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그래요. 돌아갈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더 이상 말하긴 싫어요.
-.. 무엇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겠단 말이군요.
민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는 씁쓸하게 웃더니 웨이터를 불러 보드카를 주문하였다. 그리고는 민
주 보라는 듯이 스트레이트로 마시기 시작했다.
-지금 뭐하는 거에요?
민주가 크리스의 잔을 빼앗았다. 그러나 크리스는 흘낏 민주를 바라보더니 이젠 아예 벙 째 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자 민주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맘대로 해! 난 갈테니까!
민주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크리스가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민주는 술 집 밖에 쭈그리고 앉아버렸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왜 흐르는 지도 모르는 눈물이.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데, 누군가 민주의 등을 두드렸다. 크리스였다. 민주는 황급히 눈물을 닦고 일어섰다. 크리스는 그렇게 독한 술을 마셨는데도 멀쩡하게 웃고 있었다.
-것 봐요. 나 걱정되서 못 간 거잖아요. 같은 뉴욕에서도 그러면서 나 한국가면 어쩔려구요?
크리스의 말에 민주는 입을 삐쭉거렸다. 사실, 민주는 크리스의 품에 안겨 울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4. 복수는 키스처럼
크리스는 민주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그는 노래를 부르며 걷다가 갑자기 민주를 돌아보고 말했다.
-오늘은 당신, 집에 못 데려다주겠어요.
-당연하죠. 술을 그렇게 먹고요.
민주는 크리스의 손을 꼭 잡았다. 크리스는 민주가 그렇게 손은 잡아주는 것이 너무 좋았다. 크리스는 그런 기분을 오래오래 느끼고 싶었다. 이 손을 놓지 말기를. 크리스는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택시타고 갈게요.
-어? 안돼요. 너무 늦어서.. 위험해요.
크리스는 민주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러자 민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여기서 브룩클린까지 걸어가요? 날씨도 추운데. 당신 술 먹어서 안돼요.
-우리 집에서 자고가요. 내일.. 일요일이잖아요.
크리스는 조용한 목소리로 민주에게 말했다. 민주는 이 남자가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크리스를 바라봤다. 그렇지만 크리스는 정말 진지한 표정이었다. 민주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는 펄쩍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야호!
민주는 잠깐 망설이다 크리스의 아파트에 발을 들였다. 여전히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그녀는 약간 주눅이 들었다. 아주 천천히 소파에 앉은 민주는 크리스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들이키는 것을 바라봤다. 크리스는 민주에게 물을 들어 보였지만, 민주는 고개를 흔들었다. 물을 다 마신 크리스는, 정말 뜻밖에도, 넥타이를 풀어 던지고 수트와 와이셔츠까지 벗어 던지며 민주에게 다가왔다. 민주는 너무 긴장해서 침을 꼴깍 삼켰다. 크리스는 민주 옆에 앉아 그녀에게 기댔다. 참 묘한 분위기가 민주를 감쌌다. 민주는 크리스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약한 알콜 냄새가 풍겼다.
-술 냄새 나요.
민주가 속삭이는 것을 들은 크리스는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요. 좀 씻을게요.
크리스는 욕실 안으로 사라졌고 민주는 피식, 웃으며 텔레비전을 켰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 지, 민주는 머리가 조금 아픈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깜빡 잠이 들었나보다. 민주는 목이 너무 말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튼 틈 사이로 불 빛이 들어와 방 안을 비췄다. 머리가 아파 찡그린 눈으로 옆에 누워 곤히 잠든 크리스가 보였다. 민주는 조금 놀랐지만, 크리스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민주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컵에 따라 한 잔 마시고는 다시 한 잔을 따라 방으로 가지고 와 크리스의 손이 닿는 협탁 위에 올려 놓았다.
방안의 어두움이 눈에 익자, 희미하게나마 잠 든 크리스의 얼굴이 보였다. 신기하게도 그 흐릿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뚜렷해지는 것이었다. 민주는 크리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백인의 피부색에 밝은 갈색 머리카락.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모습. 어디서도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을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국에 가고 싶었다. 몇 년 째 찾아보지 못한 부모님 산소도 돌봐야 했고 친구들도 만나고 싶었다. 그렇지만, 크리스와 함께 돌아갈 수는 없다. 아니, 어쩌면 크리스와 함께 돌아가면 그동안의 악몽을 끝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이기 때문에 안된다. 그에게 아픔을 줄 수는 없었다. 민주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자리에 누웠다.
-깼어요?
크리스가 물었다. 민주는 그 쪽으로 돌아누웠다.
-네.
-소파에서 자고 있길래 침대로 옮겼어요. 내가 옆에 있는 게 불편하면 소파에서 잘게요.
크리스의 말에 민주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오랜만에 누가 옆에서 자니깐 좋아요. 따뜻하고..
