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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 (28)

운운 |2005.11.09 00:13
조회 822 |추천 0

 

 

-나를 부르는 소리(5)-

 

 

 

 



도화와 비형랑의 고전분투(苦戰奮鬪)에 비해서, 한영과 작약은 비교적 수월하게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도 몹시 빠른 속도로.

쐐액-

한영은 엄청난 탄력으로 전각 지붕을 박차며 재차 도약했다. 허공을 가르는 그녀의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상체를 잔뜩 웅크렸다가, 힘껏 하늘로 튕겨 오르는 한영!

마치 검은 하늘에 내쏘아진 새빨간 화살과 같았다. 그녀의 늘씬한 육신은 보름달을 반으로 잘라먹으며 건너편 전각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아직까지는 별 다는 기미가 보이지 않죠?"

"그렇구나, 끌끌…….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더니! 하북성의 규모는 놀랍다!"


성을 가로지르는 작약과 한영은, 진심으로 웅장한 하북성의 규모에 감탄하고 있었다.

웬만한 작은 도시와 맞먹는 크기.

수백 개에 이르는 전각들이 질서 정연하게 틀을 갖추며, 너른 대지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동시에 이런 곳을 적으로 돌리려는 자신들의 행로가 걱정이 되어, 마음 한쪽이 슬며시 어두워져 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한영은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질근질근 씹기 시작했다. 초초하거나 마음이 어지러울 때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버릇이었다. 작약은 그런 한영을 슬쩍 보고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다시 하북성의 광경을 굽어 살피기 시작했다. 이제 50여장만 더 가면 될듯해 보였다. 목적지로 다가갈수록 점점 더 길이 훤해지고 감시하는 눈이 많아, 그때그때 상황을 살피며, 적절한 길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후우.

한영은 깊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까만 밤하늘을 보았다. 잠시였지만,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그녀의 눈앞에 스쳐지나갔다.

처음 갈대밭에 시체처럼 버려져 있던 해루. 그리고 그녀를 치료하던 도중 깨어난, 끔찍한 모습의 아귀. 해루의 의식을 훔쳐보며 알게 된, 짐승만도 못한 인간- 서문탁!

그자를 떠올리자 한영은 뿌드득하고 이빨을 갈았다. 방금 전의 어두웠던 마음은 싹 걷힌 지 이미 오래전이다. 바로 저기다! 그녀의 두 눈에 뿌연 빛 무리에 싸여있는 한 전각이 들어왔다. 동쪽으로 50여장정도만 더 가면 될 터였다. 바로 저곳에 쳐 죽여야 할 그놈이 있었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단전의 기를 두 다리로 집중시켰다. 하얀 아지랑이 같은 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작약도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고는 전신으로 진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한영은 다시 허리를 깊숙이 굽혔다.

타앗-

힘껏 도약한 그녀는 한 마리 제비처럼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때였다.


「헉!」


분명히 어둠에 잠긴 곳이라 짐작했던 곳에, 몇몇의 사람들이 등불을 쥔 채로, 갑자기 모퉁이로부터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직 출발하기 전이었던 작약은, 급히 진기를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는 놀라서 헛바람을 집어 삼켰다. 작약의 노안이 가득 찌푸려졌다.


‘이런...제길!’


그리고 이미 허공에서 활주하던 한영은, 한발 먼저 적들을 발견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다급한 한영의 눈빛과 작약의 놀란 노안이 딱 마주쳤다.


「어, 어찌해요? 공격해서 입을 막아요?」

「아직 일러! 여기서 발각되면, 시끄러워져! 시간이 얼마 없다! 아직은 더 접근해야해!」

「깨끗이 처리하죠?!」

「만에 하나 잘못될 경우 도화 쪽이 위험해진다! 신중해!」


도화라는 말에 한영의 두 눈이 매섭게 빛났다. 더 이상의 고민은 시간낭비다!

