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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사랑 (1장/ 92년 12월...) <13년 전, 실극화>

지금처럼만 |2006.05.01 09:22
조회 416 |추천 0

띨리리링~~


"여보세요?"

차분하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추림은 순간 가슴이 터질듯이 부풀어 올랐다.


"여보세요?"


침착하게 추림이 수화기를 통해 말하자 저쪽에서 다시 여보세요.... 하며 응대해왔다.


"저 혹시... 유미 아니니?"

"......"

추림의 말에 상대가 긴장한 것일까... 추림은 분명한 유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는 애써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기다렸다.

순간적으로 수 많은 기억들이 떠오르고 조금의 후회도 밀려들었다.

날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미 수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과연 그녀는 날 기억하고 있을까?


"너 추림이지? 세상에.....!"


그때 추림의 귓가로 유미의 탄성이 들리며 살짝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응. 나야. 잘 지냈어?"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추림이 담담한 듯 물었다.


"그럼 잘 지냈지. 그런데 너 어디야? 이게 몇년 만인거니 도대체?"


유미의 따뜻한 음성에 추림의 입가로 살포시 웃음이 생겨났다. 역시 날 기억하고 있었다.


"나 잠실쪽에 있어. 본지 꽤 되었지..."


어딘지 기운 없어 보이는 음성이었다.


"전화번호 어떻게 알았어? 세상에 난 니가 죽은줄 알았어. 연락이라도 하고 살지 그게 뭐니?"


추림은 유미의 말을 들으며 전화기 곁에 놓여진 작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좀 바쁘기도 했고 살다보니 뭐... 어디 아픈데는 없어?"


정말 유치한 질문이라 생각했다. 겨우 그런 질문이나 하려고 전화한건 아닌데, 하지만 지난 세월만큼이나 할 수 있는 말들도 그만큼 제한되어 있었다.


추림은 거울속에 비추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눈빛을 처연하게 빛냈다. 파리하고 허무한 얼굴 모습.

야위고 기운없는 두 어깨... 그것이 지금의 추림 그 자신이었다.


"있잖아... 추림아! 우리 보면 안될까?"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것이다. 유미의 그 말을 들으며 추림은 순간 가슴이 꽉 막힌듯 중압감을

느끼며 목 아래쪽에서 무언가 울컥하고 치솟았다.


"그래. 나도 너 보고싶어. 봐야지... 언제 볼까? 이번 주말쯤이 좋을까?"


울면 바보같겠지? 뭣 때문에 눈물이 나려할까? 감동인가? 아닌데...

추림의 벌겋게 충혈된 두 분이 깜박거리며 작은 물방울을 흘려냈다.


"나 보고 싶지 않았어?"

유미의 거침없는 질문에 추림은 참고있던 눈물을 흘렸다.

당연히 보고싶었다. 한시도 잊은적이 없었다. 세상에 널 어찌 잊을수 있니...


"응... 아주 보고...싶었어..."


투명하게 굵은 눈물이 볼 언덕을 타고 입가를 스치며 흘러 내렸다.

거울속에 추림의 얼굴은 하얗게 웃음지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반짝하고 두눈이 빛나며 추림의

머릿속으로 과거의 단편들이 떠올랐다.


* * *


1992년 12월 31일.


"에이 되게 많이도 내리네!"


짜증스런 말을 내 뱉으며 추림이 미끄러운 길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걸었다.

가히 인산인해라는 말이 어울릴만한 사람들의 무리가 질퍽하게 녹아내린 도심의 길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수시간째 쏟아진 눈 때문에 길은 엉망이었다. 눈이 내려 한해의 마지막 날을 축복하는 듯 했지만 그것이 녹고 더럽게 변해버려 눈이 지닌 순결함은 퇴색되어 버렸고 불쾌감만 가중 시켰다.

한참을 걸어 목적지 근처에 다다랐다.


저 멀리 카페 티파니가 보였다. 작고 아담한 간판이 파란 네온을 빛내며 막 어두워지기 시작한 밤을

빛내고 있었다.

외국어 대학이 자리하고 경희대와 고려대가 있어서인지 유난히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 이점을 이용해 작은 누나가 작년에 차린 주점이었다.

티파니의 간판이 보이자 추림의 가슴이 흥분으로 가득했다.

스무살이 되는 해를 맞이하게 되며 이제 성년이 되는 것이다. 친구들과 그것을 자축하기 위해 추림이 일부러 친구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다들 왔으려나 모르겠네?"


당연히 다 와있을 것이다. 시골서 상경하고 막 서울 생활에 적응해 가는 놈들이니 좋아라하고 왔을

것이다. 안 오면 그게 바보다.