크리스는 살짝 미소지었다. 그는 민주에게 팔베개를 해 주며 그녀를 살짝 안았다. 민주 역시 조용히 그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둠이 내린 방안은 더 없이 로맨틱했다. 크리스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도 누군가를 사랑했었겠죠?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죠.
-당신이 어떤 사람을 사랑했었는지 궁금해요.
어디선가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렸다.
-아뇨. 말해주기 싫어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민주의 말에 크리스는 다시 조용히 말했다.
-끔찍했나보죠?
-너무 많이 데어서.. 아직도 아파요.
민주는 약간 울먹거리는 목소리였다.
-그 사람한테 복수하고 싶어요?
크리스의 이어지는 질문에 민주는 당황했지만, 곧 단호하게 말했다.
-네. 복수할거에요.
-...
크리스는 잠깐 동안 망설이는 듯하더니 스탠드의 불을 켜고 일어났다. 민주는 스탠드 불빛 때문에 눈을 두어번 깜박였다.
-그럼 나를 이용해요.
민주는 그의 말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왜요? 당신 아프게 했다며? 그럼 됐어. 당신이 안하면 내가 할게요.
민주는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창가로 걸어갔다. 거리는 아직 어둠에 쌓여 있었다.
-난 괜찮아요.
크리스도 일어나 민주에게 다가갔다. 그는 민주를 뒤에서 안으려 했지만 민주가 그를 밀쳐냈다. 민주는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크리스를 바라봤다. 그녀는 흐느끼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
고 있었다.
-난 괜찮다구요. 뭐가 문제에요?
민주가 소리쳤다.
-그 사람이 진우니까요!
민주의 울부짖음에 크리스는 별로 놀라지 않은 듯,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알고 있어요.
이번에는 민주가 놀랄 차례였다. 민주는 고개를 들고 크리스를 바라봤다. 크리스는 언제나처럼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크리스를 보고 있었다.
-다 알고 있어요. 당신이 진우 연인이었다는 것. 나도 고민 많이 했어요.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되진 않
더라구요.
민주는 그의 말에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다.. 다 알고 있었다고요? 당신 제 정신이에요?
민주는 크리스를 밀어내고 침대로 가서 앉았다. 그녀는 너무 당황해서온 몸이 떨리는 것 같았다.
-내가 아무 상관없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당신은 속으로 날 비웃었겠군요!
크리스는 말도 안된다는 듯 손을 펴 보였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난 한 번도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어요.
크리스는 민주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했지만, 민주는 그런 크리스의 손을 뿌리쳤다.
-손대지 말아요.
-왜 내 생각은 안 해요? 그 사실을 알고 힘들어했을 나는 생각 안해요? 내가 유일하게 사랑을 느낀 여자가 내 동생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기분! 당신 짐작이나 하겠느냐고요.
크리스의 목소리가 잠깐 커졌다. 그러자 민주도 지지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날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어요?
-아무 생각도 안했어요! 내 앞에 있는 당신만 생각했어요!
크리스의 단호한 말에 민주는 할 말을 잃고 그저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크리스는 민주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제발, 난 당신에 대해 다른 생각 해 본 적도 없어요. 처음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사랑하는 거에요. 아
니, 그때보다 지금 더 당신 사랑해요. 그거 모르겠어요?
민주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난 못해요. 같이 갈 수 없어요.
-왜요?
-당신이니까. 당신을 이용할 수는 없어요.
민주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나니까 괜찮아요. 당신이니까 괜찮고.
크리스는 조용히 속삭이듯 말하며 민주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민주는 다시 흐느꼈다.
-울지마요, 제발.
크리스는 민주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나 때문에 울지마요.
-안 울게요.
민주는 여전히 울먹이며 말했다. 다음이었다. 크리스가 민주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한 것은. 가벼웠지만, 충분히 달콤한. 민주는 깜짝 놀라 크리스를 바라봤다. 그는 구겨진 이불을 다시 반듯하며 정리하며 모르는 척 말했다.
-더 자요.
민주는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셨다.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크리스가 창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주는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잘 잤어요?
-몇 시에요?
-11시. 보기보다 잠꾸러기네.
크리스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민주는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려다봤다. 겨울의 밝은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냥 서 있으니 따뜻했다.
-씻고 식사할래요?
크리스의 말에 민주는 뒤를 돌아봤다.
-이거. 아침에 밖에 나가서 사왔어요. 좋아할 지 모르겠네. 처음 이런거 사봐서..
크리스는 쇼핑백을 건네고는 쑥스러운 듯 밖으로 나갔다. 쇼핑백을 열어본 민주는 웃음을 터트렸다. 속옷 세트와 핑크색 파자마 세트였다. 민주는 속옷 가게에서 고민했을 크리스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소리내서 웃었다. 밖에서 민주의 웃음 소리를 들은 크리스 역시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잘 입을게요.
민주는 크리스의 뺨에 키스하고는 욕실로 달려갔다.
이제 봄이네요~ ^^
좋은 일주일 시작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