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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짓만 하다가 떠난 영웅

은하철도 |2005.09.05 12:31
조회 271 |추천 0
 

바보짓만 하다가 떠난 영웅



1989년 11월 중순, 천안에 위치한 외딴집,

캄캄한 어둠 속에서 홀로 등을 밝히며 살아온 의로운 문인이 임종을 맞이했다. 문우와 친구, 그리고 가족도 없는 싸늘한 방에서 제자 한 명만 달랑 그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다. 폐기종이 그의 생명을 앗아갔지만 그는 천식에서 폐기종으로 지병이 악화되어도 담배를 끊지 못했다. 그의 책상에는 한숨과 함께 내뿜던 유일한 친구인, 그 당시에 가장 값싼 “환희”라는 담배가 여전히 놓여 있었다.


임종국교수,

부친은 일제강점기에 천도교 청우당 대표로 친일회의를 주재하며 국방헌금을 모집했던 친일파였다.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고려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하고 한때는 판검사가 되기 위하여 고시공부를 했다가, 문학이 좋아서 열렬한 문학청년으로 변신하여 <이상전집>을 펴내고, 1959년에 <문학예술>지에 “비(碑)”라는 시로 등단하여 시인이 되었다. 그 후 <사상계>에 많은 시와 시평을 발표했다.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의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박정희가 1965년에 일본과 굴욕적인 한일수교회담을 벌이자 임교수는 분노했다. 근래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한일수교는 미국이 주도하여 벌인 미국과 일본의 합작품이고, 수교의 대가로 박정권에게 은밀한 정치자금이 따로 일본으로부터 건네졌다고 한다. 이런 뒷거래는 민족을 팔아서 정치자금을 챙겼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까지 단죄하여서 반민족 친일분자의 명단에 올리면서, 임교수는 친일분자들이 우리사회의 전반에 포진된 캄캄한 어둠 속을 혼자서 등불을 밝히며 걸음을 재촉했다.


한일수교회담이 체결된 이듬해인 1966년에 <친일문학론>을 써서, 그 당시에 한국문단을 주름잡았던 친일문인들의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였다. 그의 추상같은 호령은 문학인들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종교, 언론, 문화, 군사로 확대되었고, 자신이 졸업한 대학교 설립자와 그의 스승까지도 모두 민족의 법정에 세웠다. 1949년에 반민특위가 이승만에게 짓밟혀 무산된 지 17년 만에 홀로 민족의 법정을 세워서 기소장을 날린 그의 행위는 이순신장군이 임진왜란에서 승리를 거듭한 이후에 벌어진 한민족의 대장정이었다.

<발가벗고 온 총독, 1970>, <정신대실록, 1981>, <일제침략의 친일파, 1982>, <밤의 일제침략사, 1984>, <일제의 사상탄압, 1985>, <일제의 조선침략사 1. 2, 1988, 1989>, 등의 친일파연구에 사료가 되는 저서와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런 저술의 뒷면에는 학교에서 쫓겨나서 끼니를 굶어가며, 도서관마다 전전하여 철저한 실증적인 연구를 통한 자료가 있었기에, 한번도 임교수는 친일파들에 의하여 송사를 당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무서운 “재야 사학자”로 변신되어 버린 것이었다.


친일문인들이 판치는 문학계에서 임교수는 따돌림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당대에 거목으로 문학계를 주름잡던 친일문인을 고발한 <친일문학론>은 3000권이 팔리는데 10년의 세월이 걸렸고, <해방전후사의 인식, 1979>이라는 책은 판금 당했다. 한국문인들은 모두 그를 “넝마주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시인이 주제넘게 무슨 민족을 운운하는가, 그냥 음풍농월(吟風弄月)이나 할 것이지, 신문과 잡지에서는 그의 글을 실어주지 않았으며, 곤궁은 그의 뒤를 밟아 끼니마저 침탈하였고 지병인 천식으로 발걸음마저 옮기기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오랫동안 입원할 수도 없었다. 천식이 폐기종으로 악화되자 그는 천안에 요산재라는 움막을 짓고 그의 필생사업인 10권으로 된 <친일파 총서>에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가 틈틈이 작성한 수천 매의 친일파 인명카드는 지금 민족연구소에서 발표하는 친일파인명사전의 귀중한 텍스트가 되고 있다.


