 뚝 멈춰 섰다.


“쿡쿡, 준희 그 계집애 침대에서도 화끈할 거야.”


“야, 난 준희 가슴만 봐도 벌떡벌떡 선다니까”


“쿡쿡쿡……”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아올라 승하의 의지능력을 모조리 말살 시켜 버렸다.

나서야 하는 상황과 나서지 말아야 하는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승하였지만 준희를 향한 그들의 신랄한 빈정거림은 그가 들으라는 듯 그 수위를 점점 더 높여만 갔다.


“준희랑 키스 해봤어? 난 가슴까지 만져봤어.”


“오호. 너 제법 인데…… 맛은 어때?”


“침대에서 뒹굴 수도 있었는데…쿡”


아쉬움에 묘미를 남긴 표정으로 앞에 두 녀석을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준희의 짝 이었던 경호였다.

승하는 옥상으로 가던 발길을 한쪽 귀퉁이에서 실실거리던 경호와 두 사내들 앞으로 돌렸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지?”


승하의 등장은 두 사내들에겐 뜻하지 않은 훼방꾼으로 군림했고, 경호에겐 더 없이 환대 받는 VIP손님이란 걸 그 순간 그는 깨닫지 못했다.

덩달아, 경호의 눈빛이 강렬한 빛을 발 한 것도 눈 여겨 보지 못했다.


“같이 웃을까?”


“요즘 잘 때 마다 준희랑 그 짓거릴 하는 꿈을 꿔요.”


승하의 말은 곧 협박이나 명령 이었고, 이를 눈치 챈 경호는 좀 전 보다 더욱 박차를 가했다. 곧 그의 얼굴이 금 새 일그러져 낯빛은 하얗게 질리고 입술은 파랗게 바르르 떨려왔다.

“너희 둘은 그만 가봐”


경호 앞에 두 사내들은 승하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꿈을 꾸는 건 좋은데, 상대가 틀렸다.”


“왜죠?”


“한 번 더 준희를 그런 식으로 비방하면 죽을 줄 알아!”


승하는 지금 기분을 그대로 경호에게 전달했고, 경호는 놀라움을 감추기 위해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상하네요. 지금 제 나이 때 청소년 이라면

그런 일은 다반사 인데 왜 성적 호기심을 그리

무참히 짓밟는 건지…… 더군다나 상담을 해줘도

모자를 판에 선생님 이란 분이 말 입니다.

같은 반 여자 아이에게 그런 마음 갖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어차피 준희랑 키스까지 하고 가슴…”


나불대던 경호는 별안간 날아온 승하의 주먹에 숨이 탁 막혀 뒷말은 더 이상 내 뱉지

못하고 그대로 입 안으로 삼켜 버렸다.

경호의 말을 유심히 경청하던 승하는 준희를 모욕하고 멸시하는 진술에 말보다 주먹이 먼저 휘둘러졌다.

하지만, 승하의 주먹은 경호의 얼굴이 아닌 경호를 뒷받침 하고 있던 바로 뒤 벽에 내질러졌다. 하마터면 얼굴로 내리 꽂힐뻔 한 승하의 주먹은 다행히 그의 인내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박 경호! 나도 남자다. 이런 불상사가

또 한번 초래되면 그땐 참을 인을 마음으로

새겨두는 일은 결코 없을 거야.”


다짐이라도 받듯 경호를 향해 주의를 주는 승하는 입도 벙긋 못하도록 경호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날렸다.


“지금 선생님 말이나 행동 이해 안 갑니다.

준희가 뭐라고 그렇게……”


“입 다물어. 준희 이름 함부로 담지 마!”

승하의 새된 고함은 경호 앞에서 더 이상 선생이 아니라, 질투심 강한 영락없는 사랑에 빠진 한 남자 였다.

자신의 감정을 확연히 드러내는 승하로 인해 경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모든 것이 경호의 각본대로 딱딱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을 볼 날도 얼마 안 남았군.’


승하는 차가운 시선으로 경호를 노려보고는 오던 길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무심코 시계를 쳐다본 승하는 아쉬운 표정으로 수업시간에 맞춰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광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고, 그는 곧 경악했다.

