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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 예감 - 제 10 장 - 상처받은 사람들 [29]

유즈나 |2006.01.05 14:44
조회 597 |추천 0

 



4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오래 울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워낙 감정의 기복이 커서 잘 울기는 하지만 금세 운 이유를 잊기 일쑤이던 나 아닌가! 그러나 승우에 대한 생각만큼은 아무리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 해도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었고, 승우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은 자동반사적으로 넘쳐흘렀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지지리 궁상을 떨 거야? 이건 전혀 나답지 않아! 이제 승우 따위 잊고 힘내자!”

 

 그 순간 들려온 초인종 소리에 좀 전의 기백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버리고,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움켜잡았다.

 

 ‘호, 혹시 승우가 돌아온 거 아닐까?’

 

 희망이 꿈틀꿈틀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맞아, 승우도 이렇게 허무하게 끝낼 생각은 없을 거야. 날 사랑하고, 간절히 원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이렇게 쉽게 나와의 사랑을 포기할 리가 없지! 분명히 나에게 차가운 말을 던진 게 후회되어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를 받아들여야 하나? 은혜에게 약속했는데……. 승우와 반드시 헤어지겠다고…….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는 이런저런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지만, 몸은 역시 생각보다는 본능에 따랐다. 그 어떤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문밖의 인물은 승우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들어가도 되겠어요?”

 

 차갑고 메마른 목소리.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승우의 새엄마였다. 승우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상실감이 밀려오며, 다시 주저앉아 울고만 싶어졌다. 아니, 승우의 새엄마가 왜 우리 집에 찾아온 거지? 지난번의 일로 훈계라도 하려고 찾아온 걸까? 하지만 그녀는 우리의 첫 만남을 생각했을 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깍듯이 격식을 차린 말투였다. 그래서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함부로 내칠 수만도 없었다.

 

 “들어오세요.”

 

 무뚝뚝하게 그녀를 방안으로 안내했다. 지난번에 그런 험한 대면을 하고서, 사근사근한 태도가 나올 리 없다. 가뜩이나 심기도 불편한데, 집안을 둘러보는 거만한 그녀의 표정도 거슬리기만 한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

 

 내 말에 대답할 가치도 없다 이건가? 하긴 돈만 있다면 내 주소를 알아보는 거야 일도 아니겠지. 하지만 문제는 ‘왜?’냐는 거다. 나의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녀가 내 숨이 넘어가기 직전,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가씨 시간을 많이 뺏을 생각은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어요. 승우의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세요. 아가씨가 승우를 설득해서, 아버지를 찾아뵙게 해주길 바라요.”

 

 내 문제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이건 또 뭐지? 지금 이 상황에 나보고 어떻게 승우를 설득하라는 거야?

 

 “승우가 전혀 집에 안 들어가나요?”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로 한 번도 집에 온 적 없어요.”

 

 승우의 감정의 골은 내 생각보다도 더 깊은가 보다. 고집불통 녀석인 만큼, 마음의 벽을 쌓으면 그 벽은 남들보다 훨씬 더 두텁고 높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데도 그렇게 고집을 피우고 있는 걸까?

 

 “그걸 왜 제게 말씀하시는 거죠? 승우에게 직접 말하셔야죠.”

 

 “나도 여기까지 오고 싶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승우가 내 말은 들으려 하지도 않으니…….”

 

 “이런 말은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지난번 대화를 들으니 승우가 대화를 기피하는 것도 이해가 되는 걸요. 애초에 새엄마의 존재가 어린 시절 승우에게 상처가 됐던 건 알고 계시죠?”

 

 역시 이 여인에게 호의적일 수는 없었다. 승우가 그녀 때문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 역시 이런 어색한 대화를 집어치우고, 막무가내로 그녀를 내쫓고 싶은 심정이었다. 승우에게 아픔을 준 사람은 나에게도 적이다.

 

 “알고 있어요. 처음부터……승우가 나를 반기지 않았다는 것쯤은…….”

