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 집으로 들어온 추림은 유미에게 전화부터 걸기로했다.
며칠동안 통화를 하지 못하고 끙긍 거리다가 오늘 하루내내 일하면서 반드시 전하를 하리
라 다짐한것을 마음이 변하기전에 실행하려고 했다.
봄이 완연해져서 창문을 열어놓아도 그리 추운것을 느끼지 못했다.
담배를 입에문 추림은 전화기를 한참동안 노려 보다가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눌렀다.
한숨을 내쉰 추림은 조금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전화하거나 만나게 되면 늘 이런 긴장감이 들었는데 결코 싫지가 않았다.
한참을 울린 전화벨이 단절되고 누군가 받았다.
"여보세요?"
-네. 말씀하세요-
"전 이추림이라고 합니다. 혹시 유미씨랑 통화할수 있습니까?"
-아... 잠시만요.-
동생이다. 기다릴것도 없이 바로 유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예요. 추림씨.-
"유미씨? 다행이네요. 통화하지못하면 어쩌나 했는데 계셨네요."
기뻤다. 그렇게도 어긋나더니 오늘은 하루종일 바랬던 바램이 무난하게 이루어졌다.
"별일 없죠? 어디 아프거나 하거나 그렇지는 않고요?"
-네에. 잘 지내요. 추림씨는 어찌 지내시나요? 연락을 기다렸어요.-
유미의 목소리에 추림은 숨을 죽이며 싸하게 아파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 잘 지내요. 전화하려 했는데... 조금... 식사는 잘하고 계세요?"
-그럼요. 몸은 이제 괜찮죠? 상처가 흉하게 남을것 같던데 걱정이네요.-
"걱정은요? 추억거리로 만들어 버리지요 뭐."
-흐흣!-
유미에게 전화해 할 수 있는 것이 추림은 이것이 전부라 여겼다.
그저 일상적이거나 누구나가 하는 그런 진부한 말. 뭔가 특별하거나 달라야 했지만 그것
이 왜 그리 어려운지 힘들기만 했다.
답답했다. 마음속에선 어떤말을 하라고 계속 종용하고 있었지만 입밖으로 세어 나오지 않
았다.
강제로 쥐어 짜보려 해도 무언가에 가로막혀 결국은 강한 반발심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보고싶었다. 단 한번만 그녀를 보고싶었다. 많이도 바라지 않았다. 스쳐지나가듯 보기만
해도 좋을것 같았다. 그토록이나 그리운 얼굴인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안개속에 가리워진듯 흐릿하고 뿌연 잔상만 기억될 뿐이었다.
다시 봐야했다. 다시봐서 학인하고 기억해야했다.
"유미씨. 저기... 이번주에 약속있어요?"
-이번주에요?-
조금 망설인듯한 대답이다.
하지만 아직 대답이 나온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아무런 약속이 없길 기대했다.
-... 토요일날요? 아니면 일요일요?-
"아무때나요. 토요일이나 일요일 상관없는데... 그냥 만나서 식사나 하면 안될까 하고요."
-저기... 일요일은 안될거 같고... 토요일이 어떤가요. 오후에 제가 그리 가면요.-
유미의 대답에 추림은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쉽게 응낙해 올 줄 몰랐다. 물론 마음이 닺혀있어 힘들어 할 뿐이므로 부정하고 있
는 것은 아님을 알고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어려워지면 그 일과 연관된 모든것에 희망을
잃어버리거나 의기소침해 지기 때문에 작은 기대조차 하기 어려워 지기 마련이었다.
"그래요 그럼. 잘 지내시고 별일 없기를 바랄게요. 연락이 자주 되었으면 하는데 그럴지 모
르겠네요."
-자주 하도록 해 볼게요. 건강하시고요. 술 너무 많이 드시지 마세요. 몸이 많은 안좋으신
것 같던데 밥좀 꼬박꼬박 챙겨 드세요.-
"네 그러도록 하지요. 잘 지내요. 돌아오는 주에 볼 때까지 아무일 없기예요."
-네. 추림씨도요.-
그렇게 말하고 안동안 숨 죽인 채 서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침묵을 지키며 오분여가 흘러갔다. 할말이 있을 것이다.
듣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고 들려줄 말이 있을 것인데......
"유미씨 안녕히 주무세요."
-네. 잘자요 추림씨."
결국 아무런 것도 얻지 못했다.
서로의 작은 기대마저 얻지 못한 채 전화가 끊어졌다.
뚜뚜뚜......
추림은 전화 수화기를 든 채 한동안 멍하게 넋을 놓고 있었다.
허전했다. 커다란 것을 잃은듯 허무했고 마음이 텅 빈듯한 공허감이 느껴졌다.
"유미...씨... 사랑해요!"
그말을 하고 싶었다. 듣고도 싶었다.
