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 햇살이 가장먼저 닿는 곳(6)-
“엄마...엄마....이모...흑흑....”
백아의 웃옷 앞섬은 이미, 안아든 아이의 눈물로 인해 축축하게 젖었다.
작은 몸의 떨림과 흐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하지만 그는 지금 마음 아파할 겨를도 없다.
아까는 짓눈개비가 떨어지더니, 이제는 제법 굵은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이 더 쌓인다면 발자국과 핏물로 꼬리를 쉽게 잡힐 터였다.
이미 청년의 옷자락은 어깨 부근을 중심으로 붉은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백아는 익숙한 소북산의 지리를 이용해서, 쫒아 오던 십여 명의 고수들을 가까스로 따돌린 후다. 지금 그는 백경 쪽을 향해서, 지름길로 달려가고 있다.
제갈 휘. 남궁 아연.
그들이 다시 추격대를 보낸다면 정말로 위험했다.
백아에게 한쪽 팔이 잘린 남궁 아연은, 미친 암소처럼 발광하며, 그를 향해 암기를 뿌려댔다. 그녀의 암기 중 가장 날카로운 대여섯 개가 그의 허벅지에 박혀있다. 그가 속도를 내어 달리면 달릴수록, 더욱더 그의 살 속으로 철심이 파고들어왔다.
일대일의 승부라면 그는 결코 도망치지 않는다. 그리고 일대십의 싸움이라 해도 그는 절때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만히 승리를 내어주지도 않을게다. 그것이 백아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린 한영이었다.
이 떨고 있는 작은 생명을 지켜 내야한다는 일념으로 일체의 공격도 방어도 없이, 그는 자신의 등을 적들에게 내어주었다. 그들의 검은, 오대세가의 정예답게 하나같이 매섭고 날카로웠다.
찢어지고 벌어진 정도의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왼쪽 등이 점점 마비되기 시작하는 듯 했다. 백아는 달리며 자신의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등 뒤로 박힌 화살!
어깨 죽지를 관통하여 가슴앞쪽으로 이미 화살촉이 튀어나와있었다. 마지막 고수를 따돌리며 산 구릉으로 몸을 피할 때 맞은 화살이다. 심지가 굳어 보이는 그의 아미가 더욱 찌푸려졌다. 살이 짓이겨지고 벌어져 피가 철철 흐르고 있어,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다. 화살에 맞아 몸이 휘청거릴 때도 그는 아이가 무사한지를 먼저 살폈다. 다행이 아이는 무사했다. 백아는 숲 덤불 사이를 달리고 또 달렸다.
울컥
검은 핏물을 한 움쿰 토해냈다. 화살에 독이 묻어 있었던 듯하다. 정신이 가물가물 해져왔다. 한번 크게 숨을 들이쉰 후 기를 하반신으로 집중했다. 그의 경공이 절정에 달했다.
서너 보 내딛는 사이 벌써 그의 몸은 휙휙 바람을 가르고 저만치 앞쪽 구릉을 넘어 서고 있다. 시야가 멍해질 때 마다 백아는, 피눈물을 흘리던 연화의 마지막 눈동자를 떠올렸다.
연화누이를 구하지 못했다. 주먹 쥔 그의 손이, 분노로 인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이 아이는 살려야 했다.
빨리 단영을 만나야 한다!
스승 청정대인이 백경으로 떠난 것이 벌써 3일 전의 일이다. 백아는 그날 함께 출발하려다가, 스승의 심부름으로 천산에 있는 사숙에게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도 이제 백경으로 출발해야 했다. 정사대전이 벌어지면, 아무래도 단영도 적으로 참전하게 될 것 같았다. 떠나기 전에 당부도 할 겸, 백아는 무거운 마음으로 단영이 있는 소북 서성으로 향했다. 예사롭지 않은 피 비린내가 소북 서쪽을 휘감고 있었다. 성으로 향하는 동안 내내 그의 가슴은 두방망이질 쳤다.
그녀가 무사해야 할 텐데!
백아는 성안으로 잠입해서 안채 쪽으로 향했다.
오대세가 녀석들은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가솔들을 칼로 잔인하게 찔러죽이고 있었다.
서성전체는 시체로 산을 이루고 피로 내를 이루었다.
끔찍한 광경에 그의 눈이 절로 감겼다.
도대체 어느 쪽이 사악한 것이고, 누가 악마의 자식이라는 것인가! 굳게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지만 백아는 꾹 참고 안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저들은 환사가 자리를 비운 빈틈을 타 기습해 온 듯했다. 환사 쪽의 고수들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주술의 흔적도 없었다.
이것은 일방적인 도륙일 뿐.
