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어화(解語花)-말하는 꽃(4)-
무림을 주유하는 풍류객들의 서사시나 노래 가사 속에 빈번히 등장하는 낯익은 이상향으로, 대충 세 군데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 두 곳이 바로 이곳 하남 땅 위에 있었다. 사람들은 그 첫 번째로, 풀잎에 앉은 이슬처럼 손에 닿을 듯 사라져 버리는 곳이라는 초로(草露)를 꼽았고, 그리고 두 번째로는 특이하게도 푸른 다리라는 이름의 청각(靑脚)을 언급했다. 이들은 전 중원 내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 유명한 두 기루(妓樓)였다.
단연코 웅장함과 화려함으로 따진다면, 하남의 검은 밤하늘을 붉게 물들인다는 초로를 제일미로 친다. 초로는 세 개의 특색 있는 원(園)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솔원, 매원, 난원 이라고 불리는 각각의 원은 또다시 그 하나가 30여개의 전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 전각에는 대여섯 명의 기녀와 시중을 드는 아이들이 배정이 되어 있었으니, 기녀들의 총 인원 수만 해도 육백여 명을 훌쩍 넘어섰고, 호위를 하는 장정들과 시중드는 식구들 까지 합한다면 도합 이천여 명을 선회하는, 마치 거대한 일개 세가(勢家)와 같은 규모였다.
초로의 모든 전각은 중앙부의 하나의 거대한 전각을 중심으로 원뿔의 형태로 세 방향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전각은 기루 안이라면, 어디에서나 올려다 볼 수 있도록, 웅장한 규모로 높이 우뚝 솟아 있었다. 바꾸어 생각하면 그 곳은 모든 전각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사령탑과 같은 곳이기도 했다.
가운데 버티고 서있는, 그 전각은 육층의 건물이었으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온갖 금은보화로 보다 더 화려하고 고급스럽게 치장되어 있었다. 육층의 맨 꼭대기 방은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오층에서 더 이상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역시 전각의 주인만이 드나드는 비밀 입구가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화려함의 극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꼭대기 층의 그 방안에는, 지금 세 명의 남녀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색색의 하늘거리는 비단들이 겹겹이 휘장으로 둘러져 있는 중앙의 보료 앞에, 한 남자가 코를 땅에 박은 자세로 엎드려 있었고, 그 옆에는 늙은 여인 하나가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휘장 안에 가려진 이는 그저 음성만이 간간히 들릴 뿐이다. 간혹 사내의 말에 대답하거나 간단히 질문하는 목소리로 보건대, 중년 여인정도로 짐작이 되었다.
“그래, 해루라는 아이가 결국은..해를 입고 돌아왔다는 말이냐?”
“예..예, 부인. 송구스럽게도 그리되었습니다.”
“그래? 하북팽가 쪽의 움직임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나 아직 포착된 것은 없습니다. 서 너시진 전의 일이니 아직 모를 가능성이 클 것이라 사료 됩니다.”
“흐음..그래.”
바닥에 엎드려 있는 사내는 어느새 단정히 옷을 갈아입은 왕국주였다. 휘장 안에서는 별다른 큰 반응이 없었다. 그때 옆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던 늙은 여인이 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왕국주! 그 정도의 일이라면 내일 날이 밝은 후 부인을 뵈어도 될 일을, 어찌하여 이리 경망하신 게요!”
“아.. 금루국주.. 실은 그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오라...!”
흰 백의를 걸치고 있는 늙은 여인은, 아직도 미색을 얼굴에 간직하고 있는 미부였다. 위로 올라간 눈 꼬리가 그녀의 고집스러움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고작 그런 일로 부인의 밤 시간을 방해한 왕국주를 탓하고 있는 참이다. 그때 휘장 안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금루국주! 그만해 두게. 내 보기엔 왕국주가 나름의 사정의 있는 것 같은데...?”
“예..예! 부인. 이놈 왕수훈, 아직도 가슴이 떨려, 입을 열기도 황송스럽습니다..”
“흐음.......!”