휘익-

한영은 날아가던 탄력을 이용해, 급히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발돋움을 했다. 그리고는 허공에서 한바퀴 제비를 돌아, 유연하게 수직으로 방향을 꺾었다. 다행히 모퉁이를 돌아 나오던 적들이 잠시 주춤거리는 사이, 이미 한영은 사선방향의 전각위에 안전하게 착지를 하기 직전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작약은 속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기를 잠깐!

한영이 무사히 지붕위에 내려앉음과 동시였다. 기와위에 놓여 있던 작은 돌멩이 하나가 그녀의 발에 채여 땅으로 떨어졌다.

툭! 또르르!

긴장된 고요함을 깨트리는 가슴 철렁한 돌멩이의 비명소리!

한영은 보았다. 저쪽 건너편 전각 지붕위의 작약이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무언의 욕설을 퍼부어 대고 있었다. 당황한 한영의 등줄기로 서늘한 땀방울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거기 누구냐!!!”


모퉁이를 돌아 나오던 무리들 중, 가장 앞에서 호롱불을 들고 있던 자가 위협하며 외쳤다. 그의 뒤로는 한 여인이 있었다. 앞에 선 사내가 능숙하게 도(刀)를 뽑아 들자, 여인의 뒤에 서있던 키가 큰 사내와 흰 수염의 노인이, 재빠르게 여인을 보호하려는 듯이 막아섰다. 그들과 약간 떨어진 뒤로는, 대 여섯 명의 병졸들이 창과 방패를 들고 있었다.

그들 또한 순식간에 일행을 빙 둘러서서 굳건한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영은 그들보다 한 발짝 앞서서 어둠 속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건너편의 작약역시 어둠 속에 그림자를 숨긴지 옛날이다. 한영은 조용히 눈을 깜박이며 적들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오른손이 슬그머니 어깨에 들린 맥궁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무공을 익힌 자가 넷. 병졸이 여섯.’

「허튼 생각 말아. 실력이 만만치 않다.」


긴장된 눈으로 모퉁이를 내려다보던 한영은, 깜짝 놀란 고개를 들어 작약 쪽을 보았다.


「남의 생각도 몰래 읽는 거 에요?!」

「내가 신선이냐? 쯧쯧... 네놈 생각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 않았느냐!」

「그럼 두고 보자고요?」

「가만히 있어봐. 그저 화살을 먹여 둔 채로 주시해. 이대로 넘어가면 천운이니.」


작약은 한 팔을 들어 한영을 제지했다. 그리고 계속 팔을 든 채로 상황을 지켜보면서, 그녀의 움직임을 봉했다. 한영은 숨죽이며 적들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맥궁을 움켜쥔 오른팔의 맥박이 크게 뛰고 있었다. 적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한영도 잔뜩 긴장한 채로 그들의 모든 움직임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장 앞에선 사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흔적이나 낌새를 발견할 수 없자, 혼자 고개를 도리질 치며 중얼거렸다.


“지나가던 쥐새끼였던 것인가?”

‘그래! 그래! 쥐누님이시다! 피차 조용히 지나가자! 잘생긴 양반!’


한영은 차갑게 미소 지으며 나머지 일행의 반응을 주시했다.

여인을 가운데에 두고 보호하고 있던 키 큰 장정과 노인 중, 뒤에 서있던 노인이 흰 수염을 흩날리며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서, 선두에 선 자에게 귓속말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자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몇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닌가!

앞에선 노인은 품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어 들었다. 한영과 작약은 동시에 노인의 행동을 주의 깊게 지켜보기 시작했다. 양 검지를 마주 댄 노인이, 조용히 입술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노인의 주변으로 회색의 기운이 몽클거리기 시작했다.

