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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2-4화> 역지사지

바다의기억 |2005.12.09 14:20
조회 10,536 |추천 0

고된 인내와 수련 속에

 

물집이 잡히고 껍질이 벗겨지다 보면

 

어느새 그 자리엔 굳은살이 맺혀

 

우리의 몸을 지킵니다.

 

하지만... 사방에서 자라난 굳은 살은

 

아직 못 다 자란 여린 부분을 눌러

 

참기 힘든 아픔을 주기도 합니다.

 

너무 많이 상처 받으면... 언제나 아플 수 밖에 없습니다.

 

====================== 정권 단련 필요 ============================

 

 

다음날 오후. 학교.


물리 강의 시간.



권교수님

- 지금부터 제가 강의하는 내용에 대해서


절대로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거~죠?



필수 과목인데다 교수님도 깐깐하신 탓에


차분하기 이를 데 없는 분위기.


카랑카랑하고 다부진 교수님의 목소리와


노트 위를 휘달리는 펜 소리만 존재하던 강의실에


느닷없는 불청객이 뛰어들었다.



=빠바바밤빠밤빠바~ 빠바바밤빠밤빠바~=



민망할 만큼 경쾌하게 울리는 운명 교향곡의 소리.



권교수님 - 누구야?


에부리바디 - ........


권교수님 - Who??



교수님의 날카로운 눈빛이 학생들 사이를 누비는 순간


주변에 있던 많은 시선들이


나에게 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억 - 어.... 어라.



혹시나 싶은 마음에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어보자


신나게 액정을 번쩍거리며 목청 높여 울어대고 있던


내 핸드폰이 자랑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기억 - ...... 이런 쉣.


권교수님 - 오케이. 그대~로 Come on.



....... X 됐다.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계속 울려대는 핸드폰을 손에 들고


터벅터벅 강단위로 올라섰을 때


교수님이 학생들의 주위를 모으며 외쳤다.



권교수님

- 자, 이제부터 우리의 소중한 강의시간을 방해할 만큼


아주~ 중요한 통화 내용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끊어지기 전에 빨리 받아~.



일이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고 느끼며


참담한 기분으로 핸드폰을 열자


교수님은 핸드폰 수화기 부분에 마이크를 갖다 대


통화 내용이 강의실 안에 들리도록 했다.



제발 060 이나 700 만 아니어라....



기억 - ....예.


?? = 오빠~~~~!!!



!!!!!



강의실 안 가득 맑고 청아하게 울리는


어린 여인네의 목소리에


일순간 분위기가 크게 술렁거렸다.



기억 - 누.... 누구신지?


?? = 유~~니~~.



오빠라는 말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기억 - 제....제 번호는 어떻게 아시고...


유니 = 비~~밀~~.


기억 - 저기,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수..


권교수님 - 지금 끊으면 F야.



..........



유니 = 응? 수업중이야?


기억 - 아... 아뇨. 수, 숨이 차다고요.


유니 = 그래? 뭐하는데? 나중에 전화할까?


기억 - 아아아아아뇨~ 끊지 말아요, 지금 괜찮아졌어요.


유니 = 음... 나 심심해!


기억 - ...... 그래서요?


유니 = 훌쩍.... 오빠 나빠..... 그러기야?



그녀의 애교 아닌 애교와 투정에


야유와 환호성이 반반 섞여 울리는 강의실.


교수님도 매우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통화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기억 - ....... 어디세요?


유니 = 우리가 처음 맺어진 곳~.



=오오~!! 휘익 휘익~!!=


아이고 누님.....



기억 - 맺어지긴 뭐가 맺어져요!?


유니

= 눈물을 글썽이며....


너무해. 난 오빠만 믿고 허락한 건데...



기억

- 저기요, 선.배.님.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그런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씀을...



유니 = ...... 어머나, 이미 눈치 챈 거야?


기억 - 당연하죠, 그러니까 그 오빠 소리도 이제...


