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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상담때 약혼식을 했다고 말씀 드렸었죠? 그 뒤로 벌써 3주가 됐나요? 그와는 중매로 엄마 친구의 아들을 만나 6개월을 사귀고, 약혼식을 했지만 그를 사랑하는지 제 감정에 자신이 없다고 말씀드렸었죠. 그 후, 그와 약혼여행으로 홍콩으로 다녀왔어요. 제 이미지가 강해보인다는 것 저도 잘알아요. 그러나, 결벽증같은 것도 심하게 있는 편이어서 남자친구들은 많았어도 특별한 감정을 가져본 적도, 상황도 되어 본 적 없어요. 전 결혼 때까지 순결을 버릴 생각은 없었어요. 사랑하지도 않는 일시적인 감정에 쉽게 버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왔고... "
수연은 이야기를 풀어 나가며 다시금 눈물이 가득 차 올라 눈 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 그는 제가 처녀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나봐요. 약혼 여행 간 날, 그가 저를 강제적으로 덮치더군요. 반항할 수도 있었지만, ' 이 사람과 결혼하는데...' 라는 생각과 결혼식을 한 달 앞두고 어떻게 할 수도 없다는 생각에 그와 첫날밤을 그렇게 치루었어요. 조금만 피가 나올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하혈이 심해서 1시간을 휴지로 막아야 했고, 그는 할 일을 끝낸 사람처럼 " 정말 처녀구나" 라는 소리만을 내뱉은 후 돌아누워 자는데, 저는 하혈도 막을겸 화장실에서 1시간을 보내며 왠지 한참을 울었어요. 제가 생각한 첫경험은 이렇게 고통스럽기만 한 이런게 아닌데 하는 아쉬움도 컸고... 이젠 꼼짝없이 저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울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2박 3일의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그 사람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어요. 조그만 일에도 짜증을 내고, 매일 같이 자고 가라고 조르기도 하고... 잠자리를 강요하는 일이 늘었지만 그 뒤로 잠자리를 안했어요. 왠지 제 마음의 벽이 아직도 있었나봐요. 그렇게 자주 신경질이 늘어가는 그가 왠지 불안했고, 일주일 쯤 지난 어느 날, 그가 절 신라호텔 커피솦으로 불러서 나갔어요. 키를 주며 같이 올라가자 했는데 제가 결혼식이 얼마 안남았으니 조금만 참으라고 했더니 화를 내며 나가버리더군요. 저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해서 고민했어요. 저 사람에게 무조건 내 성격을 죽여서라도 맞추어야 하는 건가? 고민스러웠죠. 사랑한다는 그런 뜨거운 마음도 생기질 않아서 더 고민이었고, 그냥 남들 다 하는 결혼, 나도 맞추어 보자 싶었지만... 문제는 어디까지 맞추어야 할지 저 스스로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건데... 그 날 집으로 돌아와 전화해보니 안받아서 호텔 프론트에 전화를 걸어 방이 취소됐는지 확인했더니 취소하지 않았다고 해서 밤에 다시 차를 몰고, 호텔로 가서 벨을 눌렀죠. 갑자기 방 안에서 소리가 나더니 한참 있다 문이 열리는데 그가 누군가와 같이 있다 옷을 입었더군요. 둘 다 옷을 입었지만 당황해서 벌겋게 달아오는 얼굴과 흐트러진 모습, 구겨진 침대 시트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것 같더군요...흑.흑......"
" 어떤 사람과 같이 있던가요? "
" ... 저의 동생...이요..."
차분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담당의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 이 사실을 다른 사람은 아나요?"
"... 아니요 ... 이런 사실을 누구에게 말해요?"
"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 누군가 제 목과 심장을 으스려 쥐는 것처럼 숨이 막히고 앞이 하얘지면서 쓰러졌어요. 의식을 차렸을 땐 그만 혼자 앉아 저를 바라보고 있더군요. 제게 미안하다며, 제 동생을 사랑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많이 무거웠지만 한번만 용서해주면 저를 가졌으니 저를 책임지겠다고 하더군요.
... 절 가져요?... 뭐가요? 저와 잤다고, 절 가진 건가요? 제 동생은요?...흑... 흑..."
수연은 목이 매인 채 창훈에게 하지 못했던 울음을 토해냈다
" 제가 그렇게 약한 줄 그때 알았어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나오더군요. 동생을 사랑하지만 제가 처녀였고, 결혼식을 깰 수 없으니 저와 결혼하겠다는 그 말이.... 저를 너무 비참하게 만들었어요. "
담당의는 어두워진 눈빛으로 수연을 꿰뚫듯이 바라보았다.
" 그래서요? "
" 용서할 수 없다고 했죠. 결혼하지 않겠다고... ... 그리고 집에 돌아와 많이 고민하며 울었어요. 그대로 있고도 싶었죠. 그러다가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어지면서 사라지고 싶었고, 우울증과 불면증으로 받은 약들을 모두 한꺼번에 먹은 거예요. 내 삶이니까 내 손으로 끝내고 싶었죠. 저만 죽으면 다 될것 같았어요. 창훈씨는 절 버렸다는 오명을 쓰지 않고, 엄마는 처음에 가슴이야 아프시겠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곧 정신차리고 사신 것처럼 저도 시간이 가면 잊으실거라고 생각했어요. 살아야 할 목적도, 삶의 희망도 찾을 수가 없었죠. 결국 약을 먹음으로써 도망쳤지만요. 훗( 자조적 웃음 ) ... 그런데 우습죠? 죽으려는 순간에 그가 보이더라구요.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하진 않았는데... 이것을 무어라 해야 하나요?"
