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하다 발가락 삐었습니다.
이거 참 물구나무서서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지하게 신경쓰이네요.
병원 가기엔 또 애매하게 안 아프고.
집에 가서 하루 파스나 붙여놔야겠습니다.
====================== 조깅은 어찌 한다 =============================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는 말에
경사 났다며 달력에 체크해놓는 집이
우리 집 말고 또 있었을까...
그것도
-기억. 20살 청춘에 드디어 커밍아웃-
이라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멘트까지 곁들여서.
늦은 저녁,
간만에 아버지가 함께 한 식사 자리.
어머니는 오후에 왔던 전화와
나의 폭탄선언에 대해 이야기 하셨다.
어머니
- 글쎄, 목소리가 얼마나 고운지
난 무슨 전문 판매원인 줄 알았어요.
기억 - 아유, 어머니. 그만하시라니까요...
아직 이렇다할 사이도 아닌데
너무 앞서가시는 것만 같았던 난
어머니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그렇게 멈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참을 묵묵히 듣고 계시던 아버진
이내 식사를 마치신 듯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장엄한 표정으로 회심의 한마디를 날리셨다.
아버지 - ....... 드디어 때가 왔군.
무슨 때가 왔단 말입니까~!!!
그리고 다음날.
다시금 내가 키스신청을 거절당했다는 걸 실감하며
침울한 마음으로 전철에 오른 난
그녀와의 연습 장면을 되감았다 다시 보기를 반복했다.
분위기는 정말 좋았는데...
내가 너무 서둘렀나?
그래도 희망적인 건
그녀가 다음날 우리 집에 전화를 했었다는 것이고
부모님이 나의 연애사업에 몹시 긍정적이시라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떠난 뒤로
난 그 어떤 사람도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 ‘싫어한다.’의 개념을 떠나서
인간에게 무관심했고
스스로에게 냉담했다.
그나마 대학에 들어와 이성들을 접하고....
결정적으로 그녀를 만나게 되면서
나름대로 의욕이라는 게 생겼다고나 할까.
뭐...... 근처에 수많은 커플들의 염장질도
내 의욕에 불을 붙이는 데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변화를 비추어 볼 때
난 대한민국 모든 중·고등학교의
남녀공학화를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 아니다. 이미 졸업했으니 됐다.
뭐 어찌됐건
지금 중요한 건 그녀를 만나는 일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가늠도 못할 노릇이지만
우선은 그냥 만나볼 생각이다.
그녀가 앙심을 품고
보복을 가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렇지 않다면.... 사과할 생각이다.
뭐라고 말할지는 아직 생각 못했지만.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난
그날 수업을 마치자마자
조금 서둘러 연습실로 향했다.
아무래도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만나서 말하는 게 조금 더 자연스럽겠지.
잠시 후 연습실 문 앞에 도착한 난
선뜻 문손잡이를 잡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혹시 그녀가 이미 와 있는 건 아닐까?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가슴.
자, 진정하고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보자.....
먼저 사과를 하고...
사과를 하 뒤...
사과를 한 다음...
......
에이 씨, 될 대로 되라!!
=벌컥!=
‘남자는 갑빠!’ 라고 마음속으로 외친 후
눈을 질끈 감으며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난 역광이 비추는 창가에 기대서있는
민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 - 아 뜨거, 씨박!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들려온
하이톤의 거친 말투.
김양이었다.
갑작스런 내 등장에 놀란 그녀는
고개를 돌리느라 떨어진 담뱃불에 손등을 데여
봉산탈춤을 춰대고 있었다.
역광에 모습이 잘 안 보였던 데다
둘 다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다니는 탓에 헷갈렸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닌자거북이 보고도 놀란다고....
김양 - 아 씨. 노크도 몰라? 깜짝 놀랐네.
기억 - .... 뭘 그렇게 놀라요?
김양 - 아 그런 게 있어.
정말 놀라긴 놀란 듯,
연습실에서 ‘노크 필수’를 주장하는 그녀.
연습실 문은 철문 안팎으로 방음용 쿠션이 붙어있었기에
주먹으로 두드려도 안에 소리가 들릴까 말까였다.
아무튼.. 지금확인 할 건.....
기억 - 어제 저희 집에 전화하셨어요?
김양 - 내가 왜?
기억 - 그럼 혹시 오늘 민아양 왔었나요?
김양 - 오늘 천 끊으러 동대문 갔어.
기억 - ....음, 알겠습니다.
연습실을 나선 난 바로 동대문을 향했다.
내 볼일만 마치고 휙 가는 것 같긴 하지만
그녀는 늘 자신만의 공간을 필요로 하는 듯 했기에
별 거리낌은 없었다.
그 넓고 복잡한 곳에서 무슨 수로 그녀를 찾겠다고
그렇게 쉽게 발걸음을 돌렸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가면 만날 수 있다는 뜬금없는 확신이 들었다.
