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영국 맨체스터 근교 하이드라는 작은 마을에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명의(名醫)이자 따뜻한 '이웃 아저씨'로 주변의 존경을 받고 있던 헤럴드 시프먼이라는 의사가 환자 15명을 살해, 영국 사회를 일대 충격 속에 빠뜨렸다. 이 의사는 살인 혐의로 종신형이 확정됐지만 여죄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더욱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그가 살해한 환자가 무려 200명이 넘는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영국 정부의 조사위원회는 지난 7월 "이 의사는 24년에 걸쳐 215명 이상을 살해해왔다"는 공식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세계 범죄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엽기적인 연쇄살인 사건이다.
사람의 인적이 뜸한 골목. 눈에 띄는 건물이라야 마을 한가운데 있는 교회 정도인 조그만 도시 하이드의 주민들은 이곳을 '죽음의 골목'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곳에 시프먼이 운영하던 병원이 있기 때문이다. 한 남성 주민(51)은 "생각하기조차 싫다. 내가 아는 사람도 2명이나 살해됐다"며 몸서리를 쳤다.
시프먼의 살인 행각이 들통난 것은 1998년. 당시 81세였던 한 할머니는 단골의사인 시프먼의 왕진을 받은 직후 자택에서 급사했다.
사인은 심장마비. 할머니는 평온한 표정으로 안락의자에 앉은 채 세상을 떴다. 의사 시프먼은 유가족들에게 찾아와 애도를 표하며 할머니가 더 좋은 세상으로 가셨다며 위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큰딸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희생자 대부분 70세 넘은 여성
고령이기는 했지만 어머니는 건강했고 감기 증세로 약간 고생했을 뿐 심장 이상 따위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큰딸이 결정적으로 의심을 하게 된 계기는 이 할머니가 남긴 유서였다. 유서에는 "전 재산을 시프먼 의사에게 넘긴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큰딸은 경찰에 신고했고 수사 결과, 유서는 시프먼이 위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할머니의 시신에서는 대량의 모르핀이 검출됐다. 결국 시프먼은 살인 용의자로 체포됐다.
경찰은 수사를 진행하면서 시프먼이 검진한 환자 중 다수가 할머니처럼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시프먼은 혐의를 전면부인했지만 2000년 1월 15명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영국에 사형 제도가 있었더라면 당연히 극형에 처해져야 마땅할 흉악한 범죄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사건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희생자가 더 있다"는 주민들의 주장에 따라 영국 정부는 고등법원판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위원회를 가동시켰다.
위원회는 시프먼의 진료를 받고 사망한 494명을 대상으로 연쇄살인과의 연관성 여부를 조사했다. 1년간에 걸쳐 조사한 결과 위원회는 시프먼이 수련의 생활을 시작한 1975년부터 살인 행각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으며 24년 동안 적어도 215명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시프먼이 살해했을 것으로 의심이 가는 환자 45명을 포함한다면 최대 260명에 이를 수도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희생자는 41세에서 93세 사이의 성인들로, 여성이 80%(171명)를 차지했으며 82%가 70세 이상의 고령자인 것으로 조사됐다.
시프먼은 주민들로부터 신뢰를 받았던 가정의(왕진전문의사)였다. 그같은 신분을 이용, 왕진한 환자의 집에서 대량의 모르핀을 환자에게 주사해 살인을 거듭한 것이다. 사망진단서에는 '심장발작' 등 거짓 사인을 적어넣었다. 게다가 생전의 진료카드까지 조작해 사인에 의문을 품지 못하도록 '공작'했다.
시프먼은 체포된 이후 지금까지도 일관되게 "통상의 의료행위를 했을 뿐"이라며 범행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생명을 지켜야 하는 의사가 왜 약을 사용해 대량 살인을 저질렀을까. 최대 의문은 바로 시프먼의 범행 동기다.
범죄 전문가들은 연쇄살인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젊은이가 금품을 탈취하거나 성적 욕구를 충족할 목적으로 행하는 것'을 전형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시프먼은 체포될 당시 나이가 51세였다. 게다가 명의라고 추앙받고 있던 지역의 명사(名士) 아닌가. 체포의 계기가 된 유서 위조 사건 이외에 금품을 노린 다른 범행도 없었다. 더욱이 희생자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 뿐이고 성적 폭행을 했다는 증거도 없다. 수법도 '비폭력적'이다.
현지 언론에서는 시프먼의 범행 동기가 '그의 어머니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시프먼의 어머니는 그가 17세 때 폐암으로 사망했다. 당시 시프먼은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소년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학교 성적도 우수하고 모범생이었던 시프먼을 거의 맹목적으로 사랑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 어머니가 사망하자 시프먼의 충격은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정신의학 전문가들은 당시 시프먼이 "어머니보다 오래사는 여성에 대해 잠재적인 '적개심'을 가졌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뚜렷한 범행동기 없어 의문 증폭
범행 동기와 관련, 그 역시 모르핀 중독자였기 때문에 이같은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시프먼은 암으로 고통받았던 어머니가 모르핀 주사를 통해 통증으로부터 해방되는 장면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여기서 모르핀의 마력에 사로잡혔을 것이란 지적이다.
조사 결과 시프먼이 의사라는 신분을 이용, 병원에서 모르핀을 몰래 빼돌려 범행에 악용해왔으며 자신도 일부 투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위원회의 재닛 스미스 위원장은 "약물중독자는 특정 행위에 대해서도 중독 상태에 빠지기 쉬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마약중독이 살인중독으로 발전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시프먼이 환자가 생명을 잃어가는 순간의 흥분을 즐기는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스미스 위원장은 "현대는 인간을 단순한 집합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환자를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은 이번 사건은 그 경향을 극단으로 반영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시프먼은 범행 동기를 함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범행자체를 부인하고 있어 정신분석의와의 면회도 거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범죄 동기를 둘러싸고 갖가지 설이 난무하고 있는 가운데 영국에서는 의사들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위협받고 있다.
일간 〈인디펜던트〉는 "이제 환자들이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이 사건을 계기로 환자들은 의사들의 소견이나 2차 견해를 묻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하며 의사들은 환자들이 권리를 주장할 때 화내지 않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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