찌이이익-

찌익-

멀리서부터 전해지는 소름끼치는 예감에 깜짝 놀란 한영은,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작약도 마찬가지였던 듯, 노파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누구보다도 시력이 탁월한 그녀다. 저 멀리서부터 하북성을 까맣게 물들이며 점점이 모여드는 형체를 가장먼저 알아 본 이도 역시 한영이다. 그녀의 파리한 안색 역시 시커멓게 물들었다. 맥궁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다급한 표정으로 한영은 작약을 급하게 보았다. 비명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쥐, 쥐 떼가!!!! 몰려오고...있어요!」

「뭐야? 쥐 떼?」

「저자의 저 주문! 들은 적이 있어요! 멀리 사천 당가에 쥐를 부리는 자가 있다고!!!」

「사천에 있다는 놈이, 이곳 하북에 웬 말이냐!」


한영은 반사적으로 맥궁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주문을 외우고 있는 노인을 향해 겨냥했다. 일단 요망한 술수를 부리는 저자부터 막아야했다. 얼음같이 냉정하고 더없이 잔인하여, 냉혈마녀라는 별호까지 따라다니는 한영이었지만, 시궁창의 쥐라면 끔찍하게도 싫었다. 또한 쥐들이 저자를 중심으로 여기로 모여든다면, 자신들의 위치가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지금상황에서는, 어둠을 터전으로 여기고 사는 쥐들의 이목을 피하기도 어려웠을 뿐더러, 쥐 떼가 몰린다면 이곳에서 원치 않았던 더 큰 소동을 일으키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활을 쥔 한영은 두 눈으로 진기를 집중시켰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동공이 쑤욱 확장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한영의 눈에는 노인의 전신이 수십 배로 확대되었다.


「쳐라!」


사태를 짐작한 작약의 일갈과 함께, 한영의 활에서도 힘차게 화살이 쏘아졌다. 목표물을 향해 거침없이 날아가는 화살!

슈욱-!

노인은 어둠속에서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도 크게 놀라거나 동요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주문을 중얼거리며, 슬쩍 고개를 들어 자신의 옆을 보았다.

챙강!

놀랍게도 눈 깜짝할 사이 다가온 키가 큰 무사가 노인의 앞을 막아서서 검으로 화살을 쳐 내었다.


“으아아악!”


화살은 요란한 파공음을 내지르며, 행로를 바꾸어 곁에선 병사의 다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옆으로 쳐낸 화살의 힘이 보통이 아니었던지, 키가 큰 무사는 욱신거리는 어깨를 문지르며 재빨리 노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기껏 화살정도에 엄살을 부릴 그가 아니다! 노인은 그제야 주문을 멈추고, 놀라운 표정으로 어둠을 주시하며 다급히 뒤로 몸을 뺐다.


‘쳇! 한번에 성공할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일단, 목적은 .... 달성!’


한영은 서른 장 쯤 떨어진 주변에서 시커멓게 몰려오던 쥐떼가 우왕좌왕하며 다시 흩어지는 광경을 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돌리며, 재빨리 적들을 살폈다. 노인과 키가 큰 장정 그리고 앞에선 자들 모두 가운데 있는 한 여인을 보호하려는 듯이 자세를 고쳐 잡고 있었다. 장정과 첫 번째 사내가 여인의 좌우를 막아섰고, 노인이 여인의 뒤를 살피며 매서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호오- 네가 약점인 모양이로구나!’


순간적으로 한영의 동공 속에, 가운데 선 여인이 크게 확대되었다. 한영은 옆으로 몸을 누이며 손가락 사이에 세 대의 화살을 걸었다. 그리고 힘껏 시위를 당겼다.

슈우욱-

피웅-

어둠속에서 세 가닥의 화살이 가운데 선 여인을 노리고 날아들고 있었다. 공격을 당하는 자들은 참으로 모골이 송연해 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어둠속에서 날아드는 세대의 화살은 마치 힘차게 유속을 가르며 헤엄쳐 오는 물고기처럼 나선형으로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 점을 향해 마치 하나처럼 날아오던 세 대의 화살은 순식간에, 세 방향으로 갈렸다.


‘헉! 머리, 무릎, 가슴!’