그때부터 왕국주는 휘장안의 여인에게 그가 겪었던 일을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 한영이 해루를 업고 도착한 순간부터, 악귀가 요동치던 이야기 그리고 그것을 흰 나비 무리로 제압한 아름다운 도령, 마지막으로 신들린 듯 기적을 일으켜 해루를 치료한 노파에 이르기 까지.
“방금, 방금 의선 작약이라고 했느냐!”
“........!”
휘장안의 여인이 벌떡 일어나 보료를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동작에 색색의 휘장들이 나른하게 나풀거렸다.
화려한 봉황이 수놓인 금빛 장삼을 걸치고 있는 그녀는 40대 중반으로 보였고, 인상 좋은 얼굴의 중년 여인이었다. 하지만 몹시 놀란 듯 지금은 고운 아미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백의를 걸친 늙은 여인도 몹시 놀라 왕국주를 다그치고 있었다.
“무엇이요? 왕국주가 보기에 정녕 틀림이 없었소?”
“네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의술이 아니었지요! 또한 그들이 서로를 그렇게 존칭했으니, 틀림없을 겁니다.”
“같은 이름 일수도 있는 것이고...!”
“아니오, 금루국주! 내 어찌 화란부인 앞에서 거짓을 고할 수 있겠소!
사실을 파악하자마자 이리로 급히 달려오는 길입니다. 부인!“
단호하게 금루국주의 말을 자른 그는, 다시 화란부인 발 앞에 납작 엎드렸다.
잠시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은 중년부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을 가다듬고, 예의 그 온화한 얼굴로 왕국주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나, 왕국주?”
“지금 아마도 누루(淚淚)에 있는 한 전각에 머무르고 있을 것입니다.”
“.......누루?”
화란부인이라고 존칭되는 중년부인이 백의를 입은 여인에게 의문의 시선을 보냈다. 중년부인의 시선을 받은 노부인은 화들짝 놀라며 급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곳 초로에는 수장격인 화란 부인을 아래로 세 명의 국주가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의 원(園)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정보와 재정 그리고 잡다한 실무 운영을 책임지는 자가 여기 솔원의 대표 왕국주였고, 그리고 기녀들의 교육과 관리를 책임지는 이가, 백의를 입은 노부인인 금루국주였다. 그녀는 난원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리고 매원을 책임지는 이는 서국주로 호위와 치안 등 무위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해루라는 아이가 누루에 머무르고 있지요, 화란부인.”
“어찌하여, 아직 소속된 원에 있어야 할 기녀가 누루에 머무르고 있느냐?”
“저번에...아이를 낳아도 좋다는 화란부인의 허락을 얻은 후로, 누루에서 몸이 성치 못한 퇴기들을 거두고 있었다 들었습니다.”
“그래... 그랬었구나..”
어느 곳이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따라오는 법.
초로라는 거대한 홍등은 그만큼 어두운 그림자도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기루의 각 원의 뒤편 음지부분에는, 나이가 들은 퇴기나 혹은 병을 얻은 이, 아니면 간혹 험한 꼴을 당하고 미쳐 버린 기녀 등 사연 많은 이들이 생을 연명하는 곳이 있었다. 화란부인은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팔 안으로 보듬어서 생을 마감 할 때까지 보살펴 주었다.
화려한 불빛이 드리우는 그림자는, 늘 슬픔이 마를 날 없이, 온갖 사연으로 가득했다. 기녀들은 그곳을 눈물에 잠긴 곳이라 하여 누루(淚淚)라고 불렀다.
“하지만 저들이 신분을 밝히고자 하지 않는다면, 억지로 들추어 낼 필요도 없겠지! 왕국주!”
“네- 부인!”
“왕국주는 일단 그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해 주도록 하게. 해루라는 아이도 돌보아 주도록 하고... 그리고 더욱 유심히 하북팽가를 주시하도록 하게. 그리고 금루국주-!”
“예에. 말씀하십시오.”
