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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26화> 그녀를 잡아요

바다의기억 |2005.09.14 14:30
조회 10,829 |추천 0

운동하다 발가락 삐었습니다.

 

이거 참 물구나무서서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지하게 신경쓰이네요.

 

병원 가기엔 또 애매하게 안 아프고.

 

집에 가서 하루 파스나 붙여놔야겠습니다.

 

====================== 조깅은 어찌 한다 =============================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는 말에


경사 났다며 달력에 체크해놓는 집이


우리 집 말고 또 있었을까...


그것도


-기억. 20살 청춘에 드디어 커밍아웃-


이라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멘트까지 곁들여서.



늦은 저녁,


간만에 아버지가 함께 한 식사 자리.


어머니는 오후에 왔던 전화와


나의 폭탄선언에 대해 이야기 하셨다.



어머니

- 글쎄, 목소리가 얼마나 고운지


난 무슨 전문 판매원인 줄 알았어요.



기억 - 아유, 어머니. 그만하시라니까요...



아직 이렇다할 사이도 아닌데


너무 앞서가시는 것만 같았던 난


어머니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그렇게 멈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참을 묵묵히 듣고 계시던 아버진


이내 식사를 마치신 듯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장엄한 표정으로 회심의 한마디를 날리셨다.



아버지 - ....... 드디어 때가 왔군.



무슨 때가 왔단 말입니까~!!!




그리고 다음날.


다시금 내가 키스신청을 거절당했다는 걸 실감하며


침울한 마음으로 전철에 오른 난


그녀와의 연습 장면을 되감았다 다시 보기를 반복했다.



분위기는 정말 좋았는데...


내가 너무 서둘렀나?



그래도 희망적인 건


그녀가 다음날 우리 집에 전화를 했었다는 것이고


부모님이 나의 연애사업에 몹시 긍정적이시라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떠난 뒤로


난 그 어떤 사람도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 ‘싫어한다.’의 개념을 떠나서


인간에게 무관심했고


스스로에게 냉담했다.



그나마 대학에 들어와 이성들을 접하고....


결정적으로 그녀를 만나게 되면서


나름대로 의욕이라는 게 생겼다고나 할까.


뭐...... 근처에 수많은 커플들의 염장질도


내 의욕에 불을 붙이는 데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변화를 비추어 볼 때


난 대한민국 모든 중·고등학교의


남녀공학화를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 아니다. 이미 졸업했으니 됐다.



뭐 어찌됐건


지금 중요한 건 그녀를 만나는 일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가늠도 못할 노릇이지만


우선은 그냥 만나볼 생각이다.


그녀가 앙심을 품고


보복을 가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렇지 않다면.... 사과할 생각이다.


뭐라고 말할지는 아직 생각 못했지만.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난


그날 수업을 마치자마자


조금 서둘러 연습실로 향했다.



아무래도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만나서 말하는 게 조금 더 자연스럽겠지.



잠시 후 연습실 문 앞에 도착한 난


선뜻 문손잡이를 잡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혹시 그녀가 이미 와 있는 건 아닐까?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가슴.



자, 진정하고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보자.....


먼저 사과를 하고...


사과를 하 뒤...


사과를 한 다음...


......


에이 씨, 될 대로 되라!!



=벌컥!=



‘남자는 갑빠!’ 라고 마음속으로 외친 후


눈을 질끈 감으며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난 역광이 비추는 창가에 기대서있는


민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 - 아 뜨거, 씨박!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들려온


하이톤의 거친 말투.


김양이었다.


갑작스런 내 등장에 놀란 그녀는


고개를 돌리느라 떨어진 담뱃불에 손등을 데여


봉산탈춤을 춰대고 있었다.



역광에 모습이 잘 안 보였던 데다


둘 다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다니는 탓에 헷갈렸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닌자거북이 보고도 놀란다고....



김양 - 아 씨. 노크도 몰라? 깜짝 놀랐네.


기억 - .... 뭘 그렇게 놀라요?


김양 - 아 그런 게 있어.



정말 놀라긴 놀란 듯,


연습실에서 ‘노크 필수’를 주장하는 그녀.


연습실 문은 철문 안팎으로 방음용 쿠션이 붙어있었기에


주먹으로 두드려도 안에 소리가 들릴까 말까였다.


아무튼.. 지금확인 할 건.....



기억 - 어제 저희 집에 전화하셨어요?


김양 - 내가 왜?


기억 - 그럼 혹시 오늘 민아양 왔었나요?


김양 - 오늘 천 끊으러 동대문 갔어.


기억 - ....음, 알겠습니다.



연습실을 나선 난 바로 동대문을 향했다.


내 볼일만 마치고 휙 가는 것 같긴 하지만


그녀는 늘 자신만의 공간을 필요로 하는 듯 했기에


별 거리낌은 없었다.