이미 화살의 힘을 경험한 바 있는 장정은, 두 손으로 검을 쥐고 첫 번째 화살을 힘껏 내쳤다. 여인의 머리를 노리던 화살은, 장정의 검에 이등분되고서도, 날아오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흙벽에 푹 박혔다. 흔들리던 벽의 돌무더기가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여인의 가슴을 노리던 화살을 본 앞에선 사내는, 호롱불을 내던지며 날아올랐다.


“히얍!”


그는 큰 도를 가로로 휘저으며 허공에서 바람을 일으켰다. 크게 휘둘러진 도(刀)는 사내의 기합소리와 함께 비스듬히 화살을 쳐 내는데 성공했다. 또한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남은 다섯의 병졸들이, 일제히 방패를 들어 여인을 둘러싸고 보호했다. 앞에선 사내의 다급한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아가씨를 보호하라!”


퍼억-

남은 화살은 그중 가운데에 선 방패에 정확하게 꽂혔다. 허나 맥궁의 위력을 방패만으로 막기는 역부족인 법! 병사의 방패를 정확하게 이등분하며 뚫고 지나간 화살은, 그자의 어깨를 꿰뚫고 지나갔다.


“크아아악!”


한영은 적들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유연한 자세로 재차 화살을 먹였다. 연이어 두발과 세발의 화살이 사내와 무사에게로 향했다.

퍽-

푸욱-

챙강- 챙! 챙!

순식간에 어스름한 골목은 수십 대의 화살의 비가 내리는 듯했다.


아래에서 공격을 당하는 자들은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적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더욱이 높은 지대에서 화살을 내쏘고 있었다. 쏘아지는 화살의 개수와 속도로 보아할 때 십여 명의 궁사들이 버티고 있을 것이라고 사내는 예상했다.

어찌하여 이들이 두터운 감시망을 뚫고 하북성 깊숙이 잠입할 수 있었을까 하는데 생각이 미치자, 그는 털이 쭈뼛 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욱이 여기는 가주님의 집무실 근처가 아닌가!

여기서 자신이 이대로 적들을 방치한다면 정말로 큰 위기를 맞이할 것 같았다. 지금 하북성에는 수십 개의 눈이 촉각을 곤두세우며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내와 무사는 정신없이 화살을 쳐내고 막아내는 중이었다. 이제 곧 저들도 화살이 떨어지면 모습을 드러내리라!


검(劍)과 도(刀)가 만들어내는 파공음이 어지럽게 허공을 수놓으며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앞에 선 사내는 풍차처럼 도를 회전시키며 사방으로 휘둘러, 화살이 파편들을 어지럽게 튕겨내고 있었다. 검을 쥔 키가 큰 무사는 가운데의 아가씨주변에서 그녀를 엄호하며 하나하나 정확하게 화살과 튕겨오는 파편들을 쳐내고 있었다. 어찌나 손놀림이 정확하고 빨랐던지 팔의 잔영이 보일 정도였다.

뒤에 선 노인은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을 비교적 침착하게 가늠해 보는 중이었다. 앞에선 사내의 예상과는 달리, 백전노장인 노인의 눈에 비친 화살들은, 정확히 어둠속의 한 곳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노인은 품안에서 은빛으로 번쩍이는 무엇인가를 꺼내어 들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역시 하나로구나!  대단하군!”


노인은 묘한 자세로 손을 비틀어 수인을 맺고는, 있는 힘껏 손에 쥔 것을 어둠속의 한 방향으로 내쏘아 보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풀석-

허나 노인의 손을 떠난 반짝이던 은색의 물체는, 목적지를 잃고 힘없이 땅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덩그러니 노인의 발아래 놓인 그 물체는, 시리던 빛을 잃은 채로 작게 꿈지럭거리고 있었다. 노인은 너무나도 놀랐다. 땅에 떨어진 자신의 사랑하는 자식을 보고는, 노한 목소리로 호통을 터트리려했다. 허나 불행히도 노인의 목소리는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했다. 턱 아래 깊숙한 혀뿌리부터 딱딱하게 굳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온몸도 이미 단단한 돌덩이로 변해 있었다. 점혈(點穴)!