“분명히 아귀라고 하였지? 흐음..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어.. 일이... 다른 기녀들을 단속해봐. 분명히 무엇이 있어. 그리고 나머지 아이들 입단속도 시키도록 하고.”
“그만들 물러가서 맡은 일을 하게”
“네. 부인!”
“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허리를 숙인채로 뒷걸음질치며 벽 쪽으로 멀어져갔다. 놀랍게도 그냥 그림이 장식된 벽처럼 보였던 곳은 사람이 통과할 수 있는 비밀 통로였다. 벽 뒤로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화란부인은 시선을 돌려 몇 걸음 걸어가 큰 창 앞에 섰다. 창문 밖으로는 화려한 기루의 장관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그러나 걱정이 한 아름 담긴 눈망울이 응시하는 곳은 그 너머 어둠속이었다.
‘누루... 그곳에 그들이 있다는 말이지.... ’
그때였다.
중년부인 혼자 밖을 보고 있던, 아무도 없는 방안에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제가 살펴보겠습니다!”
“......그리 하겠니, 묵운?”
스스스스-
갑자기 천장에서부터 사람의 형체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더니, 급기야 바닥으로 쑤욱 떨어져 내렸다. 아무런 소리도 아무런 기척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두 하얀 눈자위만 남기고, 전신을 검은색 천으로 두르고 있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아이를 구한 게야. 아무런 대가없이.”
“........”
“.... 모르겠구나.”
“근심 마십시오. 낱낱이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일단은 며칠 두고 본 후에 결정하도록 하지.”
“존명!”
한마디 말을 남긴 사내는 다시금 어둠속으로 스르르 사라져 갔다. 그런 사내에게 익숙한 듯, 화란부인은 다시금 돌아서서 무심히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금빛 장삼에 화려하게 수놓인 봉황이 시원한 가을바람에 펄럭이며, 밤하늘로 용솟음 쳐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자아! 해루야 밥 먹자. 먹어야 낫지... 그래야 약도 먹고! 먹어 봐, 아-해!”
“......”
“이것 봐. 노모가 너 좋아하는 새우 죽을 쑤어 주셨잖니... 먹자!”
“......”
“먹어봐.. 먹어야 살지.. 먹자~ 응?”
“......”
아귀를 제압하고 무사히 치료를 마친 그 다음날 아침, 해루는 바로 의식이 돌아왔다.
하지만 단지 의식이 돌아 왔을 뿐, 살아있는 송장과 다름없었다. 배를 가르고 꿰맨 상처가 아플 텐데도 아프다는 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다.
며칠째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한 마디 말문도 열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앉아서 먼 하늘만을 응시할 뿐. 그 모습이 안타까운 홍루는 해루의 곁에 딱 달라붙어 그녀에게 죽이라도 한 술 떠먹이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불쌍한 것... 마음을 닫아 버렸어... 쯧쯧..말을 잃은 게다.”
해루를 지켜보던 작약이 할 수 있는 말도 그것이 다였다. 마음의 병을 고치는 일은 작약의 소관 밖의 일이니, 의선 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해루는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며 생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죽음을 앞둔 이처럼 검은 버섯을 피우고 있었다.
“먹어! 먹어!! 이 바보야! 억지로 라도 먹일 테다!”
“......”
홍루는 죽을 한 숟갈 떠서는 한손으로 해루의 턱을 잡고, 다른 손으로 억지로 숟가락을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멍하게 정신을 놓은 여인은 아무런 저항 없이 입을 헤 벌린 채로 먼 산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넣었던 죽은 고스란히 침과 함께 입 밖으로 도로 흘러 내렸다. 이를 바라보던 홍루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해루를 부여잡고 큰 소리로 오열했다.
“정말 .. 정말 죽으려고 그러는 거야? 그래? 죽을래? 으흐흑!”
“......”
“흐흑 그래..그래... 같이 죽자! 같이 죽어!! 으흐흐흑...”
쨍그렁!