사랑한다 말해주고 싶었고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가슴이 쓰라려왔다.
비칠거리며 냉장고로 다가간 추림은 소주병을 꺼내들고 이빨로 뚜껑을 따버리고 그대로
벌컥 거렸다.
쓰고 독한 액체가 목구명을 타고 위로 흘어 들어가니 화끈한 열기가 피어 올랐다.
"컥... 큭......!"
급하게 마셔 목에 걸린 소주를 도로 토해내며 추림은 바닥에 허리를 숙이고 몸을 떨었다.
"으흐흐흐......!"
신음을 흘리는 추림의 눈동자에 뿌연 습막이 차 올랐다.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둔 채 추림은 남은 소주를 억지로 다 비워버렸다.
떵그렁!
소주병을 바닥에 집어던지고 벽에 등을 기댄 채 몸을 웅크려 둥글게 말았다.
"힘들...어!"
얼굴을 팔 사이에 파묻은 추림의 입에서 우울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얼굴이 가리워진 그의 몸이 오래도록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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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약하게 비가 내렸다.
퇴근 시간이 되자 서둘러 회사를 빠져나간 추림은 회사의 입구에 서 있는 검은 외제 세단
을 바라보며 곧장 다가갔다.
추림이 세단 앞쪽 운전석으로 다가가 검게 썬텐된 창문을 두드렸다.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창문이 밑으로 열리고 잘생긴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제 끝난나 보군?"
"오래 기다렸습니까?"
사내에게 말을 던진 추림이 주위를 지나쳐 가는 회사와 근처 사원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
다. 퇴근 시간이 되자 수십명의 사람들이 앞 다투어 빠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가지. 어디가서 저녁이나 먹지. 그런데 안오나?"
"선주에게 연락하지 않았습니까?"
최진규의 얼굴에 시선을 둔 채 추림이 반대로 물었다.
고개를 가로저은 최진규가 추림에게 고개짓으로 타라고 일렀다.
"이근처를 몰라서 그러는데 괜찮은 곳이 있으면 그리로 가지?"
"어떻게 괜찮은지 알아야 겠군요?"
최진규를 부른것은 추림이었다.
어제 전화해서 오늘쯤 만나자고 했는데 그도 흔쾌히 응락해 온것이다.
"맛있어야겠지? 조용한것도 좋겠군."
운전을 하며 최진규가 추림을 힐긋 거렸다.
이제 그가 연장자 입장이 된 것이다. 추림의 입가에 고절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있지요. 음식은 맛있으면서 조용하고 색다른곳! 여기서 뉴턴 합시다!"
"......!"
"곧장 직진 다시 좌회전! 쭉 가다가 갈림길에서 다시 좌회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차를 끌고
올지 몰랐는데? 술한잔 안할 겁니까?"
"상관없지. 대리운전을 부르던가 차를 두고가도 돼고. 뭐 아무려면 어때?"
오분쯤 달리자 허름하고 낮은 건물들이 늘어선 좁은 도로에 들어섰다.
"여긴? 이상하군? 교도소인가?"
"왼쪽이 교도소 오른쪽이 구치소죠."
그랬다 지금 차가 달리고 있는 길은 영등포 교도소의 후면과 구치소의 정면쪽 사잇길이었
다. 분위기가 음울하고 조용해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톱!"
추림이 외친 낮은 목소리에 길가로 차를 세운 최진규가 당황스런 얼굴로 추림을 바라보았
다. 그가 원하는 장소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곳이 설마 목적지일까 하는 얼굴이었
다.
"내리죠? 조용하고 음식도 맛있으면서 특별한 곳에 왔으니 경험해보는것도 좋을테니까."
"설마 여기에 그런곳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 맞습니다."
그렇게 말한 추림이 문을 열고 내리자 어쩔수 없는지 최진규도 따라서 내렸다.
낮고 추레한 오래된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었는데 가장 높은 건물이 오층이었다.
저 멀리 고층 아파트가 삐쭉이 솟아 있는 정경도 들어 왔는데 대부분이 허름한 건물 투성
이었다.
추림이 곧장 걸어 한 건물앞으로 다가갔다.
최진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로 그를 따라 가니 작고 비좁은 창문이 난 한 음식점 앞이
었다.
때가 어느땐데 이런 고전적인 곳이 남아 있나했다.
<순천댁>
칠십년대에나 유행했던 간판이 패인트가 벗겨진 채 낮게 걸려있는 식당이었다.
"들어오시죠. 어쩔수 없을테니."
"여기......!"
할말을 잃은 최진규가 고개를 저으며 추림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다짜고짜 그렇게 말한 추림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최진규가 몸을 사렸다.
좁다. 열평이나 될까? 지저분하다. 청소나 단장과는 거리가 전혀 먼 곳이다.
"아이구! 우리 아들왔어? 그려 어여 오드라고. 이번에도 손님이 또 바뀌어부렀네?"
