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거친 숨을 토해내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 이상 서 있을 기운이 없었다. 달리기는 질색인데,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달려온 건지 모르겠다. 늦은 시간에 정신없이 울면서 달리는 나(그것도 중간에 두 번이나 엎어졌으니, 내 모양새는 안 봐도 상상이 간다)를 본 사람들은 아마 미친 여자려니 생각했겠지? 하지만 정말 당장 승우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무작정 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막상 승우의 집 앞에 다다르자, 나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만나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다짜고짜 지섭 오빠와 헤어지기로 결심했다고 할까? 그게 다 자꾸 네가 내 머릿속을 알짱거렸기 때문이라고? 참 한심한 생각이다. ‘그게 뭐 어쨌다고?’하는 무심하면서도 어이없어하는 녀석의 표정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바보가 된 기분이다.
‘휴우, 당장 오늘은 그만두고……앞으로 녀석 얼굴을 어떻게 보지?’
모든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얼굴을 원망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나의 한숨을 찢으며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어, 나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했다.
“여기서 지금 뭐하는 거야?”
승우였다. 슈퍼마켓이라도 갔다 오는지, 간편한 옷차림에 한 손에는 비닐 봉투를 들고 있었다.
‘신이시여, 이것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입니까! 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돼있단 말입니다! 한번쯤은 그냥 넘어가줄 수도 있잖아요!’
애초에 이곳에 온 목적을 잊은 양, 신을 원망했다. 신은 그런 내가 발칙했던지, 내 얼굴로 온몸의 피가 전부 다 쏠리는 축복을 내리셨다.
“남의 집 앞에 주저앉아 한숨이나 푹푹 쉬고 있고……도대체 뭐하는 거냐? 어라, 얼굴은 또 왜 그렇게 시뻘개? 술 마셨냐? 지금 술주정하러 우리 집 앞까지 온 거야?”
아아, 점입가경이다. 수줍은 소녀의 첫사랑이 술주정으로 오해를 받다니…….
“술은 누가 술을 마셨다고 그래?”
차라리 술을 마셨다고 하는 편이 나았을까? 그러면 적어도 붉어진 얼굴에 대한 다른 변명은 생각해내지 않아도 되잖아?
“술 마신 게 아니면 왜 그래? 꼴은 또 그게 뭐야? 데굴데굴 굴러 다녔냐? 흙투성이에……이것 봐, 턱은 까져서 피까지 난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술집 주인이 술값 없다고 내팽개치기라도 하든?”
아, 자꾸 얘기가 술주정 쪽으로 가네. 그냥 취한 척 해버릴까?
“그래, 좀 마셨다. 불만이냐?”
“술을 마시려면 곱게 마시지, 이게 뭐냐? 이러고 다녀도 지섭이 형이 뭐라 안 그러냐? 나 같으면…….”
“지섭 오빠한테……오늘 헤어지자고 했어.”
머리가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도 전에, 말이 마음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이…….
“뭐?”
여기까지는 괜찮아. 어차피 지섭 오빠와의 이별은 승우도 곧 알게 될 일인걸. 이제 잘 무마하기만 하면 되는 거다. 그러나 방정맞은 나의 입은 뇌보다 순발력이 빠르다.
“다 너 때문이야.”
헉, 진짜 내가 취한 건가? 술을 퍼마시고 기억을 못하고 있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생각과 말이 따로 놀 수가 없다. 이제 어떻게 이 상황을 모면해야 하지?
“그게……무슨 말이야?”
그의 목소리에 깃든 긴장감이 느껴진다. 눈빛 또한 심상치 않다. 기분 탓일까? 하지만 어쩐지 그의 눈빛은 묘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바로 함께 술을 마셨던 그 날 밤, 곯아떨어지기 직전에 남긴 의미심장한 말처럼……. 대답을 구하는 그의 눈빛에 무언가 대꾸를 하긴 해야겠는데, 입술이 자꾸 바짝바짝 말라간다.
“지섭 오빠와 헤어진 건…….”
힘들게 입을 열었다. 어떤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연 것인지는, 나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적당히 둘러대는 대답? 아니면 솔직한 진심? 정답은 영원히 알 수 없게 돼버렸다. 그 떨리는 순간에 울려 퍼진 핸드폰 벨소리 때문에…….
다소 신경질적인 태도로 승우가 전화를 받았다.
“은혜야, 지금은 좀 곤란한데…….”
은혜의 전화. 갑자기 얼굴에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은혜가 있었지. 승우의 곁에는 은혜가 있다는 것을 결코 잊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승우야, 나 이제 가봐야겠다. 안녕!”
완전히 파김치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여분의 기운이 남아 있었나 보다. 아니면 초인적인 능력이 발휘되고 있는 걸까? 나는 인사말과 함께 힘차게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또 다시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내가 아까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사람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아영아, 잠깐. 갑자기 어디 가는 거야?”
내 뒤통수에 대고 소리치는 승우의 목소리. 쳇, 네 녀석의 목소리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아. 자꾸 이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싶게 만드는 네 녀석의 목소리 따위는…….
또 다시 나의 광란의 질주는 시작되었다.