남자의 직감이라고나 할까.
물론 근거는 전혀 없다.
그리고 도착한 동대문.
난 방산시장 근처를 달리다시피 헤매고 다녔다.
다들 머리며 어깨에 한 보따리씩 짐을 지고 다니는 사람들.
이 사람이 저 사람 같고 저 사람이 이 사람 같고
저 앞에 있는 사람이 민아네. 브라보.
등에 큼직한 비닐 한 짐을 지고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발견한 난
곧장 인파를 헤치고 그녀를 향해 갔다.
기억 - 저, 저기요!!!! 여기요~!!
내가 그녀를 따라잡기 전에
신호가 먼저 바뀌어버릴까 봐
난 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지만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라고
근처에 있는 몇 사람만이 날 쳐다볼 뿐
그녀는 내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어쩌지? 뭐라고 불러야 하지?
민아야? 민아씨? 민아양? 자기야?
그 순간 바뀌는 신호등.
나와 그녀 사이는 아직도 30여 미터가 남아있었고
신호에 맞춰 달려가기엔 인파도 자동차도 너무 많았다.
불러 세워야 하는데.... 그녀를 불러 세워야 하는데...!!
기억 - 공주님~!!!!!!
복식호흡 단련 2개월 째.
짧은 훈련이나마 그 성량은 일반적인 수준이 아니었다.
매트릭스에서 스미스 일당이 니오를 돌아보듯
그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날 돌아보았다.
됐다, 세웠어.
=다다닷!!=
하지만 내가 한숨 놓기도 전에
그녀는 도망치듯 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반응에 정신이 퍼뜩 든 난
이제 움직일 폼을 잡고 있는 자동차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가로질러 길을 건넌 뒤
그녀를 좇았다.
기억 - 공주님~!! 잠, 잠깐만요!!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거야.
그것도 미칠 듯한 스피드로....!
등에 지고 있는 보따리가 풍선이 아닐까 싶을 만큼
빠른 속도로 달아나는 그녀의 뒤를 좇으며
난 심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리막길에서만 못 달리던 거였나?
아니면 위기상황에서의 초인적 능력?
그녀와 함께 했던 순간들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뇌리에 지나쳤다.
이대로... 끝내고 싶진 않아.
다급한 마음에 발은 자꾸만 꼬였고
몇 번이나 넘어질 위기를 넘기고야
난 지하철 입구로 들어가려는 그녀를 잡을 수 있었다.
곧 발걸음을 멈춘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고 달아날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기억 - 공주님... 할 말이 있어요.
갈 때 가더라도... 끝날 때 끝나더라도
할 말을 해야 했다. 적어도...
=그 땐 당황해서 그렇게 말했지만
절대 장난은 아니었어요.=
라고. 그 말이 가장 해주고 싶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
그녀가 내게 소리쳤다.
민아 - 공주님이 뭐야~ 이렇게 사람들 많은 데서~!!
새빨갛게 상기된 얼굴에
울먹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
그제야 난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행인1 - 응? 지금 시대에 공주?
행인2 - ...선글라스 까지 끼고....남잔 경호원인가?
행인3 - 보기엔 한국인 같은데? 우리말도 잘하고.
행인4 - ....우리나라 사람이 외국 공주 됐다 한국으로 도망친 거 아녀?
행인3 - ...그런가 보네, 짐 싸들고 다니는 거 보니까.
화끈.....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 난
3초정도 눈도 깜짝 못한 채
초고속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한단 말인가?
Now Loading. Please wait.....
딩동.
=열라 튀어.=
기억 - 쥬마쀌 기억!! 아듀 꼬헤아!!
(내 이름은 기억! 잘 있어라 한국!)
그렇게 난 신원위장을 위한 불어 한 마디를 남기며
그녀의 손을 잡고 열심히 뛰었다.
주변에 몰려있던 사람들 사이로 난 길을 달리며
문득 영화 속 결혼식 장면을 떠올린 난
어쩔 수 없는 몽상가인가 보다.
그렇게 전철역 안으로 들어서자
더 이상 우릴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제야 난 다시 숨을 고르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사과해야 해.... 연습실에서 있었던 일을....
민아 - 하아... 하아....
하지만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있는 그녀를 보자
문득 말문이 막혀버렸다.
내가 생각했던 말들은
이 상황에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 어울리는 말은.....
내가 그녀에게 해야 할 말은.....
기억 - 모시러 왔습니다.... 공주님.
난 입가에 온 신경을 집중해
옅은 스마일을 만들어내며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민아 - ..... 치~.
내 말에 그녀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두드리며
찡긋 눈웃음을 지었다.
마치 내게 바보라고 말하는 듯한 그 웃음에
마음이 놓이는 난 정말 바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