노인은 미친 듯이 두 눈알을 굴리기 시작했다. 이미 자신의 뒤로 다섯의 병사들도 같은 수법에 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한 병사는 반쯤 구부린 채로 몸이 굳어, 부들거리며 한 다리로 버티고 있었다. 그 옆의 병사는 놀라 뒤를 돌아보는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불쑥-

그 순간 노인은 잠시 동안 사고의 마비가 일어날 듯한 착각을 느꼈다. 자신의 등 뒤의 어둠속에서 한 노파가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나타난 것이지?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점혈을 할 만큼 곁에 다가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감지하지 못할 만큼 기척을 숨길 수 있는 이라면? 분명히 엄청난 고수가 틀림없었다. 어둠속에서 불쑥 고개를 들이민 노파는 담담하게 자신을 지나쳐, 뒤를 보이며 서있는 여인에게로 스르륵 다가갔다. 노인은 바쁘게 눈알을 굴려 노파의 아랫도리를 내려다보았다. 허공답보! 노인의 두 발은 허공에 반장정도 떠 있었다.

순간 노인은 크게 울부짖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의 아가씨에게, 아니 저 앞에서 정신없이 화살을 막느라고 바쁜 두 고수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제발, 제발 뒤를 돌아보라고!


작약은 천천히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있는 처자에게로 다가갔다.

초조한 마음으로 앞의 일행을 주시하고 있던 여인은, 등 뒤에서 누군가 자신의 목을 건드린다고 느낀 순간, 헛되게 입술을 벙긋거리며 놀란 두 눈을 부릅떴다.


‘헉!’


작약은 놀란 토끼를 다루듯, 한 팔로 여인의 목을 슬며시 움켜쥐고, 조용히 헛기침을 했다.

뒤에서 느껴지는 낯선 인기척에 화들짝 놀란 두 고수는, 뒤에 벌어진 광경을 돌아보고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설희 아가씨!!”

“주군!!”


그 순간 그들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자신들이 눈앞의 적에 연연하느라 한눈을 팔았던 사이, 교활한(?) 적들은 은근슬쩍 뒤를 파고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검을 휘두르던, 키가 큰 무사는 쉽게 상황을 수긍할 수 없었다. 여인을 뒤에서 보좌하고 있던 노인은 이렇게 허망하게 당할 만큼 만만하지 않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고개를 홱 돌려, 원망의 눈길로 노인을 보았다. 그는 온몸이 굳은 채로 눈물을 쏟기 직전이었다. 절망의 빛이 넘실거리는 노안과 마주한 무사는, 그제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 자신들이 실책을 범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너무 강했던 것이다!

괴물같이 등장한 노파의 손에 잡힌, 주군의 연약한 목이 곧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때 맞은 편 전각 지붕위의 어둠속에서, 드디어 한 인영이 조용히 등장했다. 놀랍게도 그는 여인이었다. 몸에 딱 달라붙는 붉은 핏빛의 경장을 입은 그는, 오른손에 커다란 활을 쥐고 있었다. 수백여 발의 화살을 쉬지 않고 난사한 탓인지 약간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환하게 이글거리는 보름달을 배경으로 전각위에서 아래를 굽어보고 있는 여인!

마치 오만하게 불타오르는, 활을 든 전투신과 같은 위엄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를 올려다보던 사내는 자괴감이 깃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명이었구나... 단, 하나였어.......!”


사내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녀는 세 장이 넘는 전각의 꼭대기에서 가뿐하게 훌쩍 뛰어내렸다. 서슴없이 노파에게로 다가가는 여인.

두 고수는 칼과 검을 쥐고는 그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 뿐이다. 그들의 시선도 한영의 뒷모습을 따랐다. 작약에게서 떨고 있는 여인을 받아든 한영은, 망설임 없이 화살촉을 뽑아들어 가녀린 목에 대었다.