자글자글한 주름이 진 얼굴이 나타나며 추림을 반겼다.
이 나이드신 분이 순천댁으로 통하며 이 거리에서 삼십년 세월을 밥장사로 버티어내고 있
는 주인공이었다.
추림과는 무척 친근한 사이라서 주인과 객 입장을 이만큼이나 좁혀버렸다.
반갑게 추림과 최진규를 맞은 할머니가 식탁 한곳을 행주로 훔치며 싱글 거렸다.
손님은 두 테이블이 있었는데 근처 공장의 노동자들로 보였다.
초져녁인데 벌써 거나하게 한잔들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막걸리와 소주병이 서너개 이상
씩 식탁위에 올려져 있었다.
"어머니. 우리 그 기가막힌 거 먹으려고요. 최형. 홍어 삭힌거 먹어 봤수?"
"......?"
엉덩이 끝만을 간신이 의자에 걸친채 경직된 자세로 있던 최진규가 얼굴을 찌푸린 채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하! 사람하고는... 어머니 우리 홍탁하고 소머리고기 주시고요. 김치찌게도 주세요."
"그려 그려. 마침 좋은 놈이 왔는디 맛이 허벌나구먼. 아이고 남겨두길 잘혔네. 엇그제 이
가 놈이 와서 냉장고 문을 열고 난리를 쳐서 숨기느라 지랄을 떨어부렀는디, 우리 아들이
오려고 내가 그리했나 보구마잉!"
전라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흘리며 순천댁이 말한 이가놈은 추림의 직장 상사인 이종열 부
장을 말하는 것이다. 며칠전에 죽어가는 얼굴로 출근했는데 이곳을 거쳐간 모양이었다.
"할매! 여기 막걸리 더 주소!"
다른 테이블에서 사내 한명이 소리치자 순천댁이 쪼르르 달려갔다.
"젠장! 난 갈테다!"
최진규가 순천댁이 사라지자 볼멘 소리를 내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시던지. 아마 여기에서 먹는 음식 못 잊을걸? 분명 맛있고 조용한 곳을 찾아서 난
안내했는데 상당히 째째하군!"
추림이 웃으며 말하자 얼굴을 일그린 최진규가 눈을 부라리며 추림을 노려보았다.
지난번 사건 이후로 추림은 시간만되면 그에게 전화했는데 이렇게 찾아오게까지 만드는데
성공했다. 남자를 비하하는 발언은 최진규가 극도로 싫어했다.
담배를 입에문 최진규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추림에게 너무 끌려 다니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는 것이다.
"어때요? 내기에서 이길수 있는 희망이 생겼소?"
추림이 다리를 꼬며 물었다. 치진규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하며 입맛을 다셨다.
"아직인가 보군! 하긴 존경을 받아야 하고 사랑과 절대적인 신뢰를 주어야 하니 그런 사람
이 하루 아침에 생겨나 따를리가 없지."
"흥! 자신만만하군! 마치 다 긑난 것처럼 말하는데... 웃기지 말지그래?"
추림을 비웃는듯한 말투로 말했지만 허세가 다분했다.
추림이 그를 직시하며 웃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가? 누구보다는 낳다 싶은데 최형이 보기에도 안그런가?"
"누가 네놈이? 나보다 낳다고? 개가 물어갈 소리만 하는군!"
이놈은 지난번보다 인간적으로 변했다.
여전히 거만하고 상대를 깔아 뭉개려하고 있지만 확실히 변한 모습이다.
"하여간 누가먼저 이기는지 두고보면 알고. 그나저나 올때가 지났는데 안오네?"
"누가 오나? 아까부터 누굴 기다리는 눈치더니?"
"내가 최형안테 누굴 보여 드릴려고 하는데 기다려 볼까요? 어? 음식 나온다."]
추림이 그렇게 말하며 일어났다.
커다란 쟁반에 가득 담겨진 음식을 들고 순천댁이 힘겹게 다가오고 있어서 추림이 다가가
받아 들었다.
최진규가 코를 감싸쥐며 얼굴을 돌렸다.
악취는 아니지만 비슷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통에 머리가 띵해져 온것이다.
"이 총각보도라고? 오뉴월 똥간에 든 허접때기구마이? 왜 코는 틀어쥐고... 별일이구마잉"
최진규의 행동에 순천댁이 뚱하게 말하고 추림의 등을 두드렸다.
순천댁의 손을 들어 얼굴에 부빈 추림이 순천댁을 자리에 강제로 앉혔다.
"자. 어머니도 한잔 하시고 가세요. 이건 아들이 드리는 선물."
막걸리를 사발에 한잔 가득 따른 추림이 순천댁에게 건네자 사람좋아 보이는 미소를 보인
순천댁이 시원하게 들이켰다.