 

 

원나잇 스탠드.[제38화]

 


교문을 들어서 교실로 향하는 길목에 좌측 편에 있는 게시판으로 준희도 모르게 눈길이
그 쪽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게시판에는 승하와 그녀가 찍힌 사진이 A4용지 만한 크기로 두 개가
떡 하니 붙어 있었다.
더 기겁을 한 건 게시판에 붙은 사진은 불행히도 차 안에서 그와 키스를 하는 모습 이었다.
사진의 옷차림으로 보아 청평의 별장에 가든파티를 가던 날 이었다.
그날 승하는 마냥 들뜬 기분으로 호칭을 빌미 삼아 그녀에게 키스를 퍼 부었었다.
준희는 게시판에 붙은 사진을 떼어내어 벅벅 찢어 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 했는지 온갖 의문만 그녀 머리 속을 어지럽게 헝클어 놓았다.
교실 문을 열고 선뜻 들어서기가 쉽지 않았다.
잠시 문고리를 잡고 주춤하던 그녀는 ‘못 봤을 수도 있지’라는 안일한 생각에 교실 앞문을
확 열어 제치고 들어섰다.
반 아이들은 일제히 자리에 앉아 차가운 시선으로 준희를 노려보았다.
아무도 말이 없었고, 준희가 한 발짝 움직이기 시작 했을 때 탁구공만한 크기의 통통 튀는
뭔가가 준희의 머리에 ‘탁’ 하고 부딪치며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뭇엇 인지 확인 할 새도 없이 또 하나가 이번엔 왼쪽 어깨에 툭 날아와 떨어졌다.
손으로 머리의 묻은 것을 매만져 느끼고, 눈으로 어깨의 묻은 것을 확인 했을 때 비릿한
내음을 코끝으로 전달하는 그것은 날달걀 이었다.

 

“승하샘 한 테 꼬리치고도 네가 무사 할 줄 알았어?”

 

“너 정말 대단하다. 존경스러워!”

 

“나 같으면 학교 못 나오지, 쟤 가상한 용기에 우리
기립박수 라도 쳐줘야 하는 거 아니니?”

 

혜미를 비롯해 저마다 한 마디씩 내 뱉고 뒤이어 하얀 밀가루가 준희의 어깨위로 뿌려지고
하나의 달걀이 더 날아오는 그 순간 이었다.
교실 문을 열고 승하가 들어왔다.
그는 준희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그녀를 향해 날아오는 달걀 세례를 대신 맞았다.
그리고 준희를 자신의 품에 감싸 안아 그의 뒤로 숨겼다.

 

“뭐 하는 짓들이야?”

 

승하가 소리를 ‘빽’질렀고, 그의 얼굴에는 격양의 빛이 만연했다.
신랄하게 준희를 향해 욕을 하고 삿대질을 하던 반 아이들은 그의 화난 음성에 잠시 침묵을
하고는 힐난의 시선으로 승하를 마주했다.
적막한 고요가 교실 안 공기를 탁하게 만들고 여전히 준희를 감싸고 있는 상태로 승하가 교실 주변을 쭉 훑었다.
그러다 칠판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아연실색 하고 말았다.
왜, 반 아이들이 준희에게 그런 행동을 보였는지 왜 자신에게 낙담한 얼굴로 책망의 눈초리를 자아냈는지 모든 의문이 풀리는 시간 이었다.
이런 상황을 전혀 예측 못한 건 아니 아니지만 이렇게 빨리 터져 버릴지는 생각 못했다.
칠판에 붙어 있는 사진과, 예전에 골프잡지에 실렸던 기사와 난동을 부렸던 그 모습까지
고스란히 다 준희에게 전달 되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참기 힘들었다.

 

“누구 짓이야?”

 

차가운 승하의 질문에 아무도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서로 눈치만 힐끗거리던 반 아이들은 고개를 땅에 떨구어 누군가 어서 이 위기를 모면
시켜주길 바랄 뿐 이었다.

 

“누가 꾸민 것이 중요한 건가요?
그럼 사진에 찍힌 저 모습이나 잡지에 실린
그 기사가 사실이 아니라는 말씀 인가요?”

 

“저희에겐 충격이고 실망 입니다.”

 

반 애들을 대신해 반문을 해온 사람은 경호와 혜미 였다.
그들의 얼굴엔 뚜렷한 실망의 빛이 서렸고, 용납할 수 없다는 명확한 의사표현이 승하에게
전이 되었다.

 

“너희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지만
부정은 안 한다. 그렇다고 이렇게 괄시 받을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내가 틀린 거니?”

