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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사랑 (7장/ 암연의 시간들..) <13년 전, 실극화>

지금처럼만 |2006.05.09 09:30
조회 197 |추천 0

추림은 그리 크게 취하지 않았다.

그것은 수연도 마찬가지였지만 아마 노래방을 들르지 않았다면 둘의 상태는 더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추림은 어제와 오늘 이틀 연속으로 과음했기에 몸이 매우 무거웠다.

노래방을 나왔을 때가 열한시쯤 이었다. 본래의 목적은 수연의 고민이었는데 일단

그것만큼은 거의 성공적이었다. 노래방에서 추림은 단 세곡의 노래만 불렀고

한시간이 넘도록 수연은 혼자서 마이크를 차지했다.

오는길에 맥주 서너병과 마른 안주 몇가지를 샀다.


"어?"


빌라가 가까워졌을 때 창문에 불이 훤한것을 발견한 추림은 가슴이 철렁했다.

추림이 출근하면서 절전하는 것만큼은 지켰기 때문에 그가 켜놓은 것이 아니었다.

'하필 이럴 때... 못말리겠군!'


속으로 누가 와 있는지 직감한 추림은 조금 난감한 상황이었다.


"왜 그래?"


추림의 탄성에 수연이 피곤한 목소리로 이상하게 물어왔다.


"응. 누가 와있다. 아마... 오해하지는 말아라... 난 아주 결백하니까!"

"......?"


수연이 멀뚱한 얼굴로 추림을 바라보았다.


"오해? 결백? 빨리가자 나 추워!"


입구로 들어서면서 추림은 호흡이 거칠어 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집안에 멀쩡한

여자가 있다면... 난감했다. 그렇다고 수연을 돌려 보낼수도 없었다.

예상대로 선주였다. 현관문을 여는 소리에 다가오던 그녀의 발검음이 딱 멈추고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 그건 수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선주를 바라보고 추림을

응시하며 이마에 주름을 선명하게 그려냈다.


"젠장! 그래 좋아. 니네 다 내 마누라해라? 됐냐? 선주야 나 이제부터 니 남편이다.

수연아 니가 둘째 마누라 해야겠다."


그 말을 내뱉은 추림이 신발을 벗고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리자 수연과 선주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수연은 조금 전, 추림의 말과 행동을 비로서 이해하자

속에서 욱하고,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냥 나가 버리려 하다가 오기가 발동했다. 설마 추림이 자신의 집에 여자를 들이고

있을줄은 상상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고 그의 성품으로 만약 그렇다고 해도 말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냥 가버리기 싫었다. 그게 질투이던 뭐던

수연은 이 키가 크고 귀엽게 생긴 여자와 추림과의 관계를 알고 싶었다.


"전 수연이라고해요. 추림친구죠. 오늘 만나서 술 한잔 마시고 자고 가려고 왔는데...

오해는 마세요. 그냥 친구니까요?"


선주의 얼굴은 조금전에 이미 어느정도 부드러워져 있었다.


"전 최선주예요. 추림의 여자친구... 아니 애인이죠! 들어 오세요.

뭐. 제가 주인없는 집에 허락도 없이 와 있던것이 이상했네요."


수연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친구인지 애인인지는 추림을 통하면 금방일 것이지만

일단 그녀의 행동으로 보면 절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추림을 죽자하고 좋아하는

선주의 반응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녀 자신도 객이지만 그녀는 이미 전례가 화려한,

평범치 않은 손님인 덕에 수연보다는 더 뻔뻔해도 될 터이지만 그녀가 이렇게 별

무리없이 수연을 대하는것은 그녀가 자라며 익혀온 환경 탓이었다.

친구와 애인의 구분이 애매하다면 애매하고 확실하다면 확실한 나라에서 자란

탓이었다. 여자이든 남자이든 친구가 친구집에서 자고 가는것은 평범한 일이었던

것이다.


"수연아. 여기 이거 갈아 입고. 화장실은 저쪽이다. 넌 이방에서 자고...

선주야 너도 자고 갈래?"