죽 그릇을 마당에 엎어 버린 홍루는, 서럽게 울부짖으며 멍하니 있는 해루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 되어버렸다. 며칠간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어오른 홍루의 얼굴도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홍루에게 멱살이 잡힌 채 이리저리 흔들리는 해루의 표정은 별반 변화가 없었다. 그저 멍한 얼굴로 대답 없을 뿐이다. 흘러내린 침과 죽으로 그녀의 앞섬이 온통 엉망이었다. 순간 홍루의 눈에 불꽃이 번쩍 튀었다.
철썩-
뺨을 갈기는 요란한 소리에, 물가에서 해루의 피 묻은 빨래를 하던 노모가 깜짝 놀라 뛰어왔다. 툇마루에 앉아 있던 한영도 놀라 한 걸음에 달려왔다. 그녀의 곁에는 걱정스런 얼굴의 도화도 함께 있었다.
해루는 마당에 쓰러져있었다. 그녀의 온통 상처뿐인 얼굴에 새로운 상처가 하나 더 늘어나 입가에 벌건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있는 힘껏 뺨을 때린 홍루도 옆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누워있는 시체 같은 해루의 온몸을 부여잡고 홍루가 바락 바락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너... 너 이럴 수 있어? 흐흑!”
“......”
“다른 사람은 몰라도...나는... 나는.. 알아봐야지! 내 말에는 대답해야지... 살면서.. 힘들어 정신을 놓아버리더라도 내가 부르면 ... 내 목소리는 알아들어야지..... 으흐흑. 한 날 같이 죽자고 했지? 네가 이러면 나는 어쩌니... 나는 이제 어찌 사니...응? 대답해봐! 대답해봐!”
“......”
“자! 이 피를 봐.. 아프지? 아프잖아.. 아프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제발......
제발, 해루야! 으흐흑!”
“......”
절절한 홍루의 애원에 듣는 이들의 눈에 다들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젖은 손으로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는 노모가, 홍루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해루는 이미 한영이 번쩍 들어 올려 다시 작약이 손수 꾸며 놓은 안락의자와 같은 곳에 앉힌 후다. 도화가 흰 광목천으로 해루의 앞섬을 닦아 주고 있었다.
“홍루야...그만 해라.. 아픈 아이잖아. 꿰맨 상처가 터질라....이 녀석아..그만 해, 흑.”
“아아... 노모..흑흑 이 아이는 이대로 두면 죽어요.. 죽는 다구요! 귀를 닫고 눈을 닫고 마음을 닫아 버렸어요.. 흑흑”
“그래그래 진정해라.. 네 정성이면 조금 있으면 괜찮아 질게야.”
“아니요..아니에요.. 으흐흑 저 불쌍한 것을 어찌하면 좋아요..흑흑흑”
“됐다, 됐다... 해루는 쉬게 두고, 너도 어제 밤도 또 못 잔 게지? 너부터 좀 쉬어야겠다.
이리 따라와!”
다시 한번 멍한 해루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자신이 그녀의 입가에 낸 상처를 본 홍루는 서럽게 흐느꼈다.
“으흐흑……. 아아! 어떡해……. 미안해, 미안해…….흐흑!”
“이리 오너라.. 괜찮아..괜찮아...”
오열하는 홍루를 다독이며 노모가 그녀를 데리고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이 해루의 눈동자 속에 담겼다. 하지만 그녀는 별 반응이 없이 그저 멍할 뿐이었다.
안타까운 눈으로 도화가 옆에서 해루를 올려다보았다. 맞은편에는 한영이 서있었다.
그녀의 눈시울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도화는 손을 뻗어 해루의 비쩍 마른 손을 꼭 쥐었다.
맞잡은 두 사람의 손에서 잠시지만 번쩍 하고 빛 무리가 스쳐 지나갔다.
「누나!」
「누나-아.....!」
잠시지만, 처음으로 해루의 눈동자가 아래로 또르르 굴러내려 반응을 보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암흑 속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던 해루의 영혼은, 어디선가 자신을 안타깝게 부르는 목소리에 슬며시 눈을 떴다.
