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포장이사가 시작되게 된 계기...

수다꾼 |2005.09.01 22:17
조회 561 |추천 0

저도 퍼온글이에요~^^

 

 

아무도 이를 시작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이것이 바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이것은 우리 주변에서 늘 일어나고 너무 사소한 것이라서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1977년 여름. 당시 19세이었던 박해돈 청년은 서울시 도곡동 소재 아파트입주현장에서 이사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가 이곳에서 제일 먼저 목격한 것은 이삿짐을 운반하는 사람들의 불량스러운 옷차림과 쌍소리. 이사 현장 곳곳에서 주민과 이사하는 사람들이 핏대를 올리며 싸움을 벌이는 것도 주시했다.

이사 현장을 바라보던 그의 눈에는 점차 빛이 나기 시작했다. 희열 가득 차가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 ‘바로 이것이다’는 생각에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습니다. 이게 나의 평생 업이 될 것이다는 생각이 퍼뜩 들대요.이사 서비스 질을 대폭 확대하자는게 나의 생각이었습니다.”

이게 시작이었다. 포장이사개념과 이사보관업을 국내에 최초로 도입,이사혁명을 일으키고, 국내 최대의 이사회사가 된 KGB의 시작이었다.

그길로 청년은 이삿짐 업체에 취직했다. 어렵사리 얻은 주택공사 급사 자리도 마다고 서울시 천호동에 소재한 동신통운에 입사했다.

일이 매일 있는 것은 아니었다. 토,일요일 또는 휴일에 일이 몰리고 주중에 쉬는 날이 많았다. 일이 없으면 이삿짐 인부들은 질펀하게 잠을 자거나 술잔을 기울이는게 일과 였지만 청년에게는 이게 영 마뜩지 않았다.

그래서 탁한 것이 이사마케킹. 주택공사를 다녔던 경험을 살려 서울시 둔촌동 주공 아파트 이사현장에 나갔다. 키를 받으러 온 입주자를 상대로 명함을 돌렸다. 지금은 보편화된 마케팅이지만 당시에는 전혀 새로운 시도였고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당시 회사 사장만 돈을 벌었지요. 인부들이야 그리 큰 돈을 벌었겠어요.”

청년에게도 소득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마케팅이 성공했다는 데 자부심을 느꼈다. 마케팅에 자신을 얻은 그는 새로운 도약을 시도한다. 1983년 그는 서울 잠실에 조그만 개인사업체를 차렸다. 이삿짐 업계에서 뒹군 지 만 4년이 넘을 무렵이었다.

이삿짐 업체는 처음부터 잘되었다. 끊임없이 들어오는 일거리로 청년사장은 하루한시를 쉴 틈이 없었다.회사가 점차 커져갔다.

1986년 초 회사명을 고려통운으로 바꿨다. 단순히 사명만 바꾼 것은 아니었다. 그가 노린 것은 이사혁명이었다.국내 최초로 포장이사를 도입한 것이다.

이는 처음부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포장이사는 의사 변호사 검사 교수 등 전문가나 고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이들에게 ‘이사는 우리에게 맡기고, 당신들은 자신의 일을 하라. 그게 돈을 더 버는 것이다’라는 개념을 제시,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 소비자들부터 호응을 얻었지요.”

1989년.박사장의 나이가 서른살을 넘어섰다. 20대 초반에 시작한 사업이 본궤도에 올라섰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 박사장이 차지하는 포션도 넓어졌다. 박사장의 행보는 항상 많은 업체들의 주시를 받았다.

박사장은 이 시점에서 이사문화를 점차 높여나가는데 기여하기로 결심했다. 돈은 안되더라도 이사혁명을 일으키는데 일조하기 한 것이다.

그는 서울 가락동의 1층 상가를 얻었다. 그곳에서 이사 일자가 맞지 않은 이삿짐을 보관했다. 국내 최초의 일이다. 당시만해도 일자가 안맞은 이삿짐은 몇 날이고 비닐포장지에 싸여 아파트 등지의 잔디밭에 보관하는 것이 예사였다.

다행히 이사보관업은 수 년이 지나지 않아 이익을 내기 시작했다. 덩달아 많은 업체들이 이업에 뛰어들었다. 박사장은 포장이사에 이어 이사보관업을 하나의 사업아이템으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92년 회사명을 다시 고려골든박스로 바꾸었다. 고려골든박스의 영문이니셜인 KGB는 이후 이삿짐 업체의 대명사가 되다시피한다.

박사장은 96년 이후 KGB브랜드를 보급하는데 주력했다. 그의 브랜드 전략의 포인트는 ‘고급 포장이사 서비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97년 IMF를 전후로 국내 포장이사가 가격파괴를 일삼을 때도 KGB는 고품격 포장이사서비스를 고집, 적잖이 업계의 영향을 끼쳤다. ‘가격파괴만이 살 길이다’는 당시의 보편화된 마케팅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KGB의 전략이 소비자들에 먹혀 들어갔기 때문이다.

“포장이사의 개념과 서비스 범위를 규정한 매뉴얼을 제작하는 등 서비스 표준화에 전념, 그결과 99년에 포장이사와 이삿짐 보관 부문의 ISO인증을 받았습니다.”

브랜드 개발로 박사장이 이삿짐업계 최초로 프랜차이즈화 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으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저얻은 행운이 아닌 각고의 노력이 밑바탕이 된 행운이었다.

1996년부터 시작한 프랜차이즈는 가맹점만 100여개를 넘어서는 등 이 업계에서 KGB의 위치는 공고하다. 가맹점수나 매출액, 시장점유율면에서 2위 업체와 현격한 차를 보이고 있다.

2002년 12월 그는 새로운 이사 택배 브랜드 ‘yes2404’를 선보였다. 이는 1t 차를 가진 세 사람의 소사장이 한팀이 되어 콜센터의 오더를 통해 작업한 후 요금을 나누어 갖는 시스템이다. 소사장들은 본사에 월 20만원의 돈을 내며, 회사는 이 사업과 관련한 콜센터운영, 홍보 등 모든 제반 사항을 제공한다.

“사장이 월급을 주는게 아니라 소사장들이 저에게 월급을 주는 시스템입니다. 달리 말하면 피고용자가 고용주에게 월급을 준다고 보면 됩니다. 이 제도는 항상 불씨를 안고 있는 노동조합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도입한 것입니다.저는 이 제도를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장점을 합친 것이라고 파악합니다.”

이러한 소사장제는 포장이사, 이삿짐 보관에 이은 또하나의 새로운 사업시스템이다. 이사업계에서 밑바닥부터 잔뼈가 굵은 박사장만이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는 아이템이기도 하다.

박사장은 2003년 7월 현재 이사회사 KGB를 비롯,택배회사 KGB택배, 이삿짐전문창고 KGB안전보관, 해외이사전문회사KGB인터내셔널 등을 운영하고 있는 종합물류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KGB일꾼만도 5000명을 헤아린다.

“대한민국 국민 1%를 책임지는 사업체를 키울 것입니다. 직원가족을 포함, 40만∼50만명을 책임지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이제는 명실공히 회장으로 불리는 박사장의 포부다.

국민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경남 밀양에서 어린 시절에 상경, 국내 최대 이사업체를 일으킨 박회장의 꿈이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02)4024-114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