그 넓고 복잡한 곳에서 무슨 수로 그녀를 찾겠다고


그렇게 쉽게 발걸음을 돌렸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가면 만날 수 있다는 뜬금없는 확신이 들었다.



남자의 직감이라고나 할까.


물론 근거는 전혀 없다.



그리고 도착한 동대문.


난 방산시장 근처를 달리다시피 헤매고 다녔다.


다들 머리며 어깨에 한 보따리씩 짐을 지고 다니는 사람들.


이 사람이 저 사람 같고 저 사람이 이 사람 같고


저 앞에 있는 사람이 민아네. 브라보.



등에 큼직한 비닐 한 짐을 지고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발견한 난


곧장 인파를 헤치고 그녀를 향해 갔다.



기억 - 저, 저기요!!!! 여기요~!!



내가 그녀를 따라잡기 전에


신호가 먼저 바뀌어버릴까 봐


난 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지만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라고


근처에 있는 몇 사람만이 날 쳐다볼 뿐


그녀는 내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어쩌지? 뭐라고 불러야 하지?


민아야? 민아씨? 민아양? 자기야?



그 순간 바뀌는 신호등.


나와 그녀 사이는 아직도 30여 미터가 남아있었고


신호에 맞춰 달려가기엔 인파도 자동차도 너무 많았다.


불러 세워야 하는데.... 그녀를 불러 세워야 하는데...!!



기억 - 공주님~!!!!!!



복식호흡 단련 2개월 째.


짧은 훈련이나마 그 성량은 일반적인 수준이 아니었다.


매트릭스에서 스미스 일당이 니오를 돌아보듯


그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날 돌아보았다.



됐다, 세웠어.



=다다닷!!=



하지만 내가 한숨 놓기도 전에


그녀는 도망치듯 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반응에 정신이 퍼뜩 든 난


이제 움직일 폼을 잡고 있는 자동차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가로질러 길을 건넌 뒤


그녀를 좇았다.



기억 - 공주님~!! 잠, 잠깐만요!!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거야.


그것도 미칠 듯한 스피드로....!



등에 지고 있는 보따리가 풍선이 아닐까 싶을 만큼


빠른 속도로 달아나는 그녀의 뒤를 좇으며


난 심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리막길에서만 못 달리던 거였나?


아니면 위기상황에서의 초인적 능력?



그녀와 함께 했던 순간들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뇌리에 지나쳤다.


이대로... 끝내고 싶진 않아.



다급한 마음에 발은 자꾸만 꼬였고


몇 번이나 넘어질 위기를 넘기고야


난 지하철 입구로 들어가려는 그녀를 잡을 수 있었다.


곧 발걸음을 멈춘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고 달아날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기억 - 공주님... 할 말이 있어요.



갈 때 가더라도... 끝날 때 끝나더라도


할 말을 해야 했다. 적어도...


=그 땐 당황해서 그렇게 말했지만

절대 장난은 아니었어요.=


라고. 그 말이 가장 해주고 싶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


그녀가 내게 소리쳤다.



민아 - 공주님이 뭐야~ 이렇게 사람들 많은 데서~!!



새빨갛게 상기된 얼굴에


울먹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


그제야 난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행인1 - 응? 지금 시대에 공주?


행인2 - ...선글라스 까지 끼고....남잔 경호원인가?


행인3 - 보기엔 한국인 같은데? 우리말도 잘하고.


행인4 - ....우리나라 사람이 외국 공주 됐다 한국으로 도망친 거 아녀?


행인3 - ...그런가 보네, 짐 싸들고 다니는 거 보니까.



화끈.....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 난


3초정도 눈도 깜짝 못한 채


초고속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한단 말인가?



Now Loading. Please wait.....


딩동.


=열라 튀어.=



기억 - 쥬마쀌 기억!! 아듀 꼬헤아!!

(내 이름은 기억! 잘 있어라 한국!)



그렇게 난 신원위장을 위한 불어 한 마디를 남기며


그녀의 손을 잡고 열심히 뛰었다.


주변에 몰려있던 사람들 사이로 난 길을 달리며


문득 영화 속 결혼식 장면을 떠올린 난


어쩔 수 없는 몽상가인가 보다.



그렇게 전철역 안으로 들어서자


더 이상 우릴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제야 난 다시 숨을 고르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사과해야 해.... 연습실에서 있었던 일을....



민아 - 하아... 하아....



하지만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있는 그녀를 보자


문득 말문이 막혀버렸다.



내가 생각했던 말들은


이 상황에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 어울리는 말은.....


내가 그녀에게 해야 할 말은.....



기억 - 모시러 왔습니다.... 공주님.



난 입가에 온 신경을 집중해


옅은 스마일을 만들어내며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민아 - ..... 치~.



내 말에 그녀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두드리며


찡긋 눈웃음을 지었다.


마치 내게 바보라고 말하는 듯한 그 웃음에


마음이 놓이는 난 정말 바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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