일단 이곳 서성에 단영이 없음을 확인한 백아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내원 쪽으로 발길을 옮길 무렵, 여자 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내원으로 들어선 백아는 순간 숨이 막혀 옴을 느꼈다. 어떤 여자가 막 칼을 들어 한영을 베려던 참이다. 그 순간, 백아의 검에서 푸른 기운이 일렁였다, 곧바로 한 장이 넘는 길이의 검기가 쭈욱 뻗어 나왔다. 그의 팔 전체가 푸른 빛으로 휩싸였다.
서걱.
남궁 아연이 자신의 어깨 죽지가 허전하다고 느끼는 순간, 이미 백아는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아이를 자신에게 동여 메는 중이었다. 절정의 경공 천운비로 단 여섯 걸음에 전광석화처럼 한영을 악녀의 팔에서 빼내왔다. 그는 절박한 눈빛으로 쓰러져 있는 연화누이를 보았다.
그는 마지막 순간 누이의 눈도 감겨주지 못했다. 나중에 단영을 볼 면목이 없으리라.
그리곤 곧바로 북문을 향해 뛰었다. 그곳으로 가면 백경으로 가는 지름길을 만날 수 있었다. 또한 숲길이 여러모로 추격을 피하기에도 유리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잘 아는 지형은 그에게 큰 힘이 될 터였다. 추적자들을 따돌리며 막 산으로 몸을 숨길 무렵이다.
뒤쪽 서성에서 엄청난 기의 파동이 느껴졌다. 의아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왠지 그 기의 폭발 이후로 적들의 추격도 느슨해진 느낌이다. 그래도 그는 방심할 수 없었다. 그만큼 오대세가의 정예고수들의 검은 날카로웠다. 막 마지막 추격자를 따돌릴 무렵 벼락을 맞은 듯한 끔찍한 고통이 등을 관통했다. 그가 화살을 맞은 것도 그때였다.
얼마나 달렸을까?
입에서 검은 핏물이 연신 울컥 울컥 올라왔다.
한 시진은 지난 듯하니, 이 근처면 단영과 환사 일행이 있을 것이라 짐작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 앞에 익숙한 서성의 붉은 깃발을 든 행렬이 보였다.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속도를 더 내었다.
놀란 눈을 치켜뜬 단영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를 쫒아오는 환사도 보였다.
그녀의 눈은 의아함으로 떨리고 있었다. 한계에 달한 백아는, 허물어져 가면서 단영의 눈과 마주쳤다. 그 눈은 분노를 내뿜으며 무슨 일이냐고 묻고 있었다. 백아는 대답할 기력이 없었다. 쓰러지면서도 그는, 아이를 걱정하여 뒤쪽으로 허물어졌다. 등 뒤에 박혀있던 화살이 앞쪽으로 쑤욱 밀려올라왔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단영과 환사에게는 이제 곧 지옥이 펼쳐지리라.
안타까움에 머라고 중얼거리던 백아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아비규환.
곧바로 단영과 환사는 소북 서성으로 한걸음에 달려갔고, 그곳에 벌어진 광경에 절망했다.
반경 백장내로 살아있는 생명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의 가솔들은 한명도 남김없이 적의 손에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또한 연화를 제물로 발동된 진이 소환한 지옥의 괴수들에 의해, 적들은 더 처참한 몰골로 다져진 채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다. 차라리 환사의 가솔들이 나은 편이었다. 적들은 시체의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여기저기 육편으로 흩어져 있었다.
고약한 냄새로 인해 눈을 뜰 수조차 없는 지경이다.
단영은 목이 없는 연화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방긋이 웃으며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고 뺨을 쓰다듬어 주던 언니였다.. 이 모든 것이 꿈임에 틀림없었다. 순간 그녀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언니의 미소를 찾아야 했다.
단영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주위를 헤집고 다녔다. 북문도 넘어서서 소북산 중턱까지.
입안으로 피가 튀어 들어오든, 병장기에 살이 찢기든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덧 그녀의 전신은 괴기스러울 만큼 붉게 물들어 갔다. 그렇게 시체들을 하나하나 살핀지가 반 시진쯤 되었을까.
저만치 앞의 가시덤불 사이로, 덩치가 큰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제갈 휘이다.
하반신 아래로는 형태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짓이겨져, 피범벅이 된 채로 처참하게 죽어있었다. 그자의 왼손에 머리채가 잡힌, 언니와 형부가 나란히 미소 짓고 있었다.
단영은 쭈구리고 앉아, 연화를 안아들었다.
붉은 눈물을 흘리는 언니의 눈은 왜 이제 왔냐고 원망하는 것 같기도 했고, 영이가 무사한지를 묻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길로 단영은 언니와 형부를 안고 내원의 정자로 돌아왔다.