“물러서. 무기를 버리라. 귀한 몸이신 것 같으니.”


두 사내가 움찔하며 쉬이 검과 도를 내려놓지 못하자, 그녀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슬며시 화살촉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눈처럼 하얀 여인의 목에 빨간 자욱이 선명해졌다. 작은 핏방울 하나가 상처의 끝에 걸렸다.


“주군!!! 멈추시오!”

“......!”


털거덩-

툭-

두 사내는 망연자실하게 손에 쥔 무기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작약이 다가와 그들에게도 아혈과 함께 중요한 요혈을 가격했다. 여인을 내려놓은 한영은, 모두를 툭툭 건드려 보며, 점혈을 확인했다. 사람의 몸을 떡 주무르듯 하는 작약에게 이 정도 쯤은 식은 죽 먹기일 따름이다. 한영은 되었다 싶어 일단 자세를 낮추어 다시 한번 주위를 살폈다. 다행이도 잠시의 소란이 이는 동안 주위를 지나가는 이는 없었던 듯, 쥐죽은 듯한 고요함만이 흘렀다. 한영은 작약에게 눈짓을 했다.


“서두르죠!”

“아차! 잠시만 있어 보거라. 끌끌.”


작약은 허둥지둥 뒤로 몇 걸음 돌아가, 굳어있던 노인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방금 전에 노인의 발 앞에 떨어져 있던 은빛의 작은 물체를 주워들었다. 작약의 눈에 놀람과 탄성의 빛이 가득 일었다.


“오호라! 이것은 사천당문의 독벌이 아니냐!”

‘안 돼!!! 그것만은 안 된다!!’


자신의 독벌을 쥐어든 노파를 바라보는 노인의 두 눈이 찢어 질 듯이 부릅떠져 있었다.

그것은 만년 만에 깨어난 귀한 독벌을 미이라로 만든 것이었다. 그의 평생의 노력을 쏟아 부어 만(萬)가지 독을 합한 결과물이었다. 손 바닥만한 벌이 공격하는 극독의 효력은 실로 엄청났다. 집채만 한 황소라 해도 스치기만 한다면, 대번에 절명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그 엄청난 괴물을 자신의 주술과 결합시켜, 오직 자신의 명으로만 움직이는 요물로 키워냈다.

그런 자식과도 같은 녀석이 지금 힘없이 노파의 손 위에 놓여 있었다.


‘저, 저런!!’


대상이 무시무시한 독벌임을 알고도 노파는 별로 개의치 않고 여기저기 들추며 살펴보기 시작했다. 심지어 독액이 진득이 흐르는 독침을 혀에다 쓰윽 대어 맛을 보는 것이 아닌가!

입안에서 혀를 오물오물 거리던 작약은 쓰다는 듯이 퇴에 하고 뱉어냈다. 그리고는 유심히 다시 한번 독벌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저 지경에 이르자 노인은 정말로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만 지금 이 상황에서 소리 낼 수 없다는 것이 죽고 싶을 만큼 한탄스러웠다.

작약은 잠시 울먹이는 노인을 보았다. 그리고는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내 영영 갖게 다는 것이 아니라... 요놈의 독만 해독을 해본 다음에...”

‘망할 할망구! 내 평생이 담긴 거야! 해독이 불가(不可)하다! 그것이 목적인 독이니!’

“해독만 해보고..... 언젠가 인연이 다시 닿는 다면 그때 돌려주마! 클클”

‘해독불가라니까! 사람마다 상황마다 천만가지로 그때그때 변하는 독이야!’


인연이 언제 닿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한영은 그런 작약을 보며 가볍게 실소했다.

아무튼 약초나 독 등 의술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 탐구욕은 하늘에 닿아있는 할망구라고 생각하면서.