유니 = 아아~ 그냥 오빠 해죠~~~!! 오빠 오빠 오빠~~!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다.....



기억 - 제가 좀 있다 그리로 갈게요.


유니 = 아~~ 지금 와아잉~.


기억 - 지금 못 가요.


유니

=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지금 안 오면 나 삐질 거야.



기억 - 하아...... 마음대로 하세요.


권교수님 - 떽!!


유니 = 응? 방금 무슨 소리야? 옆에 누구 있어?



갑작스러운 교수님의 호통에


깜짝 놀라 내게 묻는 그녀.


그 소리에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기억 - 아, 아,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유니 = 올 거지?


권교수님

- 여자가 부르면 당장 뛰어가야지,


여기 굶주린 솔로가 몇 명인데


그렇게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어, 응?



아무도 예상치 못한 교수님의 호통에


열렬한 호응을 보내는 학생들.


=그냥 이리로 오라고 그래~!=


=친구들도 데리고 오라 그래~!=


같은 함성이 중구난방으로 터져 나왔다.



기억 - 아....아...네, 지금 갈게요.


유니 = 으응~ 빨리 와~ 쪽!


기억 - 아, 진짜! 그런 거 하지 마요. 쫌!


권교수님 - 떽!!!


유니 = .... 떽?


기억 - 아, 아니....그게.... 암튼, 기다리고 있어요.


유니 = 응~.



그렇게 간신히 전화를 끊고 나니


하염없이 밀려오는 민망함과 앞날에 대한 걱정.



하지만 교수님은 매우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계셨다.



권교수님 - 아직 공대의 미래는 밝구만.



대체 지금 이 상황과 공대의 미래가


어떻게 직결되는 겁니까......



권교수님 - 뭐 해? 얼른 안 가고.


기억 - ...... 진짜로 갑니까?


권교수님 - 그럼.


기억 - ..... 정말 갑니다?


권교수님 - 안 가면 F야.


기억 -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이게 아닌데.... 뭔가 이상한데....



권교수님

- 자, 그럼 솔로들은 남아서


미래의 마누라를 바꾸기 위한 노력을 계속합시다.


379페이지 5번!



학생A - 교수님! 저도 커플입니다만!


권교수님 - 그럼 자네도 전화가 오길 빌고 있어.



뭐... 그래도 이정도면 무사히 마무리 된 건가.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떠들썩해진 강의실을 떠나 연습실로 향했다.




잠시 후, 연극부 연습실.


문을 열고 연습실 안으로 들어서자


한쪽 구석에서 비디오를 보고 있던 유니선배가 반색을 했다.



유니 -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오빠~!


기억 - ......왜 그러십니까, 선.배.님.


유니 - 재밌잖아.


기억 - 방금 선배님 전화 때문에 제가 무슨 꼴을...


유니 - 예쁘지? 잘했지? 응?



너무나 당당하게 능청을 떠는 그녀의 모습에


난 따지는 것 자체가 허무한 일 같다는 회의감까지 느꼈다.



기억 - 대체 어제 처음 만난 사이에 그런 장난을....


유니 - 당연하다는 투로, 그래야 효과가 있지.


기억 - 효과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유니 - 그런가? 암튼 일루 앉아봐, 이거나 같이 보자.


기억 - 뭔데요 이게?



박군 = 죽어! 죽어 이 ㄱ애새꺄!!



그녀가 보고 있던 비디오에선


박군 일당이 한창 김군을 패는 중이었다.



기억 - 이건...


유니 - 처음부터 볼래?


기억 - 아..아뇨, 괜찮습니다.


유니 - 하긴, 이제부터가 하이라이트니까.


기억 - 흠.....볼륨 조금만 높여주시겠어요?


유니 - 응?



김군 = 아아악!! 크흑! 어헉!


=퍼억! 퍽퍽! 뻐어억!=



유니 - 이게 그렇게 듣고 싶었어?