「누나!」
「너는...누구지....?」
사방을 더듬던 해루의 눈동자는 이제 온전히 도화에게로 고정되어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한영은, 말없이 서로를 주시하고 있는 도화와 해루를 보고는 흠칫 놀랐다.
「누나... 마음을 열어요!」
「나는 마음이 없어.」
「그리고 눈을 그리고 귀를 열어요.」
「나는 눈과 귀가 없단다, 아이야.」
「홍루 누나가...매일 울어요. 마음이 아파요.」
홍루라는 이름이 그녀의 의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자, 앉아 있던 해루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무의식의 세계에서 갇혀있던 그녀의 영혼은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영화 같은 영상이 해루의 의식세계로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그 영상은 도화의 마음속으로도 똑같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도화는 고개를 돌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과 해루를 번갈아 보고 있는 한영을 바라보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을 뻗어 가만히 한영의 손도 쥐었다. 그 순간! 밀려오는 해일과 같은 영상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덮쳐들었다.
한영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내질렀다.
「헉!」
「쉿! 누나 조용히... 지금 해루누나의 영혼이 깨어나고 있어요.」
「머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몰라요.. 마음을 열면, 이상하게 나는 마음을 열면, 그 영혼과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아아..! 전음 같은 건가? 근데, 너 자신뿐만이 아니라, 나까지 매개가 되는 거야?」
「모르겠어요. 왠지 될 것 같아서 해봤는데 .....헤헤 되는 구나.」
「머야? 내가 못살아. 암튼... 헉! 이 폭포수같이 몰아치는 영상들은 머지?」
「해루 누나의 기억들인 것 같아요.」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그들을 훑고 지나갔다. 어린 시절부터 기루에 팔려오기 까지, 그리고 기녀가 된 후 언니 홍루를 만난 부분까지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리고 그 후의 대부분의 기억들은 홍루와 함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최근의 기억인 듯 했다. 빛바랜 사진과 같은 단편적인 앞의 기억들에 비해, 비교적 선명했고, 활동사진처럼 이어지는 영상이었다. 해루는 키가 큰 미남자인 듯한 이와 사랑을 나누며 미래를 속삭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남자의 얼굴은, 검은 가면 같은 안개에 가려져 있어 알아볼 수 없었다. 사랑을 하는 그녀는 빼어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의 장면은, 임신을 안 후 기녀들의 율법에 따라 낙태를 시키려 하는 노모와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해루가 보였다. 그녀의 노력은 두 사람이 보기에도, 진심으로 대단했다. 그리고 보아하니 결국은 허락을 얻어내어 아이를 낳기로 한 것 같아 보였다. 잠시 끈긴 뒤 다시 이어지는 장면은 해루가 아이의 태동을 느끼고, 홍루에게 배를 만져줘 보며,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손을 맞잡고 낄낄거리는 장면이었다. 그녀들은 소중하게 해루의 배를 감싸 안고 있었다.
‘해루야! 내가 이모가 되는 거네! 나 너무 설레어서 잠도 안 오는 거 있지?’
‘으-응! 언니, 언니... ! 내가 엄...엄마가 되는 거래... 아아- 아가..내 아가!’
그리고 그 뒤의 장면은 한영과 도화도 잘 알고 있듯이, 낯선 남자들에게 끌려가서 잔인하게 유린당하는 그녀였다. 의자에 앉아 있던 현실의 해루도, 기억을 떠 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운지, 계속 몸을 비틀어 대며 손으로 허벅지를 마구 긁어 대듯 손가락을 꿈지럭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비명을 지르는 듯이, 소리도 나오지 않는 목으로 다급하게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당시 한영은, 일이 끝난 뒤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그녀만 보고도 분노 했었는데, 당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눈앞을 스쳐 지나가자 참을 수 없는 화로 인해 얼굴이 온통 붉게 달아올랐다. 도화를 잡은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꽉 들어갔다. 그리곤 깜짝 놀라 손에 힘을 풀며, 도화를 내려다보았다. 녀석은 그저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굵은 눈물방울만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한영은 진심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관통하는 살심(殺心)으로 인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저런! 쳐 죽일 놈!」
「아아....누나....!」
그녀의 얼굴을 덮은 흰 광목천!