 

 승우의 새엄마는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투에서 조금 전처럼 냉담하지만은 않은, 무언가 희미한 감정의 흔적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를 외면하고 먼 곳에 시선을 고정한 그녀의 눈빛에는……알 수 없는 쓸쓸함이 깃들어 있었다. 설마……나의 착각일까? 혈관에도 차가운 피가 흐를 것처럼 거만하고 냉혹해 보이는 저 여인의 눈에서 고독함을 발견하다니……. 어쩌면 나의 지나친 상상력이 만들어낸 눈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몰래 훔쳐보아도, 나의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한 무방비한 그녀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어쩌면……상처받은 것은 승우 뿐 아니었는지도 모르지.”

 

 머릿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왔나 보다. 이제 다시 감정을 숨긴 여인의 날카로운 눈길이 나를 향했던 것이다. 잠시나마 고독의 빛을 느꼈다는 게 우습게 여겨질 정도로 매서운 눈빛이다. 아, 역시 나의 착각이었던 게 분명해. 내가 지금까지 한 착각 중 가장 황당한 착각. 그러나 내 입은 주인의 생각에서 벗어나 혼자 멋대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왜 여기까지 찾아오신 거죠? 분명 달갑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요. 그냥 보기 싫은 전처의 자식이라면……아버지를 찾아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데. 정 어쩔 수 없으면 다른 사람을 시켜 불러 오게 하든지요. 어쩌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보다 승우를 더 많이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이야기 만들기에 재미가 붙었나, 아주 소설을 쓰고 있다. 이건 너무 주제넘게 앞서 가는 얘기가 아닌가! 휴, 된서리 같은 악담을 듣게 된다고 해도 할 말 없다. 그러나 승우의 새엄마는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나를 노려 볼 뿐이었다. 정지화면처럼 굳어진 모습으로……. 그리고 긴 시간이 흘러서야 조용한 한숨을 내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승우가 어려서 받은 상처를 알고 있어요. 분명 엄마가 돌아가시자마자 새엄마라고 나타난 내가 한없이 미웠겠죠. 그에 대해서는 할 말 없어요.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나도 어리고 철이 없던 때였죠. 승우의 친모가 오랜 병을 앓고 있는 동안 승우 아버지를 만난 건……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좀 더 시간을 두고 여유를 가졌더라도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찌푸린 그녀의 눈가에 주름이 두드러지며 세월의 흔적이 강하게 드러나 보였지만,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그녀의 얼굴은 한층 부드럽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엄마를 잃은 어린 승우를 잘 대해주고 싶었지만……이미 두꺼운 껍질 속에 들어가 나를 배척하는 그 애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죠. 나도 원래 그리 살가운 성격이 아니고, 아이들을 대해 본 적도 없고……. 나는 그저 나에게 상처를 주려는 아이에게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차가운 태도로 대응하는 어리석은 방법을 택했어요.”

 

 승우의 새엄마도 사실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거다. 그저 잘못된 길을 선택했을 뿐……. 그래, 알고 보면 세상에 나쁘기만 한 사람은 없을 거다. 아, 우스꽝스럽게도 나의 눈에 또 다시 눈물이 고인다.

 

 “사실은 승우와 친해지고 싶으셨던 거죠?”

 

 내 눈에 고인 눈물을 눈치 챈 것일까? 나를 보는 그녀의 표정이 한결 풀어져 있다. 그러나 냉담함이 사그라진 만큼, 그 자리에는 쓸쓸함과 우울함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나와 승우 아버지 사이에는 아이가 없어요. 승우 아버지가 세상을 뜬다면……그야말로 난 혈혈단신이죠. 승우야 어떻게 생각하든……나에게 있어 승우는 분명 내 아들이에요.”

 

 그리고 서둘러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건 지금 중요치 않아요. 내가 더 견딜 수 없는 건, 나 때문에 부자지간이 지금까지 반목하고 있다는 거예요. 승우 아버지가 세상을 뜨기 전에……두 사람 사이의 묵은 앙금을 풀 기회가 필요해요.”