수연에게 추림이 자신의 츄리닝을 건네고 잠시 집안을 안내한 그가 선주에게 묻자

대답이 바로 들려왔다.


"당연하지? 언제는 안자고 갔나?"


천만의 말이다. 여지껏 오면서 딱 한번 자고갔는데 그때도 아침에 들어와서 겨우

세시간을 잤으니 절반은 틀린 말이고 어거지에 가깝다.


"최선주씨! 나 죽이고 싶으면 계속하시던지? 나 갈테니까 당신들 둘이서 마음대로

해볼테냐?"

추림이 심각한 어조로 말하자 선주의 입술이 삐죽이 튀어나왔다. 반면에 작은 방으로

들어가며 수연은 헛기침을 토했다.


"언제왔어? 연락도 없이... 나 장난하는거 아닌지 알지?"


"두시간 됐어. 아홉시전에는 올 줄 알고 왔는데... 미안해. 이러지 않기로 했는데."

선주는 꽉 막힌 여자가 아니다. 오히려 대화하기 편했고 고집센 스타일도 아니었다.


"오해마라 친구다. 고향 동창이야. 같이 술 한잔 했는데... 자고 내일 걸 거니까...

집이 멀어서 내가 보내지 않 았어."


구구절절 핑계를 늘어 놓거나 설명하는 스타일이 아닌 추림은 딱 알아듣게만

이야기를 해주었다. 동시에 수연의 자존심도 세워 주었다. 작은 방에서 옷을

갈아입던 수연의 입에 고소한 미소가 짙게 번지고 있다는 것을 추림은 몰랐다.


"피이... 내가 뭐래? 그냥 이런 상황에서 이상하지 않으면 그게 사람이니?"


선주가 약간 서운한듯 퉁명하게 말하자 추림이 술병을 바닥에 늘어 놓다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래 공주님 말이 맞아. 내가 죽도록 맞아주면 되겠어? 아니면 우리 다시 보지말까?"


그러자 선주의 얼굴이 거짓말 처럼 펴졌다.

그녀가 가장 겁나게 생각하는 추림의 말 중에서도 가장 싫어하는 말이 그 말이었는데, 추림은 딱 두번 써먹어보고 바로 알았다. 지난 번 그 이상한 이야기 뒤로도 그녀는

변한것이 없었는데 그럴수록 추림은 부담감만 더 커지고 있음을 그녀는 몰랐다.


* * *


"이추림씨 전화 왔어요."


계단 위에서 고개를 삐죽 내민 사무실의 미스박이 소리치자 고개를 돌려 끄덕인

추림이 얼른 다가갔다.


"전화? 누구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계단을 올라 경리과로 다가가자 팔짱을 끼고 추림을

지켜보던 박지혜가 새침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또 여잔데? 넌 정말... 언제 나랑 영화볼거야? 어제도 술마셔놓구. 죽을래?"

세살 위인 박지혜는 추림이 입사하고 육개월쯤뒤에 입사한 경리과의 사원이었다.


"영화? 내가 왜 너랑 그걸 보는데? 나 시간없거든? 좀 비켜주실래요?"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추림은 절대 누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씨끄러운 기계의

소음들 때문에 어쩔수 없이 크게 소리친 추림을 매섭게 노려보던 박지혜가 길을

비켜주지 않고 더욱 막아섰다.


"왜 그러는데?"


"말해 빨리! 만난다고? 빨랑 말 안할거야?"


"참! 누가 댁을 좋아하는걸 모르셔? 이러면 우정에 금가는 거 몰라?

저리 비켜주시지 얼른."


박지혜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기술팀에 지성환 형이 본다면 그 소심한 성격에 분명

속으로 끙긍 앓아댈 것이다.


"내가 그 남자가 좋다고 했니? 이번주에 영등포에서 만나자.

점심먹고 영화 딱 한편이다! 응?"

일년 가까이 저러고 나면 질릴만도 한데 박지혜는 절대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더

열렬하게 추근거렸다.