3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달리는 와중 내내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생각이다. 정말이지 잠깐 동안 난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아무리 내 심장이 미쳐 승우를 사랑하게 됐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승우에게 내 마음을 고백할 생각을 한 거야? 승우가 누구인가. 바로 은혜의 남자친구이다. 나를 친언니처럼 따르는 천사같이 착한 후배 은혜. 이것은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나 이아영이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짓 일순위에 들 만한 일인 것이다. 그래, 정말 이러면 안 되는 거다. 때 맞춰 전화해 준 은혜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입안에 씁쓸한 맛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쩌다가 나는 하필 사랑하면 안 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 걸까? 아, 차라리 은혜가 나쁜 아이라면 좋겠다. 내가 그녀에게서 승우를 빼앗아도 타당할 정도로……. 보통 드라마에서 보면 주인공의 사랑을 방해하는 여자는 악역이기 마련인데, 현실은 왜 이다지도 다른 거지? 아무래도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가 보다. 하긴, 나보다는 은혜 쪽이 주인공 역할에 훨씬 잘 어울리지. 어쩌면 나야말로 주인공의 남자친구를 뺏고 싶어 하는 악역일지도…….
‘이게 뭐야. 어차피 현실로 옮길 수도 없는 생각으로 뇌를 혹사시키다니……. 어차피 은혜와 나는 게임이 안 된다고!’
정말 우울한 일이다. 나를 전혀 여자로 생각하지도 않는 승우를 사랑하게 된 것은……내 생애 최고의 불운이다.
또 다시 숨을 헉헉 몰아쉬며 집에 도착했다. 앞으로 한 일주일 분의 운동은 다 한 것 같으니, 내일부터는 꼼짝도 하지 말아야겠다. 물론 의욕도 안 생기겠지만……. 물에 젖은 솜 마냥 녹초가 된 무거운 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아드레날린이 과다분비 되면서 피로를 잊고 만다. 바로 집 앞에 서 있는 기다란 남자의 그림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뭐 하고 이제 오는 거야!”
승우, 바로 승우다. 초조하면서도 약간 화가 난 표정. 녀석은 나의 초췌하고 지친 행색을 발견하고, 또 잔소리를 시작한다.
“뛰어 온 거야? 우리 집에서부터 여기까지? 여자애가 밤길을 겁도 없이 뛰어다니니? 난 당연히 버스 타고 갔을 줄 알고, 서둘러 쫓아 왔잖아.”
“왜 따라온 거야? 여기까지 수고스럽게 잔소리하려고 왔냐?”
“그렇게 하고 가버렸는데, 어떻게 모르는 척 하냐? 왜 말을 하다 말고 가?”
“별로 할 말도 없는데 뭐…….”
“분명히……지섭이 형이랑 헤어졌다고 했잖아. 사실이야?”
“그래…….”
“이유가 뭔데?”
제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하지 말라고! 적당한 대답을 생각하기 위해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다. 이성을 찾은 이상, 솔직한 대답을 할 수 없는 내 가슴 아픈 심정을 네가 알아?
“남자랑 여자랑 사귀다가 헤어질 수도 있고 그런 거지……그 이유를 꼭 너한테 말해야 할 필요가 있냐?”
“하지만 지섭이 형과 헤어지고 우리 집에 왔을 때에는…….”
“일이 그렇게 돼서 속은 상하고, 딱히 속 풀이 할 사람도 없기에 만만한 너한테 찾아 갔다. 그런데 별로 너한테 할 만한 얘기도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돌아왔고. 뭐 문제 있냐?”
이만하면 잘 무마한 거 맞지? 하지만 이번에는 그리 흐뭇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거짓말을 해야 하는 이 상황이 너무 속 쓰리다.
“혹시……나 때문이니?”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역시 이 녀석은 악마야.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거야. 당혹감으로 인해 또 다시 얼굴에 피가 몰렸다.
“무, 무슨 소리야? 너 왕자 병이니? 세상 여자들이 다 너한테 반할 거라고 믿고 있는 거야?”
나의 황당하다는 반응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표정은 무언가 확신에 찬 듯이 보였다. 도대체 뭘 믿고 이러는 거지? 나는 내가 이 녀석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기 힘들 정도로 기가 막혔는데, 녀석은 뭐가 이렇게 자신에 차 있는 거지? 정말 왕자 병 맞는 건가?
“너……날 좋아하는 거지?”
비명이 터져 나오기 직전이다. 정곡을 찔린 데 대한 충격과 함께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이 따위 대사를 늘어놓는 녀석의 뻔뻔함에 질렸다. 낯 뜨겁지도 않나? 어쩌다가 이렇게 뺀질뺀질한 녀석을 좋아하게 됐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저 까맣고 인상적인 눈동자에 빨려들 것만 같다. 아, 나도 진짜 중증이구나. 이런 병은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 거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녀석의 그 눈동자만 바라본다. 그러자 그냥 고개를 끄덕여 인정하고 싶은 충동이 강렬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데, 정말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마법에 걸린 것처럼 몸이 굳어졌다. 조금만 더 승우의 눈동자를 바라보면 그대로 모든 이성을 잃고, 심장의 요구에 따를 것 같았다. 안 돼, 안 돼!
그 때였다. 마법 같은 공기의 흐름을 순식간에 몰아내는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 온 것은…….
“그래, 이런 거였니?”
바로 지섭 오빠의 목소리였다. 전에 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지섭 오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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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하아~추워욧!!
전 왜 방구석에 앉아서도 이렇게 추운 걸까요?
더구나 울 집은 남들은 더워서 견디지 못할 만큼 난방을 빵빵하게 하는데...
지금 방안에서 오리털 패딩 조끼에 이불을 둘둘 말고, 얼음장 같은 손을 호호 불며 이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설마 이런 모습 아니시겠죠?ㅋㅋ
연말이라 바쁘시진 않으신가요?
모임도 많고, 술자리도 많고...건강 해치기 쉬운 시기입니다.
건강 관리 잘하시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