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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사랑 (16장/ 손을 내민 허수아비.. 두번째) <실극화>

추림의 풍 |2005.10.06 19:17
조회 174 |추천 0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가는 혼자남아 집을 보다가~

파도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

 

술에 취한 유미는 상당히 무거웠지만 그리 힘들거나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얼어붙은 밤길을 조심스럽게 걸으며 추림은 자주 흥얼거리는 동요를 나직히 불렀다.

 

꿈에 이와같은 경험을 한적이 있는것 같은 추림은 이상한 감동이 북바쳐 올라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유미를 편하게 쉬게 해 주고 싶었다. 늘 지친듯한 모습과 외로워보이는 기운은 그녀를 가

만히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유미는 왜 자신에게 항상 불안감을 주는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자주 몰두하곤 했다.

 

휘이잉~ 으스스

 

바람이 추림의 뒷편을 세차게 두드리고 지나가자 유미가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걷다가 잠시 몸을 틀어 자리에 멈추어 바람이 잠잠해 지기를 기다렸다.

유미의 몸이 아래로 쏠리자 추림은 허리를 숙여 그녀를 조심스레 편한 위치로 옮겨 주었다.

 

싱그런 초원에서 맡아지는 풀냄새 같은 스킨향이 추림의 코속을 자극했다.

그 향이 어쩐지 유미와 어울린다 생각하며 추림은 다시 길을 잡아 걸었다.

유미의 가슴이 등에 강하게 압착되어 그 풍만한 느낌과 엉덩이의 탄력 넘치는 둔중함이

기분좋게 느껴졌다.

 

길은 매우 미끄럽고 녹다가 얼어붙은 눈으로 인해 상당히 거칠었다.

도로를 무단으로 건너고 잠시 힘에 부쳐 나무아래서 쪽바람을 맞으며 쉬었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기분이 매우 좋았다. 아무것도 아닌것 같지만 이 순간 만큼은 추림에게 세상을 다 가진것

같은 풍요로운 느낌이었다.

그녀를 자신이 좋아한다 안한다는 생각밖의 일이였다. 마음이 움직이는 정직함을 올곧게

받아들이니 그렇게 기분이 넉넉할수가 없었다.

 

외로운 날들이 참 많이도 있었다.

소위 말하는 양아치들과 서울 생활하면서 필연으로 얽혀가며 참 많이도 싸웠고 쫒기기도

했다. 무슨 구역이 그리도 많은지 작은것 하나를 해도 이눈치 저눈치 봐야했던 초창기 서울

생활은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의 연속이었다.

 

친구들의 삿된 장난질로 인해 고등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던 그 시기에 정말 견디기 어려운

시련의 시간을 보내야했다.

 

젖은 눈으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어머니와 실망 가득한 모습으로 자책하시던 아

버지를 차마 설득할 자신이 없어 몰래 길을 나서야 했던 때, 그토록이나 따랐던 세 남동생

들의 투정이 못내 그리워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어 가며 자신을 독려하고 책찍질해야 했

던 불멸의 밤들... 잃어버린 유년의 아쉬움을 감당할 길이 없어 술로 지내야 했던 암울함의

텅빈 날들... 겨우 삼년 남짓... 마치 수십년을 살았던 것 같았다.

 

친구가 조직폭력에 몸담고 힘겨워하던 당시가 떠올랐다.

어느날 피투성이가 되어 피신해온 그를 구원하기 위해 다시 자리를 이탈해야 했고 승냥이

처럼 으르렁 거리며 어두운 뒤안길을 헤쳐야 했었다.

 

두렵고 여명이 끝없이 기다려지던 사개월간의 혼돈을 지내야 했다.

친구를 어둠에서 끌어내는데는 성공했지만 결국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한 놈은 어느날 의

문에 쌓인 죽음만을 남겼다.

 

'그녀... 잘 지내고 있을까? 오래되었구나...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

 

죽은 친구가 남긴 흔적! 정명숙. 두달이 다 되어가도록 연락고 못하고 있음을 다시 인식한

추림은 그녀에게 찾아갈 것을 다짐했다. 아마 지금즘 젖먹이 아이도 많이 자랐을 것이다.

 

자신이 원했던 길은 아주 좁고 일직선적인 길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넓고 거친 길을 걸어

온듯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많고 험할텐데 추림은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이 가까워오자 추림은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그녀를 깨워 집으로 돌려 보내야 하는지, 여관으로 데리고 가야하는게 옳은지, 그도 아니

면 집에서 편히 쉬게 해주어야 하는지... 이런 비슷한 경우는 있었지만 그녀는 추림에게 특

별한 감정을 이입시키는 존재였다.