"영화보면 술 먹자고 할 것이고, 술 먹으면 자자고 할려고? 됐네요. 아가씨."


"나쁜놈! 그래봐라."


정말 삐졌는지 지혜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이러지 말자. 우리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약속도 했고. 같이 만나서 밥도 먹어주고

영화도 본것이 벌써 몇번째야? 매번 마지막이라고 하잖아."


결국 길을 비켜준 지혜를 지나치며 어깨를 토닥여주자 추림의 팔에 폴작 뛰어

달라붙은 지혜가 사무실로 따라 들어왔다.


"어쭈? 재가 아주 노골적이네?"


사무실에서 여 사원들 세명이 그 광경을 보다가 저마다 한마디씩 늘어 놓았다.


"저리좀 비켜 주실래요? 나 전화 받아야 하잖아."

지혜를 밀쳐낸 추림이 책상위에 놓여진 전화 수화기를 들고 귀에 대고 입을 열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네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여보세요?"


추림의 목소리가 맑고 건강하게 수화기를 타고 흘렀다.


"여보세요. 저 유미예요. 기억하시겠어요?"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가 낮설면서도 어딘가 친숙한 느낌이 들었지만

결코 익숙한 음성은 아니었다. 하지만 곧 추림은 가슴이 벌렁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예? 아 예. 기억하고 말구요. 그런데 어떻게... 잘 지내셨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어서 잠시 당황한 추림이 더듬거렸다.


"예. 잘 지냈어요. 그쪽은 잘 지내셨어요?"


차분하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힘없이 들려왔다. 덩달아 추림마저 기운이

빠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예. 한데 제 전화번호 모르시잖아요? 전혀 뜻밖이라 조금 놀랐습니다."


추림이 전화하는 모습을 한데모여 원숭이 재주 부리는 광경을 구경하는 사람들 처럼

여 사원들이 즐겁게 바라보았다. 그 모습들이 신경쓰여 추림이 눈을 크게뜨고

힘을주자 그녀들이 혀를 쑥 내밀었다.


"수연이 만나고 있는데 지금 같이 있어요. 오전에 전화가 왔어요.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요. 혹시 방해가 된것은 아니에요?"


추림이 조금은 짐작했던 일이다. 근방이니 멀지도 않아서 아마도 자신의 집에서

전화하고 늦게 나갔을 것이다. 밤새 선주와 뭔가를 열심히 떠들어 댔는데 잠에 취한

추림은 먼저 곯아떨어졌다.


"아닙니다. 부담같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때 잘 들어 가셨는지...

안부가 너무 늦은것 같네요."


마음 한켠이 아릿하고 머리속이 헝크러지는 듯한 느낌에 추림은 조용히 숨을

내뱉았다. 무언가 기대감을 갖게하고 설레게 하는 감동이 느껴졌지만 실체가

명확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안부가 너무 늦은거 같네요."

뒤에서 추림을 흉내낸 말이 들려 왔다. 추림이 손을 내저어 하지 말라고 신호

보냈지만 웃음소리와 짖궂은 장난은 멈추지 않았다.


"잠시 찻집에 앉아서 이야기 하다가 전화했어요. 혹시... 시간있으세요?"


떨린다고 느낌이 든듯한 말이었다. 소리없이 미소를 지은 추림이 얼른 대답했지만

평상시의 모습과 말투는 변하지 않은 채 였다.


"예. 당연히 시간을 내야지요. 제가 말할께요! 남자니까요. 내일 주말인데 좋겠어요?

좋아요. 그럼 오후 두시쯤 시간 어때요? 장소는... 유미씨가 이쪽으로 오세요.

아마 아실겁니다. '봄다'라고! 이 근방 지나다 보면 큰 레스토랑 보셨어요?

지난 번 우리가 커피 마시던 바로 옆 건물 지하인데...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예? 아 예... 그래요. 제가 끝나고 어쩌고 하면 시간만 가고...

유미씨가 오는게 나을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래요... 내일 뵐께요."


유미가 전화기를 내려 놓길 기다려 주고 곧 전화를 끊었다.


"바랑둥이!"