"최형도 한잔 하지 그래요? 남자가 빼기는. 당당하지 못한걸 죽어도 싫어하는 양반이 그게
뭡니까? 보기보다 상당히 약한 모습이구만?"
"흥!"
추림이 최진규를 부추켰다. 그러자 콧방귀를 뀐 최진규가 스텐그릇에 주전자에 든 막걸리
를 스스로 따라 한번에 들이켰다.
"오메? 잘 마시구마잉? 이제보니 얼굴만 허여멀건한 남정내는 아니네. 난 애새끼가 매려부
린 싹쑤머린줄 알았고마잉?"
"쓸데없는 남자인줄 아셨다는 말입니다. 어머니 이 남자 근사한데가 많아요. 특히 돈이 엄
청 많지요. 안그래 최형?"
순천댁에게 은근히 최진규를 자랑하고 다시 그에게 말하자 최진규의 얼굴이 조금 어색하
게 변했지만 싫은 얼굴은 아니었다.
막걸리를 비운 순천댁이 홍어 한점을 입에 넣고 우적거리며 다시 돌아갔다.
"그런데 이건 뭐야? 상당히 냄새가 지독한데?"
최진규가 큼지막하게 쓸린 채 접시에 담긴 고기 덩어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게 홍어하는 겁니다. 시중에는 가오리를 홍어라고 속여 판매하지만 대부분 가짜요."
"홍어? 그 가오리를 말하는 건가?"
"같은것은 아닌데 같은 어류는 맞아요. 홍어가 원조라면 가오리는 아류에 속하죠. 이걸 통
째 단지에 넣고 일정기간 삭히는데 마치 식초맛같기도 하고 강한 신맛을 내기 때문에 정신
이 다 얼얼해 지죠. 하지만 일단 한번 먹어보면 그맛에 반하죠. 이건 진짭니다. 예전엔 홍어
가 흔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하늘에 별따기랍니다. 아 국산말입니다. 한번 먹어 보시죠?"
최진규가 코를 찌르는 홍어의 독특한 냄새가 신기한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금 작은 덩어
리를 들어 입에 슬쩍 넣고 우물거렸다.
"하하하!"
추림이 그런 최진규를 바라보며 재밌게 웃었는데 최진규는 톡쏘는 홍어를 기를써가며 씹
고 있었다.
"후아... 지독한 맛이군! 이걸 즐겨 먹다니? 신기한 족속들이군!"
막걸리를 물마시듯 한잔 비운 최진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리곤 소머리 고기를 입에넣고 씹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새끼 암퇘지 고기요. 아마 처음일걸? 그냥 물에다가 삶는 것이 아니니까 이런 돼지고
기는 서울에서 여기가 유일하지."
"이건 그런데로 괜찮군!"
괜찮은 정도가 아닐것이다.
순천댁의 가게가 허름했지만 언론에 보도되고 신문이나 잡지에 날 정도로 음식은 기가 막
힌 자랑을 발휘하는 분이셨다.
아마 최진규는 이런데는 태어나서 처음일것이다. 늘 좋은 환경과 고급화된 공간에서 살았
을 그였다. 가난한자의 삶과 서민의 생활이 어떤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 살아가는 것은 모두 거기서 거기임을 조금은 알게 될지도 모른다.
고급 호텔의 요리가 익숙하고 그런곳의 불빛과 음악, 사람들이 친근하듯이 그렇지 못한 사
람들의 삶 또한 다를것이 없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은 다양하고 모습은 부지기수다.
최진규가 조금은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환경을 이해하고 알길 바랬다.
자신의 세상이 아닌 다른이의 세상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고 행복과 즐거움이 있을거란 인
식을 갖기를 바랬다.
그와 내기한 것은 다른것이 아니다.
서로가 여자와 완전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다면 이기는 게임을 시작한 것이다.
최진규가 가진 조건이 추림보다 낳다는 것에서 생각해낸 추림의 제의 였는데 쉬우면서도
무척 어려운 게임이 될 것이다.
사랑이 각자가 지닌 조건에 맞추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심과 신뢰 믿음으로 얽히고 뚜렷한 색을 지닌 사랑이 그리 쉬울까?
추림은 최진규가 인간적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생각한 것이다. 그가 휘두른 선주에게의 잔
악한 폭력을 깨닫고 후회하길 바랬고 마음이 아프고 울렁거리는 감정을 느껴 순수한 인간
애의 본질을 찾음으로서 그녀에게 인간적으로 미안해 하기를 바랬다.
이기고 지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가 자신과 장난같은 내기를 기억하면서 사랑이 가지는 힘과 매력을 자신의 내면에 동화
시켜가길 바랬다.
"이추림!"
문이 열림과 동시에 뾰족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와 추림과 최진규가 동시에 바라보았다.
"왔어요? 조금 늦었잖아요? 삼십분이나 지각이라고요!"