언니의 시신에 잘 맞추어 목을 올려두었다. 그제야 연화가 단영을 향해 방긋이 웃어주었다.
단영은 언니의 가슴팍으로 머리를 파묻으며 흐느꼈다.
“어,언....언니....날 두고 이렇게 가면 어떻게 해..흐흐흑..
언니야...일어나......일어나봐!!!.. 흑흑”
절규하는 단영의 곁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긴 환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옴 스마라 스마라 미마나 사라 마하 자가라바 훔!”
환사의 몸에서 기이한 보라 빛 기운이 넘실거렸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스물 스물 바닥을 기어간 그 보라색 기운은 연화의 시신을 휘감았다. 죽은 시신의 몸이 꿈틀 꿈틀 거리며 부르르 떨리더니, 뿌연 안개 같은 것이 연화의 열린 동공을 통해서 밖으로 새어나왔다. 뿌연 안개는 점차로 제 색과 형태를 갖추더니, 환사와 단영 앞에 또렷한 영상을 만들어 내었다. 적들의 기습을 안 순간부터 시작되어, 그녀가 억울해 눈도 감지 못하고 의식을 잃는 순간까지의 모든 영상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죽은 연화의 분노와 절망과 ... 고통이 고스란히 환사와 단영의 의식 안쪽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연화의 목소리.
‘ 아버지 죄송해요..
단영아...우리들의.. 영아를 부탁해.. ‘
충격으로 환사의 몸이 휘청거렸다.
지금 이 순간도- 연화의 영혼은... 죽어서 가야할..그곳으로 떠나지 못하고, 이곳 서성의 진속에서 고통의 몸부림을 치고 있을 것이다.
"으아아아아아악!!!!!!"
격한 분노와 슬픔으로 울부짖는 단영!
갑자기 그녀의 몸이 공중으로 반장정도 떠올랐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검은 기운이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다. 피가 엉겨 붙은 그녀의 검은 머리칼이 뻣뻣하게 하늘로 치솟으며, 뱀처럼 일렁였다. 주위의 기운이 그녀에게 휘말려 들어가는 듯...눈발이 그녀를 향해 몰아친다. 심장이 얼어붙을 만큼 공포스러운 광경이다.
단영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검은자위가 없다. 오직 번뜩이는 흰자위뿐이다.
그것은 인간으로써 견딜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분노! 복수!
“으아아아악!!!! 이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들아....!!!
내 친히 너희들의 살과 뼈를 갈아 부수고, 네 피를 마실지니...!!
나의 발걸음이 닿는 자리는 영원히 어둠속에 갇히리라!!“
그녀의 쇳소리 같으면서도 위엄 있는 목소리가 내원 가득 곳곳이 울려 퍼졌다.
이것은 인간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소리가 안기는 참지 못할 고통에 환사도 귀를 막고 엎드렸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순간 그녀는, 그토록 염원해 오던 강신을 이루었다.
「시바」
파괴의 신. 뜻은 “취소하는 존재 또는 제거하는 존재”.
그 날 이후 무림에는 피바람이 몰아쳤다.
오대 세가는 이틀 간격으로 하나씩 차례대로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후,
현판을 내리고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궜다.
분노한 마신이 등장했다며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고, 원흉인 오대세가를 손가락질 했다.
그녀의 눈에서 분노의 섬광이 나오면- 그 대상은 불에 타서 재가 되었고, 그녀의 손가락이 지목하는 것들은, 뼈를 들어내며 녹아 없어져 무위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그녀를 피의 주인. 마신 혈주라고 불렀다.
그리고 항상 혈주의 곁에는 푸른빛의 검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감탄스러운 실력의 고수가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그가 적들을 먼저 공격하거나 위협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단지 그림자처럼 그녀의 곁을 지키다가, 그녀에게 다가오는 공격을 철저히 봉쇄하고 덤벼드는 적을 가차 없이 베었다. 그의 발검은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빠른 쾌검이기도 했지만, 수려하게 아름다운 청검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를 ‘청검백아’라고 부르며, 혈주와 함께 두려워했다.
정파의 십대고수중 하나인 청정대인의 제자인 그가, 왜 마신 혈주와 함께 하는지- 무성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아무것도 밝혀진 것은 없었다.
정확히 열흘.
수천 명의 피를 뿌리던 혈사는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무림 천제를 지옥에 몰아넣었던 두 존재는 연기처럼-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마신 혈주단영. 그리고 그녀의 호위, 청검백아.
들끓는 솥도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 언제 뜨거웠다는 듯이 삭아들 듯..
