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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뿐인 무죄판결

고춘남 |2005.05.30 13:37
조회 844 |추천 0

상처뿐인 무죄판결, 살길이 막막하다
민주화와 DJ돕다 사업망친 高春南사장의 인생행로-

 오직 정직'을 자기인생의 좌우명(左右名)으로 삼아 60의 평생을 살아온 고춘남(高春南·60세)사장. 그는 역시 사업가였고 지금도 사업가임이 틀림없다. 바로 오늘(2월 16일) 그는 그 암울했던 박정희 독재시대의 연장이었던 전두환 군부정권에 의해 1981년 4월 9일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음반에 관한 법률위반죄'로 1심에서 벌금 1백만원의 선고를 받고 1981년 4월 17일 항소기간경과로 판정이 확정되었는 그 재판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여 이 민주화시대에 걸맞게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단독 제9부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
 그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마디로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며 만면에 미소를 남겼고 “내일 오전 기자회견을 통하여 자기의 소감을 밝히겠다”는 말로 소감을 미루었다.
 여기에서 기자는 고(高)사장의 이 사건에 대한 전말(顚末)을 이에앞서 약간이나마 추적해볼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각설하고, 고사장은 사업가로서의 큰 꿈을 가진 재력가였다. 아니 수십억원의 돈을 가지고 30대 초반부터 음반사업을 주도한 원음(原音)예술사와 출판물을 제작하는 민성사(民聲社)라는 두 회사를 경영하게 되었다. 7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음반사업이 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소위 히트를 쳤고, 이때부터 돈이 마구 굴러 들어와 주체를 못할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서울 중구 북창동(北倉洞) 대성빌딩 3층에 큰 사무실을 그들에게 제공해 그의 전성시대에는 이 사무실에 찾아드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 즐거운 비명까지 날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이때를 전후하여 고사장은 자기사업의 기반이 어느정도 튼튼하여짐에 따라 자연히 자기생각이 이 나라의 민주화(民主化)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기의 고향이 호남(전북부안군부안읍서외리273번지)이라는 점이 운명이 되었는지 그는 김대중(金大中·전 대통령)씨를 존경하게 되었고 그를 통해 나라의 민주화를 실현시키고 아울러 그를 대통령이 되도록 자기가 앞장서 만들어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입장에서 자연적으로 김대중씨를 접하게 되었고 그의 참모와 측근들과도 교류를 가지면서 은연중에 자기도 김대중가족의 일원이 되고 말았다. 당시 김대중씨는 정치적으로 많은 수난을 겪었고, 또 그들 참모들은 보스의 수난과 함께 그들의 처지도 여간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그는 이들 참모들이 사무실을 찾아오면 점심사고, 술접대하고 어떨 때는 용돈까지 주었고 이때에도 그는 남을 도운다는데 큰 보람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런데 1979년 12월 어느날 김대중씨의 자택에서 그 김대중씨와 독대를 가지면서 그로부터 “시국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으니 이런 때 고동지와 같은 분이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어야겠다”는 부탁을 들었으며 이를 기화로 그와 더 가까워졌고 그때마다 그는 가슴 뿌듯한 심정과 그에게 말할 수 없는 호감까지 간직하게 되어 졌다는 것이다.
 그후 고사장은 12·12군사반란 이후 신군부 세력에 의해 민주화 운동가들이 탄압받고 언론기관까지 통제되어 국민들에게 진실된 정보가 전달될 수 없게 되었을 때를 즈음하여 80년도 소위 서울의 봄'을 맞이할 시점이었다. 김대중씨에게도 그런 봄이 와야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1980년 3월 어느날 또 김대중씨를 만났다. 이때 고사장은 김대중씨에게 “선생님께서 시국강연을 통해서 연설하신 행동하는 양심' 민족혼과 더불어' 등등을 테이프로 제작 배포하겠다”는 것을 포함하여 민주화에 대한 자기의 소신까지를 단호하게 이야기 했다.
 이에 김대중씨는 “그거 좋은 생각이오. 왜 진작 그런 기막힌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소. 그렇게만 된다면 혼자 몸으로 백만 청년학우들이 해야할 일을 하는 것이니 계획대로 추진해주시오”하며 간곡히 요청해왔다.
 그후 고사장은 서울 도봉구 쌍문동 당시 음반제작업을 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기재들을 이용하여 그의 도덕정치를 구현하자' 등 김대중씨가 일본에서 납치되어 수중고혼이 될 뻔 했던 그 실화의 연설을 녹음테이프에 담아 녹음테이프를 9만3천2백10개나 만들어 한국정치문화연구소, 한국헌정연구소 등 그의 방계 조직체를 통하여 전국에 배포했고 또 84년도에는 김대중씨가 미국의 소리방송에 출연하여 “한국의 민주화를 위하여는 죽어도 귀국하겠다”는 내용의 녹음테이프를 제작하여 최초로 전국에 배포하여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는 전두환(全斗煥)군부정권에 이 사실이 발견되었고, 그는 두 번이나 구속되어 고문, 구타 등을 당하며 옥고를 치렀고, 부인(전영순)마저 정보요인들이 쌍문동 공장을 찾아와 제작기계 집기 등을 부수고 부인에게 잔인한 폭력까지 휘두르며 남은 녹음테이프 서류 등을 모조리 압수해 갔던 것이다. 지금도 부인은 이들의 잔혹행위에 허리 신경손상 등 부상을 입고 중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것으로 입은 물질적 손실을 당시 시가로 계산하여도 4억원은 넘을 것으로 계산한다.
 그러나 전두환군부정권은 그를 구속하고 재판에 회부했다.
 그로 인하여 고사장의 음반사업은 모두 도산하고 말았고 그는 일순간에 거지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뒤 김대중씨는 그후 대통령이 되었고, 그의 아들 김홍일씨도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의 참모들은 모두 잘나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를 위해 전재산(약 20억원)을 잃은 고춘남씨는 거지가 되었고, 그들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그들은 모두 비정하고도 냉정한 인간으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는 여기에서 또 한번 인간을 배우고 인정을 알았다고 한다.
 “김대중씨를 비롯한 그들은 너무나 비정하고 차갑고 매정했습니다. 섭섭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나마 K실장은 인정이 조금은 있었지요…”
 그는 직접 도움을 간청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에 오히려 배신에 대한 앙갚음까지 하고 싶었다. 그래서 최후의 발악으로 “부채를 갚으라”는 1인 데모도 감행해 보았다. 채무소송도 해보았다. 공소시효가 만료되었고 그런 사실이 없다는 변명뿐이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폭행까지 당하여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고 그 울분을 삼키지 못하고 있다.
 그런 그의 흔적은 상처투성이인 광주5·18민주화관련'으로 국가유공자가 된 훈장 하나 뿐이다. 실로 기막히는 사연이 아닐 수 없고 너무나 안타깝기만하다.
 그는 수표부도, 자기집, 처가집, 누이집 건물대지 등을 모두 날리고 빚만 진 물질적, 정신적 불구자가 되어 있다. 부인도 지금 중증으로 와병중에 있어 월세집 1칸 방에 누워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정말로 그의 살길이 막막한 것처럼 보이기만 한다.
 그는 한번 더 재기할 수 없을까? 천재적인 사업의 노하우, 특이한 아이디어(특허권3개보유) 그러면서 사업가로서의 선견과 기획개발면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소유하고 있다. 이런 그는 오늘도 재기하려고 몸부림친다. 그는 지금 전영순(全英順·57세)여사와의 사이에 5대독자인 1남과3녀를 두고있고 취미는 바둑(아마5급)과 독서. 교훈으로 정직하게 살자'를 삼고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도울자를 돕는다고 했다. 빨리 그가 재기하기를 기대해 보고 싶다.
〈전성현 기자〉