이시연이 화사하게 웃으며 다가왔는데 오늘은 짧은 스커트에 맞춤 정장 차림이었다.
"어? 미안... 손님이 께셨네? 내가 방해한거야?"
"아니요. 인사해요. 최형 여기는 이시연씨라고 해요. 이쪽은 최진규라고 하니까 알아서 인
사 하세요."
최진규가 소개하자 최진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신이라 이시연을 내려다 보았다.
"최진귭니다."
"이시연이라고 하네요. 처음 뵈겠습니다."
이시연이 매력적으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설마 악수까지 신청해 올줄 몰랐던 최진규가 손바닥을 옷에 문질러 얼른 내밀어 그녀의 손
을 맞잡았다.
"무척 기시네요! 추림과 잘 아시는분?"
가벼운 농을 던지며 이시연이 물었다. 최진규는 멍하게 이시연을 바라보다가 추림을 힐끔
쳐다 보았는데 추림과 자신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난감해 진것이다.
"잘 아는 양반입니다. 아시죠? 선주? 오빠예요."
"어머? 그랬구나. 지금보니 닮은것도 같네? 혹시 애인 있어요?
"......!"
이시연의 성격은 무척 직선적이고 화통하다.
늘 뒤에서 생각하고 음침한 행동을 즐겨했을 최진규가 당황한것은 당연하다.
"잘됐네! 누나하고 최형하고 한번 잘해 보라구요."
"......?"
"......!"
추림이 그렇게 말하며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의미없이 그 둘을 동시에 불렀을까? 기자 수습생활에 정신없어 바쁜 시연을 평일날 우겨가
면서 나오라고 한것은 어뚱한 추림의 생각이 있어서였다.
"잘생겼네요? 키도 크고... 하체가 길고 곧으니까 발육이 훌륭하다는 증거니 집안이 잘 나
가겠는데? 혹시 밖에 BMW 세단 최진규씨가... 어머? 봉이네? 호호호! 얼굴 빨개지시네?"
최진규는 정말 이시연의 거침없는 말에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
어색한지 자꾸만 애꿎은 시계만 바라보았다.
최진규가 외모적으로 잘난 남자라면 시연도 그에 절대 못지 않은 미모를 지닌 여자였다.
"최형. 어때요? 이 자리가 마음에 안들면 그만 갈까요?"
"......?"
"왜? 가려고? 나 이제 왔는데? 여기서 만나자고 해서 기대하고 왔단 말이야."
"아니요. 최형이 바쁜거 같은데... 말도 않고 시계만 보고 있잖아요! 최형 그만 가지요."
추림이 짖꿎은 얼굴로 짐짓 그런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당항한 최진규가 추림을 바라보며 허둥거렸다.
"아니... 난... 안바쁘다고! 술이나 마시자 응? 그냥 손님이 오셔서 조금 어색한것 뿐이라고
오해 말아라."
'뜻밖이네? 이 인간이 이런 모습을 다하고? 부끄러운가? 하여간 이상하군!'
내심으로 최진규의 행동이 의외라고 생각한 추림이 이시연에게 잔을 건네 술을 따라 주었
다.
막걸리를 거침없이 마시고 홍어 한 조각을 집어들고 우적거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씹어 먹
었다.
그 모습이 신기한지 최진규가 홍어와 이시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모습은 전혀 그럴것 같지 않은 여자인데 자신도 어려운 맛을 자연스럽게 씹고 있는 것이
마냥 신기한 얼굴이었다.
잡담이 늘어지고 이시연이 대화를 주도해 나갔다.
의외로 최진규는 알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세련된 외모는 단지 겉모양만이 아니었다.
그만큼 지식도 풍부하다 여겨질 정도였는데 선주에게 들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시연씨. 이놈과 어떤 사입니까? 설마 선후배나 그냥 알고 있다고 말할려고 하는것은 아니
겠지요?"
취기가 조금 오른 최진규는 팔 소매까지 걷어 부치고 담배를 피워가며 분위기에 휩쓸렸는
데 조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 설마는 내가 가장 싫어 하는 설마죠. 추림은 내 애인인데요? 말 안하던가요?"
"......?"
"......!"
저렇게 뻔뻔하고 거침이 없다.
사실이 아니지만 사실이어도 가릴것은 가려야 하건만 이시연은 전혀 그런것과는 상관이
없는 여자였다.
"예? 애인요? 설마... 나이차가 너무 나는거 아닙니까? 이놈은 전혀 그런거 같지 않은데?
농담도 잘 하시네요."
최진규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러다가 싱겁게 웃으며 말했지만 이시연은 진지했다.
"나이차이요? 그건 일이삼사 하는 숫자 같은 거 아닌가요? 뭐 애인이 아니라면 짝 사랑이
라고 정정하죠"
이번엔 최진규가 더 놀라는 얼굴이었다. 추림이 그녀를 짝사랑하면 이해가 간다.