거기에 사뿐히 내려 앉아 있는 자수 글귀. 해루의 이름 마지막자- 루(淚).
해루와 아이의 죽음을 사주한 자는 분명히 앞에서 본, 검은 안개에 가려져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던, 바로 그 남자가 틀림없었다.
그것은 인간의 탈을 쓰고는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짓 이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엄청난 동요! 폭풍처럼 몰려오는 집채만 한 의식의 파도에 휩쓸린 도화와 한영은, 그만 그녀의 영혼 밖으로 쑤욱 밀려나 버렸다.
깜짝 놀란 도화도 퍽! 소리와 함께 한영과 함께 일장정도 날아가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다행히 넘어지면서 한영이 무의식적으로 아이를 감싸고 안아, 둘 다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도화를 일으키며 같이 일어선 한영은 이를 뿌드득 갈았다. 꽉 모아 쥔 두 주먹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빨간 핏물이 베이고 있었다.
“내... 내 반드시, 그자를 찾아내어,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그때였다.
“우.. 우우우...”
나흘 동안 시체처럼 멍하니 있던 해루의 얼굴이 부르르 떨리더니, 입술을 벙긋거리며 소리를 내지르려 하고 있었다. 한 손을 들어 배를 감싸 안으려 하는 듯 했으나, 기운이 없는 팔은 부들부들 떨리다가 이내 풀썩! 하고 다시 무릎위로 떨어져 내렸다. 놀란 한영이 다가가 해루의 자세를 고쳐주며 소리쳤다.
“아......! 깨어났구나! 그만해.. 아직 기운이 없어서 그래!”
“누나! 홍루누나!!! 해루누나가 깨어났어요!”
도화는 깨어난 해루를 보고는, 눈물을 흘리고 있던 얼굴로 뒤돌아보며, 전각을 향해 너무나도 반갑게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듣고 놀란 홍루와 노모가 달려왔다. 맨발로 뛰쳐나온 홍루는 해루의 두 얼굴을 감싸 안으며, 미친 듯이 제 얼굴에 비벼댔다.
“우어어어어....아아..기...”
“아아...! 해루야....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
“우어어어 어언..니... 없...어. 아아..기”
“으흐흑 그래그래...알고 있어. 알고 있어.. 노모 이를 어찌해요.. 불쌍해서 어찌해요..흐흑!”
“어언..니... 없...어. 내 ...아아..기”
“아이고...이 불쌍한 년아.. 어찌할꼬..어찌할꼬...으흐흑”
오랜 시간 혀의 근육이 굳은 듯 해루는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까칠하게 목소리도 갈라져 나왔다. 의식을 찾은 순간 맨 먼저 그녀는 텅 비어버린 배를 안아 쥐며 애타게 아이를 찾고 있었다.
너무 안타까운 상황에 한영도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그만 뒤로 돌아 서 버렸다. 한영은 아까의 영상의 충격에서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톤 한 가지 생각으로 집중되었다.
‘찾아야 해! 반드시 죽인다!’
절규하는 홍루의 목소리와 노모의 서러운 울음이 전각의 뜰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눈여겨 지켜보는 두개의 검은 눈동자가 큰 나무에 박힌 채로 조용히 깜박거리고 있었다.
-------------------------------------------------------------------------------------- 이제 연휴입니다. 어찌 된 일인지 추석 기분이 나는걸요(^_^)ㆀ풉!
한 주 마무리 다들 잘 하시구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환절기 감기 조심하세요.
여러분의 소중한 리플들에 얼마나 기운이 나는 지 모르시지요? 정말로 감사하고 있답니다.
주말동안에는 그 동안 밀린 일들을 다 해치워야 겠어요.
울 님들도 알찬 계획을 세우셔서 멋진 연휴 보내시길 바랍니다.
파안의 가호가 언제나 함께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