궁핍과 병마로 세상을 뜨기 2년 전에 임교수가 남긴 절규다.

“혼이 없는 사람이 시체이듯 혼이 없는 민족도 죽은 민족이다. 역사는 꾸며서도 과장되어서도 안 되며 진실을 밝혀서 혼의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 15년 걸려서 모은 내 침략, 배족사의 자료들이 그런 일에 작은 보탬을 해줄 것이다. 그것은 59세인 나로서 두 번 모을 수 없기에 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자료와 그것을 정리한 카드 속에 묻혀서 생사를 함께 할 뿐인 것이다.”


반민족행위자들이 미국과 이승만에게 붙어서 아부하다가 4.19로 무너졌지만,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박정희는 정권을 잡자마자 자신이 입대하였던 일본군사관학교 교장을 먼저 찾아가서 인사했다고 한다. 패망의 터를 움켜쥐고 다시 국가를 부흥시키던 일본인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친일문인들은 여전히 그 명성을 유지하여 한국문학의 거두로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제자를 양성해 냈다.

내가 임종국교수의 특집 다큐멘터리를 텔레비전으로 접한 때가 군사정권이 무너진 후였다. 비틀대며 뒷산에서 땔나무를 지게에 지고 내려오는 모습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서재의 책상 위에는 손때 묻은 인명카드가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변함없이 가장 값싼 “환희”라는 담배가 놓여있었다. 임교수는 담배를 피우다가 심한 기침과 담배연기를 함께 토하며 술회했다.

“다른 교수들과 동창들이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하냐고 그러더군요. 학교에서도 외면당하고 매일 도서관 구석에 앉아서 일제시대에 발행된 신문이나 뒤적거리고 있으니, 그들 눈에도 내가 한심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돈이야 물론 없었죠. 제대로 먹지도 못한 몰골이었으니 얼마나 우습게 보였겠습니까,”


반민족행위자를 운운하면 빨갱이로 몰려 치도곤을 맞는 60, 70, 80년대였다. 넝마주이라는 문인들의 비아냥거림에도 아랑곳없이, 또한 궁핍과 병마의 몸으로 제 길을 고집했다. 그의 생애에는 빛이 없었다. 그러나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그가 작성한 친일분자 인명카드는 지금 역사의 정사(正使)로 빛을 발한다. 친일분자의 아들은 위대했다. 우리는 이런 영웅을 기대하는 것이다. 바보짓만 하다가 떠난 영웅을 말이다. 멸시와 조롱을 받았던 영웅을 말이다. 폐기종 때문에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면서 땔나무를 하러 뒷산에 오르던 영웅을 말이다. 다시 모을 수 없는 소중한 자료를 끌어안고 서재를 뜨지도 못하다가 죽은 영웅을 말이다.


“아일랜드는 삼백 년 만에 압박을 벗었고, 유대민족은 나라 없이 이천 년을 떠돌아 다녔으나, 그들은 민족의 전통을 상실하지 않았다. 우리가 불과 35년으로 이 지경까지 타락했다는 것은 단순히 친일분자들의 수치로만 끝날 일은 아니다. 민족 전체의 수치로서, 맹성은 물론 환골탈퇴의 결사적 고행이 수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청산이 아니라 오히려 온존된 일제의 잔재는 이 땅의 구석구석의 민족의 정기를 좀먹었고, 민족의 가치관을 학살하였다. 이 흙탕물을 걷어내지 못하는 한, 민족의 자주는 공염불이요, 따라서 민족의 통일도 백일몽이다.”


임종국교수의 유고의 한 대목이다.

금년 3월에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임종국문학제도 치루고 그의 사상을 기린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이다. 우리는 민족혼의 선생을 깍듯이 모셔야 한다. 아주 공손하게,



글 / 은하철도 (독립기념관장 김상웅씨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을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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