"배신자!"

"제비같은.....!"


그러자 여 사원들이 한마디씩 하며 추림을 약올렸다. 추림에 대해 아는것 보다

모르는게 더 많은 그녀들이지만 매번 회사로 전화가 오면 그녀들을 통해 전해

받으므로 그렇게 오해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알까? 추림이 여자들에게 지독하게 무관심 하다는 사실을.....?


"나쁜놈! 나쁜놈!"


박지혜가 억울한 얼굴을 지은 채 책상에 기대어 서서 씩씩 거렸다.


"안되는건 안 돼! 그래 내가 나쁜놈이다. 이건 아니야. 성환이 형안테 나 맞아

죽으라고 하는거지?"

전북 임실이 고향인 지성환은 입사 사년차인 스물 여덟의 총각이었다.

독자였는데 성격이 소심하지만 착하고 조용한 사내였다. 그런 그가 박지혜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추림은 잘알고 있었고, 그에겐 지혜는 별반 느낌이나 관심이 없는

여자였다. 처음에 그녀가 하도 조르고 친구들과 어울리는데 같이 가자고 사정하는

바람에 몇번 그렇게 해 주었지만 그 뒤로도 그런 요구는 끊이지 않았다.

점점 도가 커지는 그녀의 대범한 행동에 추림은 곤란한 지경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아닌것은 아니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은 분명한 추림이었다.


"추림씨. 지혜. 저 정도면 괜찮은 아이야. 그러지 말구 조금만 만나보지 그래?"


같은 공간에서 일하니 서로가 별 이야기를 다 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들은 철저히

지혜 편이었다.


"수고들 해요."


무시해버린 추림이 나가자 뒤에서 지혜의 투정 소리가 들려왔다.

더 머무르면 분명 그녀는 울것이고 달래려면 다시 만나줘야 가능했다.

아마도 내일쯤이면 사내와 근처에 추림의 이야기가 놀잇거리로 떠 돌지도 몰랐다.

다른게 아닌 오늘 전화한 내용이 그것일 것이지만 추림은 상관하지 않았다.

심심하고 따분한 여자들의 유흥은 그런 것인것을 추림은 잘 알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갔다. 담배가 생각나서였다.


"야! 개추림!"


추림을 향해 누군가가 소리치자 추림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키가 껑충하게 큰

미남이 싱글거리며 걸어왔다.


"개대준씨. 약은 처 발랐소?"


이대준이었다. 오늘 출근한 그는 얼굴이 엉망이었다. 누군가와 싸웠는지 여기저기가

붓고 깨진 흔적이 역려했는데 듣고 나서 추림은 한참을 웃었다.


"이새끼가 이제 아주 맞먹어라! 너야말로 얼굴이 그게 뭐냐? 엇그제 성기나게 먹었다고

하더만... 얼굴이 아예 썩었잖아. 어때 오늘 한잔?"


손을 들어 술잔을 걲는 시늉으로 말하자 추림이 질린 얼굴을 해 보였다.


"됐어. 나 어제도 죽다 살아났어. 인간아! 어디가면 연락이라도 좀 해라. 형 때문에

내가 아주 미치겠어. 이제 씹어도 안통하니까 죽여야 할 것 같거든."


"에라이 화상아. 없는데서 죽이던지 살리던지... 나 확 때려칠까 생각중인데 어떠냐?"


"때려칠까 생각 중이라면서 뭘 물어? 그냥 때려치면... 안되지... 아마 집에서

어머니가 형을 죽이려고 하실걸? 자식으로 안 보실지도 모르시고......!"


그의 집안 사정과 환경등을 잘알고 있는 추림이었다. 네번이나 다녀왔고 마지막

네번째에서는 이대준이 어머니에게 죽어라고 혼나는 모습을 즐겁게 구경하기도 했다.


"신발! 이건 내 삶이 아닌데? 재미도 없구...

결정적으로 난 기름밥 체질이 아니란 말이야."


