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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24화> 특별훈련

바다의기억 |2005.09.07 10:46
조회 11,426 |추천 0

처음으로 집에서 =장가 가라= 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여자친구도 없는 데 뜬금없이 무슨 말씀이세요= 라고 했더니

 

밖에 나가서 적당히 데리고 오라십니다....

 

...... 누구 적당히 따라오실 분?

 

=================== 까짓거 대충... 그럼 이 고생을 하겠습니까 ====================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혹시나 했던 마음이


불안과 긴장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왜 나를 불렀는가?



문득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


=너 잠깐 나와.=


라는 말을 듣고 화장실로 따라갔을 때가 떠올랐다.


그 아슬아슬한 침묵, 시린 공기....


지금과 똑같은 분위기였다.



그래도 그 땐


때리면 받아치고, 안 때리면 먼저 친다는


극도로 간단한 행동지침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녀가 무슨 행동을 취할지,


또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나에게 역할을 그만 두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이제 적당히 알아서 물러나라는 말을


사람들 앞에서나 다른 때 하기가 미안해서


지금 이곳으로 날 부른 걸까.



...그럼 난 어떡해야 할까.



어느 정도 생각했던 일이긴 하지만


관둘 땐 관두더라도


그녀에게 그런 말을 듣고 관두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내가 먼저 말해버릴까?


그랬다가 혼자 김칫국 코로 마시고 전율한 거면


완전 새 되는 건데...



혹시나, 정말 혹시나


‘나 아무래도.. 널 좋아하나봐.’


라면서 수줍은 얼굴로 고백을 하려는 건 아닐까?


...... 뭐, 물론 그럴 확률이야


동전을 던졌을 때 동전이 접힐 확률이나


빨간 펜을 던졌을 때 검은 펜 될 정도 밖에 안 되겠지만


그래도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그런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절대...


.....


그냥 말하는 게 나을지도.



내가 그렇게 분위기를 살피며 고심하고 있는 동안


눈가에 비닐팩 같은 것을 대고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던 그녀가


뭔가 결심이 선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지나치다 싶을 만큼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


왠지 모를 위기감에 그녀의 손에 들린 주머니로 눈이 갔다.


뭔지는 몰라도 던지거나 하진 않겠지?



그녀가 불과 몇 발짝 앞으로 다가온 뒤에야


난 그 주머니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이스팩.


그녀는 충혈 된 눈을 진정시키기 위해


냉찜질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원인이라고 하면 역시 나겠지...



기억 - ....미안해요.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사과였다.


세부 항목까지 따지자면 끝이 없겠지만


내가 그녀에게 끼치고 있는 피해가 막심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민아 - 매번.... 그렇게 미안하다는 말만 할 거예요?



찌푸린 눈가에 원망의 그림자가 가득한 그녀의 표정.


확실히 짜증이 남직도 했다.


내가 연습시간 내내 그녀에게 했던 말은


‘미안해요. 잘 하려고 했는데...’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달은 지금도


그녀에게 해줄 말은 ‘미안해요.’ 밖에 없었다.


....... 이게 내 한계인 걸까.



민아 - 나 좀 똑바로 봐 봐요.


기억 - ...예.



그녀의 시선을 비끼듯


비스듬히 서 있던 난


삐질삐질 정면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가슴에 걸려있는 묵직한 무언가에 눌린 고개는


여전히 그녀의 발치를 향하고 있었다.


면목이 없다.... 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일까.



민아 - 내 얼굴을 보라고요.



그녀는 앞으로 굽어있는 내 어깨를


뒤로 접을 듯 밀어 올렸고


일시적이나마 난 그녀와 얼굴을 마주했다.


하지만 잔뜩 힘이 들어간 그녀의 두 눈을 마주하기가


몹시도 버거웠던 난


머쓱함에 코끝을 매만지며 고개를 돌렸다.



민아 - 왜 눈을 못 마주쳐요?


기억 - 아니 그게... 좀... 어색하기도 하고...



정면 돌파라도 하듯 치고 들어오는 그녀의 공세에


난 영문도 모르고 버벅거리기만 했다.


그녀는 내게 화를 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뭔가 비유적으로 말하려 하는 걸까.



민아 - 뭐가 그렇게 어색해요?



그녀의 질문은 나를 고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대체 왜 나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는가?



민아 - 똑바로 봐 봐요.



그녀는 다시 내 어깨를 흔들었고


나는 어금니를 꾸욱 다져물며 고개를 들었다.



내 실루엣이 선명히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


눈가는 아직도 좀 부은 감이 있었지만


동그랗고 또렷한 눈매는 몹시 당돌한 인상을 주었다.



기억 - .......



같은 극의 자석끼리 붙여놓으려 할 때처럼


내 눈은 끊임없이 그녀의 눈동자로부터 벗어나려 했지만


지금 눈을 돌려버리면


그녀가 아예 뒤돌아서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추산하기 힘든 시간이 흘렀다.


실제론 20초가 됐을까 말까한 정도?


갑자기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눈싸움을 하던 중이라면 몹시도 웃긴 일이겠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민아 - .........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사이에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눈물.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무 이유 없이 죄책감이 밀려왔다.


곧 가슴 한쪽에 느껴지는 뜨끔뜨끔한 통증에


그녀를 마주하고 서있기가 힘들어졌다.


결국 난... 고개를 피하고 말았다.



민아 - ..... 또 마음이 아파서 못 보고 있겠어요?


기억 - ...... 예.


민아 - 왜요?


기억 - 그...그냥 우니까 그렇죠.


민아

- 남자가 여자 눈물에 쉽게 흔들리면 인생 망친댔어요.


그렇다고 함부로 울리고 다니면 안 되겠지만...