 

자신의 작은 행동 하나가 자칫 오해와 삿된 모습으로 비춰질까 걱정이 앞선 것이다.

결국 추림은 그녀를 일단 집으로 들이기로 했다.

어깨가 뻐근해지고 허리가 욱신거렸다. 빌라의 현관을 열고 손을 더듬어 익숙한 위치에서

전등 스위치를 켰다.

 

비앙카향의 방향제 향기가 부드럽게 흐르는 방안으로 유미를 업고 들어가 발로 이불을 펼

쳤다.

방안은 따듯했고 웃풍이나 건조함은 없었다. 작지만 살뜰한 추림의 주거공간.

 

유미를 이불위에 조심스럽게 누이고 코트와 목도리를 벗겨냈다.

한숨을 내쉬며 불편한 몸을 풀어 잛게 스트레칭을 했다. 머리가 멍하고 띵한것이 온도의

변화에 적응하는 모양이었다.

 

문득 추림은 유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흘러내린 머리결이 얼굴을 뒤덥고 있어, 그것을 정

리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게 도톰한 입술을 벌리고 잠든 그녀의 모습이 귀엽고

다정하게 느껴졌다.  

 

양말을 벗겨내었다. 단단하게 굳은 발의 근육들을 부드럽게 주무르자 곧 이완되는 증상이

느껴져 슬며시 발을 어루만지고 물러났다.

 

그녀에게 정말 미안했다. 선주가 억지를 부려 저녁만 먹고 헤어지자고 않했다면 그녀가

도착한 여섯시 무렵에 왔을 것이다.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밖에서 한시간을 넘게

떨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저려왔다.

 

"잘자요 유미씨... 이렇게 가끔 볼 수 있었으면 한다면 제 욕심이겠죠."

 

불을 끄고 살며시 밖으로 나가며 문을 절반쯤 닫아 주었다. 갇혔다는 느낌이 들면 당황할

것이다.

 

대충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주방 거실의 벽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앉아있자 하루의 일이

주마등처럼 순식간에 지나쳤다.

 

자야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이상하게 작은 긴장에 경직되었다.

티비를 틀어 소리를 줄이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살며시 눈을 뜨자 주방 거실에서 흘러드는 빛에 방안의 광경이 흔들리다가 차츰 또렷해 졌

다. 푸른 커튼이 쳐진 창과 작은 사단 서랍장, 입식형 일자모양의 옷걸이가 전부인 방은 아

늑했고 따듯했다. 머리가 조금 아파와 슬그머니 이불을 걷어 손으로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그가 흥얼거린 노래도 들었고 가끔 내뱉은 독백도 들었다. 추웠지만 그의 등은 넓고 따듯

했다. 오는내내 자신이 어찌 될까봐 조심하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머리속과 마음에 깊게

새겨 넣었다. 잠이 들었다가 깨고를 반복하며 다시 설핏 잠에서 깨어날때 그가 발을 주물러

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가끔 볼 수 있었으면 한다면 제 욕심이겠죠... 그 소리가 끝없이 머릿속에

서 공명되어 울려 퍼졌다. 욕심이겠죠... 욕심이겠죠... 욕심이겠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처음 느껴보는 애절한 감정이 가슴을 헤집었다.

차라리 자신을 이렇게 재우지 말지... 자는척 하지만 잠들어 있는 자신에게 짧게 입맞춤 정

도는 해주고 가지... 그는 극도로 조심했고 자재하고 있었다. 그것이 못내 서운하고 고마웠

으며 마음에 파랑을 일으켰다.

 

콧속으로 흡입되는 집안의 향기가 너무 좋았다. 그는 예상되로 깔끔하고 깨끗한것을 좋아

하는 남자인것 같았다. 그 흔한 담배 냄새나 곰팡이의 탁한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등에 업혀오는 내내 충만한 뿌듯함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술에 취해 그렇게 잠들수도

있다는 자신에게 놀라워하면서도 그것이 믿음에서 비롯되거나 그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자

신의 본능이라 해석했다.