"누군 기름밥 체질이구? 잘난건 형보다 내가 더 잘났어. 한데 난 기름밥이 맛나기만

하구만! 그대는 어찌 체질 타령이오? 별로 열심히 일하지도 않는 양반이."


"어? 이새끼봐라? 내가 언제 열심히 안했어? 내가 받는 월급 만큼만 하는건데.

그게 나쁜거냐?"


"아니. 그게 나쁜게 아니고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작전짜는 당신이 엿같거든! 아닌가?"


"이게? 너 언제 나이 똥구멍으로 처 먹었냐? 그랬으면 말하고 엿 찾던지 해라.

주먹 나간다!"


"그게 주먹이야? 싱거운 소리 그만하구 일이나 열심히 합시다. 아니. 출근만 착실히

하라고 하던데? 그럼 줄건 다 준다고."


"정말? 어떤 새끼가? 장난이지 새끼야?"


이대준과는 싸우고 친해진 사이였다. 형이면서 친구처럼 지내는 이유도 사실은

친구로 지낼까 하다가 그를 존중해주고 싶은 인간성 정도는 있었기에 가능했다.

추림은 나이가 많다고 형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건 상당히 오랜동안 그래 왔는데,

관철시킨 사람은 아직 없었다.


"당신 사돈께서 그러시던데?"


박도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자 이대준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 새끼가? 쳇! 지가 뭔데? 사장인가? 웃기네!"


사실 이대준은 사돈인 박도형보다 매형인 박수형을 더 싫어했다.

누나를 하루가 멀다하고 쥐잡듯하는 그를 원래부터 싫어했다고 하는데 행동하는

것은 그것과 반대였다. 받아쓴 용돈만 한 천만원쯤 되는 동안 그가 벌인 비굴한

행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자기 말로는 매형을 이용한 것이라는데

추림은 굼도 꾸기싫은 행동들이 수십가지쯤 되었다.

 

"사장이나 다름없지 뭐. 회계장부를 꿰차고 있는 사람이니... 언제 미선씨랑 한번

뭉치자. 회나 한번 사라."


"이새끼가 형수님이라고 부르라니까!"


"엿까지 말고! 내가 형수라고 부른 사람이 벌써 네명이다. 이 바람둥이야!"


추림에게 대준은 지독한 바람둥이고 사기꾼이었다. 대준이 추림에게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고 말한탓이었지만 추림은 진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번엔 진짜야. 미선이는 틀려! 집착도 없고 화내지도 않지만...

사실은 반대야. 추림아. 나 결혼할거다."


진지해진 얼굴로 대준이 말하자 추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선씨랑? 미친놈! 누가 형안테 시집간데?"


"신발놈! 형이야? 미친놈이야?... 미선이 애가졌다 임마! 2개월 되었단다."


어딘지 처량해진 얼굴로 대준이 힘없이 말하자 추림이 조금 놀랐다.


"미친 대준이 형님아. 그게 정말이야? 아주 골고루 하는군! 잘했군 아주 잘했어!"


"나 심각해 이 새끼야! 이거 비밀이야... 알잖아? 미선이네집 힘든거...

어떻해서든 대학은 졸업해야 하는데... 힘든가봐. 오빠가 또 돈만 날리고 잠적했다고

하더라. 찾아서 만나 이 모양이 되었지만... 그 새끼 어디가서 안 뒈지나 모르겠다."


미선의 오빠는 미선이와 무려 열 세살이나 차이난다. 말로는 사업가지만 실제로는

날건달이고 한량이었다. 한다는 사업에 돈이 부족해 집안에서 없는 돈 이천만원을

빛내 해 주었는데 두달도 되지않아 날리고 잠적해 버렸다.

그 덕에 힘들어진 미선의 집은 길가로 나 앉게 되었는데, 힘들어 하는 미선이를 보고

대준이 해결한답시고 나섰다가 삼일만에 상처가 가득한 얼굴로 나타난 것이다.


"내가 말해줄게! 아! 난 왜 그런일만 하는지 모르겠다."