그렇게 이들의 이름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 갔다.
마신의 강림이라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당시 백아는 누구보다도 가슴을 졸였다.
「시바」가 강림한 이후로 그녀는 자아를 잃었다.
분노와 복수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려온 신은 모든 것을 파괴했다. 그리고 그녀의 의식을 지배했다. 곁에서 지켜보는 백아는 진심으로 두려웠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단영, 그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단지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곤, 그녀의 뒤에 서서, 육신이라도 지킬 뿐.
단영이 자아를 잃은 지 열흘째 되던 날- 환사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녀를 금제 했다. 계속 이를 거절하던 「시바」도, 할 수 없이 다시 자신이 있던 그 곳으로 사라졌다. 이 일로 환사는 광분한 신을 달래느라 두 눈을 잃었다. 하지만 딸을 살릴 수 있는 길이라면, 그는 자신의 심장이라도 내어 놓았으리라.
하지만 감히 인간의 몸으로 신을 받아들인 단영의 육신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절맥이 모두 끊어지고 온몸의 뼈가 잘게 잘게 부서진 채로 그저 형식상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화타가 온다고 해도 그녀를 원래대로 돌리지는 못할 듯 보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그녀의 마음의 상처였다. 「시바」의 의식에 눌려, 몸 안의 작은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그녀의 영혼은, 자신이 저지르는 살상의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그녀는 자신의 생을 포기하고 있었다. 복수도 분노도 더 이상 그녀를 숨쉬게 만들 수 없었다. 단지 그녀에게 걸리는 것이 있다면...
지켜야 할 아기... 한영..영이.
‘ 아버지 죄송해요..
단영아...우리들의.. 영아를 부탁해.. ‘
연화의 마지막 목소리가 단영의 머리를 울렸지만 그녀는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수천의 피를 묻힌 자신의 손으로, 귀한 아이 한영을 만진다는 것 자체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것은 꼭 아이를 피로 더럽히는 짓 같았다.
또한 아이와 함께라면 그녀는 평생 연화의 죽음 속에서 괴로워해야 하리라..
그녀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죽음은 자신을 고통 속에서 해방시켜 줄 것 같았다.
그때였다.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백아는 그녀를 들쳐 업었다.
그리고 환사에게 허리를 굽혀 크게 절했다.
“단영을 데려가겠습니다. 무림에 남아봐야, 그녀에게 상처만 될 뿐입니다.
제가 치료하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속세와 인연을 .... 끈겠습니다...“
어차피 ‘청검백아’로 불릴 그 순간부터 백아는 자신이 스승의 짐이 될 것임을 알았다. 이미 청정대인에게도 구배를 올린 후 용서를 구했고, 목숨을 걸어 단영의 곁을 지키기로 마음먹은 그다.
말없이 돌아선 환사의 두 눈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길로 백아는, 소북을 떠났다.
그 후 그는 전국 곳곳의 귀인들을 찾아다니며, 그녀의 치료법을 구했다.
그 정성에 하늘이 감복했는지 그녀를 살릴 수 있는 길이 보이는 듯했다.
그해 겨울.. 어느 선인의 도움으로 그녀를 살릴 해답을 얻은 백아는, 인적이 드문 장백산 운해 속으로 그녀와 함께 자취를 감췄다.
어린 한영이 아홉이 되던- 유난히 추웠던 그 해 ..
흰눈이 온 세상의 혈사를 덮어 버렸던 그 겨울 ..
환사 위제혁은 두 눈과 두 딸을 잃었고, 백아는 아내를 얻었다.
“아빠~ 안 들어가요? 더워요~”
“멍!!멍멍!!”
맹랑한 꼬마의 투정에 백아는 지난 세월의 상념에서 깨어났다.
벌써 한 시진 동안이나 말없이 운해를 내려다보는 노인이다.
운해 너머로 붉은 석양이 내려앉는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순간 아빠의 작은 눈에 반짝이는 이슬방울이 걸렸다고 도화는 생각했다.
노인의 마른입에 미소가 걸리며, 주름진 손이 도화의 곱슬머리를 흩트려놓는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눈은 무심하게 일렁이는 운해를 바라보고 있다.
‘그래..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지는 게야... 끌끌..
하늘이 정하는 인연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구나....‘
한숨을 내쉬며 노인은 초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던 아빠가, 말없이 돌아서 초가로 향하자, 도화는 얼른 그 뒤를 따랐다.
조그마한 소년에게 오늘은 정말이지.. 이상한 날이었다.
--------------------------------------------------------------------------------------- 이곳 부산은 비가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다들 평안하시겠지요(^^)
제 글을 읽어 주시는 고마우신 분들께
항상 파안의 가호가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