「가요!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어요. 북동으로 45장!」


곧바로 그녀는 상체를 둥글게 숙인다음 확 솟구치며, 탄력을 이용해 하늘로 튀어 올랐다. 아무 도약대가 없는 지면에서도 멋진 탄력으로 날아오른 그녀의 몸은 내쏜 화살처럼 어둠을 갈랐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두 사내의 눈에는 잠시 동안 경외감이 흘렀다.


‘궁신탄영(弓身彈影)!  완벽한 재현이다!’


작약은 노인에게 슬쩍 미소를 띠우고는, 은빛의 독벌을 사정없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한영을 따라 한줄기 빛 무리를 남기며 사라져갔다.

노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에서는 굵은 물줄기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                    *                   *







정적이 흐르는 어두운 골목.

빛을 밝히고 있는 유일한 호롱불은 덩그러니 한쪽 구석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점혈이 되어 꼼짝하지 못하고 있던 네 사람은 각자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몹시 복잡했다.

젊은 집주는 그들이 사라져간 방향이 가주의 집무실 쪽이었기 때문에, 그 걱정으로 심장이 펄떡거렸다. 아마 점혈이 풀린다면, 그는 자신의 머리통을 바닥에 찍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20년 전의 혈사의 기억이 아직도 소름끼치도록 뇌리에 선명한 그였다.

사천당문의 영애, 당설희 낭자 역시 놀란 가슴을 진정하느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귀하게만 자란 그녀였다. 또한 하북팽가 가주의 생일연을 구실로, 이번에 처음 강호에 나온 길이었다. 피 튀기는 실전(實戰)을 눈앞에서 지켜본 그녀는,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리고 당설희의 호위무사인 키가 큰 장정, 유가는 약간 다른 의미로 작약과 한영이 사라진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맥없이 당한 것은, 그가 평생 무공을 연마해 오던 중 이번이 딱 세 번째다. 전각의 꼭대기에서 마치 전투신과 같은 위엄을 흘리던 한영의 모습이 그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 그는 무기력하게 넋을 놓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천당문에서 가주를 보좌하는 실질적인 권력자인 노인에게 있어서, 실로 이번 여행은 스스로 자청한 것과 마찬가지의 길이었다. 당가 내부의 어려운 사정과 대외적인 행사를 절묘하게 이용한 자신의 계책이었다. 평생의 친우인 가주를 안심시키며, 또한 자신의 딸과 같은 아가씨를 모시고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떠난 그였다.

허나 지금의 결과는 어떠한가?

아가씨가 무사한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었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도 혹독했다. 자신의 눈앞에서 소중한 독벌을 빼앗겼다. 그것도 두 손 벌리고 내어 준 꼴이다.

그는 정말로 목 놓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앞으로 몇 십 년은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았다. 곁눈질로 슬쩍 웃으며 자신의 독벌을 주머니에 쑤셔 넣던, 괴물 같은 노파의 얼굴이 매일 밤 찾아 올 테니.




잠시 뒤.


뚜두두둑-

두둑-

삐거거걱-


기괴한 소리가 침울한 골목을 가득 메웠다.

놀랍게도 그것은 사람의 몸에서 나는 소리였다. 점혈이 되어 나무토막처럼 굳어있던 노인의 몸이다. 허나 지금 그는 마치 인간의 것이 아닌 것 마냥 팔 다리가 거꾸로 꺾이고 있었다.

모두의 눈동자가 노인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허나 당설희 낭자와 유가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 침착하게 노인을 지켜보며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의 팔이 팔꿈치 아래부터 툭 꺾여 아래로 흐느적거렸다. 뼈가 없는 동물처럼 전신의 관절이 스스로 툭툭 끊어져 내렸다.

그러기를 몇 차례 반복한 그는 스스로 몸을 경직에서 풀어내었다.


“휴우! 엄청난 점혈이군!”