 

단 한번도 이런적이 없었다. 그보다 더 많은 양의 술을 마셔도 능히 견뎠고 흐터러진 모습

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은 이런 지금의 상황을 바랬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밖에서 마감뉴스를 보는지 몇번 들어본 앵커의 설명이 나직하게 들려왔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그가 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몰입했다.

시간이 지루하고 느리게 흘렀다. 어느순간 애국가 소리가 들리고 곧 띠이하는 고저음의 방

송 종료를 알리는 신호음이 들려왔다.

 

잠시 더 기다리자 유미는 추림이 잠들어 있음을 확신했다.

몸을 소리없이 일으켜 앉았다. 반쯤 열려진 문을 응시하며 망설이던 그녀는 다시 몸을 일

으켜 조용히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당기자 삐익하고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유미를 추춤

거리게  만들었다.

 

작고 아담한 주방겸 거실에서 추림은 티비를 켠 채, 담요를 덥고 모로누워 잠들어 있었다.

두병의 맥주는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고 그의 머리맡에는 일기장으로 보이는 노트 한권이

놓여져 있었다.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여니 남자답지 않게 살림을 잘 하고 있는지 냉장고는 대부분 반찬과

여러가지 식품들로 채워져 있었다.

술도 여러병 보였다. 물병을 꺼내 두잔을 연거푸 마시자 갈증이 가시는 것 같았다.

 

추림에게 다가가 그의 곁에 조용히 앉아 잠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 표정이 힘들고 무척이나 피곤하게 보였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그의 한쪽 얼굴을 가

려 잘 보이지 않아 유미는 과감하게 그 머리결을 살짝 쓸어 올렸다.

 

1993년 1월...

날이 매우차다.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마음속에선 온통 무언가들이 아우성치며 날 강요하려 드는것 같다.

조금 쓸쓸하고 허무한 밤이다. 아마 지금쯤 그녀도 자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묻지 못해 너무 아쉽고 후회스럽다. 그녀가 싫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는데 차라리 물어버리고 바보가 될걸 그랬다.

요즘 지쳐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언젠가 내 곁에 스스럼없이 찾아와 날 웃게 만들어 줄

이가 한명쯤은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내일이 가만히 거부감이 든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 단 한번, 내 의지가 하고싶은 것을 해

보고 싶다. 남들이 모르고 금새 잊어버릴수 있는 그런 일들을 몰래 해보고싶다.

내일은 안산에 다녀와야 한다. 무슨 산업박람회가 열리는데 그곳을 과장이 같이 가자고 했

다. 조금 더 일찍 출근해야 하는데 잠이 오지않는다.

그녀에게 전화가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끝내 연락이없다. 조금 아쉽고 서운하지만 내

일쯤이면 어쩌면 올지도 모른다.

 

1993년 1월...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출근하다가 힘없이 걷는 할머니가 보여 모셔다 드리느라 지각을 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노인정을 찾아 가신다고... 거기까지 모셔다 드렸다가 차를 마시고 가라해서 사십분

이나 늦어버렸다. 잔소리꾼이 하루종일 쫒아다니며 그일을 가지고 궁시렁 거렸다.

성규의 소식이 들려왔다. 명화씨가 회사로 전화해서 우울한 목소리로 말하다가 울어서

오후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휴일에 찾아간다고 했는데...

초저녁에 수연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물을까 하다가 끝내 묻지 못했다.

바보... 멍청한... 뭐가 그리 어렵다고!

솔직히 보고싶고 궁금하다.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고 있으면 좋겠다.

항상 쓸쓸하고 존재감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그녀... 부디 힘내고 밝게 살아갔으면 싶다. 

내 마음 절반을 떼어 줄 수 있다면 무척 좋을텐데... 오늘 하루도 이렇게 간다.

밖에서 무섭게 바람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바삐 걸어가는 소리에 가슴이 떨려온다.

 

1993년 1월...

하루동안 너무 바빴다.

성규에게 다녀오고 말썽꾸러기를 겨우 달래서 보내고...

유미씨를 우연히 만났다. 추위에 떨고 있는 그녀를 길에서 보고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바보같은... 역시 날 항상 걱정하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드는 여자임을 다시

확인했다.

기분은 좋았다. 그녀가 그토록 그립고 보고싶었는데... 어쩌면 그녀와 난 어긋난 

인연이 아니가 싶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내기를 했다. 난 이길 자신이 있다. 언제고 그녀를 기다리고 싶고 기꺼이

기다려 주고 싶다. 그녀는 알기나 할까? 내가 그녀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것이

누군인줄...? 말하고 싶은데... 조금 망설여 진다... 추림아 그냥 확 말해 버리자...