●정당활동
·1980년:김대중선생님 홍보담당. 광주민주항쟁 내란 음모죄 구속
·1985년:민주화추진협의회 운영위원
·2000년:새천년민주당 홍보위 부위원장
·2002년:제16대 노무현 대통령후보 중앙선대위 홍보기획부위원장
·2003년:김근태 우리당 원내대표와 함께 국민에게 “석고대죄”단식
·2004년:열린우리당 국정자문위원. 인권위원회 고문
●사회단체활동
·1984년:일본IBBY(아동출판물 세계대회) 한국대표
·1986년:이태리 볼로냐 세계출판전시회 한국대표 단장
·1986년:6월 민주항쟁 자문위원
·1987년:(사)한국전통 예술진흥회 기획이사
·1995년:(사)종로청년회의소 특우회장
·2003년:(사)5.18민주화운동 부상자 수석부회장
●기업활동
·1980년:원음예술사(출판 음반. 영상제작사) CEO 25년
·2001년:인포코리아 21 CEO, 수람종합건설 이사
·2003년:월드컵, 올림픽 홍보영상조형물 실용신안, 의장등록, 상표 외 3개 특허보유
●포상 및 특허
·2000년:김대중 대통령 표창, 민주화운동 유공자
·2003년:노무현 대통령당선자 감사장 외 20여회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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