왜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속아요?



기억 - .........



‘속는다.’ 라..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


연극을 보던 중 위기에 처한 여배우를 구하러


무대 위로 뛰어올라간 관객처럼


난 ‘연기’와 ‘실제’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서


태연한 얼굴로 그녀의 눈물을 마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영화나 소설이 현실이 아닌 걸 알면서도 감동받는 것처럼


그녀의 연기에 동요 되는 건 당연했다.



민아

- 기억인 관객이 아니야.


‘속는 사람’ 이 아니라 ‘속이는 사람’이야.


관객을, 동료를, 그리고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순간, 내 마음을 꿰뚫어 본 듯한 그녀의 한 마디.



그녀의 말에 난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건 바로 역할에 대한 몰입이었다.


그녀의 연기에 동요하는 한이 있더라도


사채업자로서 동요해야 했다.


‘자신을 속인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내가 그녀의 말을 곱씹어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만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민아 - 자, 그럼 연습 시작.


기억 - 네?!



이제 당연히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던 난


깜짝 놀라 그녀에게 되물었다.



민아 - ..... 뭔가 느꼈으면 실제 해봐야죠.


기억 - ....... 지금요?


민아

- 나 오늘 완전히 망가질 각오하고 온 거니까 잔말 말고 해요.


NG없이 끝나는 그 때까지 울어줄 테니까


오늘 이후로 또 ‘마음이 아파서 못하겠어요.’ 이런 말 하면


내가 그동안 운 것만큼 눈물나게 해줄 거예요.



그녀는 지잇- 하고 인상을 쓰며


손가방 안에서 안약이며, 선글라스 따위를 불끈 꺼내보였다.



.......오늘 아주 임자 만났다.




민아 - 제발, 제발 그만하세요!


기억 - 이거 놔! 얘들아, 적당히 죽을 만큼만 밟아!

(난 이 대사가 아직까지 이해가 안 간다.....)



아무도 없는 연습실 중앙에서


있지도 않은 부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리는 나와


보이지 않는 철수를 위해 애걸하는 민아의 열연.


열 번도 넘는 NG에 흐트러질 데로 흐트러진 그녀의 모습은


처절할 만큼 현실감 있었다.



기억

- 다시 한 번 도망쳐봐.


그 땐 발모가지를 잘라놓을 테니까.



나 또한 그녀의 연기에 부응하듯


진지한 태도로 연습에 임했다.


지글지글 달아오르는 김군을 향한 분노.


역할에 몰입한다는 건 이런 의미였나....



민아 - 안돼요! 철수씨~!!



부하들이 근처에 있던 화분으로 철수를 내려치려는 장면에서


철수를 감싸려 달려가는 그녀.


난 그런 그녀의 어깨를 잡아 뒤로 내쳤다.



기억 - 넌 저리 꺼져있.....!


‘쿠당탕탕!’



앞으로 나가며 대사를 하려는 순간 들려온


몹시 둔탁한 소리에


난 번뜩 정신을 차렸다.


황급히 뒤돌아본 그곳엔 바닥에 널브러진(?) 그녀가 있었다....



기억 - 괘, 괜찮아요?



너무 세게 밀었나?


아니....그렇게 힘이 들어가진 않았는데... 순간 욱한 건가....


이걸 어쩌나 이걸 이거...



민아 - 이이이잇!!!



몹시 화가 난 듯 주먹을 부르쥐고 일어나는 그녀.


원망하듯 쏘아보는 그녀의 눈빛에


난 순식간에 소심모드로 돌아섰다.



기억 - 미안해요,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민아 - 사채업자가 밀쳐놓고 괜찮냐고 그래욧?!


기억 - 아.. 그게 너무 세게 넘어지신 것 같아서....


민아 - 그럼 이 상황에서 빙글빙글 샤방그르하게 넘어져요?



비... 빙글빙글 샤방그르.....


대체 그게 어떤 모습을 뜻하는 형용사인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기억 - ...다시 한 번 부탁합니다.



그렇게 연습은 곧 클라이막스를 지나


대망의 엔딩을 향해 갔다.



빚에 쫓기던 철수는 끝내 어둠의 길로 접어들어


밀수 조직에서 활동하다


조직의 희생양으로 경찰에 붙잡히고


그의 변호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선희는 사채업자에게 자신을 맡긴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후.



기억 - 대체 왜 그 쓰레기를 잊지 못하는 거지?


민아 - ...... 철수씨는 쓰레기가 아니에요.


기억 - 무엇이 부족했지?


민아 - ...... 아무것도.


기억 - 그런데... 그런데 왜!!!


민아 - 그건... 아까도 말했잖아요.


기억 - 빌어먹을......!! 가!! 가서 같이 썩어버려!!


민아 - .....오케이!! 드디어 끝!!



내가 마지막 대사를 마치자



그녀는 만세를 부르며 주변을 한바퀴 휘~돌았다.


하지만 뭔가 마지막 장면치고


굉장히 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아 - 아..... 눈 아파. 진짜 피라도 날 것 같아.


기억 - ...괜찮아요? 어디 봐요.


민아 - 여기 봐봐. 새빨개.



난 손거울을 보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벌겋게 충혈된 그녀의 눈.


두 시간을 내리 눈물 흘렸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기억 - 미안해요. 내가 너무 쩔쩔 매서...


민아 - 아녜요. 나중엔 정말 잘했어요.


기억 - ...... 그런데 마지막 장면 좀 허전하지 않아요?



난 여전히 그녀에게 붙어선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도 나와 같은 느낌이었는지


눈가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 - 마지막에... 키스 장면을 넣어보는 게 어때요?


민아 - 으음.... 나중에 협의해보자.


기억 - 지금 해보면.....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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