그녀를 업고 오는내내 가슴은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했고 매서운 추위마저 날 축복

하는듯했다.

그녀는 내게 인형이었으면 싶다. 살아있는 나만의 인형!

자는 모습이 귀엽고 앙증맞게 보였다. 술에 취해 잠든 그녀... 정말 아파하거나 슬픈

일이 없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가끔 아주 까끔... 아무런 사심없이 그녀를 보았으면 싶은데... 추림아 한번 물어볼까?

그래도 되느냐고... 히히... 편히 잘자요 유미씨...!

내일...이 안... 왔으면 싶다. 그녀와 헤어져야 할텐데... 이 겨울 그녀를 만나게 해주어서

무척 감사하게 생각한다... 93년 겨울아! 너는 아니? 내가 다시 태어난 느낌을 지니게

해주었음을... 피곤함이 몰려..든..다... 잘자요... 잘자...

 

추림의 일기장을 본의 아니게 보게 된 유미의 시선이 아련한 빛을 담았다.

그의 일기장에 온통 자신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음을 확인한 유미는 가슴 한켠이 쩌르르

하고 저려왔다.

 

마지막 일기장은 오늘것이고 끝맞추지 못한 흔적이 남아있는것이 쓰다가 잠든듯 보였다.

이 남자도 이렇게 자신을 생각하고 그리워했다고 생각하니 기쁨보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

었다. 자신은 이 남자보다 자유로웠지만 인내심이 부족했고 덜 순수한 것 같았다.

이렇게 자신을 좋아하면서도 자신이 원하지 않을까 고뇌한 그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이 남자에게 자신이 어울릴까?

정말 순수하고 담백한 추림이다. 솔직하면서도 인내심이 강하고... 만약 서로 사랑한다면

자신은 이 남자에게 줄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처럼 강한 인내도 없었고 포용도 없었다.

그가 열심히 앞날을 위해 살고 친구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때 자신은 스스로의

감정과 세상에 갇힌 채 터무니없는 시간을 보냈다.

 

자신은 이 남자에게 부족할지도 모르는 여자다.

하지만... 이 남자라면 모든것을 감싸줄 것 같았다. 사랑해주고 보듬어주고 상처를 가만히

쓰담아 주면서 웃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추림을 가만히 응시하던 유미는 살며시 주림이 곁에 누웠다.

그의 향취가 느껴지며 정말 남자라는 느낌이 강하게 밀려 들었다.

얼굴을 옆으로 돌려 깊게 잠든 그의 얼굴을 바로 코 앞에서 마주보았다.

 

두툼한 그의 입술은 매마른 채 다물어져 있었고 숨을 규칙적으로 내뱉는 소리가 편안한 음

악의 선율처럼 들려왔다.

얼굴을 가까이 하고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입맞춤했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좋았다. 느낌도 감흥도 모든것이 좋았다. 어떤 느낌보다는 그의 자체가 좋았고 자신도 느껴

보지 못한 이 순수한 정체성이 좋았다.

 

추림이 뒤척이면서 팔을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유미에게 팔을 두르게 되자 달콤한 웃음을

지은 그녀가 조금 움직여 추림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추림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심동맥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커다랗게 들려왔다.

 

유미의 손이 추림의 완만한 턱선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큰 얼굴이 아니고 잘생긴 편인 그의 외모탓인지 몰라도 남

자인 그가 여자인 유미에게 아이처럼 귀엽게 느껴졌다.

 

"추림아... 나 너 사랑해도 되니? 나 너 사랑하나봐. 어떻게하니... 힘들어 질텐데!"

 

혼잣말로 추림에게 고백한 유미의 얼굴에 진한 서글픔이 베어 나왔다.

자신이 없었다. 그를 사랑하면서도 그의 사랑을 받아 줄 자신이 없었고 그의 순수한 마음

을 어지럽힐까 두려웠다. 긴 한숨이 흘러 나왔다.

 

추림의 손가락을 조심스레 매만지며 한참을 놀던 유미는 따듯하게 전해지는 그의 품에서

저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다.

 

그녀의 입가에 한 줄기 웃음이 매달리고 슬며시 감긴 눈에 눈물 한방울이 메달려 반짝거

렸다.

 

둘만의 세상에 갇혀 동상이몽을 꿈꾸는 추림과 유미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17장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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