한데 그 반대라면 이건 어이없는 사실이었다.
"최형. 그냥 농담으로 생각하시면 돼요. 짝사랑은 무슨 짝사랑! 농담 그만해요! 그러지 말
고 둘이 한번 만나 보는게 어때요?"
그러자 최진규와 이시연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시연은 추림을 응시했고 최진규는 고개
를 아래로 숙였다.
"흐응... 추림아 추림아? 이 누나를 네가 데리고 장난치려고 하는구나? 감히 바쁜 이몸을
오라고 한것이 이것이렷다! 고얀지고!"
시연이 장난하는 투로 추림에게 말하며 눈을 홀겼다. 추림이 멋쩍게 표정을 지으며 입을
손가락으로 가리며 조용하라는 체스춰를 보였다.
"내가 뻔뻔하거나 이상하게 보이세요?"
이시연이 최진규를 똑바로 직시하며 물었다. 최진규는 아무런 행동도 말도 않은 채 술만
들이켰다. 그리고 잠시뒤 입을 열었다.
"조금 어색하긴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말이 사실로 보일리 있습니까?"
"왜 사람들은 마음을 숨기거나 다음 기회로 미루려 할까? 그냥 있는데로 봐주거나 표현하
는게 그렇게 힘든건가? 이봐요! 최진규씨! 난 말이죠. 내가 좋아하는 이는 절대 안 놓쳐요.
다짐이죠. 어려서 항상 외로워서 누군가 마음에 들면 갖은 구실을 동원해서 가까워 지려고
애를썼죠. 어느날 추림이 알게 되었는데 참 멋졌죠. 싸우고 다쳐 쓰러진걸 내가 발견해서
병원으로 데려갔거든요. 그 덕에 산 인간은 나 몰라라 하지만 난 느꼈죠. 내가 처음으로 좋
아하고 싶은 남자가 생겼음을 말이죠. 이 감정이 뻔뻔하거나 장난치는 거라면 난 너무 바
쁜 사람이네요."
시연의 말에 최진규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의 말속에 자신과 관계된 사연이 얽혀 있음을 알아챈 것이다.
추림은 최진규를 응시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하지 않았고 모른체 하라는 의미였다. 참 얄꿎다. 한명은 자신을 가해한 자였고 또 한명
은 자신을 살린 장본인 이었다. 이런 웃긴 만남도 있을까?
이것을 생각하지 않은것은 아니었지만 추림은 이미 잊어가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선주라는 존재는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비
록 마음을 주지 못했지만 무시하거나 남처럼 여기지 않았다.
싫건 좋건 최진규는 선주의 친 오빠다.
선주와의 우정과 인간적인 관계가 자신의 상처보다 우선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시연이 취했다. 그건 취진규도 마찬가지였는데 작은 식당안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넘쳐봐야 다섯개의 식탁과 작은 골방이 전부였지만 비좁은 식당이라 거의 달라붙은 채
공간을 공유하고 있어서 북새통이었다.
"전 어려서 참 못난 아이였습니다. 늘 따돌림을 당했고 혼자서 놀았지요. 공부를 못한것이
아니라 하기가 싫었다고 하는것은 제가 우기는 거지만 그것이 절 더우기 이상한 놈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한번은 야외로 소풍을 갔는데 누군가 내 도시락을 훔쳐 간 것입니다.
소심하고 친구도 별로 없던 내가 하루종일 주린 배를 움켜쥐고 견디다 못해 땅에 떨어진
음식을 몰래 주워 먹었지요. 그뒤로 난 더 이상해져서 소풍이나 어떤 놀이같은 곳에는 절
대 가지 않았죠. 뭐 커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더군요."
"저는 일찍 부모가 돌아가셨어요. 언니와 나만 달랑 남겨져서 어려서부터 혼자 있는 시간
이 많았어요. 언니와는 나이차가 많이나서 언니는 나와 놀아주거나 그러지 못했죠.
제가 무슨 놀이를 즐겨 했는지 알아요? 숨박꼭질을 가장 즐겨 놀았어요. 친구가 없고 놀
아줄 사람도 없으니 혼자 노는 숨박꼭질이 얼마나 이상하겠어요. 인형을 집안 곳곳에 숨
기고 정해진 시간안에 찾아내는 놀이였는데 항상 내가 이겼지요. 아무리 잘 숨겨도 내가
숨겼으니 찾지 못할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몇번 그렇게 놀고는 주저 앉아서 울어 버리는
것이 순서였죠. 뭐 저도 컸지만 달라지지 않았어요."
최진규와 이시연은 절반쯤 내려앉은 눈꺼플로 서로를 바라보며 베시시 웃었다.
그런 둘을 바라보며 추림은 그들이 지닌 공통점이나 동질감이 적지 않다고 느꼈다.