 

'웅성웅성’

 

“이해하고 받아줄 수 없는 거니?
지극히 정상적인 남. 녀 가 만나서 사랑 하는데
그게 선생과 제자는 안 되는 거니? 너희도
패륜 이라고 생각 하는 거니?”

 

웅성대던 반 아이들은 승하의 말에 또 한번 침묵을 했다.
하지만, 그 애들의 모습엔 호의를 보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늘 얌전하게 있는 듯
없는 듯 했던 반장이란 아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패륜은 아니지만 부도덕한 건 사실이죠.
아직까지 사회는 선정적이고 불명예스러운
소문으로 승화 시키니 까요… 적어도 선생님이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나름대로 좋은 선생님
이라고 좋아했었는데 실망과 그 배신감이 크군요.
이 사건이 마무리 지어질 동안 선생님 수업은 받지
않겠습니다. 제가 아직은 사회적인 편견에서 색안경을
벗지 못해 서요… 죄송합니다.”

 

“선생이기 전에 나도 사람이고, 남자야 지금 너희들이
이러는 거 솔직히 이해는 되지만 기분은 나쁘다.”

 

“당신 말대로, 당신 감정대로 라면 선생이라는 사람은 교과서
위주의 지식만 주는 게 아니라 진정한 가르침을 주어야 하지 않나요?
하지만 이미 신뢰를 잃어버린 사람을 어떻게 믿으며 사제간에 예의를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끝까지 예의를 지키겠습니까? 감정에만 호소하는
당신의 말에 어떻게 진실을 말 하겠습니까?”

 

승하는 얼굴이 굳어졌다. 반장의 말은 그에게 충격을 주었고, 반 아이들 에겐
적잖이 큰 탄력을 부풀려 주었다.

 

“야, 나가자”

 

“더 이상 배울 것도 없다.”

 

“왜, 연애 잘 하는 방법 뭐 그런 건
배울 만 하지 않을까? 쿡쿡……”

 

반장이 뒷문을 열고 망설임 없이 교실을 나가자, 그 뒤를 따라 한 명, 두 명 가방을 들고
나가며 저마다 한 마디씩 비아냥 거렸다. 결국 그 교실 안에 남은 건 승하와 준희 뿐 이었다.
그는 준희를 안은 팔을 풀지 않았고, 석고상 마냥 그대로 멈춰 준희를 감싸 안은 한쪽 팔에
더욱 큰 힘을 가했다.
그의 품 안에 숨겨져 있던 준희는 승하의 팔을 걷어내고 앞으로 나왔다.
승하는 더럽혀진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고, 주머니 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준희 머리에
묻은 터진 달걀을 닦아 내었다.

 

“앞으로 더 힘들어 지겠다. 이제 시작 이야…
그래도 조금만 더 참자…… 알았지?”

 

준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이 불안 했지만 승하는 대답을 강요 하지는
못했다. 더 이상 아픈 곳을 건 들여 기억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만 갈래… 더 이상 여기 있기 싫어”

 

“데려다 줄게”

 

“아니, 당신은 학교에 남아 교무실 가서도
부딪쳐야 하잖아… 어차피 매도 일찍”

 

“준희야, 약해지지 말자”

 

승하가 그녀의 말을 자르고 굳은 의지를 보여 왔고, 그런 승하의 모습을 보면서
준희는 포복절도 할 뻔 했다.

 

‘권승하 선생
나도 학생이기 전에 사람이고, 여자야…’

 

준희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을 발했지만, 승하는 전혀 볼 수 없었다.

 

*            *             *              *            *

 

준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승하는 그녀가 한참이나 멀어져 눈에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눈을
떼지 않고 주시 하고 있었다.
승하는 앞으로 어떠한 난관에도 흔들리지 않을 거라 다짐 했다.
하지만 그의 그 마음은 쉽사리 허락되지 않았다.
교실 안에서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갔듯이 교무실 안도 난리가 아니었다.
선생님들 책상마다 놓여있는 사진, 그리고 한쪽 벽면은 아예 그 문제의 사진과 잡지 기사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그들의 눈초리 또한 매끄럽지 않았고, 반 아이들 보다 더 승하를 깔보고, 업신여겼다.

 

“권 선생! 지금 이게, 이게 다 뭡니까?”