티파니 입구에 서서 스텐레스 기둥에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검은색 스트라이프 정장... 이놈은 굉장히 파격적이다. 그만큼 돈이 들었고 신경쓴 놈인 것이다. 영등포 현대 백화점에서 무려 오십만원이나

주고 사입은 놈이다.

아직 앳되고 치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제법 잘생긴 얼굴이었다.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을 밝고 지하로 내려갔다. 티파니는 지하에 위치한 주점이다.

뜨거운 열기가 확하고 얼굴을 덥혀왔다. 크리스마스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흔적이 티파니의 입구에 선명하다. 츄리며 장식들 엽서하고 인조 눈 뭉치들.... 추림이 누나를 도와 치장한 것들이었다.

딸랑~

추림은 이 소리를 굉장히 싫어했다. 입구의 문에 방울을 달아 놓아서 손님의 방문을 알리기 위한 것이지만 들어가고 나올때마다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다.


예상되로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여기가 특별해서 그런것이 아니고 때가 특별한 것이다. 망년히와 송연회... 한국사람들은 명절보다도 그것들을 더 신경쓰는 민족이었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왔어?"


맑고 고운 목소리가 들리며 눈에 확 띄는 미모의 여자가 반겨왔다.


"응. 사람들이 굉장히 많네! 자 이거. 선물."


추림이 품에서 작은 포장지에 쌓인 꾸러미를 내밀자 고운 치아를 드러낸 향미가 덥석 받아들었다.


"누나는 뭐 없어?"


추림의 일곱살 위인 둘째 누나가 그녀였다. 추림이 뭔가 기대한듯한 얼굴로 묻자 향미가 베시시

웃었다. 누나지만 참으로 예쁜 여자였다.


"넌 선물을 꼭 주고 받아야 하니? 마음으로 주면 그게 더 큰 선물이야."


"됐네요! 그건 그렇고 애들 왔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추림이 묻자 향미가 돌아보며 한곳을 가리켰다. 추림에겐 사각이 있어 보이지

않는 장소였다.


"너만 늦었다. 나 바쁜데 도와줄거지?"


"누나는 날 종업원으로 써먹으려고 주말마다 오라고 하는거야?"


"맞아. 잘아네. 바빠 도와줘 응?"


당연히 도와줄거지만 괜히 심술을 부려보는 추림이었다.


"잠깐만 친구들 좀 보고."


추림이 팔장을 끼며 달라붙은 향미의 팔을 떼어내며 걸음을 옮겼다.

소란스러운 소음이 가득한 티파니는 열기로 가득했다. 낮엔 차와 식사를 만들어 팔지만 저녁엔 온갖 종류의 술을 파는 주점으로 돌변하는 곳이어서 제법 이름이 난 곳이다.

싸고 많고 다양하고 빠르게... 이것이 누나의 모토였는데 그것이 적중해서 매상은 좋았다.


"새끼들 거 되게 시끄럽게 놀고있네."


롱코트를 벗어 손에 들고 추림이 친구들이 자리한 테이블로 다가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말하자

시선이 집중되었다.


"왔냐? 늦었잖아 새끼야!"


"오랜만이다 추림!"


"안녕!"


여기저기서 손이 내밀어지고 인삿말이 오갔다. 그러다가 추림의 눈에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는 얼굴이다. 본지 오래되긴 했지만 분명 아는 얼굴이었다.

김수연. 중학교 이후로 한번인가 보았던 친구였다.


"너 수연이구나? 야 정말 오랜만이다."


추림이 작고 이쁘장한 얼굴을 한 김수연을 알아보고 환하게 웃자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때문에 왔는걸. 정말 오랜만이다."


수연이 작고 하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해왔다. 앙증맞은 손이다. 맞잡고 흔들어 주었다.


"얜 내 친구 유미라고 해."


수연이 곁에 앉은 친구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이추림입니다."


길게 기른 생머리에 연한 분홍색 파커를 걸쳤다. 짙은 눈썹과 두눈이 무척이나 깊어 강렬한 인상이

느껴지는 여자였다. 적당한 키가 늘씬했다.


"유미에요. 실례좀 할께요."


낮고 차분한 음성이었다.


추림이 순식간에 친구들에게 둘러쌓여 잡담이 이어졌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더러 있는지라 근황을 묻고 그동안의 일들을 정신없이 늘어놓았다.


"추림아 이 누나는 보이지도 않는거니?"


그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추림의 눈에 큰 키에 파머 머리를 한 여자가 보였다.

"어? 상희누나! 없던데요?"

추림이 일어서서 반갑게 대하자 상희가 입술을 삐쭉거렸다.

누나의 후배다. 그런데 추림에게 늘 피하고 싶은 여자였다. 말하자면 작은 유혹 같은 것을 던지곤

했는데, 나이차가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바쁜데 일 좀 도와주지 않을래?"


"에이.... 알았어요."