 

 “뜻은 잘 알겠지만……잘못 찾아 오셨어요. 지난 번 승우 집에 있었던 건……오해하신 거예요. 제가 잠시 신세를 졌던 것 뿐, 승우와 저는 아무런 사이도 아닌걸요.”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아주 잠깐 동안 ‘특별한 사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이제는 정말 승우와는 ‘아무런 사이’도 아닌 거다.

 

 “전 승우를 설득할 수 없어요. 승우는 이제 제 얼굴조차 안 보려고 할걸요. 승우에게는……제가 아닌 다른 여자 친구가 있어요. 저와 비교도 안될 만큼 착하고 예쁜…….”

 

 제대로 설명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하소연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어느 새 눈이 부어오를 정도로 눈물, 콧물을 흘리며 흐느끼고 있는 나. 승우의 새엄마가 날 얼마나 이상한 애라고 생각하실까?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서 괜히 혼자 눈물을 찔찔 짜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승우 새엄마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야? 이제 다시 볼 일도 없을 텐데…….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냥 맘 편하게 엉엉 울어 버렸다.

 

 “아영 양…….”

 

 내 우는 꼴을 보다 못한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 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승우의 여자 친구는 아영 양이 분명하다고 생각해요.”

 

 “아니라니까요(훌쩍). 승우의 여자 친구는(훌쩍)……은혜라는 예쁜 아이에요. 보시면 아마(훌쩍)……만족스러우실 거예요.”

 

 그러나 승우의 고집은 집터 때문인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승우의 새엄마조차 고집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 말에 전혀 의구심조차 갖지 않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내가 왜 이 곳에 왔다고 생각해요? 단지 잠자리를 갖은 가벼운 여자가 승우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 같아요? 난 지난번에 승우의 눈빛을 봤어요. 내가 아영 양에게 심한 말을 했을 때, 자신이 당한 것보다 더 크게 분노하는 승우의 그 눈빛을. 그리고 아영 양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 지 느꼈어요. 그렇기 때문에 아영 양만이 승우를 설득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예요. 지금도 역시 옳은 판단이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훌쩍)……하지만 이제 다 틀렸어요(훌쩍). 모두 엉망이 되(훌쩍) 버렸는걸요. 도대체(훌쩍)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누구의(훌쩍) 잘못인지 모르겠어요(훌쩍). 분명한 건 이미 늦었다는 것뿐이에요(훌쩍).”

 

 나의 알아듣기 힘든 말을 들으며, 내 앞의 여인이 화사하게 웃어 보인다. 웃는 그녀의 얼굴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녀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늦은 일 같은 건 없어요. 더구나 두 사람이 사랑한다면……. 무슨 오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용기를 내서 그걸 바로잡아 봐요. 아영 양은 무척 용기 있는 사람이지 않아요?”

 

 말을 마치고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당혹스러운 듯 굳어졌다. ‘내가 왜 이런 쓸데없는 소리들을 지껄이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나보다. 그녀는 마법처럼 다시 원래의 냉담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 표정은 긴긴 인생을 얼굴에 가면처럼 덮어 쓰고 산 탓에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그러나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본 후라 그런지, 더 이상 거부감이 들지는 않는다.

 

 

 


 감정을 드러냈던 게 쑥스러웠던지, 다소 어색하고 딱딱한 짧은 인사를 하고 그녀는 떠났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 승우를 설득하기로 한 건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승우한테 말해야 하는 건가? 승우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신 가본데, 그냥 놔둘 수는 없잖아!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정말 내가 용기를 내서 승우와 맞부딪혀야 하는 걸까? 하지만……은혜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다. 두 사람 모두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으니 내가 어떻게 생각해야 한단 말인가!

 

 골치가 아프다. 내 인생에 이렇게 어려운 시험 문제는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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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야기가 후반부로 치닫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글이라(중간에 접어두고 있던 시간이 너무 길었죠;;) 빨리 끝을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강하답니다.

적어도 이번 달 안으로는 충분히 끝내겠구나 하는 생각에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물론 아영이는 제 소중한 자식;;이지만...딸자식을 서둘러 시집 보내고 싶은 기분이 바로 이런 거 아닐까요?ㅋㅋㅋ

 

모두들 오늘 하루도 행복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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