뻔뻔하거나 자신만만한게 무슨 차이일까? 둘다 혼자였던 시간이 많은 경우였으니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구석이 있다고 느꼈다.
"그러고보니 우린 통하는데가 있군!"
"그런가요? 그럴지도 모르네요."
소주로 바뀐 술을 이시연의 잔에 따라주는 최진규의 손길이 흔들리면서 술이 식탁위로 절
반은 흘러내렸다.
상당히 많이 마시고 있었다.
멀정한것은 추림뿐이었다. 세되자리 막걸리는 네섯주전자를 마시고 소주 세병째였는데
그정도면 주량이 적당한 이들은 버티지 못한다. 다행이 대화를 많이 할 수 있어 지금까지
는 별무리 없었지만 이제는 버티기 힘들어 질것이다.
"야! 이추림 너 이새끼! 언제 나안테 한번만 맞아라 응?"
취했다. 최진규가 감기는 눈을 억지로 참아가며 추림에게 주사를 부렸다.
추림은 그를보고 풀썩 웃어보였다. 차라리 저런 모습이 인간적이다. 잘난체하고 거만을
떠는 그의 모습보다는 허름한 선술집에서 팔소매를 걷어 부치고 음식물을 옷가지에 묻혀
가며 취해가는 모습이야 말로 순수한 인간 본질의 내면이라 할 수 있었다.
지난 일이 잊혀지지 않는 모양인지 취해버린 최진규가 추림에게 계속 시비를 걸었다.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이들이 술에 취해 주사 부리는 사람이다. 적당히 하거나 대응할
수도 없다. 그럴수록 자신의 사고는 더 비비꼬여 상대를 물어뜯으려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
다.
"너 임마! 내가 얼마나 무서웠... 그러는게 아니야 새끼야! 힘좀 있다... 씨발... 널 패야 되
는데... 후우... 야! 우리 선주 마음에 안든다며?"
베베꼬인 발음으로 서두없이 말하던 최진규가 마지막 말은 또렷하게 해왔다.
그녀가 말한것 같다. 자신이 끝내 자신을 거부한것을 최진규에게 말한듯 그것을 기억해
낸 그가 주사로 이용해 먹으려 들고 있었다.
"나이쓰! 이추림! 너 다른 여자 좋아하면 주우거! 선주? 내가 낳지 걔보다... 안그래요? 최
진규씨?"
"아... 당연하지! 시연씨가 백번 낳고 말고... 이추림 똑바로 들어. 너 선주 괴롭히면 그때는
바로 죽는거야 알았어?"
앞뒤도 안맞고 엉망이다. 둘다 취해서 노는 꼴이 가관이다.
곧 쓰러질듯 상체를 심하게 흔들면서 용케 버티는 두 사람을 어떻해 해야 할지 걱정이다.
시간을 보니 밤 열한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일곱시가 못되어 들어와서 있었으니 상당히 오
래 앉아 있었던 셈이다.
계사을 하고 돌아갈 채비를 하려했다.
둘이 연신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이제는 지겹게 들리고 있었다. 내일이면 아마 둘다 오늘
의 일을 기억 못할지도 몰른다. 거의 확실하다. 아니면 기억나지 않는다고 잡아 뗄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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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연을 먼저 집에 업어다 눕히고 택시안에서 늘어져 있던 최진규를 힘겹게 부축해서 데리
고 들어와 방에 눕히니 기진맥진해져 버렸다.
씻고나니 열두시가 넘고 있었다.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지만 크게 취하지는 않았다.
맥주를 꺼내 자작하며 오늘과 내일이 빨리 가길 기대렸다.
유미를 만날수 있다. 그녀도 기다리고 잇을지 모른다.
그리웠다. 주위에 알고 있는 사람들처럼 그녀도 불쑥 찾아와 주면 좋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표현하지 않고 생각을 말하지 않는 그녀의 성정으로 인해 늘 답답하고 조
심스러운것이 조금 부담된다.
자신의 생각가 마음을 조금이나마 표현해주면 좋을듯도 한데 그녀는 전혀 그런 부분이 없
었다.
1993년 3월 봄......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날이 무척 따듯해져서 이제는 옷차림도 바꿔야 할 것 같다.
금요일이다. 오늘 하루만 보내면 그리운 사람을 만날수 있을 것이다.
만나게 된다면 다시 더욱 커질 그리움과 외로움을 떠앉고 헤어져야 겠지만 그래도
만나고 싶다. 회자정리라 하는 말... 이해가 간다. 실감하고 있다.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은 필연인것 같다.
그녀가 한 행동들을 나무라거나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미 기억에서 지워가고
있는 중이다. 평생 날 괴롭힐지도 모르지만 난 자신한다 그보다 더 큰 일이 있다해도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보다는 결코 크게 날 구속하지 않을것임을......