누나에게 불려 나왔을 상희였는데 종업원에 그녀까지 모자라 추림을 부려먹으려고 하는 향미의

심술에 잠깐 짜증이 났다.


"새끼들아 많이 처먹지 말고 적당히 마셔! 이 형님은 잠시 다녀오마"

벌써 얼굴들이 벌겋게 달아오른 놈들이어서 걱정이 된 추림이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그래 어서가봐라! 넌 있으면 부담만 된다."


"가서 오지마 제발 부탁이다."


여기저기서 왁짜한 놈들의 말들이 튀어나왔다.


"새끼들... 하는 짓들하고는."


추림의 눈에 놈들이 하는 짓이 너무 뻔하게 보여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유미라고 했던가? 그녀에게 정신이 팔려 수작질에 정신이 없는 놈들로 변해 있는 것이다.


"5...4...3...2...1!"


사람들의 함성이 카운트가 끝나자 티파니를 떨어 울렸다.

벽면에 올려진 TV를 바라보며 모두 그렇게 소리를 내지르며 악을 써댔다.

종로 보신각에서 타종이 울리고 수천 수만명의 인파가 새해를 맞으며 복을 빌고 폭죽을 터트렸다.

종로와 티파니의 열기와 기분이 최고조에 달했다.


"에이 신발!"


졸지에 티파니의 종업원이 되어 친구들과 제대로 술자리도 같이 하지 못한 추림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누나 이거 너무한거 아니야?"


"아 준다니까! "


"누가 돈 달래? 이게 모냐구? 나 이제 여기 안와."


"삐졌어?"


"......!"


당연히 토라졌다. 하지만 누나라서 애써 참고 있는 추림이었다.


"이제 가서 술마셔. 조금 한가해졌어"


추림이 향미의 말에 얼굴을 환하게 바꾸며 잽싸게 달려가 버렸다.

술자리에 다가가자 얼굴들이 벌겋고 두 눈들이 충혈된 친구들은 절반이 오버해서 술을 마신 상태였다.


"너 되게 오랜만이다."


자리를 비집고 앉자 수연이 잔에 맥주를 따라주며 말해왔다.


"음 오랜만이지. 이년전에 한번 잠깐보고 처음이지?"


"그때 구정때였나 그랬을거야. 거의 이년정도 되었네. 잘 지냈니?"


"그럭저럭. 너 많이 이뻐졌구나."


추림의 말에 수연이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술기운 탓인지 양볼이 붉게 물들어 한결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넌 멋있어졌어. 니가 항상 친구들 중에 가장 어른같았어. 여전하구나."


이제 갓 스무살이 된 놈들이 술은 노련한 꾼들이었다. 하는짓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유미라고 했던가? 관심이 집중되어 그녀앞에만 술잔이 다섯개 이상이 되었다.


"니얘기 자주 들었어. 강수하고 자주 통화하고 그랬거든."


수연의 말에 추림은 절반정도 정신이 나간 강수를 바라보았다. 시골에서 최고의 수재고 천재라고

불렸던 친구였다. 놀기 좋아하는 놈치고 공부 제대로 하는 놈 없다지만 저놈은 예외인 놈이다.

잘 놀고 공부도 최고였다. 잘난 얼굴이고 늘씬한 체구를 지녔다. 하지만 하는짓은 개판인 놈이 저놈이었다. 어릴때부터 엄한 부친의 가르침에 원치않는 공부에 매달린 불쌍한 놈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때 천자문을 떼고 중학교때 사서와 삼경을 읽던 놈이었다.

저놈은 수연이하고 같은 동네에 살았다. 그것도 삼분도 안되는 거리에 살았던 것이다.


"별로 말이 없는 분이시네요."


그때 유미가 말을 걸어와 추림이 고개를 돌렸다.

처음과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유미가 차분하게 추림을 마주 바라보았다.

역시 눈이 깊다. 한번보면 절대 잊지 않을것 같은 깊은 인상을 지닌 여자였다.

그런데 두 눈이 매우 슬프게 보인다고 느낀것은 추림의 착각이었을까?


"아니... 그런건 아닌데... 좀 그러기도 하지만..."


별로 할말이 없던지라 버벅거리며 추림이 입을 열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유미가 웃었다.

눈웃음을 친다. 선천적으로 지닌 눈웃음이었다. 남자들에게 가장 짙은 인상을 주게되곤 하는 표정중에 하나가 여자의 눈웃음이다.


"술 한잔 받으실래요?"


새맥주를 들고 내밀자 추림이 빈잔을 들었다.


"고맙습니다."


술을 가득 따르고 건배를 청해오는 유미에게 잔을 내밀었다.

쨍하고 잔이 부딪히자 추림의 마음에서 작은 격랑같은 것이 파동치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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