대준에게 일이 생기면 막내인 그를 끔직하게 생각하는 이금선은 무엇이든 해주려

했다. 하지만 명색이 사내인지라 남자라고 말도 하지 못하는 대준은 늘 추림에게

아쉬운것을 부탁했다. 물론 추림도 우연히 그렇게 되었지만 이번에 이금선에게

말하면 네번째인가 된다. 그때마다 부탁하고 당부하는 말로 추림에게 돈을 전해주던

이금선이었지만 대준은 그런 누나를 찾아가지도 않았다.


"됐어. 족팔리게... 하지마! 내가 어떻해든 해결할께."


풀 죽은 목소리로 대준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그래? 알았어. 잘 해결하고 이야기 해줘."


"뭐라고? 안들려? 아 참! 나 이러고 있으면 안되는데... 야! 시간 있으면 술이나 한잔

하자. 아이고. 큰일 났다. 물건 찾으러 왔다가... 나 간다. 한 이백이면... 수고해라!"


후다닥 거리며 정신없는 대준이 할 말은 기어이 다 하면서 저만치로 뛰어갔다.

아쉽지만 째째한 말을 하지 못하는 그인지라 한두번 있는 일이 아니면서도 늘 저렇게

허둥거렸다.


"못말리겠군!"


두개피째 피운 담배를 다시 피울까 하다가 추림은 포기하고 걸음을 떼었다.

내일쯤 이금선이 나오면 대준의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벌써부터 고민되기 시작한

추림이었다.


* * *


분위기도 아늑했고 음악도 좋았다. 점심을 늦게 먹고 지금은 맥주를 가볍게 마시는

중이어서 졸음이 약간 밀려오는 것만 빼면 아주 괜찮은 금요일 오후였다.


전화를 끊고 자리에 와서 앉자 수연이 묵묵한 얼굴로 유미를 응시했다.


"들어가 봐야 하는거 아니야?"


이윽고 수연이 입을 열자 유미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별일 아니래."


조금 전 막 추림과 전화를 끊었지만 수연에게는 집에다가 전화 한다고 했던 것이다.


"아직 술이 안깨니?"


유미가 피곤해 보이는 수연에게 걱정스럽게 묻자 이번에 수연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정도야 뭐! 그런데 아까는 괜찮더니 지금이 더 힘들다 얘."

"술이 깰때가 더 힘든거야."


수연역시 유미에게 거짓말을 했다. 어제 누구를 만나 늦도록 술을 마시고 오늘

근처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전화한 것이라 했는데, 그녀 둘은 서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아마 사실을 털어 놓으면 서로 토라지겠지만 수연이 더 불리 할

것이었다. 그냥 전화 한것과 한 공간에서 잔것 하고는 차이가 수십배쯤 난다.


"그런데 수연아? 너 여기 오면서 저기... 추림씨에게 연락하지 않았니?"


순간 가슴이 뜨끔해진 수연이 얼굴을 정색하고는 얼른 말했다.


"아니? 왜? 참! 걔도 이근처에 있는데... 연락해서 만나볼래?"

아무렇지도 않은듯 말했지만 가슴이 벌렁거리며 두근거리는 수연이었다.


"아니. 됐어! 연락은 무슨... 참 내가 영훈이 만난거 이야기 안했지?"

전에는 영훈씨였는데 지금은 영훈이로 바뀐 채 유미가 자연스럽게 말하자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긴장한듯한 얼굴의 수연은 영훈과 유미가 만나 시간을 보냈을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좀팽이처럼 속이 좁고 계집아이같은 영훈이 과연 녹록치 않은 성격의 유미를 어떻게

대했을까 궁금해졌다.


"별로 재미없었어. 스케이트타러 갔었고. 밤에 잠깐 술 마셨어. 그런데 웃기더라."

"뭐가 웃겨? 영훈이?"

"아니... 응... 아닌가? 어쨌든 영훈이는 추림씨를 굉장히 의식하는 것 같았어."


수연은 유미가 같은 친구이면서 영훈은 영훈이로 낮추고 추림은 추림씨로

존대하면서 부르자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질감은 당연하지만 꼭 그런것만은 아니었다.