 

승하의 면전에 대고 사진을 흔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교장 선생님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때 나한테 큰 문제 될게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눈 감아 달라고 해서 눈 감아 줬다니 이렇게 뒤통수를 칩니까?
지금에 와서 이런 상황은 어떻게 설명 할겁니까?”

 

몹시 노하여 펄펄 뛰는 교장 선생님은 예전에 지도실 에서의 일을 은연중에 승하에게
상기 시켰다. 그리고 승하는 그때의 일을 생생히 기억했다.
자신을 노골적으로 유혹해 오던 준희의 자태를…… 그때 만 해도 이런 일이 있을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었다.

 

“제일 고등학교 명예 실추 입니다. 그냥 두고 보실 겁니까?”

 

“도마 위에 오르기 전에 손을 써야 하지 않나요?
권 선생이 스스로 사퇴를 하는 게 최선책 일 것 같군요”

 

“그만 둔다고 최선은 아니죠… 사랑은 나이도, 국경도,
연륜도 초월 한다고 했습니다. 무턱대고 비난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여러 선생님 들과 학생들이 고정관념에 쌓여 불신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권 선생과 그 학생을 받아
들이 는 건 해석과 이해의 차이일 뿐 입니다.”

 

승하를 중간에 두고 그의 행실이 옳으니 그르니 옥신각신 다투는 선생님들의 모습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들이 주는 냉대한 경멸과 경시를 그대로 받아
들였다. 그 반면엔 승하를 옹호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수는 단 한 명에 불과 했다.

 

“모두 조용히 하세요. 결정은 저와 이사장님이 합니다.
내일 오전 중으로 긴급 이사회를 소집하고 통보 하겠어요.”

 

교장선생님은 할말을 마치고 급히 교무실을 나갔고, 마치 교장선생님이 나가길 기다린
듯이 여러 선생들의 참혹하고 격렬한 말과 시선을 승하는 한 몸에 받았다.

 

“설마, 이사장 아들인데 잘리기야 하겠어?
이래서 빽 없으면 서러워서 못 산다니까…”

 

“뭐, 양심이 있다면 스스로 기어 나가겠지?”

 

“양심이란 게 있는 인간이 학생과 연애질 인가?”

 

“아무튼 저런 인간 하나 때문에 우리 같은 선생
들도 싸잡아 손가락질 당하고 욕먹는 거라고…”

 

노골적인 그들의 모멸에 찬 비난은 예리하고 모질게 승하를 질책했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 선생이란 타이틀은 참으로 비참한 형벌 이었다.
승하는 ‘이쯤이야…’ 하는 마음으로 두 주먹을 꽉 움켜지고 이를 악 물고 참았다.
참고, 참고, 또 참았다. 그런데……

 

“이 여학생도 보통이 아니군… 이 사진 좀 봐
완전 요부 같고만 하하하”

 

그들끼리 준희를 모욕하는 발언에 승하는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는 바로 그 선생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이거 못 놓나?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왜 가슴이 아픈가?”

 

여러 선생들이 양 옆으로 승하를 뜯어 말렸고, 그 기세로 우월에 압도된 당찬 그 선생의
빈정거림은 승하의 탈선을 부추길 만큼 위험천만 했다.

 

“나에게 돌을 던지는 건 상관없지만 죄 없는
준희까지 거들 먹 거리지 마세요 몹시 불쾌 합니다.”

 

“하. 삼류영화가 따로 없구만…”

 

“제가 선생님들의 푸대접을 받을 만큼 그리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선생이란 작자는 사랑도
못하는 병신입니까? 그 대상이 학생 이란 게 이런
수모를 당할 만큼 잘못된 것 입니까?”

 

관례에서 오는 그들의 틀에 박힌 사고방식에 승하는 개탄을 했다.
자신의 무모한 욕심에 준희가 받을 피해와 상처를 생각 하니 가슴이 미어지고 쓰라려 왔다.
그는 힘없이 돌아서 교무실을 빠져 나왔다.
그 악몽 같던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 에는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또 다른 사진이 올라왔고
학부모들의 항의 전화가 하루 종일 빗발 쳤다.
홈페이지에 등록되는 사진은 지워도, 지워도, 실시간으로 계속 올라와 승하를 더욱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그 끔찍한 상황에 승하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발신번호를 확인 하고는 한참을 망설임 끝에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들려오는 말에 승하는 자기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 준희에게 악
영향을 미칠 거라는 단 한 마디에 분개하고 탄식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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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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