" 동생분과는 이야기 해보셨나요?"
" 아니요, 그 후로 못봤어요. 어제 그가 면회오기 전까지 그가 보고싶더군요. 이곳에 갇혀서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은 감정인지도 모르지만요. 그가 곁에 있겠다고 걱정말라더군요. 전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를 용서못하겠다는 감정과 이대로 그와 결혼해도 되는 걸까? 하는 감정들이 제 속에서 부딪치고 있어요. 이렇게 약한 제가 아니었는데... "
" 동생은 어떤 분인가요?"
" 예쁘고, 귀엽고,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연약함을 가진 아이죠. 이복 동생이예요. 아빠가 바람피워서 낳아온 아이... 사춘기부터 많이 방황해서인지 저와는 반대의 성격을 지닌 자유분방함과 애교가 있죠. 갖고 싶은 것은 가져야하는 이기적인 면도 있구요. 전 자라면서도 모범생 그 자체였죠. 자기 앞가림, 자기가 할 일들을 똑 부러지게 하는 면을 보면서 사람들은 제가 미인이라고 하면서도 제게 접근을 안해요. 대학 때 별명이 '얼음공주'예요. 차갑고 도도해 보이는 인상이 저죠. 알아요. 자라면서 지긋지긋하게 비교됐으니까."
담당의의 표정이 다시금 무표정으로 돌아가며 물었다.
" 제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결혼은 다들 새로운 출발이라고 하는데, 이수연씨는 결혼을 왜 그렇게 힘들게 받아들여야만 했을까요? 어머니가 결혼을 강요했어도 선택은 이수연씨가 했을텐데요."
" 남자를 한 명도 안사귀는, 차가워보이는 제 모습에 결혼이 늦어질 거라고 생각한 엄마의 집요한 강요, 자라면서 한 번도 엄마의 말을 거역해 본 적도 없었고, 저를 위하는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하기 싫었던 저는 선을 네 번정도 봤죠. 거만하고 잘난척하는 외과 전문의, 물론 선생님 이야기는 아니예요, 권위적이고 눈매가 무섭게 생긴 경찰관, 굉장히 약해보이는 샌님같은 공무원, 외국 제약 회사 과장인 창훈씨... 그 중에서 외모나, 집안이나 저와 가장 무리가 없고 조건이 평범해서 저와 어울릴 것 같았죠. 여행을 좋아한다는 취미도 맞고... 맞는 옷을 고르듯이 골랐을 뿐이예요. 만나다 보니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고, 이 정도면 결혼해도 무난할 것 같았는데... 엄마들이 친구들이시다 보니 가족들끼리 자주 어울렸는데 그 와중에 제 동생과 그렇게 됐나봐요. 그렇다면 차라리 일찌감치 사실을 밝혔다면 좋았을텐데... 제가 구식인가요? 아직도 제 마음 한 구석에선 그가 제 첫남자라는 사실과 제 동생과의 관계가 제 속에서 뒤엉켜 있어요. 마음이 많이 정리되어 가지만 아직도 괴로워요. 이것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새 출발을 하게 되는 걸까요? "
담당의는 내 뒤에 있는 벽시계를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돌아간 무표정으로,
" 그래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일요일은 제가 안나오니까 월요일에 뵙고, 다시 이야기 해 볼까요? 주말에도 푹 잘 쉬고요."
" 네. 수고하셨어요."
담당의와 대화를 마치고 나니 수연 속의 덩어리가 조금은 더 가벼워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수연에게 오늘따라 하루종일 밖에서 지내던 지아가 기운이 좀 나는 모습으로,
" 언니, 언니에게만 얘기하는데, 내 이름이 가리킬 지 (指), 아이 아 (兒) 거든. 난 내이름이 싫었어. 뭐를 가리키는 아이라는 건지. 그런데 ( 어두워지기 시작한 창밖의 불빛을 가리키며) 여기서 불빛의 선이 저기까지 이어져 있는데 불빛이 문득 여기서 저곳으로 이어져 보일거라는 것을 난 알수 있는거야. 빛이 이어지는 길들이"
" 지아야, 지아 네 이름이 얼마나 귀엽고 예쁜데."
" 성경을 펴면 '네가 어찌하여...(웅얼거림)' 이 보이고, 또 다른데 펴면 ' 너는 그리스도의 신부...
(웅얼거림)..' 이 보이고, 내 가슴속의 이야기들이 보이는 거야. 난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예수님의 부인이거든."
수연은 지아가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동거남에게 머리를 맞았다더니 후유증이 생기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었다. 자신도 그렇지만 남.녀 관계 란게 감정의 미로처럼 잘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같기만 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축복받은 것일까...
다시 머리에 잡념이 생기는 가운데 담당의의 웃는 얼굴이 떠오르며 잠이 드는 수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