"영훈이가 원래 아이같아. 추림은... 영훈이와 달라. 니가 좀 혼란스러울거야.

나도 그렇거든! 같은 친구 이면서 어쩌면 그렇게 다를까하는 생각을 하곤 했어.

그런데 너 추림 연락처 아직 몰라?"


오후쯤 되서 만나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대부분 형식적이고 예전 학창시절

따위 때 있었던 말만 늘어 놓았다. 친했지만 깊은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깊은 사이는

아니었기에 오히려 무거운 이야기는 부담스러웠다.

그녀들은 서로 본능적으로 알았다. 서로가 공통적으로 하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이추림!


"응. 몰라. 사실 석호씨에게 들었는데... 잊어먹었어. 나중에 니가 알려줘. 알았지?"

미소를 지은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은 간밤에 있었던 재미있고 유쾌하면서도 어딘지 마음이 허전해지는 일이 계속

생각났다. 스므한살의 여대생이 열렬히 좋아하는 남자가 있지만 남자는 그런 여자를

별 관심없이 받아들이고 한결같은 모습으로 대한다는 사실은 다행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남자가 추림인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가 관심없게 대한다니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가운데 이 친구만 보면 괜히 자격지심같은 것이 생기는 수연은 이 친구가 아직

여러 친구들 중 추림하고만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니 기분이 가벼워졌다.

 

고등학교 시절 주위에 늘 관심의 대상이었고 한차원 높은 생각을 가진듯한 유미는

다른 아이와는 달랐다. 더 성숙했고 조숙했다. 철없이 까불고 연예인들에 푹 빠져

있을 나이에 그녀는 항상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길위에 있는듯 보였다.

같은 나이 또래에 있는 남자들 마저 아이처럼 대해 버리고 무시하는 모습이 무척

당당하고 자연스러웠다.

유미는 누구도 가볍게 대하지 못하는 친구였다. 마치 큰 언니쯤 되는것 같은

분위기라서 친구들은 항상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 했지만 쉽게 가까이 하지 못했다.

 

"너 추림을 기억하고 있니?"

수연이 움츠려드는 마음을 다잡으며 유미에게 묻자 조금전부터 담배를 만지작

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수연을 응시했다.

"응. 당연하지. 만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느낌이 좋지? 부드럽고 따듯하고... 널 데려다 주었다면서?"


지난번 만났을 때 이야기였다. 유미는 자신이 추림에게 느끼고 모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당연히 아직 모르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했다.


"모르겠어? 넌 추림씨가 친구로 느껴지지 않니?"


이를테면 이성으로 느껴지냐는 말이지만 수연은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모르겠어 추림은... 어려워... 사람으로 너무 어려워...

어떻해 그 나이에 그만큼 커진 느낌을 지닐수가 있는지!"

"넌 동창이잖아. 잘 알거 아니야? 예전에도 자주 이야기 했는걸?"

"아니 모르겠어. 추림이 학교를 중도에서 포기했다는 말을 듣고 비로서 생각이 다시

떠올랐나봐."

"아! 그러고 보니... 나 그 이야기 궁금하다. 영훈이도 추림씨의 그런 말을 하던데...

도대체 추림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수연은 영훈과 추림을 극명하게 비교하며 말하는 유미에게서 추림을 생각하는

마음을 느꼈다. 같은 여자로서 알 수 있었다. 여자는 호기심과 관심이 없으면 남자

이야기를 멀리하려 하는 본능을 지닌다. 스스로를 천박하고 얽매이게 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같은 친구라는 이름이지만 유미에게 어쩐지 추림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 망설여 지는 이 마음은 뭘까하고 생각한 수연은 유미가 담배에 불을 당기자

일단 명확하지 않은 실체는 뒤로 미루기로 했다.


"고등학교 일학년때였어."


수연은 추림이 학교를 자퇴하게 된 사연을 떠올렸다. 수연이 입을 열기 시작하자

자욱한 담배 연기를 뿜어낸 유미가 서둘러 담배를 재털이에 비벼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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