좀더 일찍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떨쳐지지 않는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고 돌다가 문득 만난 인연이라면 더욱 빠른 회전을 할 것이지
너무 늦게 만난것 같다. 인연이 아니라는 느낌이다. 강제성과 억지성의 사랑이라는
애증이 교차한다.
선주의 오빠와 시연을 한군데서 만났다.
웃기고 어처구니없는 자리였지만 무언가 기대감을 가져보기로 한다.
최진규 그리 악한 인간은 아니다. 의외로 순수한 면도 있고 빈틈을 많이 보였다.
강한척 하지만 결국 그도 다르지 않은 인간임을 깨달았다.
이시연... 부담스럽다. 하지만 굳이 피하려고 한다거나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선주 명숙 시연 수연 그리고 유미까지... 평생 좋은 기억으로 남아주길 기대한다.
특히 유미... 그녀를 내 운명으로 정해버린 난 죽어서라도 그녀의 별자리로 남기를
희망한다.
이제 그녀로 인해 그만 울었으면 싶다.
많이 울어버리고 지쳐간다면 가슴이 식어버리고 감정은 메마를지도 모른다.
백년을 사랑하자 다짐한 나이고 천년을 기억하자한 나이면서 겨우 몇개월 남짓에
이렇게 약해질 수 없다.
같이 사랑할 수 없다면 혼자 사랑할 것이다.
이미 그녀에게 약속했다. 언제나 기다리고 기억할 것이라고... 그녀는 반드시 기억해
줄것이다... 나의 약속을 나의 사랑을... 유미... 사랑한다!
오랜만에 일기를 쓴 추림은 맥주를 마저 비우지 못하고 거실에 불을 켠 채 늦은 시간 잠들
었다. 잠들기전에 아스라히 꺼져가는 정신의 한면을 부여잡고 꿈에 유미를 만날수 있도록
기도하고 유미를 외쳐 불렀다.
유미! 사랑해!
봄이 완연한 밤에 추림의 외침이 유미에게 살며시 다가갔다!
* * *
"...........!"
잠에서 문득 깨어 멍한 눈으로 어둠에 넋을 던져놓았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환청이었다.
뒤척이다 겨우 잠든 것이었는데... 잠결내내 추림이 보였다가 사라지는 것을 반복했다.
설잠... 깊은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꿈인듯 현실인듯 아릿한 것들이 끊임없이 떠오르고 명
멸해가기를 반복했다.
"추림......!"
메마른 음성이 방안 허공에 슬며시 울리며 부서지고 허전한 외로움이 진하게 묻어났다.
불멸의 밤이 시작되었다. 알수없는 환각이 보이고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것은 추림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를 만나고 알게되면서 달콤했던 순간들이 어느샌가
어그러지고 나서 시작되었다.
주륵......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렸다.
무감각한 얼굴로 어둠을 바라보던 유미는 눈물을 훔치며 몸을 길게 떨었다.
보고싶었다. 이틀뒤면 만나게 되지만 그런 만남보다는 구체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만남을
원했다.
만나고 헤어지는 순간이 오면 또다시 상처를 지녀야 할 것이리라!
두려웠다. 상처 받는게 두려운게 아니었다. 그를 계속 그렇게 사랑할 수 밖에 없을까 두려
웠다. 차라리 그가 자신을 미워하거나 욕해주면 좋으련만 그는 한없이 부드럽고 따듯한
남자로 다가온다. 환한 웃음과 유유한 얼굴을 들고 자신을 정면에서 바라보려하고 정열적
인 눈빛으로 이야기하려 했다.
머리를 손으로 감싼 유미는 힘껏 도리질을 쳤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몰랐다.
자신이 그를 사랑한게 잘못인 것처럼 무척 가혹한 형벌로 여겨졌다.
너무 힘들었다. 그리움이 시퍼런 비수에 찔리는 아픔처럼 여겨졌고 외로움은 빙산의 일
부에 갖힌듯 견디지 못할 냉기처럼 느껴졌다.
천길 낭떠러지에서 추락하는 듯한 가슴은 하루에도 몇번씩 수천만개의 파편으로 부서져
갔다.
웃고있다. 어둠의 허공에 걸린 추림의 얼굴이 나타나 하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추림... 추림... 추림......!"
손을 들어 어둠을 파헤친 유미의 몸부림은 허무한 광대짓 같았다.
가슴이 부서져 버린다. 마음이 녹아 내린다. 외로움이 잔인한 배신감에 울고있다.
죽을것 같았다. 지독한 병에 걸린 시한부의 삶처럼 느껴졌다.
"추림... 나 죽고싶다... 나 어떻하면 되니... 힘들어 너무......!"
유미의 독백이 서럽게 공허한 밤... 그녀가 온통 하얗게 지새워야 하는 어둠은 차츰 여명의
기운에 묻혀가고 있었다.
(38장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