기억 - 아...... 좀 있다가 올리죠.


유니 - 으음... 이런 취향이 있었구나.


기억 - 아니에요~!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새 클라이맥스.


문제의 키스장면을 앞에 두고


자꾸만 유니선배가 의식됐다



이걸 봐야하나 말아야하나.


그냥 보면 굉장히 민망할 것 같기도 하고..


이거 가지고 또 장난치면 어떡하지?



문득 그 순간의 촉감들이 스멀스멀 살아났다.


목을 감싸던 그녀의 팔,


뺨에 느껴지던 콧바람.


품 안에 쏙 들어오던 여린 어깨.


영원처럼 길기도 하고 찰나처럼 짧기도 한 시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얼굴이 달아오르고


보여주기가 부끄러워졌다.



선희 = 불쌍한 사람...


업자 = 마지막으로.... 내게.... 키스해주겠어?



유니 - 오오....왔어 왔어 왔어~!!


기억 - .......



그리고 이어지는 긴 침묵.


힘없는 갈대처럼 휘청거리는 내 모습과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날 바라보는 민아의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 웃고 있었구나.



그 때 난 웃고 있었다.


흐릿하면서도 쓰디쓴 느낌이 드는 미소를 지은 채


금방 수명이 다할 듯 깜빡이는 전구처럼


필사적으로 빛을 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선희 = 불쌍한 사람..



하지만 그녀는 돌아섰다.


내 마지막 부르짖음을 뒤로한 채.



하지만 다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하얗게 백열하며 증발해버리기 위해.


그리고 내 품으로 뛰어드는 그녀.



선희 = .......


업자 = ......!



=정지=



유니 - 모모모모모모오야~!!!


기억 - .....아?


유니 - 왜 멈춰?


기억 - ........



어느새 내 손에 들려있는 리모콘.


내 엄지손가락은 아직도 정지버튼을 꽈악 누른 채


희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유니

- 잔뜩 화가 나서... 왜 찬물 뿌리고 그래?


한창 분위기 좋았는데.



기억 - 아, 저기.. 잠깐... 잠깐만요.


유니 - 모가 잠깐만이야! 이미 지난 일을.


기억 - 아니 그러니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난 비디오 본체를 향해 기어가려는


유니 선배의 발목을 잡아 뒤로 거듭 끌어당기며


그녀가 재생버튼을 누르지 못하게 막았다.



유니 - 왜 그래? 안 놔?!


기억 - 잠깐만 좀 있어 봐요!! 아직 준비가 안됐다니까요!


유니 - 어머, 너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니?


기억 - 아니, 그러니까...


유니 - 기가 차다는 듯이..... 알았어~ 안 보면 될 거 아냐?



=콰앙!!=


자리를 떨치고 일어난 그녀는


정말로 화가 난 것인지


출입문을 힘껏 닫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 이게 아닌데.


난 단지.....



그런데 이 상황....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끼익.=


한숨을 푹 내쉬며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하고 있을 때


출입문이 빼꼼 열리며 유니가 고개를 내밀었다.



유니 - ..... 이제 민아 기분이 이해가 가?


기억 - 아!


유니 - 갔나보네.


기억 - 아.... 그렇지만 전 화는 안냈는데요.


유니 - 민아가 그랬는 걸? 문 쾅 닫고 나가버렸다고.


기억 - 그건 피카츄가 쫓아와서...


유니 - ...응?


기억 - 아니.... 그... 개가 줄이 풀려있는 바람에...


유니 - 한심하다는 듯..... 사정이 어쨌건 민아가 모르면 소용이 없잖아?


기억 - ....그러네요.


유니 - 알았으면 언능 뛰어가지?


기억 - 아..... 오늘 학교 안 왔나요?


유니 - 응.


기억 - .....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유니 - 빨랑 가기나 해~.


기억 - 옙!



유니 선배.... 생각보다 좋은 사람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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