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청년’ 고수(24)를 만났다. 데이트 장소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카페. 고수는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잠을 두 시간밖에 못 잤어요”라며 애교섞인 푸념부터 했다. STV 드라마스페셜 ‘순수의 시대’에서 주인공 태석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는 그는 ‘초치기’ 제작일정에 맞추느라 요즘 극심한 수면부족에 시달리며 강행군을 하고 있다. 고수는 졸린 눈을 가누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입가에는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세상의 근심을 몽땅 날려버릴 듯한 고수의 미소는 정말이지 언제 봐도 멋지다.고수의 졸음도 쫓을 겸 빙수 한 그릇을 주문했다. 고수는 “올 들어 빙수를 처음 먹어본다”며 아이 마냥 신나하더니 연방 숟가락을 갖다 댔다. 가수 윤종신의 ‘팥빙수’란 곡의 노랫말처럼 ‘여름엔 빙수가 왔다(최고)’인 모양이다. 과묵하기로 소문난 그가 종전의 피곤한 기색은 온데간데 없이 입안에 얼음조각을 굴리면서 얘기꽃을 피웠다.
“한달 새에 몸무게가 5㎏이나 줄었어요. 살이 빠져 더 어리게 보일까봐 걱정이에요. 제 나이가 어느덧 20대 중반인데, 어려 보인다는 말은 듣기 싫거든요. 이번 드라마에 출연한 소감이요? 처음엔 신기했어요. 출연진 자막에 ‘고수’란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오는 걸 보는데 이게 진짜인가 싶더라고요. 근데 요즘 태석이 때문에 무척 힘들어요.”
태석 얘기가 나오자 그의 눈빛은 진지해졌다. 고수가 맡은 태석은 사랑(지윤-김민희)과 우정(동하-박정철) 사이에서 애처로울 정도로 번민하는 인물이다.
“만약 본인이 태석이었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느냐”고 물었다. 고수는 고개를 숙인 채 빙수 그릇을 숟가락으로 휘휘 젓더니 한참 만에 말문을 열었다.
“지윤을 그저 좋아하는 수준이었다면 단호하게 우정을 택했을 거예요. 끝까지 지윤에 대한 감정을 숨겼겠죠. 하지만 그게 인생에 단 한 번뿐일지도 모르는 운명 같은 사랑이라면 상황은 달라질 것 같아요. STV ‘피아노’에서도 그랬는데 또 힘겨운 사랑을 만났네요. 이번엔 좋은 결실을 봤으면 좋겠는데….”
“운명적인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느냐?”고 묻자 “물론이다”란 명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번엔 고수가 되물었다. “예나 지금이나 제 자신은 순수하다고 생각하는데 남들 눈엔 어떤가요? 저, 조금도 변하지 않았죠?”
고수는 변했고, 또 변하지 않았다. 고수를 처음 본 것은 그가 신인탤런트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2000년 초였다. 당시 그는 MTV 일요아침드라마 ‘눈으로 말해요’에 출연 중이었는데, 또래 신인들 가운데 유난히 돋보였다. 말투나 행동은 능숙하고 세련된 것과 거리가 멀었지만 세상에 대해 궁금한 것 투성이란 듯한 호기심 어린 눈빛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특히 불이 꺼진 촬영세트에 홀로 남아 대본을 든 채 연기연습에 몰두하는 그의 모습은 범상치 않았다. 잠시 그때를 회상하다가 정상급 청춘스타로 성장한 현재의 고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옷과 머리 모양은 예전에 비해 한층 멋있어졌고, 배역을 대하는 자세는 어느새 성숙한 연기자의 의젓함을 풍긴다. 그런 점에서 고수는 분명 변했다. 그러나 가식과 포장을 모르는 말투와 풍부한 감성이 담긴 눈망울은 예전 그대로였다.
드라마를 끝내고 난 뒤에 관해 물었더니 설레는 표정으로 등반 여행을 떠날 계획이란다. 산장에서 낯선 산사람들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는 게 즐겁다나. 이럴 때 보면 고수는 디지털시대에 걸맞지 않은 구세대 같다. 그는 ‘n세대 스타’나 ‘꽃미남’ 같은 수식어는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며 양 손을 내저었다.
연기자의 삶을 등산에 비유하면 얼만큼 오른 것 같으냐는 질문에 고수는 “이제 막 등산 장비를 갖추고 산에 오르기 시작한 때”라고 말한다.
청산유수로 말 잘 하고 그럴 듯한 인물보다 허술하고 상처 많은 인간상을 연기하는 게 더 좋다는 그는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아는 듬직한 청년이었다.
조재원기자 jone@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