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히(Zurich).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스위스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인구 35만의 이 도시에 최근 뜻밖의 손님들이 몰려들고 있다. 불치병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자살 여행’을 떠나온 죽음의 관광객들이다. 취리히는 이들에게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일까. 왜 이들은 삶의 마지막 장소로 취리히를 선택하는 것일까.
■ 자살 전령사 디그니타스
라틴어로 ‘존엄,가치,위엄’을 뜻하는 디그니타스(Dignitas)는 지난 98년 취리히에서 설립된 비영리 단체의 이름이다. 육체 또는 정신적으로 치료 불가능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도록 돕는 게 디그니타스의 설립 목적. 시사주간지 ‘타임’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디그니타스는 지금까지 125명의 자살을 알선했는데 그중 대다수는 외국인이었다. 또 현재 이 단체에 가입한 회원은 1,800여명에 달한다.
불치병 환자들이 디그니타스를 찾아 스위스로 몰려드는 이유는 자살에 관한 한 스위스의 법률이 그 어느 나라보다 관대하기 때문이다. 스위스 국내법은 의사가 치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환자에게 자살을 위해 독극물을 제공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단 의사나 제3자가 아니라 반드시 환자 본인이 아무런 도움 없이 직접 자신의 몸에 독극물을 투여해야한다.
■ 죽음에 이르는 길
연회비 17유로(약 2만1,000원)를 내면 디그니타스 회원이 된다. 디그니타스와 연계된 의사에게 자신의 의료 기록을 보내는 게 첫 관문. 의사가 불치병이라고 판정하고 본인도 결심을 굳히면 자살 희망자는 취리히로 ‘마지막 여행’을 떠나게 된다. 거사 장소는 취리히 시내 한 아파트. 살인 혐의를 피하기 위해 디그니타스 직원과 환자의 친척,두 사람의 증인이 반드시 입회한다.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환자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은 채 고체 독극물을 삼키거나 정맥 주사 스위치를 열어 영원한 잠에 빠져들게 된다. 이때 사용되는 약물은 간질 발작이나 불면증 치료에 사용되는 바르비투르산염. 회원 가입부터 자살까지 걸리는 시간은 보통 3∼4개월 정도다.
■ 격렬한 찬반 양론
디그니타스의 설립자 루드빅 미넬리는 지난해 9·11테러 때 고열과 화염을 피해 세계무역센터에서 뛰어내린 사람들에 비유하면서 “끔찍한 통증과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행동”이라고 말했다. 그는 “모든 사람은 위엄있게 죽을 권리가 있다. 내게는 자살을 원하는 사람들의 여권(국적)은 중요하지 않다”며 외국인들의 ‘자살 관광’에 대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태도다.
그러나 반대론자의 비난은 거세다. 국회의원 도를레 발레더는 “관광객이 점심 나절 스위스에 도착해 저녁이면 숨진 채로 발견된다. 이는 우리가 원하는 국가 이미지가 아니다”며 스위스가 자살 천국으로 비쳐질 것을 우려했다. 발레더는 최근 외국인을 ‘도움 자살’ 대상에서 제외하는 내용의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디그니타스의 ‘고객’ 중에 정신질환자가 일부 포함된 것도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다. 베른대학병원 정신과 토머스 쉴래퍼 교수는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이들을 돕는 것은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옳지 못하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디그니타스의 활동을 막을 만한 법적 근거가 없어 취리히행 자살 여행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뉴스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