평소 잘 알려진 노인의 특기는, 쥐 떼를 부리는 능력과 독벌을 다루는 능력 그리고 스스로 점혈을 풀어내는 능력이었다. 그의 관절과 근육들은 이미 온전하게 노인 스스로 의지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보통의 경직 같았으면 곧바로 풀어내었을 테지만, 과연 작약의 점혈은 대단한 듯 노인도 죽을힘으로 용을 쓰고 나서야 한참 만에 겨우 풀 수 있었다.

그는 곧바로 당설희 아가씨와 호위무사인 유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집주의 혈을 풀어 주었다. 오랜만에 움직임을 찾은 그들은 잠시 동안 저린 팔과 다리를 주무르느라 다들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이런 고생을 겪게 해드리다니요! 무엇이라 할 말이 없습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사내는 다름 아닌 하북팽가의 집주였다. 그는 손님들의 접견실에서의 가주의 명을 받들고 있는 중이었다. 당설희 낭자와 일행에게 좋은 전각을 내어주고 머무름에 부족함이 없도록 돌보아 드리라는 명이었다. 그는 절망이 베인 표정의 노인을 보았다. 집주도 노인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 대강 짐작이 갔다. 그는 깊이 허리를 숙였다.


“다 제 불찰입니다! 하북성의 경계를 게을리 한 탓입니다!”


노인은 눈을 들어 올려 젊은 집주를 보았다. 이 젊은이의 탓이 아님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몸을 던져 아가씨를 보호하던 용감한 젊은이가 아닌가!

그는 팔을 훠이훠이 내저으며 급히 말했다.


“그런 말 말게. 그나저나 큰일 일세! 그 자들이 어디로 간 게지?”

“노부! 아마도 여기서 북동쪽으로 날아갔을 겁니다!”


곁에선 유가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그들이 날아간 방향을 눈여겨보아 둔 그였다.


“짐작하고 있습니다. 가주의 집무실...이십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가슴속의 말을 토해내는 집주! 그런 청년을 바라보는 당설희의 눈에 호기로운 의협심이 일었다.


“백부! 그리고 유가! 우리도 가서 도와야지요! 집주, 우리가 돕겠어요!”

“아, 아닙니다. 위험한 일입니다. 처소로 급히 안내를......”

“아니네. 젊은이! 어서 앞장 서 게나! 이대로 우리가 모른 척 한다면, 나중에 돌아가서 당가주님께 고개를 들지 못할 일이니!”

‘내 독벌의 행방도 알아봐야 할 일이고!’

“감사합니다!”


집주는 허리를 깊이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음 재빨리 병사들을 추스르고 급하게 지시를 내렸다. 병사들은 그의 지시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당가 일행을 향해 말했다.


“이리 따르시지요!”

“알겠어요!”

“그러하지!”

“......!”


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일행의 뒷모습은 순식간에 골목에서 사라졌다.

 

 

 

일행이 출발한 지 딱 한 시진이 되던 시각.

비형랑과 도화가 막 서문탁의 전각앞에 당도한 바로 그 시각, 낯선 이방인의 침입을 알리는 경보가 하북성 전체에 울렸다.

 

 

뿌우우우웅-

위험을 알리는 경계령의 뿔피리 소리가 까만 밤하늘을 불길하게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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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님들 다들 잘 계셨지요?

일교차가 너무나도 심해지는 요즘입니다.

혹여나 감기로 고생하시고 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늘 따뜻하게 하시고, 외출시에는 손발을 깨끗이 씻어서 건강 조심히 시는거 아시죠?(^_^)

감사한 꼬리말들, 추천들 출력해놓았다가, 글쓰며 힘들 때 마다 읽고 또 읽고 한답니다.

(소심한 작가 -_-aㅋㅋ)

공약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달리고 또 달립니다!!

수요일이 가장 나른한 날이라고 하지요?

다들 기운내시고, 잠시라도 제 글을 읽으시는 동안만은

하루의 시름을 잊으셨으면 합니다.

 

울 사랑하는 귀한 님들-

파안의 가호가 늘 함께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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